이 자료 동영상을 보니 우주외계 생명체는 UFO의 존재에대한 미국NASA의 그동안 침묵해도 러시아에서 이 동영상을 보면 그 존재가 확실했음을 말해주는것이다
그동안 지구안에 UFO출현은 사실로 판명되는것이다 그동안 영국이나 프랑스,로마교황처에서도 우주외계 생명체 UFO의 실존의 사실을 부정하지않았다 즉 존재를 인정한 발언을 하였음을
그러니 지구는 그동안 우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한것도 지구인들이 우주외계 생명체를 못믿는것인지 아니면 지구행성의 위기나 아니면 우주의 태양의 위기때문에 그러한것인지
우주는 현존의 지구행성의 위기는 언제든지 올수도 있기에 지구인들이 부지런히 우주 집중투자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어야함을 역설해주는것 같습니다
그럼 태양의 흑점폭발에 증가를 가중시키는것도 우주외계 생명체들이 한것인지 배제할수는없는일이네요
지구의 온난화를 가중시켜서 지구인들이 내분의 분열로 지구 행성이 인류가 하루빨리 멸망되기를 우주외계 생명체는 생각하고 있지는않은지
그동안 인류 문명이 달려온 모습이나 과정들을 보면 반신 반의 생각을 우주외계 생명체도 지구인들을 경계하는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도 지구 행성이 필요충분조건에서 지구행성이 유지되는것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는것으로 그래도 지금의 인류의 지구인들보다는 앞선 경험을 한 생명체이기에 자신들이 지구인과는 게임이 아니된다라는 여유감이 있을것입니다
그들도 지구 행성을 관찰함에 그동안 UFO관련한 자료에 언급한대로 거래의 조건들이 있는것으로 봅니다
지구행성은 지구인들은 우주외계 생명체와 이들과 소통하는 국가나 세력과의 거래에서 지구 행성을 관리되어온것으로 보는데
지구 제국의 필요성은 더더욱이 그 당위성에 힘을 받게될것같습니다
지금 지구인들의 세계 경제의 정체되어있는데 지구인들의 증가는 계속되고 먹고는 살아야하니 세계 경제를 살리려면 우주에 대한 정보들을 이제는 범지구촌 차원에서 우주 분야의 우주혁명을 가지고 이 지구인들이 먹고 사는데 촛점을 역량이 집결되어야함을 말해주네요
이것으로 지구인들이 먹고살수있도록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의 촛점이 이제는 맞추어져야 할것입니다
지구인들의 딜레마 지금 지구의 하루의 시간이 천팔만백년의 가치를 에너지레벨을 끌어올려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세계 프리메이슨 최고 지휘부에서 반드시 변화와 혁신의 미래 지향적인 구도의 시스템이 개선되어야할것입니다 그리고 조속히 지구 제국의 구심점을 마련되어야하고 불필요한 지구행성의 제한된 상황에 대한 통제력도 집행해야하니 이것이 딜레마인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의 주장대로 범지구적 공동 협의가 되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미래 지구인들의 지구행성이 만에하나 소행성과 충돌로 아니면 행성계의 어떠한 혼돈의 시대를 대비해서라도 지금처럼 불필요한 지구 행성 관리를 해서는 아니된다라는것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소모적인 깨닫지못한 정치권력의 시간 낭비들은 하지않는것이 지구행성의 앞날을 위해서 바람직한 나아갈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물질에는 인간의 육신도 수명이 있듯이 지구 행성 역시 수명이 있지요 늦었지만 지구행성 관리를 주어진 지구 행성의 수명시간안에 그동안 제대로 통제관리하지 못하였기에 지구인들이 지구행성을 스스로 위기를 앞당겨왔기에 사실 지구행성을 살리기위한 불필요한 생명체들이 이들의 인간 육신의 탐욕의 불랙홀의 물질의 특성이 지구 행성의 파괴를 앞당기고 있는것도 사실이기에 말입니다
그래서서 여러모로 전방위 정보를 집합해서 분석하드라도 그러하므로 지구 행성을 최소한 주어진 시간안에 지구인들의 문명 과학 기술의 속도나 정신적인 절대적인 신의 믿음의 측면이나 깨달음 측면에서도 상당히 더디기에 분명히 분발해야할것입니다
소생이 이런일이라면 발벗고 나설것이며 지구행성이 지구인들이 구심점이 잡히면 세계3차 대전의 시기를 알려드리지요 공개는 할수가 없지요 지구촌의 소요 사태가 날수가 있고 이런글을 적으면 얼마나 깨닫지못한 인간 육신의 생명체도 별볼일 없는 생명체다라는것을 실감합니다 소생이야 최근에 사생에서 중요한 회답을 받았기에 그들이 필요로한다면 도와드리지요
그 나머지 지구촌 인간들의 세상사 삶의 이야기는 흥미거리가 되지않습니다 소생의 깨달음의 도량의 영적인 범위가 어디까지 우주의 시간을 기준으로 보여주셨기에 이제는 맘이 홀가분합니다 소생의 모든것을 업장이나 영적인 깨달음의 부분에서 평가받았기에 절대적인 신으로부터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지구 제국도 달성해야하고 미래 지구행성의 본격적인 위기로부터 구해내기위해서 준비도 해야하고 참으로 이 지구는 해야할일 준비되어야할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발상인식이 일반인들은 그 필요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않고 있는 현실에 이제는 조속히 위에 언급한대로 국제 사회는 소생의 견해를 경청해서 그림들을 그려드리겠습니다
소생은 거듭말하지만 이 지구 행성에서 하루하루가 마지막 삶의 만남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음을 강조해 드립니다 두번다시 소생의 업장이 윤회해서 지구인으로 사는일은 없습니다
2012년 태양의 흑점대폭발로인한 지구행성의 영향을 받는 파급력이나 이로인한 세계지도에 붉은색 V계시 그림의 의미 만에 사태를 충분히 대비해야하는것이 소생의 지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중요한 사실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않고있는 국제 사회의 모습들을 보면
그래도 소생은 그림들은 다 구상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든말든간에 ..............
그동안 인류가 개개인의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삶의 처지와 확연하게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비교가 되지않습니다
미국이 UFO파일들을 세상에 드러내어서 지구인들이 더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도록 공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전세계 국가들과 공유해야합니다
그만큼 공유하지못하는것은 지구행성의 구심점이 잡히지않았기에 위의 언급한 마인드와 자세가 부족하기에 그러한것으로 보입니다
세계3차 대전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적용되어야 지구인들이 그나마 희망이 보일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실패한 지구인들이 되지말고 이 지구 행성에서 최고의 지혜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금 인류 문명의 숙제이고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라는 사실임
지금 인류의 문명은 태초이래로 지구행성은 쾌략과 풍요를 즐기고 있지요 그러나 그 쾌략과 풍요는 죄인들의 쾌략과 풍요에 불과할뿐이다
이럴때일수록 지구촌 인류의 모든 인간 생명체들은 이러한 풍요의 한경속에서 자신들의 죄인임을 잊어버리기가 쉬운 인류문명이지요 그러니 더더욱이 쾌략과 풍요의 만찬들을 즐기고 있는 지금 지구촌의 인류 문명 그들의 속에서 그러한 쾌략과 풍요가 자신들의 행복한 삶이라고 자화자찬을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위기를 죄의식 최고조에 달한 지금 지구촌 인류 문명들 인류 대다수 인간 생명체들이 절대적인 신의 믿음으로나 성인분들의 믿음으로 대해탈을 하지못하면 깨달음의 구도 수행을 노력하지않으면 지금은 이 수행의 강도는 어느때보다도 높은 고강도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하지못하면 그들은 업장의 윤회를 경험하게될것이다 이미 세상은 이 지구는 인류 대다수의 개개인의 생명체의 힘으로 돌아가지않고 있다라는 사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러하고 그러니 이럴수록 게을리한다면 돌이킬수없는 개개인의 재앙이 급습하게 될것이다
지금 지구인들도 우주로 나가서 적용가능한 생명체 유전자 전이 과정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지금도 지구인들은 적응가능한 생체 시스템과 최첨단의 고도의 우주선을 개발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우주외계 생명체도 그리고 모든 만물의 생명체는 물질의 특성상 적응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것은 당연하므로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가능하도록 되어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진화를 하는것이고 유전자 변형이 진화의 과정의 미세한 상에 불과한것이고 돌연변이도 기형아 출생도 다 유전자 변형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유전자 변형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는 방사능이 가장 큰 변형을 가져다주는 물질이다 그렇다고 생명을 자체를 파괴하는것은 아니지만 우리 생명체의 몸속의 세포도 스스로 자기의 성질을 지키려고 하는 물질의 특성이 세포이다 그러나 이 세포가 다른 방사능과 접하면서 본연의 세포가 방사능을 이기려고 저항하는 힘이 어느정도인지에 따라서 변형의 간격이 다소 차이가 나지요
방사능을 많이 경험한 세포는 그러하지않는 세포보다도 방사능 환경에서나 아니면 우주공간의 환경에서도 우주공간의 방사능 노출로 적응력은 높아져갈것으로 본다
우주외계 생명체들도 지금의 지구인들이 우주로 나가려고 우주공간에 적응가능한 지구인의 생명체들을 점진적으로 새로운 변형된 진화된 생명체 시스템 시계를 하고 있는것도 우주외계 생명체들도 했을것이라 본다
지금 지구인들이 하는 모습들이 똑 같이 우주외계 생명체도 했기에 우주외계 생명체도 생체 시스템도 우주공간에 적응가능한것이고 동시에 이것을 기준으로해서 자연적으로 우주선을 개발함에 지금 지구인들이 최첨단 과학기술문명의 집약되는 우주선 개발에 자동적을 개발하지않으면아니되기에 그들도 그래서 지구인들이 상상하는 그이상의 기능을 가진 우주선을 개발하였듯이 지금 지구인들도 그 전철을 밟고 살아가고 있는것 같다
아직도 우주는 미지의 세계이고 우주 무한한 공간에서는 지구인들앞에 모습들을 드러내는 문명사회에서 나타난 그들위에 또 다른 우주외계 생명체가 우주외계 생명체 세력들이 존재할수도 있다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지구의 지금까지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보드라도 그 사이에 지구해성이 여기까지옴에 그들도 더욱 더 발전하고 생명체의 개체수 증가도 존재했을것으로 본다
그런데 참으로 우주 외계 생명체들이 존재함에 있어서 지구인들이 이러한 우주로나가기위한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인들의 걸어가려는 과정들을 단축해줄수있는일을 우주외계 생명체는 왜 길잡이 역활을 해주지않는지
한마디로 지구인들 너희들 스스로 개척하라는것인가? 자신들의 실패한 과오를 경험을 통해서 지구인들에게 더 나은 우주 시대를 열어감에 상생 정신을 보여줄수도 있는데 보여주지못하는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주의 선천시대의 공간과 시간세계와 우주의 후천시대의 공간과 시간세계에 어떠한 생명체가 미래에 살아가든 결론은 우주공간의 세계도 원점으로 돌아간다라는것이다 즉 우주 태초의 본래의 자리로 그런데도 우주외계 생명체는 아직도 정신을 지구인들처럼 차리지못한 모양인가
그러니 그들도 지구인들도 각개전투의 문명을 유지해가고 있는것인지
어차피 지구인들이 지구행성이 끝나면 기존의 우주외계 생명체와 지구인들의 우주로나가는 생명체 그룹들과 역시 우주전쟁이 생길것이다 그 이유는 우주로가든 우주에 있든 지구인들의 생명체든 물질의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은 충돌이 생기는것이 물질의 법칙이다
우주공간에 수많은 은하와 별들이 충돌이 생기듯이 마찬가지이다 법칙은 변화되지않는다
그래서 지구인들이 지구에서 깨달음의 대해탈을 하라는것이다 즉 물질의 허상으로부터 자신의 육신의 물질의 허상으로부터나 지구행성으로부터나 우주공간의 물질으로부터 벗어나라는것이다 그래야 미래의 지구인이든 기존의 우주외계 생명체든간에 우주공간의 물질의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인 힘을 절대적인 신의 믿음으로 대해탈이 이루어지는것이고 그들마마저도 이길수가 있는것이다
대해탈의 앞에서는 우주외계 생명체도 소통못할 이유가없다 이 지구에서 영적인 고속도로를 놓았기에 이미 지구는 하나로 이어졌고 이길을 통과함에는 절대적인 신의 믿음의 약속을 한 영혼만이 고속도로를 사용할수가 있다 통행료를 내야만 가능하다
조금더 있으면 우주공간에까지 미치게될것이다 지금도 소생은 그들의 마음을 소통할 준비는 되어있다 오히려 먼저 소생이 읽는것으로 그래서 이러한 기록물을 남기는것은 않인지 생각한다
소생의 몸은 지구인이지만 마음의 영적인 시간은 우주외계 생명체들이 지구인들과 소통하지않아도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수가 있다
즉 우주센타에 이들의 관련한 자료들을 육신들의 신체들을 보면 더 정확하게 읽어버릴것입니다
그 정도로 고속도로를 소생이 닦아놓았기에 소생은 반드시 대해탈을 대완성하게될것입니다
지금도 지구인들의 미래의 불행과 고통을 줄어주기 위해서 다방면의 견해를 기록해주었으니
어차피 지구인들이 우주로 나오게되면 그들과 충돌이 생길것이라는 사실은 우주외계 생명체도 알고 있을것입니다 그들도 그러한 경험을 앞셔서 했기에 말입니다
지구인들이 그래서 지금과 같은 걸어온 문명과 절대적인 신의 믿음과 개개인들의 대해탈의 실천을 깨달음의 수행을 완성하지못하면 아마도 우주외계 생명체들이 앞셔서 지구행성을 아니면 지구인들을 선제 공격 해 버릴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걸어온과오를 되풀이하는 도움이 안되는 지구인들이 우주 공간으로 나온들 우주의 평화 공간을 파괴하기에 지구인들이 맘이 그러하다면 살려둘수가 있다라고 생각하는것은 지구인들의 착각이지요
그것은 소생이 우주외계 생명체 입장이라도 그렇게 할것입니다
지금 지구인들은 우주외계 생명체들을 함게 우주 공간의 평화를 모색해가는 정신 마인드로 준비해가야지 그러기위해서는 지구인들이 지금 바른길로 정도로 가야만 우주외계 생명체들을 설득할수가 있는것이고 지구인들이 우주로 나감에 그들의 도움으로 허용이 가능할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지구인들이 모든면에서 게임이 아니되기에 우주외계 생명체들이 지구인들 하는대로 놓아두는것이지만 어느 정도 힘의 경쟁 수준에 도달하면 지구인들의 처신여부에 따라서 조치가 내려질것입니다
우주외계 생명체도 절대적인 신의 종의 생명체들이다라는 사실은 지구인들이 인정하고 인식해야한다라는 사실이다
절대적인 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고 태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기에 그속에 이 지구행성은 작은 은하 행셩계에 지나지않는다
그래서 지구인들이 살아남고 싶으면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보여야만 가능하다라는 사실이다 그러하지못하면 그동안처럼 처신하다가는 아무리 지구인들이 기고날아도 막판에 무력화시켜벌리수도 있다라는 사실은 존재하므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데
깨닫지못한 생명체의 물질의 상이 아무리 기고날아도 물질은 물질일뿐이기에 해주는 말입니다
거기에 수많은 종교 사상 이제는 지구상에 모든 종교사상에 고해성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동시에 모든 종교는 절대적인 신에게 믿음과 실천을 약속하는 모습들을 보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의 종이 되는 충성 맹세를 해야 보호해줄것이니 말입니다
소생이 이번에 남은육신의 시간을 여기서 마감할것인가 아니면 이어갈것인가에 대한 신의 대답은 소생의 모든것을 평가해주셨습니다 88억광년의 물질의 우주 공간세계와 대해탈의 경계선인 부근이 88억광년의 경계선에 지금 소생이 서있습니다
이러한 도량은 절대적인 신께서 대답을 평가를 해주신것입니다 앞으로 소생 육신살아갈수있는 시간까지 다 계산해서 업장들을 계산해서 공덕을 계산해서 포한된 위치가 그러합니다
그러니 세상사를 내려놓고 지구인들이 진정으로 인류를 사랑하고 지구행성을 사랑하면 소생의 도움을 원한다면 도와드리이나 소생의 프로필은 견해는 불로그에 기록한 그대로 입니다
더할것도 뺄것도없기에 절대적인 신의 종부터되어야 도와줄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세계3차 대전을 집행하드라도 그러합니다
황당한 글로 보시는분들이 있겠지요 그러한 영혼들은 아직도 정신차릴려면 멀었고 세계 프리메이슨 최고 지휘부에서 모션을 이제는 기다리고 있는것입니다
소생이 생사를 절대적인 신으로부터 그리고 육신이 죽어서라도 소생의 영적인 영혼은 소생이 원하는 대해탈의 길로 가는것이기에 이것까지 확답을 받았기에 이 지구상에 어떠한 아무런 걸림이 없고 우주공간에서도 우주외계 생명체라도 소생앞에서 그러합니다
비책들을 전수 받을자 이 지구상에 나타나면 그 한명으로 족합니다 개체수가 중요하지않으므로
이 지구는 이러한 큰틀에서 물질의 잡다한 상들이 변화무쌍하게 권력이라는 이유로 경제라는 이유로 종교라는 이유로 돌아가고 있는것이다 여기에 탐욕과 괘략 동물의 본성으로 맞물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행성의 생명체들 그러니 그러한 권력을 소생앞에서 주름잡지말라는것이다
지구방위 총사령관의 직책이 이제서야 실감들을 하시는지 ㅋㅋㅋㅋㅋㅋㅋ
소생은 지구인들을 도와드리려고 왔지 멸망하기를 위해서 지구에 태어난것이 아니겠지요
서울=뉴시스】
국제 식량 및 에너지 위기 속에 식물에 방사선을 쪼여 생산량을 늘리고 질병에 대한 식물의 저항력을 키울 수 있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2일(현지시간) 주장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IAEA는 이날 IAEA 주최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한 식물의 변이 유발에 대한 국제회의에서 또 선택적인 변이를 통해 식물들이 기후 변화 및 여건 변화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회의에는 약 600명의 과학자들과 연구원, 식물 재배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방사선을 이용한 식물 변이 유도 기술은 이미 80년 전부터 개발돼 왔다. 세계 60개 국에 걸쳐 170여종 식물의 3000개에 달하는 변이종이 IAEA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데이타베이스에 보관돼 있다.
생체공학에 의한 유전자 조작과 달리 변이 유도는 다른 종의 유전자를 식물에 주입하지 않고 식물 자체 내의 유전자 구조를 재배열하는 것이라고 IAEA의 식물 재배 및 유전자 책임자인 피에르 라고다는 밝혔다.
라고다는 "자발적인 변이는 진화의 원동력"이라면서 그러나 자연적으로 유리한 진화가 이뤄지는데는 수백만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지적, 시간에 좀더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방사선을 쪼인다 하더라도 식물에 방사능이 남지는 않는다면서 괴물식품(Frankenfoods)으로 비난받는 유전자조작식품(GMO)과 같은 저항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베르너 부카르트 IAEA 사무차장은 페루에서 5000m의 고지에서까지 자랄 수 있도록 한 변이 보리로 1978년에서 2002년 사이 보리 생산량이 52% 증가하고 케냐의 변이 밀은 가뭄에 대한 저항력이 훨씬 커졌다는 등 변이 식물의 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기후 변화와 식량 부족, 에너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부카르트 차장은 변이 유도는 위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싼 비용으로 현재 농업이 처한 도전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라고다 역시 변이 유도야말로 식량과 에너지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유세진기자 dbtpwls@newsis.com
① 우주선 탑재 식물발아 생장 및 변이 관찰실험 : 우주환경에서의 식물체의 생장특성 구명을 통해 유용 식물유전자원의 개발로 장래 우주식량 생산시스템 개발에 기여 가능하다.
③ 우주공간에서의 초파리를 이용한 중력반응 및 노화유전자의 탐색 : 우주환경에서 초파리를 이용하여 중력 반응 인자와 노화 촉진 과정 규명을 통해 장기간의 우주체류에 대비한 무중력 적응 프로그램 및 무중력 적응제 개발, 노화 방지 대책 마련 등에 활용이 가능하다
④ 미세 중력이 안구압에 미치는 영향 및 우주환경이 심장에 미치는 영향 : 우주환경에서 우주인의 건강 모니터링을 통해 장기간의 우주비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대응책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 가능하다.
⑤ 무중력 상태에서의 균일한 크기와 모양을 갖는 제올라이트 합성과 제올라이트 필름 성장 : 중력의 영향이 없는 무중력환경에서는 균일한 크기, 모양, 두께의 제올라이트 결정을 성장 가능하여 새로운 광결정 물질, 첨단 광학전자소재 등으로 응용 가능하다.
⑥ 무중력 상태에서의 금속-유기 다공성 물질의 결정성장 : 무중력환경을 통해 효율이 높은 무결점 금속-유기 다공성 물질 개발의 단서를 제공하여 연료기체 저장 매체로써, 제약 산업에서 중요한 촉매로써 응용 연구 가능하다.
⑦ 한반도 관측 및 촬영 : 한반도 상공의 대기, 황사현상, 해양 등의 관측 및 촬영하여, 대기권에서 관측한 정보를 통합하여 거시적인 대기, 황사현상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⑧ 극한 대기현상 관측 망원경과 MEMS 기술 테스트 : 대기의 TLE현상 관측가능한 망원경을 개발 및 관측하여 TLE 현상의 규명을 통해 유용한 과학적 결과를 얻고, 향후 이 망원경은 유성, 오로라, 대형화재 및 폭발 감시 등에 활용 가능하다.
⑨ 국제우주정거장 러시아 모듈 내 소음 환경 문제 파악 및 개선: 소음으로부터 취약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소음환경을 개선하고 우주인의 귀 건강을 보호하는 귀마개를 개발한다.
⑪ 미세중력상태에서 소질량 물체의 무게측정장비 개발 : 무중력환경에서 소질량물체(6kg이하??)의 무게를 측정하는 장비로써 국제우주정거장에서 과학실험 수행 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우주저울로 활용이 가능함.
⑫ 첨단 식품가공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우주식품 개발 및 실증 실험 : 한국의 전통 음식을 우주 식품으로 개발하여 한국 우주인이 섭취하여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우주 식품의 인증 및 개발 기술 확보
⑬ 등고선 촬영장치를 이용한 미세중력 상태에서의 한국 우주인 얼굴(신체)의 형상변화에 대한 연구: 유사연구가 시행된 적이 없다??
[스크랩] 시련에 감사하는 마음 코너에서 자세하게 기록하였음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징기스칸을 만들어줄수도 있다 그런데 만들어줌에는 절대적인 신의 믿음과 실천이 우선이다
로마 제국이 찬생하는것이나 몽골제국의 징기스칸 역시 천하를 호령하는것이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고 공통점은 끝없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다라는 사실 현실에 안주하지않는다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적인 신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사고 의식이나 자신의 습관이 정도로 가는 기본과 원칙이 몸에 베어있다라는 사실
개인의 대망의 야심적인 꿈을 혼자가지지않고 많은 국가의 사람들과 나누려고 했다라는 점 그러니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라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나 그전의 여러 제국이나 환인 제국이나 왜 제국을 세우려고 했는가?
에 대해서 인류는 지금 지구인들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거의 수많은 제국의 경험으로 오늘날 지구는 솔직히 지구 제국이 된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각 국가간의 여론 통로라든가 문명의 속도라든가 격차가 심화되었고 속도가 더디고 한 구심점에서 폭발해가는 화신들이 영웅행색을 하지않고서는 세계가 가까워질수가 없기에 말이다
왜 우리 인류는 제국을 꿈꾸어야만 하는가?
이 사람들이 할일 없어서 영웅 한번 해 보려고 제국을 달성한것으로 보이는가?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제국을 향해서 천하를 향해 백마를 타고 달렸서 호령한것으로 보이나
그에 대한 해답은 이미 가르처주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거나 찿아보세요
그리고 지금 그래서 세계 프리메이슨 최고 지휘부에서 소생이 거듭강조해준 언급해준 지금 현재 변화와 혁신을 해야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인위적이고 강제적이지않고 지구인들이 금세기 21세기 벽두에서 소생이 거듭언급한대로 세계가 모두 공감하는 환영하는 지구 제국이 건설이되어야함을 어차피 누가 제국의 영웅이 되든 그나라에 자의든 타의든 종속않인 종속속에서 자율과 자유와 상생과 공동협력은 수반되어야 하므로 누가 제국을 만들었는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하면 지구제국이 그동안의 잘못 걸어온 인류문명을 바로 세우느냐가 중요하고 여기에서 인류의 전체 모든 그룹들이 100% 완성된 그룹들을 만들기는 힘드나 최소한 지구 제국의 브래인 핵심 중심축의 세력들은 타락한 사탄의 부패한 인간 생명체가 않인 영웅다운영웅들의 집합체가 되어야한다라는것이다
그만큼 깨어나야하는 그룹들이어야함을 강조해주고 싶다 징기스칸 같은 분들 이 지구에 7분만 더 있으면 지구제국을 탄생시키고 동시에 연속성을 위해서 안정적인 지구제국이 이어갈것이고 이에 탄력을 받아서 지구제국이 자리를 잡아갈수가 있는것이다
지구 제국을 다스려감에 66억명 사람들이 다 필요로하지않는것이다 그만큼 지구제국의 영웅이 되려면 최소한 66억명의 맘을 꿰뚫어볼수있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물질로 세력을 얻고 자본으로 군사로 세력을 얻는힘은 언제든지 해페될수가 있는것이 세력의 실체의 불안정한 모습들이지요 그리고 인위적이기에 의도적이고 그러므로 그러한 세력들은 오래동안 유지하기가 힘들다
지금 세계 각 국가에 프리메이슨 지부들을 두고 있고 나름대로 활동을 하지만 그들은 다 경제논리에 자본논리에 힘의 논리에 의도적인것이 인위적인 의도가 출발부터 그러하므로 선택과 결정을 하지않으리라 소생은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허락하지않으므로 그리고 도움이 되지않는다라는 사실에 도출되므로
2가지 길중에 남은것은 한가지 길 그동안 소생이 지적해주고 언급해준대로 따라오주시면 되는것입니다
그동안 프리메이슨의 추구해 갈방향은 그리고 로마교황청이나 유럽이 프리메이슨을 창설한 조직의 이유나 유럽연합을 탄생시킨것이나 다 제2의 로마제국을 건너뛰어넘는 차원의 지구제국으로 가기위함인것을
우연히 지하철 벽보에 종교 단체에서 좋은글을 부처놓은신 벽보판들을 지하철을 타시는분들은 다 한번씩 보셨을것입니다
소생도 가끔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러한 글귀들을 봅니다 마침 징기스칸 부분에 현재 중국 베이징 올림픽 개최중에 인류문명의 대운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갈수가 없음의 이유를 설명 해 드렸지요 그러한 차원에서 강조하고자 제국의 영웅 한분을 다시한번 소생의 견해로 이러한 글을 기록하는 시즘에서 이와 공감하는 글귀라서 소개하고자합니다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도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민족보다도 못하고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안보다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떨어진다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 승자가 되어 천ㄴ녀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변화와 혁신의 깨어있는 살아잇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원칙에 충실했든 로마시민들의 삶이 바로 로마제국의 번영의 열쇠였다라고 합니다
로마인의 아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니미의 25권전집책을 통해서 많은분들이 읽고나서 나름대로 각자가 처한 역활과 위치에 따라서 그리고 깨달음의 도량에 따라서 세계관의 차이가 있지만 다 공통점들이 존재하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합니다 그것은 징기스칸의 제국의 기초와 다르지않았다라는 사실입니다
뿐만아니라 점령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시민권을 개방하고 그 대표자들을 원로원에 흡수하는 사회적 통합에 성공했습니다 이부분에도 역시 징기스칸도 점령한 국가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세계 프리메이슨 최고 지휘부에서 세계 각 국가에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우는것이 그러한 유형과 비슷하지요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 어느 종교보다도 오대양 육대주 종교 시장에서 먼저 절반에 가까운 기독교 종교 시장을 점령한것은 그 결실이 오늘날 바로 세계 프리메이슨 위치와 역활에 힘의 원천이였든것입니다
종교 시장을 점령한후에 미래의 인류모습에 바로 경제력 시장에 몰려옴을 이미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어느 민족보다도 미리 선견지명으로 보고 준비해온것입니다
식민지지배화 산업혁명 그리고 세계화 그리고 세계 각 국가의 허수아비 대통령화 세우기등은 이러한 과거의 치밀하게 총체적으로 인류 문명의 그림들을 그려왔기에 가능한것이지요
기독교 경제 시장에 세계 각 국가들이 자국의 인구는 증가하고 먹고는 살아야하고 그러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투쟁하는 속성에 이 두가지를 로마 교황청은 잘 이용해왔든것입니다 그러니 세계 각 국가에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울수가 있었고 정치권력에 개입할수가 있었든것이지요 ㅎㅎㅎㅎ
소생은 그렇다고 높은 점수를 주지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설명해드린것이기에
고대 로마인의 후세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제도와 세계화,개방성,글로벌화통한 사회질서 확립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존쟁마저도 결코 적이 미워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논리는 이미 산업혁명이전에도 존재했음을 부패와 전쟁은 ==입니다 이글귀에 대해서 소생도 공감합니다 세계사 큰 전쟁은 다 필요에 의해서 했기에 오늘이 존재하는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세계3차 핵대전도 필요에 의해서 하게될것입니다
그랬기에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적을 항복하여 말살시키는일이 없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였다라는 사실입니다
징기스칸도 그렇게 했지요 일본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들의 문화를 말살시키고 대학살을한 사례를 보면 제국의 주인이 될수가없음을 말해주는것이지요 이글보고 열받겠다 쪽발이들에 개,노예로 사는 축생들은 ㅋㅋㅋㅋ
정복자가 정복한 국가들에게 스스로 힘으로 살아갈수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얼마나 도량이 넓은것인가? 그래서 제국의 영운은 이미 태어나기전에 만들어서 나오는것이고 그속에서 신의 도움으로 신의종의 역활에 충실하게 소임을 마치고 가는것이 영웅들의 삶이다 그리고 정복자다운 정복자들이지요
여기서 정복자가 무엇을 인류에게 메세지를 던지는지 잘 아실것입니다 그러니 좀팽이 도둑질하는 정복자는 되지말라는것이다
하늘의 선택을 받지못하는 영웅이나 정복자는 도량이 좁다 그리고 오래가지못한다 앞으로 지구 제국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역대 영웅보다도 더 도량이 넓어야함은 지구인류 문명의 마지막 정복자가 될것이다
로마와 징기스칸 그리고 오늘날 지구가 처한 인류문명의 모습과 세계 프리메이슨의 위치와 역활 그리고 소생과의 관계 및견해를 보면서 솔직히 이미 인류는 되돌아올수없는 강을 건넜기에 전쟁을 하지않고 인류 대다수 깨닫지못한 죄인들을 죽이고 있고 죽어가고 있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막는다고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므로 그렇다고 인류 대다수 깨닫지못한 생명체들이 스스로 자각하여 인지를 하느냐 그것도 아니기에 그들은 죽든말든 이미 죽음이 드리워지는 생명체에 불과하고 지금은 그들의 만족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미 죽은 목숨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것도 인류 대다수 문명의 생명체들이 그러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들을 돕는다 인류 문명의 대다수 개개인의 생명체 역시 이 말의 근본을 맥을 보지못하면 그렇게됩니다
얼마나 한 인간이 세상 천하를 담음에 있어서 이렇게 세밀하게 견해를 기록할수가 있다고 판단해보시지 않았는지요
소생의 과거의 영웅보다 더 미래를 준비하는 영웅을 말하는것입니다 그것을 소생이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것입니다
소생이 현실적으로 국가의 실제적으로 미국이나 강대국의 국방 장관급이 직책이었다라면 벌서 이 지구는 아마도 지구 제국을 위해서 행동에 들어갔엇을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으로 나와서 이러한 언급을 해드리는것은 굳이 긴설명하지않아도 수년전에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소생이 권력을 잡았으면 굳이 이러한 고급정보의 두뇌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기록하지않지요
소생이 그동안 인터넷에 기록하고 공유하는것은 수많은 세계의 전사들을 키우기위함이다
그동안 세계의 전사들이 지금도 마음한곳에 불타는 전사가 되고자 씨앗을 뿌려주려고 소생이 그동안의 세력들이 안알아주어도 그들을 끝내 절대적인 신의 믿음에 배신하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지금 전사들을 전세계에서 자라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이렇게 수년간 인터넛으로 세계 여러 국가들에게 소생의 존재를 알려주었든것입니다 미래의 희망을 꿈꾸어라고 오늘은 미천한 국가이고 민족일지는 모르나 먼내일에는 지구제국의 주인이되고 반석으로 세울수가 잇다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기위해서이지요
소생이 그들에게 바보멍텅구리로 현실적으로보면 그러합니다 누가 이러한 견해를 이토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이제는 결정과 선택을 소생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소생을 가볍게 보지마세요 다칩니다 소생이 영어로 세계에 불로그 기록물들을 공유도 바라지만 거듭말하지만 세상을 놀라게할 폭발력은 엄청나므로 대한민국이 남북한이 과거처럼 행동하지말고 소생의 접근방식을 바꾸어야 할것이다
그래서 남북한 전체를 그대들 하기나름에 생과사가 결정될것이다 세상천하를 담고도 남음이 있는데 이 한반도 못담겠는가?
그만큼 동아시아도 담고남음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세계 프리메이슨 최고 지휘부에서 어떠한 모션을 취해줄것으로 믿는다
세상의 지구 제국을 담기에는 지금 세계 최고 프리메이슨 지휘부에서는 부족하다라는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변화와 혁신을 하지못하면 누군가는 그대들을 변화와 혁신을 강요받게될것이다
그리고 전세계 프리메이슨 세력들에게도 기나긴 어둠의 밤이 찿아오게되므로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랍니다
모든것을 미래지향적으로 긍정적으로 영웅다운 영웅의 발상으로 이 세상을 바로보시면 지구촌의 문제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지구제국을 건설함에 지금 인류문명은 과거처럼 인류의 제국의 교훈을 기억하지못하고 미련함으로 바보같은
<8.15 경축사> 전.현 대통령 경축사 비교
[연합뉴스] 2008년 08월 15일(금) 오후 04:24 가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연합뉴스) 정윤섭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축사와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 모두 8.15 경축사를 통해 분열과 대립을 끝내자고 제안했으나 역사관과 해법은 달랐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 해 제63주년 광복절 및 건국 60년을 맞아 지나간 60년을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로 높이 평가하면서 새로운 60년을 위해 미래로 나가자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은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강조한 뒤 "이제 눈을 세계로 미래로 돌려야 한다"며 "우리 모두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8.15 경축사를 통해 국민적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면서 그 전제로 과거사 문제의 올바른 정리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8.15 경축사에서는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 독재시대의 억압과 저항 등 과거의 역사에서 분열의 상처를 물려받았다면서 "분열의 극복을 위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통일문제에 대해서도 강조점을 달리 했다.
실용정부와 굳건한 한미동맹을 표방하고 있는 이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6자회담과 국제협력의 진전에 따른 한반도 경제공동체 실현을 역설하면서 통일한국이 유라시아-태평양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8.15 경축사를 통해 주한미군 재배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자주국방론을 역설했고, 국민의 정부시절 일궈낸 6.15 남북공동선언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북핵 6자회담의 해결을 거듭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전.현직 대통령 모두 취임 첫해 8.15 경축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비전을 제시하면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새로운 60년의 비전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제시했고,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경축사에서 성장잠재력 확충,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 동북아 경제중심론을 내놓았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 시장경제 완성 등 `제2의 건국운동'을 제창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광복절을 "신한국 창조의 원년이자 민족사 복원의 원년"이라고 역설했다.
jamin74@yna.co.kr
(끝)
인류의 문명의 자의든 타의든간에 그동안 인류문명의 수많은 잘잘못을 겸허히 포용하는관점에서 소생은 모든것을 끌어안을수있는대까지 끌어안고 그래도 끌어안을수없는 상황이 있다하드라도
인류 문명의 문제점들을 개선해야함은 절실합니다 이와 더불어서 대한민국의 60년의 그동안 역사나 남북한 민족의 환인의 역사를 비롯하여 단군의 역사 한반도 역사의 2000년간의 모습이나
인류문명과 따로놀수가 없다라는 사실이고지금도 그러하므로 지금은 오히려 이 한반도는 우리만의 국가도 아니요 우리만의 민족도 아니요 한반도는 인류문명 전체의 것이기에
다원주의 세계화는 지구촌 인류문명의 새로운 도전의 변화의 물결인것은 분명하나 공동적인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식구로서 접근해갈것입니다
여기서 수많은 이해 상충관계가 생길수도 있으나 큰 테두리는 같은 출발점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지구촌의 인류 문명의 문제점과 위기 지구행성의 위기측면에서 인류문명의 그동안 이역시 잘잘못을 포용하는데 우선적으로 최선을 다해보고자합니다
지금은 너희 나라 나의 나라가 구분되는 패러다임이 무너지고있습니다 더더욱이 이 한반도만큼은 그러한점을 절실하게 피부에와닿지요
세계 각 국가마다 저마다 달려온 과정들은 다소 차이가있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정보 속도화. 문명 속도 평균화,똑같은 정보를 주고도 자신들에 처한 환경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접근 방식에 차이가 생기기에
무한한 경쟁 지구촌 사회일수도 있으나 인류가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문명 인류를 건설해감에 멈출수는없는것이 우리 인류 문명의 처한 숙명인것입니다 싫든좋든간에 미래로 무한궤도로 달려갈수밖에 없기에 이왕이면 미래 지향적 긍정적 진취적인류전체가 하나의 관점에서 달려나아가야한다고 봅니다
모든 결과의 유형은 인류가 그동안 걸어온 방식이나 패턴처럼 잘못에 대해서 방조하거나 묵인해서는 아니된다라는 사실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민족이든 잘못은 바로잡아가는 인류문명이 되어야 인류문명의 생존력이 살아날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보이고 무엇보다도 지구행성의 주어진 수명의 천수를 채우려면 그렇게해야 지구 해성을 오래동안 유지해갈수있는 살아있는 아름다운 지구행성이 되는것이고 이것을 지구인들이 인류인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또 문제점을들을 전세계인들이 100%충족 해 드릴수가 없지요 그러나 이 지구상에 최고의 최상의 정보를 바탕으로 최고의 정보분석과 선견지명으로 그 지혜를 도출하여 그 합의점을 생산하여 적용해가는 인류문명이 되어야함을 강조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은 깨달음을 대해탈하는 해가는 생명체와 그러하지못한 생명체의 의견 대립은 당연히 생기기지요 여기서부터 자신들간의 의견이나 의식이나 사상이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상의 특성이므로 그들을 토론과 대화로 충분한 이해를 설득시켜서 문제점들을 해결해감에 선후를 선정해서 지구행성을 관리해가는 노력을 전세계 국가와 사람들에게 함께 공유하고자하는것입니다
소생의 불로그 기로물들은 전세계인들과 정보를 깨달음을 공유함에 그 의미가 있기에 왜냐하면 부족한 견해이지만 소생의 본심은 인류가 어려운점들이 줄어들고 문제점들도 줄어들고 지금보다도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인류문명을 열어감에는 과오를 되풀이하는 인류문명이 되지않기를 바라는 차원이 소생의 심정이고 바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구 어디에든 가서 도와드리고 목숨을 내놓으라면 목숨을 던져드리지요 목숨을 던져서 해결되는일이 아니므로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신의 도움으로 그대들에게 많은 도움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지구 행성의 위기의인지 사실과 인류문명의 최대의 위기이다라는 사실은 분명하므로 이럴수록 지구인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공동논의가 활성화가많이이루어져야 할것입니다
민족,인종,종교,이념,사상,문화,모든 개념들을 초월해서 접근되어야함을 강조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바탕속에서 지금 소생은 대한민국 국가의 모습 앞으로 한반도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기에 세계와 한반도가 따로놀수가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실험대에 이 한반도가 한반도 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문명의 정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에 대한 국가 정책이든 미래 설계든 다 지구 전체의 국가들을 상대로해서 내놓는 정책이될것이고 미래 설계가 되므로 따로놀수가 없지요
이러한 기준에서 소생은 세상천하를 편력하면서 품언하여 그동안 갈길을 충분하게 윤곽을 그려드렸습니다 남은것은 구체적인 현실적 실천 방안을 속도조절과 실현가능한 시간속에서 추진해가는일만 남았지요
우리 인류가 죄인으로 인간 세상에와서 태어난것 자체도 죄이지만 자신들의 탐욕을 66억명이 한사람마다 조금만 양보하면 지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큰 힘이 된다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좋은 지구 행성이 발전하고 성숙하는 깨달음이 넘치는 지구행성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 유대계 미국 프리메이슨 조정 작업
광복63주년 건국6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 청산 차원에서 자신의 국가와 민족이 스스로 깨어나지못하면 모든것이 외세에 흔들리는 농간에 모두가 불행해진다라는 사실을 그렇다고 미국의 유대계 프리메이슨 세력인들 자유로워졌는가 미국 국가가 잘 되었는가라는것이다 둘다 미친짓을 했음을
오늘 광복절 행사에 광복60주년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축사와 광복 63주년 건국 60주년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를 참관해서 들었보면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행동한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시간이 다가옴을 이것은 피한다고해서 피해지는것이 아니므로 그래야 새로운 역사 새로운 한반도의 태동이 새로운 문명의 시작을 이 한반도에서 시작하게되므로 그동안 수년동안 언급한대로 지금 언급한것이나 맥략은 변함이 없으니 우리 스스로 아둔하고 무능하고 어리썩은 인간 생명체는 되지맙시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바라는 바이고 로마교황청이 바라는 바이지요 세계에 이스라엘과 로마교황청이 이제는 개과천선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막말로 미국이 정신차리고 러시아와 손잡고 여기에 중국과 중동이 손잡고 이스라엘과 로마교황청,영국, 일본, 한반도을 접수 할수도 있지요
지금 이스라엘과 로마교황청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에 이토록 인류를 바르게 인도하지못하고 죄악을 거듭 자행한다면 어떠한 구도로 판가름의 결론이 나올것입니다
실상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이 없으면서도 세상을 어지럽혀온 사실에 그 마침표를 이제는 찍을것입니다
아울려 참으로 박정희 대통령도 인과응보에 시작을 그렇게 해서 끝을 그렇게 반복당한 모습은 악순환의 중심에 외세가 존재하고 개입했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대한민국은 악순환의 단절은 커녕 다시 재현한 환경을 그동안 조성해온 대한민국 한반도 정치권력에 세계를 평정하지못하면 대한민국 남북한 통일 대통령 할 생각하지마라 그래서 소생은 전세계 그들의 개입에 의한 권력의 창출은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세계3차 대전 집행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스스로 대통령해야지 외세의 간섭을 받지않고 독자적인 동등한 위치에서 국가 운영이 가능하지
그래야 내부적 정치 반발 세력들도 교화를 하고 그래도 거역하면 살려둘수가 없다라는 사실이다 불행의 씨앗은 미리 제거해서 외세들의 빌미를 주지않기위해서는 내부의 반역자 장애물을 제거하는것이 현명한 선택이고 결론이기에 말이다
이제는 그러한 결정을 집행할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 남북한의 저들의 세력들 하고싶은대로 맘대로 내버려두는것은 중요한것은 세계3차 대전의 승패의 결정이다 이것을 결정하고 세계최고의 정치권력과 담판을 지어야 대한민국을 바로세우든 남북한을 바로세우든 해야 위엄이 서기에 말이다
그리고나서 저들을 죽이든 살리든 살생부를 통해서 정리하고 세계3차 대전에 대한 준비를 한반도에서도 해야하므로
그럼 이승만과 박정희 악업은 두사람간의 운명이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이기에 이러한 악업을 현존의 정치 세력들도 답습하고 있다라는 사실과 그들이 역시 악순환의 환경을 조정하고 있다라는 사실 그 농간에 허우적거리는 정치권력의 지금의 행태에 대해서 죽음의 길로 가며는 관을 짜놓고 가거라
무덤은 파들이겠다라는 사실이다 모든것을 청산정리 작업을 하겠다 단순히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역사의 한 단면만 보고 하지않는다라는 점을 강조 해 주고 싶다 세계의 모든 정세와 인류가 갈 방향을 고려해서 집행을 해 갈것이다
그래서 뉴라이트 교회 목사들이 또 다시 프리메이슨의 조정하에 제2의 박정희가 되고싶은 각본이 이와 같은것이고 그 사람의 목사 이름을 공개하지않겠다
목사 이름을 공개하지않는것은 국가와 민족의 마지막운명의 생사 갈림길에서 설사 성공하드라도 죽는것이 이 한반도의 운명이 될수가 있음을 강조해주므로 그대들 손으로 그대들의 반역자들을 청산해야 할것이다 소생은 세계3차 대전의 지휘권을 가지고 그대들의 일에 목사이름을 밝히지않는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대들의 결과물을 알고 있기에 어차피 대한민국 전체가 부패했고 프리메이슨 개,노예짓을 이스라엘 꼬봉 국가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에 망조의 반역의 짓을 용납하지않을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가와 로마교황청 미국,일본 중국,한반도 동향을 최종점검하고 있는것이다
지금도 현시국을 미국유대계 국무부 프리메이슨 세력이나 대한민국의 프리메이슨 똘마니 정치.방송언론 권력 세력이나 되풀이하려고 있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미 이승만 정권 때부터 사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으며 반공 정신에 투철한 군부를 동원하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을 뿐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Plan Ever-ready)을 세워놓고...
이승만 박사가 하야하게 된 원인중의 중요한 원인은 이 박사가 북진통일정책을 계속 추구하며 미국에게도 이를 받아들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제 유태인의 세계 정복 계획에 동조해야 하므로 순수한 마음의 이승만 박사의 북진통일정책을 인정해줄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되면서 미국이 'Plan Ever-Ready'를 세우고 이승만 박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4.19에 의해 하야한 것이 아니라 북진통일 정책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뉴라이트의 김진홍이 이승만 박사를 기리는 행사를 주최한다고 하니 의아한 생각이 든다.
김진홍은 북괴 공민증 소유자로서 가짜 우익이다.
상점이 사세확장하듯이 현재 이명박 정권을 믿고 이것저것 활동하고 있는 김진홍은 북괴 조선노동당 연락부 소속의 민청학련 멤버로서 좌익 주사파이다.
김진홍의 통일정책을 적화통일정책이며 남진통일정책이다.
이승만 대통령제거 계획이나 박정희 대통령암살 제거 계획인 금오산작전명이나 그중간에 미국과 일본 권력 투쟁하는 세력이나 권력투쟁을 야기시키고 환경을 일차적으로 높은 도덕성과 청렴한 국가운녕정치 모습을 하지못한 요인을 제공하고 그 악마의 손짓에 유혹에 말려들어가서 프리메이슨 각본에 허우적거리게되어서 개입을 받게되는 실체가 그러하므로 지금 대한민국 현재그동안 30년동안 해온 그대들 역시 토사구팽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될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처신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바보가 않인이상 무엇을 어떻게 처신을 죄를 사할수있는 행동을 할것인지는 잘 알것이다
그만큼 일차적인 책임과 불행과 고통을 파장을 야기시킨 자들은 바로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들이다라는 사실이다 그 다음 외부 요인이나 환경을 죽을 대 죽드라도 당당하게 신앞에 죽을수있는 청렴한 높은도덕성 정직성을 갖고 정치를 해야지 그러하지못하면 다 되돌아감을 말해주는 정치권력의 교훈이다
지금 금강산 새안문교회 신자 여성피살사건 역시 교회소속이나 같은성격과 의미를 가진 북한과 가짜 우익의 농간의 사건이다
기형적인 신앙을 가장한 정치 종교행세를 하면서 조용기목사도 다른 종교종단 책임자들도 프리메이슨회원이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프리메이슨 회원이고 김대중,노무현 전대통령도 이명박 대통령도 한승수,사공일,정동영,유시민,정몽준, 이미 대한민국 고위직 프리메이슨 회원 명단은 입수되었고 동시에 대기업 총수들 여기에 지금 국회의회는 이스라엘12지회 만들어서 개판을 만들고 있다
다시말해서 지금 대한민국 북한 모두다 정신차리지못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국에 그동안 대한민국을 구해보려고 소생이 몸부림처겄만 이좃이면 세계3차 대전 지금이라도 해도 무방하지요 그러나 그대들만 도축시킨다고해서 본질적인 인류문명의 문제가 해결되지않기에 지금 시간을 두고있는것이다 그것때문에 인내하고 있는것이다 죽고싶으면 무엇인들 막가는 세상에 그대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언급해준들 의미가 없기에 하지않는것이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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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대통령 제거계획 - 52년 6월초의 육본 심야회의(陸本 深夜會議)
당시 작전국장 李龍文 차장 朴正熙 장군의 숙명적 인간관계, 주한유엔軍의 쿠데타 계획, 부산정치파동이 뒤엉킨 숨막히는 大드라마의 철저 추적 - 미 국방성 비밀문서(美 國防省秘密文書) 최초공개
장군, 새벽에 나타나다
임시 수도 부산의 서대신동, 때는 1952년 5월 10일 새벽 3시께. 쾅, 쾅, 쾅…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선우종원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경비원이 방문을 열었다.
『웬 미군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미군이?』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는 뜨락으로 나갔다.
『지금이 어느 땐데 쿨쿨 잠만 자?』 어깨를 툭 치며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육군 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이었다. 얼굴은 희고, 키는 크고 눈이 노란 이 장군을 경비원이 미군으로 잘못 본 것이었다. 그는 선우씨의 평양 고보 두해 선배였다. 선우씨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직에서 그 며칠 전에 물러난 유명한 반공 검사 출신. 이 장군을 평소 믿고 존경하는 터였다.
이용문 장군은 『지금 대구 육본(陸本)에서 나 혼자 총장차를 몰고 달려 오는 길이다』고 했다. 이 장군은 덮개를 벗기고 지프차의 3성장군 표지판을 보여주었다. 선우씨는 이 장군을 2층으로 안내했다. 이 장군은 대뜸 『우리, 같이 무력혁명을 하자』고 했다. 선우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 장면씨를 총리로 추대하려는 목적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던 선우씨는 그 즈음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 박사를 엎어버릴 쿠데타를 하자는 거야. 너희 쪽 사정은 어떤가?』 선우씨는 「우리」란 표현에 주목했다.
『우리라니? 선배님 말고 많은 장군들이 가담하?있습니까?』
『아니야…자넨 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가? 너희들이 찬성하면 장면박사 추대하고 곧 혁명 일으키겠어』
『이 박사는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죽여야지』
『죽여요? 난 못합니다. 민주주의란 수단과 절차가 중요한데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더구나 우리 집안은 3대째 천주교 신자입니다』
『야 이 사람아, 이런 판국에서 페어플레이가 있을 수 있나? 조금도 주저말고 거사하세. 참모총장도 알고,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의 묵계도 받아 두었어』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두 시간쯤 열띤 토론을 벌였다. 후배인 선우씨가 설득당하지 않자 이 장군은 탁자를 쾅 치면서 일어났다. 희끄무레 동이 터 오는 바깥으로 나가는 이 장군에게 선우씨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일은 내 목숨 다할때 까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을거야』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리곤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13년 뒤 선우종원씨(66·변호사·전 국회 사무총장)는 「망명의 계절」이란 책에서 이상과 같은 에피소드를 공개했었다. 다시 그 15년 뒤인 1981년에 국토 통일원은 6·25 전사 관계 미국 정부 문서집을 2권 발간했다. 비밀 등급이 해제된 외교·국방·문서였다. 이 장군과 선우씨가 만난 바로 그 무렵 주한 미군이 한국군을 동원,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전문 3통도 있었다. 다시 그 3년 뒤, 필자는 선우씨의 회고담과 이 극비 전문을 실마리로 삼아 32년전의 부산정치 파동, 그 무대 뒤에서 어지럽게 벌어졌던 60일간의 숨막히는 드라머, 그 진상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월남 독립군 도운 풍운아
「이용문 장군 배 쟁탈 승마 대회」를 통해서나 서울지검 이건개 부장 검사(전 서울시경국장)의 아버지로서 약간 알려져 있는 이 장군은 짧고 굵은 인생을 살고 간 풍운아였다. 육군 정보국 인맥의 대부(代父)였던 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선배이기도 했으며 2대에 걸쳐 숙명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와 맺었다.
이용문 장군은 1916년 1월 22일 평양에서 났다. 아버지도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다. 그는 보통학교 땐 짓궂은 장난꾼, 평양고보 재학 때는 일본의 차별교육에 대항, 동맹 휴학을 주동했다. 1934년 그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신입생 약5백명 가운데 한국인은 둘뿐이었다. 37년12월에 일본 육사 50기생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육군 창모총장 채병덕과 이종찬은 그의 1기 선배였다. 건장한 체격에 힘이 장사인 이용문 장교는 말을 잘 탔다. 도오꾜 기병 연대의 장교로 배속되었다가 만주로 가서 실전을 처음 경험했다. 그 사이 평양 유지의 딸인 김정자와 결혼, 첫아들 이건개를 낳았다. 42년에 이용문 장교는 도오꾜의 육군 참모본부로 전속됐다. 일제 시대를 통틀어 참모본부에 근무했던 한국인은 홍사익과 이용문뿐이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육사로는 7기가 늦고 나이로는 한 살 아래인 박정희 장교를 처음 만났다.
1943년 이용문 장교는 남방 사령부 참모로 보내졌다. 말레이시아, 버마 등지를 옮겨다니다가 사이공에서 해방을 맞았다. 당시 그의 계급은 소좌, 그는 한국인으로는 몇 안되는 전투 병과(보병)출신이었다. 이용문 장교의 진면목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이 때였다. 사이공에서 잠시 같이 있었던 그의 후배 김정렬씨(당시 항공 대위·전 국방부 장관)는 이렇게 회고했다. 『용문 형은 일본 장교들 사이에서도 스타였다. 위로는 귀여움, 밑으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실력이나 용모, 행동가짐이 출중했다. 그 때 남방사령부는 전투 능력을 간직한 채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항복, 장교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용문 형은 이 때부터 머리를 기르더니 중국인으로 위장, 여권을 얻었다. 그리곤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월남 독립군을 뒤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항복한 일본군 사령부에서 약 30만 피아스타를 뽑아냈는데 지금 한국돈으로 치면 1백억 원쯤 되지 않을까? 이런 자금을 바탕으로 월남 독립군 조직에게 무기도 공급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게릴라 지도자인 호지명의 조카 딸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늘 정의감이 넘쳐 흘렀던 그는 대단한 로맨티스트였고 월남인들을 돕는 데 그 낭만을 불살랐다. 1946년 4월 나는 1천1백10명의 한국 교민들을 이끌고 귀환선을 탔다. 원래 용문 형이 인솔자로 정해져 있었으나 그는 월남이 독립하는 날을 보고가겠다고 남았다. 「형님! 조심하시오」라고 했더니 「걱정없어. 천지는 넓어」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떠난 석 달쯤 뒤에 용문 형은 프랑스 군에게 체포돼 주거 제한을 당했다』 1947년9월 그는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그의 가족은 이미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육군 정보국 인맥의 대형(大兄)
그는 귀국 후 무역업을 하려고 했다. 홍콩 상해에서 설탕을 들여올 길을 찾기도 했다. 국군이 창설되자 채병덕의 권유로 그는 군에 들어갔다. 1948년 11월에 육군 사관학교 제8기 특대생 과정을 마치고 그는 소령으로 임관됐다. 초대 육군 수색대장. 한 달 뒤 수색단은 기갑 연대로 바뀌었다. 곧 중령, 대령으로 올라간 그는 육군본부의 제2대 정보국장으로 취임했다. 점인 국장은 백선엽 대령. 여기서 이용문 국장은 문관 박정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48년 10월에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대대적인 「숙군」을 시작했다. 그 작업의 조직상 책임자는 백선엽 정보국장, 실무책임자는 김창룡 대위였다. 49년 7월까지 진행된 「숙군」으로 4천7백49명이 총살, 유기형, 또는 파면되었다. 육사 3기생의 경우엔 2백81명의 임관자 가운데 2백58명이 조사를 받고 60여명이 숙군되었다고 「한국전쟁사」(국방부 전사 편찬실 펴냄)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증거주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고문이 성행했으며 이에 따라 술친구나 동기생을 억울하게 끌고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소령도 숙군되어 한때 군복을 벗었으나 백선엽 정보국장이 그를 문관으로 구제하여, 정보국에 근무하게 했다. 백선엽씨는 『그 때 벌써 그가 큰 인물감임을 알 수 있었기에 인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났었다. 문관이었지만 정보분석에 뛰어나 중요한 기안과 분석은 주로 그가 맡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에 이어 정보국장이 된 이용문 대령 밑에는 박정희 문관뿐 아니라 많은 「미래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유양수 과장(전 동자부 장관)을 비롯, 육사8기를 갖 졸업한 김종필(전 국무총리) 이영근(전 유정회 총무) 서정순(전 중앙정보부 간부) 석정선(전 중앙정보부 간부) 전재덕씨등(전 중앙정보부 간부)과 5·16때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태화씨(당시 문관·전 서울신문사장) 등등.
이용문 국장의 큰 그늘 아래에 모인 이들은 그 뒤 군 안에서 정보 인맥을 형성, 5·16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의 현대사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맥이란 것은 그저 같이 있었다는 인연 정도로 이루어지는건 아니다. 의리나 이념의 동질성, 또는 공통의 이해 관계가 접착제로 작용해야 한다. 이용문 국장을 필두로 하는 정보국 인맥은 의리와 가치관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했던 것 같다.
박정희 문관도 감복한 큰 그릇
이용문과 박정희의 관계에서 보면, 박정희 소령의 생명을 「숙군」에서 구해준 데는 백선엽, 그를 문관에서 현역으로 복직시킨 데는 제3대 정보국장 장도영씨의 배려가 결정적이었으나 진정으로 그를 알아주고 그를 감복시킨 사람은 이용문 장군이었던 것 같다. 장남 이건개 부장 검사(42)의 회상-. 『그 무렵 우리 집은 서울 북아현동에 있었다. 많은 장교들이 자주 놀러 왔다. 채병덕 장군, 뒤에 한강교 폭파 책임을 지고 사형된 최창익 공병감, 이종찬 장군 등이 기억난다. 채병덕 장군은 너무나 뚱뚱하여 허리를 굽혀 군화끈을 조를 수가 없어 부관이 늘 대신해 주던 게 눈에 선하다. 가장 자주 왔던 분은 역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씨는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를 열심히 하셨다. 진지한 토론이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두 분은 6·25 전투 중 적군에 포위되어 후퇴하면서도 「이럴 땐 물자를 아껴야 한다」. 「위기 땐 물자를 풍성히 써야 한다」고 서로 논쟁을 하더란 것이다. 어머니는 가끔 6·25때 부하에게 욕 안하고 손찌검 안한 장군은 선친과 박정희 장군 두 분뿐이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시 문관으로 국장실 근무를 했던 전 서울신문사장 장태화씨의 회상-.
『이용문 장군은 정말 그릇이 큰 분이었다. 사소한 데 구애받지 않고 대범했으며 쾌활, 활달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면서도 경솔하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남을 도우는 사람이었고 도무지 사심이 없었다. 행동적 인간이었고 인정이 많았다. 아무리 부하가 잘못해도 기껏 한다는 욕은 「야, 이 사람아…」 정도였다. 채병덕 총장이 주재하는 참모회의엔 지각을 자주 하고 회의 도중 코를 골면서 졸기가 일쑤였다. 친구 사이인 채 장군이 평안도 사투리로 「야, 너 농문이 졸아서 되간?」하고 면박을 주어도 태연했다. 발언을 하는 걸 보면 졸면서도 다 듣고 있었던 것같이 조리정연했다. 그래서 이용문 장군의 낮잠은 「뭘 그렇게 자질구레한 걸 이런 자리에서 논의하느냐. 그런 건 졸아도 다 안다. 좀 굵직한 데 관심을 갖자」는 충고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첫눈에 반할 것 같은 쾌남아」(선우종원씨의 얘기)였던 이용문 장군의 이러한 인품이 김종필 소위 등 정보국의 청년 장교들에게 준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남산에서 게릴라전 기도
6·25가 터지기 직전 이용문 대령은 국지전이 있었던 옹진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됐다가 부임하자마자 면직돼 참모학교 부교장(교장은 김홍일)으로 전보됐다. 이 면직 소동의 배경엔 정보비 지출을 둘러싼 신성모 국방장관과의 불화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6·25 당일 육군 정보국 작전정보실의 박정희 실장은 육본에 없었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북한반장이던 김종필 중위가 당직을 하고 있다가 남침 소식에 최초로 접했고 곧 수뇌부에 연락했다. 육본 수뇌부는 대부분 전날밤의 파티 영향으로 골아떨어져 있었다. 이용문 대령은 전투 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연락 요원 겸 독전 요원으로 서울 방어선에 투입됐다.
6월27일 김종필 중위는 유재홍 장군 사령부로 가다가 정릉 입구에서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전임 상관에게 김 중위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물었다. 이 대령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가 힘들다』고 했다. 김 중위는 이 판단을 채병덕 총장에게 전했다.
6월 28일 밤 이용문 대령은 3사단 참모장 김종갑 대령과 함께 성북 경찰서에서 약5백 명의 장병을 지휘하고 있다가 북괴 전차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는 와해돼버렸다. 한동안 이 대령은 전사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용문 대령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고 이종찬 장군의 생전 회고담에 따르면 이 대령은 부하들과 함께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꾀했었다고 한다. 식량도 물도 없어 나무 열매를 따 먹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지냈다고 한다. 『이 대령은 할 수없이 부하들을 해산하고 석달 동안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는 게 이종찬 장군의 얘기였다. 적 치하 석달 동안의 이용문대령에 대해선 이건개 검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 건 서울이 함락되고 보름쯤 지나서였다. 그 길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친척 집이나 셋집에 들어가면 방 바닥 밑으로 땅굴을 파고 아버지는 그 속에서 숨어 살았다. 어느날 밤 괴뢰군이 수색을 나왔다. 장롱을 뒤지던 한 군인이 누워 있는 나의 오른손을 밟았다. 어린 마음에 비명을 지르면 혹시 방바닥 밑에서 숨어 있는 아버지가 들킬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때의 상처가 곪아서 서울 수복 뒤 나는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 마디를 잘라야 했다. 인천 상륙으로 북괴군이 밀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숨어 있던 지하실로 북괴 패주병들이 들이닥쳤다. 아버지를 나오게 하더니 옷을 벗으라고 했다. 총살하려는 듯했다. 이 때 어머니가 총구 앞으로 넘어지면서 「날 대신 쏘라!」고 울부짖었다. 북괴군인은 공포를 한방 쏘더니 옷만 갖고 그냥 가버렸다』
박정희 대령을 다시 부하로
수복 뒤 다시 군에 복귀한 이용문 대령은 낙동강 방어전이나 북진 대열에서 빠졌던 탓으로 승진이 늦었다. 강원도 계엄 민사부장, 육군 종합학교 기획처장, 제9사단 부사단장 등 화려하지 못한 자리로만 떠돌았다. 제9사단 부사단장 자리에서 그는 또 박정희 중령과 만났다. 박 중령은 참모장이었다. 9사단이 속한 동부 전선의 제3군단은 51년 봄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거의 괴멸되다시피했다. 「현리 전투」라고 불리는 이 후퇴에서 이용문 대령과 행동을 같이 했던 당시 부연대장 이근양씨(예비역 소장·전석공 사장)는 말한다. 『그 전투 며칠 전 박정희씨는 다른데로 전속을 갔었다. 이용문 대령과 후퇴를 하는데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령부와 통신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때 이용문 대령은 야전 전화기를 늘 들고 다녔다. 왜 갖고 다니는지 몰랐는데 그는 이때 숲속으로 들어가 전화선을 찾아내더니 그 선에 전화기를 연결, 직접 사령부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역시 2차 대전 때의 실전 경험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1951년 5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 방위군 사건과 관련하여 신성모 국방장관을 면직, 이기붕을 대신 임명한 데 이어 6월 22일엔 정일권 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을 미국 참모 대학으로 유학 보내고 이종찬 중장과 이용문 준장을 각각 후임 발령했다. 신성모-정일권-강문봉의 퇴장과 이기붕-이종찬-이용문의 등장은 만군(滿軍) 인맥의 퇴조와 일군(日軍) 인맥의 승세를 뜻하는 변화였다. 참모차장에도 일본 육사 55기 출신인 유재홍 소장이 임명되었다. 작전국장이 된 이용문 장군은 직속 부하인 작전차장에 박정희 대령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세 번째로 콤비가 된 것이었다.
이종찬 총장이 장악한 육군 본부가 일본 육사나 학병 계열 일색이었던 데 대해 박정희 대령은 만군 출신이었다. 물론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사에 편입되어 57기로 졸업했으나, 일본 정규육사 출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만군 출신으로 분류했다. 이용문과 박정희의 인간 관계는 파벌적 갈등에는 구애받지 않을 만큼 질기게 엮이어 있었다.
궁지에 몰린 대통령의 도박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 23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그의 재선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서울 사수」란 속임수,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약화시켰다. 특히 「서울 사수」란 거짓 방송으로 수많은 인명을 적의 손에 넘겨 주었다가 서울수복 후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분류, 「비도강파」를 마치 불온 집단인 것처럼 취급하였던 이승만 정권에 대해선 국회의원들의 감정이 좋지 못했다. 수많은 동료 국회의원들이 거짓 방송에 속아 납북된 것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되게 되어 있었으니 이승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선우종원씨 같은 사람도 이승만 반대노선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이승만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구속시켰던 언더우드 부인 살해범들이 보복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승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승만은 점점 극동 전략의 장애 요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기본 입장에 어긋난 행동을 되풀이 한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미국의 전략은 『지지도 말고 이기지도 말라』는 것으로 굳어졌고 회담을 통한 명분있는 휴전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일본을 재무장시켜 중공과 소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이용한다는 방침도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우리는 공산군에게 향해 있는 총구를 그들에게 돌리 것이다』고 선언하고 휴전 회담에도 극렬하게 반대하기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은 거추장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51년 후반기부터 국무성이나 주한 미군 대사관측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 친미 인사들을 리스트에 올리고 암시들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포스트 이승만」의 정권 담당자로 가장 유력시 된 것은 주미 대사를 지낸 당시 국무총리 장면 박사였다. 선우종원씨에 따르면 장면씨도 대권에 도전할 의지를 분명히 했었다고 한다.
재선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51년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1백83대19로 무참하게 부결돼버렸다. 국회가 이런 분위기라면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판단했다. 이 무렵 정계에선 두 개의 신당이 탄생했다. 오위영·정헌주·김영선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원내 자유당과 이범석 등 족청세력을 뼈대로 한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었다. 원내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상징적 대통령에 이승만, 실권 있는 국무총리에 장면씨를 추대할 계획이었고 원외 자유당은 처음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했다.
원내 자유당·민국당·민우회 등 야당연합 세력은 52년4월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발의시켰다. 꼭 개헌정족수인 1백23명이 서명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탈자가 생겨도 안되는 아슬아슬한 세력 분포였다. 정부와 원외 자유당측은 두 번째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이에 맞섰다. 이 팽팽한 무대에 등장한 것이 장면씨의 후임 총리 장택상씨였다. 그는 먼저 20여 명의 영남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라회를 조직, 국회에 발판을 만들고 혼미한 정국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각된 것이었다.
데모 유치계획
박정희 혁명계획의 핵심은 1961년 4월 19일 혁명1주년 기념일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할 것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수도권의 부대들이 폭동진압에 동원되면 이미 포섭한 장교들에 의해서 이 부대가 쿠데타 군으로 돌변,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전제가 되는 것은 4월 19일에 과격한 학생시위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 모의 세력은 학생들을 포섭하여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른바 '데모 유치공작'을 꾸민다.
이 공작 이야기는 일종의 공간사인 '한국군사혁명사'(1963년 8월 한 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발간·위원장 장경순소장)엔 빠져 있다. 이혁명사의 원본이 된 비공개 '혁명실기'엔 적혀 있고 이낙선의 '혁명 참여자증언록'엔 자세히 그 경과가 실려 있다.
혁명사가 발행될 때는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대결한 제5대 대통령 선거투표일을 앞두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학생들을 선동 했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혁명실기'는 '데모 유치공작'이 김종필 중령과 박종규소령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 소령은 미국 보병학교에서 유격특수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김종필은 평소자신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박종규에게 특명을 내렸다. 3월 초순 박종규는 우선 서울대, 고려대, 건국대 학생들을 포섭하여 의식화하는 일에착수했다.
영어를 꽤 잘하는 박종규는 알고 지내는 터키계 미국여성 사이데양의 신당동 집을 의식화 토론장소로 빌렸다. 첫 회합은 3월 7일 저녁 8시에 있었다고 '혁명실기'는 적고 있다. 참석한 학생들은 '건국대 정치과 조병규, 이두현, 고려대 정외과 김수길 등 학생회 간부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토론에서 4·19의거 학생들의 열망을 배신한 장면 정부를뒤엎어야 한다는 과격한 토로를 했다. 박종규는 이들의 토론상황을 미리 장치한 녹음기로 담았다.
박 소령은 이틀 뒤엔 10여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다시 불러모아 의식화 토론을 가졌다. 박종규로부터 학생들의 동태를 전해들은 김종필은 행동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박 소령은 학생회 간부 5명을 뽑아 각자 10명씩의 학생들을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박종규는 이들을 일종의 특공대로 만들어 비밀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런 공작과 포섭엔 자금이 필요했다. '혁명실기'는 '당시 비용은 김종필 중령이 김용태· 공화당원내총무 역임)의 협조를 얻어 부담했는데 3백만 환이 소요됐다. 김중령도 전역하며 받은퇴직금 1백만 환을 다 쓰고도 모자라 부인의 곗돈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이데모 때 뿌릴 전단 2만 장을 인쇄했다'고 기록했다. 전단의 서두는 이러했다.
<학생이여 궐기하자! 4·19의 피가 헛되었다.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피를 흘렸던가!>.
박종규는 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 기자를 사칭했다. 친구가 경영하는 대륙통신사에 가서 "이번에 군에서 제대를 했는데 내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려고하는데 기자증을 하나 만들어주게"라고 부탁하였다. '사진기자 박 종규'는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만났다.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은 혁명주체들은 이즈음 조직확대와 점검을 서두르고 있었다. 3월 15일 김종필, 오치성, 유승원, 이석제, 옥창호, 길재호, 김형욱, 신윤창, 박종규는 명동신도호텔 2층 객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몇 가지사항에 합의했다.
<1군사령부내의 공작은 조창대 중령에게 일임하고 수시로 감독한다. 해, 공군, 해병대 등 타군 및 2군과의 연락은 사장(박정희)과 김종필에게 맡긴다. 공수단은 오치성과 김형욱이 책임진다. 33사단은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을 포섭하여 책임을 맡긴다. 박종규 소령은 사장의 신변경호에 책임을 진다.> 다음날 김동환, 김형욱 중령이 대구로 내려가 박정희로부터 새로운 지침을 받고 올라왔다. 3월 22일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장면 정권과 보수층을 크게 자극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혁신계가 주동한 악법반대궐기대회가 폭력화된 것이다.
4·19 이후 표면으로 나온 혁신계 속에는 좌익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2월 13일에 조용수를 사장으로 하여 창간된민족일보는 장면 내각 비판을 극렬하게 전개했다. 당시 장면 정부는 좌익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해서 보안법과 반공법을 강화한 '반공임시특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놓고 있었다. 혁신계와 민족일보는 이 법이 통과되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판단, 공세를 강화했다. 3월 22일 오후2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약1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들은 '밥 달라고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라고 외치면서 연좌농성을 벌인 뒤 장면 총리의 사저가 있는 명륜동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혜화동에서 경찰은 약 30발의 최 루탄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중앙청 문을 부수고 일부는 택시를 잡아타고 난동을 부렸다. 이 시위에 맞서 우익단체에선 '반공법 지지'시위를 벌였다. 마치 광복 뒤의 좌우익 대결을 연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 다음날 김종필과 오치성은 서울근교에 주둔하는 33사단 작전참모이자 육사동기인 오학진 중령을 서울소공동 화식집 '남강'으로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시국에 관련한 이야기를 유도했다.
"민주당 정부는 반공에선 자유당보다 더 무능하다. 이대로 가다가 는 공산당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들의 수중에 들어갈 판이다.".
"조국을 구출하는 일은 우리 장교들이 궐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육군장성들 가운데서 가장 신망이 높고 양심적인 사람을 꼽아보라.".
"박정희 장군, 한신 장군…." "우리 하고 생각이 같다. 우리가 바로 그 박 장군과 손잡고 일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포섭된 오학진 중령은 33사단 병력을 혁명에 동원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졸업을 앞둔 육사17기 생도들 가운데서도 쿠데타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한 장교가 주동생도를 찾아가서 "야, 좀 기다려. 우리가 다 준비 하고 있어"하고 말렸다.
정부가 무능하고 만만하게 보이니까 생도들까지 정권탈취를 꿈꿀 정도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3권 13장中 발췌함.)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1956년, 6·25전쟁의 전후복구가 일단락됐다. 같은 해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승계위기에 봉착했다.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고집했다. 1950년대 후반, 야당의 도전과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자 자유당 강경파는 국가보안법 개정, 조봉암 처형, 경향신문 폐간 등의 강압조치를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총체적인 선거부정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6·25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젠하워 장군(왼쪽)이 1952년 12월2일 한국을 방문해 일선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휴전 이후 한국정치는 6·25전쟁의 연속에 불과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선의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전쟁 위협은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진행경로를 규정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과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이는 남북분단이 고정되는 것을 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은 남북관계의 현상변경, 즉 북진통일을 추구했다. 이는 또 한 번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큰 골칫거리였다. 1953년 휴전과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을 전후해 미국은 이승만의 북침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 이후 공산진영의 전쟁 재개뿐 아니라 한국의 전쟁 개시 가능성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이중봉쇄’ 정책을 수립했다. 미국은 남북관계에서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면서도 한국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현상변경을 요구했다. 한국군 병력감축과 경제건설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압박했다. 한국의 국내정치 안정을 위해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을 선호했다.
이승만은 국내상황과 관련해서는 반공과 반일(反日)을 두 축으로 삼아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거부했다. 야당을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적대시했다. 6·25전쟁과 한미동맹을 통해 맺어진 혈맹이건만 남북관계와 국내정치를 둘러싸고 195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시각차
휴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봉쇄와 롤백(rollback) 사이를 오갔다. 1953년 초부터 1960년 말까지 미국은 뉴룩(New Look)전략에 따라 대한정책을 재조정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가장 염려한 것은 6·25전쟁을 계기로 한 미국의 군비팽창이었다. 건전한 경제가 국가 안전보장의 기반이라는 신념을 지닌 그는 미국이 직면한 위기를 ‘이중적인 위기’로 파악했다. 즉 세계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도전과, 미국경제의 약화라는 내부의 위험이 그것이다. 군사비 과잉지출과 민간경제 파탄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냉전에서 미국이 지켜야 할 가치가 개인의 자유, 민주정부, 사기업 주도의 자유시장경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적 생활양식 그 자체라고 보았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군사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결과적으로 병영국가가 출현하게 되고, 국가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 정권의 특징은 건전한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국가 안전보장의 기본으로 삼아 ‘지속가능한 국가안보’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동북아에서 확고한 냉전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아이젠하워 정권과 상이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분단을 ‘적색(赤色) 제국주의(帝國主義)’가 북한을 강점해 생긴 문제로 보고, 북한 해방 차원에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양 진영의 공존은 불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전면전쟁이 불가피하므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무력 북진통일을 호소했다. 이승만은 양 진영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의 견해 차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하느냐, 아니면 앞으로 미루느냐 하는 점에 국한되고 있다”고 했다. 7월28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이승만은 극동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격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만 지원한다면 아시아 지역의 군대만으로 북한을 회복하고, 나아가 중국 본토를 회복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 정치인과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승만의 이미지는 ‘반공투사’에서 ‘전쟁광(狂)’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휴전이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정세가 양 진영 사이의 평화공존이 정착되는 방향으로 흐르자 북진통일론은 안팎에서 도전받게 된다.
“가장 시급한 요구는 휴전 백지화”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내부에서 야당과 지식인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민주당도 같은 시기 화전양양론(和戰兩樣論)을 주장함으로써 휴전기에 구축된 북진통일론 일색의 통일 논의는 시험에 들게 되었다. 이승만은 1956년 말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북진통일론을 강조했다. 1957년 1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어떤 사전계획이나 특별한 조직도 없이 정말로 자발적으로 일어난 헝가리 봉기는 소련의 통제 아래 놓인 인민들이 얼마나 결사적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소련의 위성국가들은 해방을 얻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바랐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미국이 지켜 나가야 할 기준은 평화가 아니라 정의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는 바입니다. …현재 우리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조국통일입니다. 38선으로 분단된 이후 거의 1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국가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막는 두려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쟁점은 자유세계가 추구해야 할 더 나은 길이 해방이냐, 또는 봉쇄냐 하는 점입니다. 내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봉쇄정책은 자유세계를 지키는 데 부적절합니다. 첫째, 봉쇄정책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해방에 반대하여 봉쇄를 지지하는 주장은 봉쇄선 그 자체로부터도 끊임없는 후퇴를 낳게 됩니다. …둘째, 봉쇄정책은 이미 공산주의자에 의해 노예가 된 세계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헝가리인은 노예가 된 인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봉쇄정책의 실패는 날이 갈수록 점차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감스럽게도 또 다른 세계대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득세했습니다. 우리 처지에서는 이런 주장에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방국들에게 공산주의 문제를 푸는 데 가능한 모든 평화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휴전에 반대했으며 우리 우방국들의 바람에 반하여 최소한 한 번 이상 북진하려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탄약과 기름 공급이 3, 4일분으로 줄어들거나 하루분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조국의 분단 상황을 내버려두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소위 휴전을 백지화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요구사항입니다. (“Aide Memoire”, 24 January 1957. 이승만 대통령이 주한 미국대사 다울링을 통해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외교각서)
중국 봉쇄와 일본 중심 경제 통합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1957년 말부터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유로 감군(減軍)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1958년 신년사를 통해 단독 북진통일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엔군이 우리에게 허락해 우리 국군이 나가서 싸울 기회를 주고 자기들은 뒤에 앉아서 물자와 도의상 원조만 해주면 우리나라의 통일은 머지않아 성취된다는 것입니다.”(공보실, ‘대통령 리승만 박사 담화집’ 제3집, 1959, 55쪽).
1958년에는 북한 주둔 중공군이 전면 철수하였다. 이는 휴전체제가 사실상 안정기에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휴전 무렵부터 중공군을 통일의 장애물로 규정하고, 중공군만 철수하면 당장이라도 북진해서 통일할 수 있을 것처럼 선전해왔다. 더욱이 같은 해에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점차 껍데기만 남게 됐다.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 공약에서 통일정책 부분을 빼버렸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집권 자유당에 의해 북진통일론이 자체 청산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
이러한 상황은 북진통일론이 국가 프로젝트로서 효과를 상실했음을 뜻한다. 이승만은 분단 문제를 철저하게 냉전체제와 직결해 파악했다. 국제적인 반공 진영 결속과 적극적인 대공정책만이 한국의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보았다. 195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한국, 대만, 남베트남이 결속해 공산주의에 대항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철저히 자유 진영을 결속하고 미국의 적극 개입을 촉구함으로써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했다.
휴전 이후 한국군의 병력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병력 문제는 휴전 후 한미관계에서 최대 쟁점이였다. 한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군사력이 유지된 주 원인은 북진통일을 내건 이승만 대통령의 군비확대정책이었다. 중공군의 북한 주둔과 미군 감축도 무시 못할 요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지역적 위협으로 대두한 중국을 봉쇄할 필요를 느끼고 일본의 재군비(再軍備)가 지지부진한 상황전개에 위기감을 가진 미국 군부의 후원도 있었다. 6·25전쟁을 통해 경제력을 훨씬 넘어서는 군사력을 떠안게 된 한국은 중국 견제와 더불어 일본의 통상병력 방위부담까지 짊어진 셈이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아시아정책의 기조로 중국 봉쇄와 더불어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경제통합을 추구했다. 6·25전쟁 후의 대한부흥 원조가 일본의 ‘부흥특수’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 대해 이승만은 격렬히 항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기에 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시하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을 다시 일본의 경제세력권에 집어넣으려는 수작이었다. 더욱이 6·25전쟁으로 미국의 군사공약이 확정되고, 경제원조도 기대할 수 있게 된 마당에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1956년 선거는 ‘정치적 전복’의 계기”
그렇지만 미국의 대한정책의 무게중심은 점차 군사 분야보다 경제 분야로 옮겨졌다. 한국경제의 전후복구 방향은 1956년을 기점으로 구호와 재건에서 발전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한국에 근무하는 미국 관리들은 미 정부에 군사 중심의 대한경제정책을 바꿀 것을 건의했다. 1956년 7월 주한 미대사와 경제조정관이 모두 교체되었다.
새로 부임한 다울링(Walter C Dowling) 대사와 원(William Warne) 조정관은 군사안보와 더불어 경제발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56년 10월25일 다울링 대사는 다음과 같은 장문의 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보내 대한정책에도 ‘뉴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새롭고 복잡한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데, 특히 경제발전 및 군비지출 수준과 관련해 그렇다. 군사 분야에서 우리는 침략에 대항하여 한국의 방위력을 증강한다는 목표를 달성한 반면 구호와 복구 분야에서는, 비록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한국의 필수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기초를 닦은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공산주의자의 군사위협에 대항하여 강력한 방위력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 분야와 경제 분야 양쪽에서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는 내적인 어려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 우리의 노력을 조정할 것을 요구하며, 이제까지보다 더욱 더 한국측의 협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한국인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프로그램을 수립할 수만 있다면 한국측의 협력을 얻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달 동안 한국지도자들이 국가목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1956년 5월에 실시된 전국적인 선거 결과는 한국민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기적절하게 경고해준 것이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그들이 민주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징조다.
만일 앞으로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이 승인한다면, 당분간 그는 우리의 소중한 동맹자일 것이다. 비록 이승만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크긴 하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한국민에 대해 지도력을 가지고 있으며, 달리는 불가능할 일을 그의 협조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많다(“Broad Eval !uation of U.S. Program in Korea,” October 25, 1956, RG 469,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Korea Division, Korea Program Files, 1953-57, box 1, WNRC).
또한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으로 있던 스트롬(Carl Strom)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작성해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이승만 정권은 “1948년 이래 질서유지라는 단기 목표는 성취했지만 지속가능한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건설적인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도와야 하겠지만” 그에게 “건설적인 국가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1956년의 선거는 대중의 실망이 드러난 것이라 인식하고, 야당이 정권을 물려받을 수도 있는 ‘중요한 정치적 전복’의 계기가 된다고 평가하면서 한국군대를 국내정세의 안정세력으로 보고 계속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Memorandum From the Officer in Charge of Korean Affairs(Nes) to the Deputy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Parsons),” Washington, July 12, 1956, FRUS, 1955-1957, Vol. XXIII, p. 291).
군사 대결에서 경제 경쟁으로
6·25전쟁 이래 미국이 한국에 관여하는 일차적 목적은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반공 정권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냉전전략이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냉전의 전개에 따라 반공의 방법과 내용이 변했으며, 미국의 관여 내용도 바뀌었다.
뉴룩정책에 따라 지속가능한 안보를 추구하는 아이젠하워 정권에 군사 중심의 구형 냉전대립구조에 기반을 두는 이승만 정권은 차츰 부담으로 변했다.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로 한국에 드는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한국, 대만, 남베트남을 전초기지로 아시아 대륙 연안의 도서를 방위선으로 하는 중국 봉쇄정책의 기본 틀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경제체제 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신형 냉전 아래 국내 정치경제개혁에 소극적인 이승만 정권의 태도를 미국은 불만스러워했다. 미국 처지에서는 군사적 대치에서 정치경제전쟁으로 변모된 냉전을 효율적,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새로운 협력자가 필요했다.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관료 출신이 한국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이기붕계가 다수 당선되었다. 이기붕은 선거에서 압승한 후 국회의장에 취임하고, 당과 정부의 전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승만 정권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1954년 11월18일 국회에 상정했다. 한미합의의사록과 상호방위조약 발효가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개헌안은 11월27일 표결에서 가(可) 135, 부(否) 60표로 부결되었다. 단 한 표 차이로 희비가 엇갈린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이를 번복하고, 가결을 선포했다. 북진통일운동을 통해 강화된 이승만 정권의 권력은 사사오입개헌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 3선 제한조항의 폐지와 함께 부통령의 대통령 지위 계승권을 신설하여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한편 반(反)이승만 세력은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에 대항했다. 총선거에서 참패하고, 개헌 저지에 실패하면서 위기를 느낀 야당은 오랜 분열을 일단 극복하고 1955년 9월 민주당을 결성했다. 모든 야당세력의 결집을 기치로 내건 민주당이었지만, 조봉암 등 진보세력은 배제한 채 보수야당으로 출범했다. 조병옥이 이끄는 구파와 장면을 지도자로 하는 신파가 양대 파벌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은 일관되게 이기붕 체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승만 후계체제에 대비했다. 1956년 5월의 정·부통령선거는 휴전 후 한국정치사의 기로였다. 1956년의 선거는 이승만 이후 체제를 가름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나이가 많고 건강악화가 두드러진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기붕 후계체제를 확립하는 선거였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선거 결과 뜻밖에도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의 법적 계승자 지위에 야당지도자가 선출됨으로써 집권 자유당은 승계위기에 봉착했다.
자유당 내부의 강경파는 야당 부통령 탄생에 반발했다. 장면 부통령 암살시도도 있었다. 장면의 민주당 신파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강화해갔다. 이후 미국은 자유당, 민주당 양당의 강경파를 억누르는 한편 온건파를 중심으로 양당제를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미국은 보수양당제를 통해 한국 내부의 정치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은 1956년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선전(善戰)한 데 대해 우려했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돌연한 죽음으로 이승만과 대통령직을 겨루게 된 진보당의 조봉암은 도시지역에서 이승만을 능가하는 득표력을 보였다. 미국은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두라는 불길한 정치변동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정권이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발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는 정책쇄신과 민주적인 절차의 성장을 장려하는 것이 미국의 긴급과제로 대두한 것이다.
미국은 이기붕 체제하의 자유당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재정 안정계획, 장기 경제개발계획 수립 등 정책전환을 진행했다. 또한 여야의 공존관계를 촉구했다. 1957년 12월의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 법개정은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이 주도했다. 그래서 ‘협상선거법’이라고 불렸다. 공탁금제도 도입 등으로 무소속과 군소정당의 진출을 억제한 점이 특징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보수체제 안정 조치와 더불어 보수 정치질서의 최대 위협인 진보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조봉암 당수를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한 것이다. 1959년 1월 이기붕과 조병옥 사이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비밀교섭이 있었다. 국회에서의 수적 우위를 배경으로 정권 연장을 도모하는 자유당 온건파와, 당내에서 장면 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신파에게 밀리던 민주당 구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생긴 대연립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새어 나가자 자유당 강경파와 민주당 신파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협상은 무산되었다. 이후의 역사경로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야당과 언론의 압살을 노린 1958년 12월의 국가보안법 개정, 1959년 4월의 경향신문 폐간, 7월의 조봉암 사형집행 등 자유당 강경파가 주도하는 이승만 정권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1960년 3월1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광범위하고도 공공연한 부정이 저질러졌다. 그리하여 대통령후보 이승만과 부통령후보 이기붕이 상식을 초월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폭발했다. 마산을 비롯한 도시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군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 몰락 : 4·19혁명과 미국
4월12일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항구 앞바다에 떠올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대해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다.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했다. 다시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의 허락을 얻어 투입되었다. 이승만은 모든 반정부 행동은 엄단할 것이라고 반응했다. 그는 시위가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여겼다.
유엔군사령부가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경무대에서 요청한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승인하는 사이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과 여러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월19일 10여만 학생과 시민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군이 질서회복을 위해 투입되었지만 학생과 시위군중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4월19일 밤 주한 미대사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가 이승만을 방문했을 때, 김정렬 국방장관과 홍진기 내무장관이 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문제를 장면 부통령을 포함한 민주당원과 익명의 정부 전복분자 탓으로 돌렸다. 그는 전국적인 시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며칠이 지나서다. 4월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했다. 4월25일 200여 명의 대학교수가 이승만 정권 퇴진과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저녁 때 수만명의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가 이기붕의 집으로 가서 그의 집을 부쉈다.
마침내 4월26일 수만명의 시위대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이승만은 학생대표 두 명을 포함한 시민대표 다섯 명을 접견했다. 약 한 시간 후 매카나기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로 갔을 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4개 조항을 발표했다. 첫째, 사임할 수도 있음. 둘째, 재선거 실시. 셋째, 이기붕이 모든 공직으로부터 사임함. 넷째, 내각제 개헌 착수.
북진통일론에 대한 재평가 필요
한국의 휴전체제는 세계 냉전체제의 하위질서였다. 남한과 북한이 마주한 휴전선은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분할선, 동아시아적인 차원에서는 공산 진영 중국과 자유 진영 일본의 대치선이었다. 미국이 유지하고 지휘하는 한국군 또한 한국 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진영 방어부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처한 이러한 구조적 위치를 십분 활용하면서 정치를 해나갔다. 비록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낮을지라도 북진통일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부터 갖고 있던, 결코 버릴 수 없는 국가목표였다.
그가 휴전협정 과정에서 독자 행동을 불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휴전체제를 곧 무너뜨릴 것 같은 언행을 보인 것은 미국에 대한 협상용 또는 시위용만이 아니었다. 또 후대에서 비판하듯이 단순한 정권안보용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6·25전쟁이 휴전으로 봉합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50년대 내내 북진통일은 무시 못할 정치적 동원력과 이데올로기적 통합력을 가졌을 수 있다. 민족분단과 항상적인 전시동원체제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조속한 북진통일이야말로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묘책으로 보였을 수 있다.
휴전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은 재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통일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남침으로 붕괴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지도자를 교체한 것도 아니다. 바로 한국 국민의 봉기로 무너졌다.
이승만이 마지막까지 국가 프로젝트로 추구한 북진통일론은 그의 퇴장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에서 사라졌다. 평화통일이 대세를 넘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시대착오로 보인다.
그렇지만 냉전시대에 열전을 치렀고, 탈냉전시대에도 통일은커녕 여전히 군사적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간의 지혜에 기대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국내외 상황에 비추어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재평가할 여지는 충분하다.
비록 그가 추진한 북진통일이 명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반공체제를 단단하게 다지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가치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의 인과관계에 주목하면서 북진통일이라는 현실주의적 국가 프로젝트가 대한민국의 진로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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