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암살의 배경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궁정동(宮井洞)의 밀실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암살하였다. 우발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한국 현대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궁정동의 총성이 울리기까지의 전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박 정권 18년간은 미국과 갈등관계인 때가 더 많았다.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던 존슨 대통령 시절이 가장 사이가 좋았다. 박정희 씨는 미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나라로 한국과의 안보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이후 한미 관계는 계속 충돌하였다. 김한조 박사와 사이비 로비스트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한국의 인권 문제 등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였으나, 실제는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 문제였다. 유신체제 자체가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국제정세변화에 대한 대응과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1969년 7월에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인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선언이 핵심 내용인 괌(Guam) 독트린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 씨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 뒤인 1970년 7월,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미 국무장관은 사이공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 철수’를 통고했다. 8월에는 스피로 애그뉴(Spiro Theodore Agnew) 부통령이 방한하여 박 대통령에게 직접 통보했고,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이에 한국정부는「先안보보장 後철군」을 미국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양국은「1개 사단 철수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은 한국군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71~75년)에 매년 약 3억 달러의 무상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합의하였다.
예정대로 1971년 3월 주한 미 제 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했을 때,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결심을 굳힌 것은 이때였다.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가 설립되어 71년 겨울부터 무기 국산화에 착수하였다. 1971년 11월 11일 ADD로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장비를 4개월 내에 국산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ADD 연구원들은 역설계 공법(reverse engineering)으로 국산화를 했다.
박대통령은 오원철 경제2 수석 비서관, 국방부장관, 상공부장관, 과학기술처장관, ADD소장 등으로 구성된 무기개발위원회(WEC)를 비밀리에 운영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미국 정보망에 잡혔다.
1971년을 기점으로 박 정권은 ‘한국군 장비현대화 5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끝난 1975년부터는 ‘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추진했다.
이보다 앞서 한국군 현대화 계획은 월남 파병이 본격화된 1966년에 미국의 약속에 의해 추진됐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따라 미국은 파병의 선행조건으로 한국의 방위력 강화를 위한 지원을 다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 약속은 매우 소극적인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요구에 마지못해 약속하는 형편이었고 이행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핵무기 개발을 결정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1월 청와대에 경제 2수석실을 신설했다. 이 부서는 방위 산업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으나 핵무기 개발에서 총괄 조정역도 맡았다. 박 대통령은 1972년 7월 20일 국방 대학원 졸업식에서 핵무기 개발을 암시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 국방입니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이 있었다. 70년 4월에 기공하여 3년 3개월 만에 완공된 것이다. 선진국 전문가들이 불가능이라고 한 마당에 연산 1백3만 톤 생산능력의 제철 공장 건설은 당시 한국 형편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해 미국의 감시를 피하면서 재미 한국인 과학자의 초빙을 추진하였다. 1973년 3월 주재양(朱載陽) 박사가 원자력 연구소 제1부소장에 취임 핵무기 개발 전담부서를 맡았다. 주 박사는 최형섭 과학 기술처 장관(71년 6월~78년 12월 역임. 취임 즉시 원자력 개발 15년 계획을 수립함)이 직접 스카우트했다. 주재양 박사는 서울대 화학공학과 재학 중 미국유학을 떠나 텍사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MIT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핵연료 분야의 권위자였다. 주 박사는 73년 5월 23일에서 7월 12일까지 핵과학자 유치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했다. 주 박사는 미 육군 연구소에서 일하던 김철 박사 등 10여 명의 과학자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모두 100명 가량의 핵무기 제조 관련분야 과학자를 유치했다.
한편 북한은 1974년에 핵공학자 경원하 박사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의 핵무기 산실인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에서 직접 핵폭탄 제조에 참여했었다. 캐나다에서 대학 교수로 있다가 많은 기밀 자료를 갖고 북한에 들어가 핵무기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1973년 겨울 핵무기 개발 계획서가 박정희씨에게 보고되었다. 개발 비용은 15~20억 달러, 개발완료 예상기간은 6~10년으로 잡았다. 개발 예정의 핵폭탄은 20㏏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플루토늄으로 제조할 생각이었다. 투하방식은 폭격기에서의 공중투하식이었다(1978년 미사일 개발로 미사일 탑재식으로 수정됨).
핵무기 제조의 핵심은 순도가 100%에 가까운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것은 원자로를 가동한 후에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reprocessing)해서 얻는다. 박 정권은 핵연료의 재처리 시설과 관련 기술의 도입은 프랑스를 상대로 교섭했고,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려 했다. 별도로 벨기에와도 교섭했다.
1972년 5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 프랑스와 오르톨리 산업기술부 장관으로부터 재처리 기술 등을 제공받기로 확답을 받았다. 프랑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 Non-Proliferation Treaty)을 지키기보다는 재처리 기술과 시설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는 한국과의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1972년 10월부터 한국의 원자력 연구소와 프랑스 원자력 위원회(CEA : Commissariat a l'energie atomique)간에 실무접촉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재처리 시설의 협력선으로는 CEA 산하 용역 회사인 상고방(SGN) 社가, 핵연료 가공시설 협력선으로는 CERCA 社가 선정되었다. 1973년 10월에는 서울~파리간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1973년 4월 존 그레이 캐나다 원자력 공사(AECL) 사장이 방한, 월성(月城) 1호기 원자력 발전소를 캐나다형 중수로(CANDU : Canadian Deuterium Uranium)로 할 경우 3만kw 용량의 연구용 원자로(NRX)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미국이 발전시킨 경수로(輕水爐)와 달리 캐나다의 중수로(重水爐)는 농축이나 재변환 절차 없이 천연 우라늄을 연료로 쓸 수 있었다. 고도의 제조 기술이 필요한 중수(重水)는 캐나다에서 수입하면 되고 더구나 캐나다에는 천연 우라늄이 풍부해 한국측에 유리했다. 한국 최초의 중수로 원자력 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 계획이 1973년 11월 24일 확정되었다.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는 핵연료를 오래 태우기 때문에 타고 남은 핵연료 속에 플루토늄이 너무 적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연구용 원자로는 태우는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순도 높은 타고 남은 핵연료를 얻을 수 있다. 이 무렵 인도(印度)는 캐나다에서 수입한 NRX 원자로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이용해 원자폭탄 개발이 한창이었다.
1974년 5월 18일, 인도가 핵실험을 성공시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참고로 말하면 1945년 미국 원자폭탄 개발, 1949년 소련 원폭 실험 성공, 1952년 영국 원폭 개발, 같은 해 미국 수소폭탄 개발, 1953년 소련 수소폭탄 개발, 1960년 프랑스 원폭 개발, 1964년 중국 원폭 개발, 1965년 이스라엘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였다).
핵무기 개발의 대가는 컸다.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많이 기울인 데다 세계적으로 경제 제재조치를 받아 경제난에 빠졌다. 결국 인도 국민회의 당은 1977년 선거에서 대패하고 정권은 야당 연합에 넘어 갔다. 한 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하려면 파키스탄의 알리 부토 수상이 ‘풀뿌리를 먹고 사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라고 말한 것처럼 결연한 의지가 필수 조건이다.
인도의 핵실험에 충격 받은 미국은 정보채널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예의주시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핵무기 관련 자재에 대한 각국의 수입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많은 물자들이 남한으로 들어간 것을 곧 알아내었다. 1974년 11월 주한 미 대사관은 남한이 “핵개발 계획의 제1 단계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본국에 타전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하였다.
한국의 전략적 위치를 볼 때 남한 정부의 핵무기 개발 노력이 이웃 나라, 특히 북한과 일본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미국은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 우리가 직접 관여하고 있는 이 지역 전체의 안정을 저해하는 중대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지원해 준다는 약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은 남한 정부가 미국의 안보 공약을 전보다 덜 믿게 된 것과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를 줄이려는 박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는 복잡성을 띄고 있다.
미국의 대응책은 “대한민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핵 실험이나 핵무기 운반 체제 개발 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 이었다.
미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 수출국들과 함께 ‘런던 클럽’을 결성, 핵기술 후진국에 대한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론 재처리, 농축, 중수(重水) 제조 등 민감한 기술의 국가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핵 확산 금지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핵무기 개발을 본격 추진하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등과 이들 국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 서독 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1974년 12월 18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예비역 미 해군 소장의 기고문이 실렸다.
U.S. Sould Leave Korea - For Money, Security
(By Gene La Rocque)
In between his recent visits to Japan and Vladivostok President Ford squeezed in a short trip in South Korea to perpetuate American support for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that country. Specifically, Mr. Ford promised to keep 38,000 U.S. troops in South Korea indefinitely and to give more millions of dollars to support the Korean military.
As President Ford, faced with a worsening U.S. economy, seeks ways to ameliorate hardship at home without contributing to inflation, he would be wise to reverse signals about South Korea. That is one area of the world where our military budget could be cut-with positive advantages to U.S. national security. Savings and security could be combined-simply by withdrawing all American soldiers from South Korea.
Prompt withdrawal could save more than $1 billion in the Defense Department budget. Since the end of the Korean war, we have poured $11 billion into maintaining U.S. troops in South Korea. What we have bought for our money is the regime of Gen. Park Chung Hee whose despotism is embarrassing us diplomatically and hurting us strategically.
Militarily, we have done more than enough. The South Koreans simply don't need us any more. They have a powerful force of 625,000 men equipped with modern aircraft, tanks and surface-to-air missiles. South Korea, with a population twice that of North Korea and a gross national product three times greater, has the fifth largest military force in the world. Even Secretary of Defense James R. Schlesinger conceded recently that “South Korea has the manpower, firepower and defensive position to repulse a North Korean attack without U.S. ground support..”
In no way does our presence contribute to the defense of the United States. In fact, stationing troops in South Korea weakens our national security. Just by being there, they could cause our automatic involvement in another costly land war on the Asian mainland, whether triggered by President Park or the North Koreans. Our 38,000 troops, in short, would be hostages requiring help from other U.S. forces to prevent their capture.
The largest U.S. contingent now deployed there is the 2nd Infantry Division, which has been stationed near the North Korean border for more than 20 years. If fighting flared, this division would certainly be the first unit to become involved regardless of who attacked first - and regardless, too, of military problem that might be arising elsewhere in the world. (Danger of this kind would become particularly acute as our oil stores diminish.)
The presence of a great number of U.S. weapons in South Korea - many of which can be armed with nuclear warheads - also presents a problem of enormous gravity. These weapons are vulnerable to capture by enemy forces in time of war or by various groups, perhaps terrorists, in South Korea itself. Beyond that, their withdrawal would save us the expense of storing and protecting them on Korean soil.
Given the potential for political turmoil in South Korea, U.S. nuclear weapons could become political weapons in efforts to involve this country in war against the north. Thus the withdrawal of such weapons - they are now deployed in forward areas - would enhance, not weaken, U.S. security. (Indeed, we should reexamine our general policy of stationing nuclear weapons in many parts of the world.)
The military rationale for U.S. troops in Korea no longer makes sense - and I am not alone in holding this view. Let me onc e again quote Secretary Schlesinger, who told a congressional committee this year that “The justification for those forces is no longer primarily a military one - the political purpose is primary now.”
Yet, unless the United States recognizes the negative political consequence of its close identification with President Park's oppressive political regime, we may repeat in South Korea our experience in Greece where, in order to hold ont o military bases, we supported a military dictatorship, lost the good will of the people - and, in the bargain, probably weakened our long-term security interests in the area.
A stepping down of our military involvement in Korea, accompanied by diminished support for Park's dictatorship, would permit the political situation in South Korea to evolve in a more democratic and stable direction, benefitting both that country and our own.
One specific benefit to the United States - in addition to a saving of about $1 billion - is that we would regain our option of whether to go to war again in Korea if war were to break out there. Our withdrawal, in fact, might well ameliorate hostility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for onc e their forces have achieved relative parity, they might learn to live with one another.
Thus, if President Ford means what he says about budget reductions, one place to start is South Korea. It is, of course, in the best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o maintain a strong national defens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he proposed military budget should be swallowed whole. Far from contributing to our defense posture, the presence of U.S. troops and weaponry in South Korea is as counterproductive as it is wasteful.
Gene La Rocque, a retired U.S. Navy rear admiral, is director of the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 in Washington. He is a former assistant director of the Strategic Plans Division of the Chief of Naval Operations and also served as a strategic planner for the Joint Chiefs of Staff.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이 글은 박 정권에 대한 미국 영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또한 한국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1974년 11월 9일에서 12월 10일 까지 주재양 원자력 연구소 제 1부장, 윤석호(尹錫昊) 원자력 연구소 화공개발실장, 박원구(朴元玖) 원자력 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 3인이 프랑스를 방문․체류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 과학자들에게 재처리 공장, 핵연료 가공 공장, 원자력 연구소 등 관련 시설들을 모두 보여 주었다. 이들은 상고방 社와 CERCA 社와 가계약을 체결했다.
본계약은 1975년에 체결되었다. 1975년 1월 15일 원자력 연구소는 프랑스의 CERCA社와 ‘핵연료 성형가공 연구시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1975년 4월 12일 원자력 연구소는 프랑스의 상고방 社와 ‘재처리 연구시설 공급 및 기술용역 시설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상고방 社의 포앙세 사장이 한국을 방문해 윤용구(尹容九) 원자력연구소장과 원자력 병원 회의실에 숨어서 서명했다. 1975년에는 벨기에와도 ‘혼합 핵연료 가공 기술 도입 계약’이 맺어졌다.
주재양 박사가 대표로 나선 캐나다 측과의 협상은 원활히 진행되어, 1975년 중반에는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만 확보하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 생산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박 정권에 핵무기 개발 포기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 정부에 직접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을 썼다.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 미국대사는 피에르 랑디(Pierre Landy) 주한 프랑스 대사를 만나 “미국은 남한 정부가 플루토늄을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넌지시 경고했다. 그러나 랑디 대사는 남한이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프랑스가 먼저 핵 기술 판매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미국은 캐나다와 벨기에에도 한국과 맺은 계약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1974년 12월 미 의회는 미군철수에 따라 지원하기로 한 對韓 군사원조에 제동을 걸었다. 미 의회는 1975년 한국에 대한 미 행정부의 2억3천8백만 달러 군사원조 요구를 1억4천5백만 달러로 삭감했다. 그러면서 만약 포드 미 대통령이 한국의 인권수준 개선을 의회에 보증한다면 1억6천5백만 달러의 추가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포드 대통령은 보증을 하지 않았고 對韓 군사 원조는 삭감된 채로 집행되었다. 미 제 7사단 철수의 대가라는 성격을 띠고 무상원조로 진행된 이 한국군 장비 현대화 계획은 1971년을 기점으로 실시되었으나 결국 2년이나 지체되었고, 소요 비용도 처음 합의와 달리 총액의 3분의 1이상을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했다.
1975년 4월 30일 남부 베트남이 북부 베트남에 패망,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되었다.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정부가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에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므로 미국정부는 이에 대비하여 정책전환을 해야 한다고 본국에 의견을 내었다.
6월 박정희 씨는 워싱턴 포스트 지와의 회견에서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자지「Korea Times」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최형섭 과학 기술처 장관의 말을 보도했다.
같은 달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담은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우리의 현 한반도 정책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은 남한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을 토대로 삼고 있다(Our present policy toward Korea is ill-defined and based on an outdated view of Korea as a client state.).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장차 중견 국가로 성장할 남한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남한 정부는 미국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미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 여부에 대해 아직까지도 남한 정부에 분명하게 답을 준 적이 없다. 또한 자체적으로 첨단 무기를 개발하려는 박 대통령의 노력을 저지하면서도 정작 미국 정부가 남한에 제공할 수 있는 군사기술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박 대통령은 언젠가 다가올 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 남한 내에서 탄압 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북한은 언젠가 미군이 철수할 날을 고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미국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남한의 장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품고 있다.
핵무기 개발 포기를 위한 미국의 압박은 더욱 거세고 집요해졌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압력과 함께 상업․재정 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당시 남해 화학이 여천에 건설 중이던 비료 공장은 미국의 차관 중단으로 공사에 차질을 빚었다. 1975년 8월 23일 리처드 스나이더 미국 대사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해 최형섭 장관을 방문했다. 그는 국제정치 불안을 내세워 핵무기 개발 포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박 정권으로 하여금 핵무기 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하는 한편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의 포기를 선언토록 했다. 1975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은 일생일대의 굴욕을 맛보았다. 미국에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고 만 것이다. 75년 8월 25~28일간 열린 한미 연례안보 협의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이례적으로 한국을 찾은 제임스 슐레진저(James Rodney Schlesinger) 국방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협박해서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미국 정부는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낸 대가로 ‘북한전쟁 도발시 선제 핵사용’ ‘한국 수도권 방위 9일 속결전’ 등의 강력한 대한(對韓)방위 공약을 제공했다.
【슐레진저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과 CIA 국장을 역임한 핵문제 전문가이다. 하버드대 동창인 키신저 국무장관과의 불화로 75년 11월 포드 행정부에서 물러났다. 1976년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자 다시 에너지 장관으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박 정권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1976년 1월 미국 정부는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국무성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런처 해양․국제 환경․과학 담당 차관보 서리를 단장으로 한 미국 교섭단 일행은 76년 1월 22~23일 주한 미 대사관에서 최형섭 장관을 대표로 한 한국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실제로는 협상이 아니라 한국측을 심문하는 자리였다. 미국 교섭단은 재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지 않으면 고리 1호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핵우산도 철거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들 일행은 회담에 앞서 박정희씨를 만나 ‘재처리 시설 도입 강행시 군사 원조 중단’ 방침을 통고한 상태였다.
결국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과의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던 프랑스 정부도 미국의 압력을 버틸 수 없었다. 1976년 1월 23일 한국과 프랑스와의 계약은 공식파기 되었다. 캐나다에서 수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 도입 계획도 좌절되었다(다만 월성 1호기는 76년 착공되어 83년에 완공되었다). 벨기에와 함께 추진 중이던 혼합핵 연료 사업도 1977년 11월 11일 공식 중단됐다. 1976년부터 미국은 핵무기 개발 감시를 위해 미 대사관에 과학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점인 1975년 12월 6일 일본은 순 일본산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일관된 정책과 외교력, 미국의 유화 정책이 빚은 결과였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에는 일본이 놓여 있으며, 한국은 그 뒷마당에 불과하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미국의 대한 통제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며,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장를 하게 된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박정희 씨는 결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1976년 1월 말 핵연료 재처리 사업은 ‘화학 처리 대체사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코리아게이트로 한미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던 1976년 가을 박 정권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위한 의욕적인 작업을 착수했다. 76년 10월 한국 원자력 기술 공사가 설립되었고 12월에는 한국 핵연료 개발공단이 창설되었다. 핵연료 개발공단의 초대 소장에는 주재양 박사가 임명되었다. 원자력 개발을 위한 표면상의 최대 이유는 원자력 발전과 핵연료 국산화 및 방사선 동위원소 이용기술 개발이었다.
1975년부터 착수된 국군 전력증강 계획이 바로 이해부터 시작된 원자력 개발정책과 병행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밝혀진 원자력 개발 정책의 주요 목표는 원자력 발전 기술 개발, 핵연료 국산화, 방사선 동위원소 이용 기술 개발, 안전성 확보, 원자력 인력개발 등 다섯 가지였다. 그러나 당시의 밝혀지지 않은 최대의 목표는 핵무기 개발이었다.
정부는 1977년 무렵부터 대전 대덕지역에 대규모로 연구 단지를 조성, 원자력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광활한 이 연구 단지야말로 박정희 씨가 야심을 갖고 착수한 핵무기 개발센터였던 것이다. 여기서 실험용 원자로를 이용한 플루토늄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미사일) 개발이 추진되었다.
핵연료 재처리 사업은 우라늄 정련(精鍊) 시설, 전환 시설, 핵연료 가공시설, 조사(照射)후 시험 시설,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 등을 프랑스에서 들여와 재처리 시설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미국에게는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캐내 핵연료로 가공하는 것이 대체 사업이라고 둘러댔지만 미국 정부는 믿지 않았다. 각종 시설들을 제공하는 프랑스에도 핵무기 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다.
연구용 원자로(NRX) 개발 사업은 김동훈(金東勳) 박사가 이끄는 원자력 연구소 장치개발부가 맡았다. 30명 정도의 연구원이 참가했다. 설계․기술 자료 등은 캐나다와 연구용 원자료 도입 교섭을 할 때 상당수 확보했었고 대만에서도 많은 자료를 얻어 왔다. 이 사업 역시 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업 명칭을 처음에는 ‘열중성자 시험 시설 사업’으로 위장했다가 나중에는 ‘기기장치 개발 사업’으로 바꾸었다.
1978년 10월에 핵연료 가공 시설이 완공됐다. 1979년 5월에는 우라늄 정련․전환 공장 건설이 시작됐다.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낸 이후로도 미국은 경계의 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 파견된 과학관이며 CIA 요원인 로버트 스텔러는 불시에 핵연료 개발 공단을 찾아와 감시를 했다. 카터 행정부에 들어와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이래 미국은 한국이 자주국방을 위한 대안으로서, 한때 중단한 핵무기 개발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CIA 같은 정보기관이나 의회보고서, 민간 연구 기관에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과 그 전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박 정권이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에 관한 최초의 공식 기록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가 1978년 10월 31일 발간한『한․미 관계 조사보고서(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였다. 프레이저(Donald M. Fraser) 의원이 위원장이었던 관계로『프레이저 보고서』라고도 알려진 이 보고서는 1976년에 일어난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한미관계를 조사․연구한 최종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주 국방계획과 핵무기 개발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정부는 상황이 요구하는 데 따라, 미국정부와 결속하거나 독자적으로 방위산업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철군 선언이 있던 시기인 1970년 말에 방위 기구 2개를 설립하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와 무기개발위원회(WEC : Weapons Exploitation Committee)가 그것이다. ADD는 공개적으로 군사연구와 무기개발, 무기체제, 장비, 한국 군사물자의 개발을 실행하였고 방위산업 영역의 기술개발을 지원했다. 1973년과 1975년 사이에 ADD는 그 인력과 예산을 배 이상 증가시켰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생산이라는 면을 고려하여 전형적인 군수품의 고안과 실험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른 한편, WEC는 군수조달과 생산에 대해 청와대의 책임을 지는 비밀특별위원회였다. 경제문제 제 2 수석 비서관인 오원철과 다른 고위 청와대 관리들이 참가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WEC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히 WEC의 멤버들은 노르웨이․프랑스․스위스의 무기 공장을 견학하였고, 1972년에는 생산시설을 조사하고 무기생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갔다. 이스라엘에서 WEC 멤버들은 아이젠버그(Shoul Eisenburg)의 초청손님이었다고 한다. 1972년 가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WEC에 대해, 아이젠버그가 한국에 판매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이스라엘제 가브리엘 지대지미사일의 구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은, 그 미사일 체제가 미국의 군사원조 프로그램의 상당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미군부의 반대와, 가브리엘 미사일은 2급의 체제로서 그것의 조달은 미국측의 강력한 부정적 반응을 초래할 것이라는 한국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미국은 이전에 代案차원의 미사일 체제를 공급하라는 한국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있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미 군부는 미국의 부정적인 대응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가브리엘의 조달을 진전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명백히 그 견해를 수정했고 미사일 체제에 대한 미국의 기술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78년 9월 27일 한국 정부는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의 개량형인 최초의 한국산 지대지미사일의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의 방위계획과 생산에 있어서 한국의 핵정책만큼 대미 독자성의 증대 정도를 잘 나타내준 것은 없다. 미 행정부는 이 문제를 예민한 것으로 간주하여 계속되는 정보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무성은 응하지 않았다. 이 무제에 대한 본 소위원회의 관심은 한국정부가 핵무기 제조능력의 발전을 위해 취한 조치에 앞서서 미국과 논의하거나 통고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한국이 핵무기개발계획을 위해 몇 가지 조치들을 취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상세한 내막은 WEC의 멤버였던 전 한국정부 고위관리와 가진 본 소위원회 조사위원 인터뷰에서 밝혀졌다(1978년 2월 28일). 그는 본 소위원회에서 WEC가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했다. 결과, 한국정부는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벨기에로부터 합성산화연료 처리시설의 구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1974년 4월 캐나다 NRX 실험원자로의 도움으로 생산된 분열물질을 이용한 인도의 핵장치 폭발은 핵기술공급국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벨기에와 캐나다는 기술제공을 철회하였다. 한국과 프랑스의 협상은 재처리공장건에 대래 얼마간 지속되었다. 결국 1975년 경, 한국의 모든 핵무기계획은 취소되었고, 연료재처리 시설의 구매협상은 종료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핵정책이 명백해짐에 따라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계획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표면적으로 한국정부와의 에너지관계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개선시켜 온 과정에서 미국의 상업적 원자로를 판매하기로 약속했다.
위의 사건은, 전지역적인 안보이해와 다른 강대국들과의 군축협상을 포함하고 있는 미국의 강력한 관심영역에서조차도 한국정부는 명백히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1974년의 외교적 노력이 한국의 핵무기 생산에 대한 독자적인 조치를 봉쇄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재래식 무기에 있어서의 유사한 조치들이 제한되지 않고 있었다. 1976년, 한국정부가 그들의 재래식 무기조달과 생산능력 확장을 위한 다른 공급원을 모색하려는 일방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났다…
1978년 11월 4일자 로스 엔젤레스 타임즈지는 핵무기 개발로 인한 그간의 한미 간의 갈등을 보도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974년 5월 18일 인도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탐지하기 위해 미국은 핵기술 전문가를 포함한 특별 정보반을 설치하여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및 지원 목록을 작성, 플루토늄, 붕소, 베릴륨 및 특수 폭발 장치 등에 대한 각국 정부의 대미 구매 신청 상황을 추적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알게 된 것이며 미국 내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 및 한국의 평화적인 핵에너지 계획에 대해서도 정보를 수집한 결과 ‘한국이 핵무기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고 이를 포기토록 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의 핵연료 재처리 시설 도입과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의 원자로 구매 교섭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캐나다 정부를 설득, 한국과의 핵장비 교섭을 중지시켰다. 포드 대통령이 이끄는 미 행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결국 한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했고 그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원자력 발전 설비의 공급을 약속했다.
미사일 개발도 핵무기 개발과 비슷한 시기에 추진됐다. 미사일은 날아다니는 종합과학이다. 유도 조정, 구조 해석, 풍동(風洞) 시험, 추진제 등 각 분야의 고급 기술이 농축된 무기 체계의 정화이다. 1971년 12월 26일 박정희 씨는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미사일 개발 작업은 ‘항공 공업 사업’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불렸다. 12명의 개발 계획단이 구성되어 1972년 5월 16일서부터 7월 4일까지 미국의 미사일 연구소를 견학했다. 72년 9월 30일에 항공 공업 추진 계획서가 완성됐다. 이 계획에 따르면 74년 말까지 중거리 무유도 로켓, 76년 말까지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 79년 말까지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1973년 2월 23일에 연구장비 심의 위원회가 설치되어 필요 장비 구입계획이 작성되었다.
1974년 5월 미사일 개발은 율곡 사업의 하나로 확정되었다. 박정희 씨는 최단 시일 안에 목표를 달성하라고 재촉했다.
ADD는 이때부터 기술도입 계획을 추진하고 해외 과학자 유치에 나섰다. 재미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채용되어 곧바로 연구팀에 합류했고, 국내 연구원들은 입소식을 마치고 기술 습득을 위해 해외로 출장갔다.
미사일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한국 전자산업이 진공관․트랜지스터 수준에서 반도체로 겨우 넘어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미사일 선진국의 제조 기술과 생산 장비를 들여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연구진은 미국․영국․프랑스를 오가며 추진제와 미사일 본체 제조 기술을 얻어냈다. 미사일 제조 기술을 얻기 위해 한국은 나이스 허큘리스 미사일의 주 설계 회사인 맥도널 더글러스(MD) 社와 교섭을 벌였다. MD 社에 나이스 허큘리스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에서 240km로 늘리는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공동 사업은 기초 조사, 설계, 개발 생산 3단계로 나누기로 하고 1단계만 계약했다. 李景瑞, 洪在鶴, 崔浩顯, 具尙會 박사 등 10명의 연구진은 1975년 초 로스앤젤레스의 MD 社에서 6개월 동안 기초 설계 방법 등을 익혔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미 국무성은 ‘기술인도 不可’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6개월 동안 ADD연구원들은 미사일 설계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2, 3단계 계약이 취소되자 독자 개발로 들어갔다. 다음 문제는 추진제 제조 시설과 기술 확보였다. 추진제는 미사일의 동력으로 자동차의 엔진과 같은 것이다. 추진제는 高價이나 즉시 발사가 가능한 고체식 추진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나이스 허큘리스 추진제를 생산하는 다이아콜 社와 교섭을 벌였으나 미 국무성의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목영일 박사가 추진제 제조 시설 및 기술이전을 프랑스 SNPE 社와 교섭했다. SNPE 社는 당시 세계 3위의 화약회사로 대륙간 탄도탄 추진제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 무렵 미국의 록히드社 계열의 추진기관 제조회사(LPC)가 파산해 추진제 공장을 매각하려 했다. 추진제는 일종의 폭약인데 다량의 가스체를 고속으로 일정 시간에 걸쳐 분출해야만 한다. 그래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어떤 화학물질을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가가 추진제 제조기술의 노하우이다. 화학물질의 배합에는 믹서라는 장치가 필수인데 한국형 미사일을 만들려면 용량이 300갤론인 믹서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300갤론 믹서를 생산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했다. LPC에서는 용량이 300갤론인 믹서를 2개 보유하고 있었고 용량이 작은 믹서도 여분으로 있었다. 기술은 얻을 수 없었으나 공장은 사서 통채로 한국으로 옮겼다. 프랑스의 SNPE 社에서는 추진제 제조 기술과 원료를 도입했다. 영국의 한 회사로부터는 유도 조정 장치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록히드 社로부터 매입한 추진제 공장을 대전으로 뜯어 와 1976년 12월 2일 대전 기계창을 준공하였다. 기계창은 미사일 개발을 위한 위장 명칭이었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1977년 1월 20일 취임하면서 한국에 배치했던 전술핵탄두와 미사일 부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전쟁 억지력의 보존」이란 측면에서 전술핵의 잔류를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사일 부대는 한국정부에 통고도 없이 1977년 4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1977년에 미사일 보유를 서두르기 위해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로부터 핵탄두 운반이 가능한 소련제 미사일을 公海상에서 인도받는 형식으로 들어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것은 신형식(申炯稙) 건설부 장관의 건의로 기획된 것으로 中東의 한 건설회사를 중개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거액의 선금까지 지불한 이 거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미국 정치와 언론은 유태인이 지배한다. 이스라엘 최대의 적인 PLO와의 무기 거래가 미국에 알려지면 한미관계에 어떤 파장이 일지는 예측을 불허하는 일이었다. 정보부장의 반대는 이를 우려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박정희씨와 김재규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처음에 미국정부는 미사일 개발 자체를 반대하였으나, 미사일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자 한국 정부와 타협, 기술이전을 해주는 대가로 사정거리를 180km를 넘지 않도록 요구했다. ADD는 시간이 촉박하므로 사정거리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고 판단, ‘180km 제한 합의서’를 썼는데 이것이 나중에 외교 문서가 되었다. 미국은 미 합동군사고문단(JUSMAC-K) 요원 6명을 대전 기계창에 보내 미사일 개발 상황을 감시했다.
1978년 4월 NHK-1 미사일 제 1호가 시험 제작 됐으며 9월 초 제 8호가 나왔다.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산군 서해안 안흥 종합 기지에서 박 정희를 비롯한 3부요인과 군수뇌부, 존 베시(John William Vessey Jr.)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보는 가운데 제 9호 미사일 발사는 성공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7번째의 미사일 개발국이 되었다.
일본의 매스컴들은 일제히 9월 27일자 조간에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아시아의 세력균형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요미우리 신문은『북한보다 10년 늦게 70년대 초부터 방위산업 개발에 착수한 한국은 이번의 미사일 발사 실험성공으로 북한을 앞지른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북한이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핵무기 운반체를 보유했다는 것은 안보상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논평했다.
소련 국방성 기관지「적성(赤星)」1978년 9월 29일자에서「한국의 미사일 생산은 핵무기 생산의 예고」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고,『한국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발사 성공은 곧 핵무기의 자체생산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국은 오래 전부터 탱크, 군함, 대구경포 등을 자체생산하고 있었으며 총 예산의 35.9%를 국방비에 사용해 급격한 국방력 강화작업을 서두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은『우리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보고를 받을 때까지 한국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논평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사일 개발로 원자 폭탄의 운반 방식도 공중투하 계획에서 미사일 탑재식으로 수정됐다. 유도 조정 장치를 관성항법 장치(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이 기술은 1979년 봄 영국의 Ferranti 社에서 도입했다)로 개량한 NHK-2(현무) 사업에 들어갔다. 인공위성 사업도 시작했다. 대전 기계창 상공은 비행금지 구역이었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 시험 성공 후 미군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와 저공비행을 하며 항공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관련된 일련의 보고서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것은 1979년 4월 브루킹즈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에서 나온 보고서〈제 3세계에서의 핵무장-미국의 정책적 딜레마〉였다.【브루킹즈 연구소는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 미국기업연구소(AEI ;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와 더불어 미국의 대표적인 정책 연구기관으로 1916년 설립되었다. 보수적인 AEI와 헤리티지 재단에 비해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보고서는 브루킹즈 연구소의 외교 정책 담당 연구원이며 조지타운 대학 교수였던 어니스트 레피버가 집필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 가운데 한국 관계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핵무장 동기는 북한의 군사 위험이 증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직면해야 하는 불안성의 증대와 불확실성의 증가, 그리고 미국이 안보 지원을 감소시키거나 아예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공포 때문이다.
만약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심하게 떨어진다면 그것은 한국에 뚜렷한 불안감을 조성할 것이며 핵무장 지지자들은 그것을 이용할 수가 있다.
한국은 1985년에 가서 소규모의 방위용 핵군사력을, 2000년엔 보다 주목되는 핵군사력을 보유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국의 핵군사력 유지는 한반도의 세력 균형에 새로운 힘의 요소를 가미, 재래식 혹은 핵전쟁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주한 미군 철수정책을 위협할 것이며 미국의 강력한 대한 방위공약을 유도할 것이다. 카터의 철군정책은 한국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핵 방위 능력을 강화토록 촉발했다.
한국은 북한이 중공이나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공격해 온다면 이를 단독으로 저지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련, 중공이 북한을 돕고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라면 한반도 적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이 대한(對韓) 안보 공약을 약화시키고 80년대에 가서 모든 지상군을 철수시킨다면 한국은 소규모로나마 독자적인 핵군사력을 창설할 수밖에 없으며 북한이 이런 사태 발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국의 핵군사력은 방어력으로 남을 수도, 혹은 공격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욕구는 사이공 함락, 소련과 쿠바에 의한 앙골라 赤化 및 카터의 철군 정책에서 강화되었다. 한국인과 정부는 미국이 방위 공약을 철회함으로써 고립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품어 왔다. 만약 한국이 재정적인 부담과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기를 생산해 낸다면 그들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F-4기나 어네스트 존 미사일 등에 이를 장착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억제력이 될 것이다.
한국은 지난 1975년 고체연료에 의한 로켓 추진 장비를 록히드 회사로부터 구매했으며 한국 기술자들은 미니트맨이나 폴라리스 미사일에 응용되고 있는 고체연료 추진 과정을 익히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미국편에 놓여 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강력한 군사지원 공약을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한국의 핵개발 여부가 달려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를 위해 핵무기 건조를 계획하고 연구하려는 것은 미국의 대한방위결의를 확고히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씨 암살 사건이 있기까지의 수년간 한미 간에는 사실상 신뢰성이 완전히 상실되고 만 형편이었다. 미국은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박 정권의 핵개발 정책을 추적하고 있었다. 연례안보 협의회와 이를 계기로 한미국방 당국자의 방한은 그 목적의 하나가 핵무기를 포함한 한국 방위 산업의 현지 점검이었다. 70년대 말,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군사 정책의 입안자나 국방 책임자들이 일반 부대 시찰은 간단히 둘러보는 데 그쳤던 반면, 방위 군사 시설과 방위산업 시설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둘러 본 까닭도 이런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1978년 11월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방한하여 방위산업을 시찰했을 때, 워싱턴의 일부 소식통들은 브라운 장관의 방한 시찰이 반드시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평가적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군수 시설과 능력이 혹시 미국이 '통제하고 협조할' 단계를 넘어선 측면은 없는가를 확인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다고 전했다.
유신 선포 이후 한국은 언론통제가 극심했고 이에 따라 유언비어도 많아졌다. 대부분은 반정부 인사들이 만들어 유포시켰는데 그들의 희망 사항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였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도청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나고 포드가 계승했으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참패했다. 민주당은 인권을 중히 여기는 정당이니 민주당이 승리한 이상 한국의 유신 독재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미국의 민주화 압력에 견디지 못하여 미국의 간섭이 귀찮으니까 소련을 한국에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있는 소련 대사관을 통해서 진주, 마산, 제주도를 소련에 조차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그의 앞잡이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시켜 외무위원회에서 공공연하게 진해, 마산, 제주도를 소련에 빌려주자고 발언시키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는 조만간 미국에 의해서 제거된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또 군사쿠데타로 전복된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은 육사 11기 이후의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사단장 급으로 진급이 될 때 그들의 군사쿠데타로 끝장이 난다.”
1970년대 내내 박 정권에 반정부 세력이 치열하게 도전하였으나 국민의 지지가 적은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1976년에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가 발발하여 박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박 정권의 몰락이 미국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역량이 부족한 반정부 세력은 미국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또한 박 정권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반정부 세력이 집권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10월 유신에 관한 미국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1973년 2월 18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골자의 보고서를 공표한 적이 있다.
‘이른바 유신체제란 이 승만 시대 이래 한국이 채택한 최악의 독재체제이다. 박 대통령은 이제야말로 그가 바라던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박 대통령이 퇴진하는 길은 그 자신이 퇴진에 동의하거나 아니면 죽음, 또는 혁명밖에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인 76년 10월, 서울에서 3년간(1972~1975) CIA 한국 지부장으로 근무한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는 텍사스 대학에서의 한 강연에서, “한국의 정권이 현재와 같은 정치를 해 나간다면 임기 중반쯤에 가서 쿠데타로 타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때는 코리아 게이트가 미국 정치를 뒤흔들고 있었다(그레그는 1989년 한국대사로 부임하였다).
한미 관계의 위기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단순한 외교상의 불편함 이상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은 한국에 있어 국가운명에 영향을 주는 커다란 정치적 변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을 무력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를 무조건 항복시키고 3년간 이 땅을 직접 통치한 나라이니 자력갱생 능력이 모자라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은 그럴 수밖에 없다. 통치권자가 자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 비판적인 안목을 가져 고분고분하지 않을 경우 한미 관계는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 미국은 정권 교체를 생각하게 된다.
한국전쟁 시기, 정치 파동을 일으키고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한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 실각시키고 말 잘 듣는 장면을 집권시키려 했던 미국의「에버 레디(Ever Ready)」계획이 좋은 예다(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 때 미국은 장면을 숨겨서 보호했다. 그 후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미국 정부에 ‘만약 대통령 유고시에는, 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할 때까지 48시간 정도 나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가 나자 장면이 미국 대사관으로 도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금융시장 개방과 대 북한 정책 문제로 클린턴 행정부와 심한 마찰을 빚었던 김영삼 정권도 1997년 가을, 미국의 무차별 ‘달러 폭격’을 맞고 몰락했다. 이 융단 폭격에 수백억 달러의 외환 보유고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국과의 불화가 정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본보기였다.
박 정권은 출발 당시부터 미국과는 숙명적인 불화감을 지니고 있었다. 박정희 씨 자신이 미국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5․16 이전에도 한국군 장군 치고는 유일하게 미국인과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유일하게 골프 못치는 장군이었으며, 미국식 애칭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장군이었을 때, 박씨는 군수사기관원과 미군을 가장 혐오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다.
5․16이후 2년이 넘는 군정 기간에도 통화개혁이나 계엄령 선포, 군정연장 선언 같은 중요 정책을 미국과 사전 협의없이 선언하고 추진하여 미국은 여러 차례 당황했다.
1963년 발간된『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박정희씨는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첫째,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하나의 민족 사회가 현대 자본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제 요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회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자주국가인 이상, 무조건 동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전반이 균형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민주주의 이상과 경제원조의 정신적인 의욕은 높이 사는 바이나 그렇다고 이를 통하여 한국사회로 하여금 일률적인 미국화를 기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상과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를 밑거름으로 하여 한국 고유의 주체성, 확고한 자아의식이 확립되고, 그 위에 자율적인 사회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미국의 참된 희망은 성취되는 것이요, 또한 외적과도 대결할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군사 경제면에 걸친 미국의 원조는 이왕에 줄 바에야 우리의 뜻에 맞도록 하여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콤한 사탕보다는 한 장의 벽돌을 우리는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박 정권을 상대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면에서 추진되었으나 단 한번 공개적인 의사표명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 씨가 살해되기 1개월 전에 있었던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의 연설에서였다.
1979년 9월 12일, 한국무역협회(Korean Traders Association)와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가 공동으로 주최한 ‘80년대 한국 국제 심포지엄’에서「1980년대에 한미간에 효율적 관계를 유지하려면(The United States and Korea - Developing An Effective Relationship for the 1980s)」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자료집 참조).
『최소한 한국의 전력이 북한의 전력과 맞설 수 있거나 또는 정치적인 조정이 이뤄지는 충분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美전투병력의 한국주둔이 전쟁억제를 위해 한국에 필요할 것이다.
양국간의 신뢰회복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뢰가 없다면 한국은 과도한 정도의 자립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80년대의 효과적인 한미 안보관계란 한국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최대의 자립 방위 부담을 지게 하면서도 한국이 제 7 함대의 압도적인 능력이나 미국의 핵우산과 같은 요소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정도는 아닌 관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I believe that in the 1980s an effective U.S.- ROK security relationship will be one that has the Republic of Korea carry the maximum possible degree of the self defense burden but not to the point of thinking the ROK can replace factors such as the overwhelming capabilities of the Seventh Fleet or the American nuclear umbrella.)』
글라이스틴 대사가 말한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요소란 다름 아닌 핵무기 보유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연설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북한을 정식 명칭인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여러 차례 호칭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한국에 대한 미국이나 다른 외국의 태도도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제적 지위 向上에 상응한 政治制度를 한국이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의 與否에 따라 아마 상당히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유신 체제에 대한 수정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이때는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줄다리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국은 이면으로 핵무기 개발에 경고를 연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개발 현장을 체크하고 다녔었다. 주한 미 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평균 1주일에 한번 정도 연구소를 찾아가 연구 실태를 감시했다.
79년에 들어와 박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연구소를 들러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박정희 씨의 측근 중 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집념과 과학자들의 연구 열의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살해 사건이 있기 몇 달 전부터 박 대통령은 굉장히 흥분된 상태에서 지냈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핵무기 개발이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은 몇몇 측근에게 “81년 국군의 날에 핵무기 개발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그 이후에는 영남 대학이나 나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미국의 세계지배에 위협을 주는 여러 가지 대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 79년 2월의 이란 혁명, 7월의 니카라구아 혁명, 4월 이스라엘의 비밀 수소폭탄 실험, 9월 22일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은 남(南)아프리카 공화국의 원폭 실험 등.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한국, 대만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가까운 미래에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경계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신경과민이 되었다.
여기에 국내정치 상황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의 뉴욕 타임즈 회견문제로 한국 정국이 들끓고 있던 9월 18일 미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담당 잭 케넌 대변인은 박 정권에 대해 김 총재를 구속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한편 김 총재에 대해서도 충동적 발언으로 정부를 자극하지 말 것을 권했다.
한국 국회에서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제명 결정이 있은 직후 미 국무성은 즉각 성명을 발표, “이러한 행위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평하면서,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제명 조치 이후 박 정권은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두 차례 항의 성명을 전달받았다. 워싱턴에서는 리처드 홀브루크(Richard Holbrooke) 국무성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가 김용식(金溶植) 주미 한국대사를 불러 항의하였다.
박 정권은 미국 정부의 항의를 ‘내정간섭적 발언’ 또는 ‘대국주의적 사고’라고 말하며 반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을 ‘친미사대주의자’로 생각해 왔었다.
10․26 사건이 있기 몇 주일 전부터 미국 정부는 공개적인 불만 표시와 함께 한국 정부를 상대로 비공개적인 경고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10월에 들어와서는 거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태도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태의 시정을 요구하는 압력을 여러 루트로 전달했다.
특히 김영삼 총재 제명 직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비공개로 한국 정부에 YH 사건과 김 총재 제명을 강력 비난하면서 1개월 이내에 수습 또는 시정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덧붙여 대통령 긴급조치 9호의 해제도 촉구했다. 미국이 시한을 정하면서 사태의 시정을 요구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10월 9일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 주일 미국 대사는 동경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의 이익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이 지역의 외곽 방어선(outer defenses)은 일본과 필리핀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방위선 안에 한국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시사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애치슨 성명’을 연상시키는 맨스필드 주일대사의 발언이 한국에서 파문을 일으키자 미 국무성은 “미국의 對韓 방위 정책은 확고한 것이며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해명했다.
김영삼 총재 국회 제명에 대한 미국의 항의표시로 10월 6일 소환됐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서울에 돌아온 것은 살해사건이 나기 10일 전인 10월 16일이었다. 매년 열리는 한미안보협의회에 참석하러 방한하는 브라운 미 국방장관 일행이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귀임이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의 여당과 정부당국 및 야당인사들과 정력적으로 만났다.
10월 19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카터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 보낸 친서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미국정부가 對韓 경제개발차관의 의례적인 승인을 중지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U.S. Policy Aims at Stability for Seoul
By Don Oberdorfer
Washington Post Staff Writer
The United States has responded to internal unrest in South Korea with new political signals of concern and disapproval, including a letter from president Carter and an unannounced change in procedures for considering economic development loans to that country.
At the same time, new expressions of support for Korea's security by Defense Secretary Harold Brown have complicated the human rights diplomacy.
The mixed result of a high-level Washington policy review, which came to a head late last week, took into account a complex and sometimes conflicting welter of U.S. political, economic and security interests in Korea. In view of the problems involved, policymakers have been cautious both in their diplomatic decisions and in public disclosure of them.
A senior State Department official stressed that the U.S. objective is not to bring down the troubled regime of President Park Chung Hee but to convince Park to emphasize conciliation, rather than confrontation, with the political opposition. Washington's hope is that such a shift would restore a measure of stability to South Korea, where martial law has been declared after riots in the second largest city, Pusan. The most dramatic public sign of Washington's displeasure was the recall two weeks ago of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for consultations. This was announced the day after the expulsion of Korean opposition leader Kim Young Sam from the National Assembly, an event that deepened already intense political discord in Seoul.
Results of the Washington consultations included:
● The letter from Carter to Park expressing concern about the recent events and making clear, according to officials, that the future course of relations between Washington and Seoul is at stake in Park's current decisions. Officials reported that the letter did not outline a specific course of action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like Park to take.
● An announced meeting at the State Department last Saturday at which Secretary of State Cyrus R. Vance expressed strong U.S. concern to Korean Ambassador Kim Young Shik for transmission to Seoul.
● A decision, conveyed to Seoul, to suspend routine U.S. approval of economic development loans for Korea proposed by the Asian Development Bank and other 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s.
Washington abstained on such loans because of human rights considerations for several months late in 1977, but has consistently voted in favor of loans to Korea, with greater likelihood that Washington will abstain or vote against them.
A $25 million coal development loan scheduled to be considered by the Asian Development Bank next week may be the first test of the new U.S. policy. Some officials suggested that Washington may ask that consideration be postponed for a more intensive review.
Running counter to the signals of concerns is the message of reassurance projected by the current visit to Seoul of Defense Secretary Brown. The Brown for periodic U.S.-Korean military consultations had been scheduled before the internal discord in Seoul reached its new intensity.
There is no indication that serious consideration was given to postponing Brown's trip or replacing him with a lesser official. The Carter administration is concerned about any action in the security field that could transmit a signal of weakening resolve to North Korea, especially after widespread charges that this was the effect of Carter's plan for withdrawal of U.S. ground troops.
Another problem for American policy is the possibility that public expressions of U.S. displeasure could spur Park's political opponents to stronger action while failing to convince Park to take a moderate course. The Carter administration is hopeful -but by no means confident -that the steps to date will succeed, making more difficult and visible steps unnecessary.
〈THE WASHINGTON POST, FRIDAY, OCTOBER 19, 1979〉
미국 정부가 1979년 하반기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례를 찾기 힘든 압력을 가한 이유가 단순히 한국정부의 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목표가 있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부마사태가 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리에 유화책을 모색했다. 이 무렵 박정희씨는 시국수습 방안으로 긴급조치 9호 철폐안을 만들도록 신직수(申稙秀) 법률특보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신직수 특보는 긴급조치 9호 철폐안 및 철폐후의 관련 법안을 10월 27일 오전 중에 박정희 씨에게 브리핑할 예정이었다.
유신헌법은 격변하는 주변 정세와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력의 조직화를 기하기 위래 제정된 것이라고 박 정권은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는 박정희씨의 종신집권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유신헌법 제 47조는「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고 규정돼 있을 뿐, 重任이나 連任에 관한 얘기는 없다.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월남 패망이후의 비상시국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긴급조치 9호 철폐는 바로 개헌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문세광 저격사건 때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공화당 의원 朴鐘圭는 10월 24일 황낙주 신민당 원내총무를 만났다. 황낙주 총무의 시국 수습건의를 경청한 박종규는 곧장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황낙주 총무의 시국수습방안을 설명한 박종규는 자신의 의견도 말했다.
박종규 : 김영삼의 총재직 가처분 조치는 국민들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민당 당헌․당규에 따라 자기들끼리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일이지 무엇 때문에 법원이 나서게 됐냐는 것이지요. 국민 모두가 권력의 개입에 의한 장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9월 하순부터 10월초까지 西獨서 열린 세계사격연맹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회의도중 급거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귀국해 보니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도 없는 의원 제명, 그것도 제1야당 총재를 제명한 일은 결코 온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신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는 발상은 정치도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집권당의 도량을 의심케하는 비신사적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발상을 한 자들이 한건했다는 식으로 어깨에 힘주고 있으니 국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애초부터 김영삼을 신민당 총재로 인정해주고 대화의 길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 나도 처음에는 자네와 같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보고 내용을 보니까 김영삼과 신민당이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는 거야. 그러니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된 거야.
박종규 :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의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폭력을 우선 시키고자 하지는 않을 사람입니다…. 19일에 馬山에 내려가 봤습니다.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가처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별수리라는 것이 시민들을 자극했습니다. 선별수리론은 더 이상 거론하면 안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김영삼을 신민당 총재로 인정하고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사태수습의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 좋아. 내가 김영삼을 만나지…. 황낙주도 자네한테 의뢰를 해왔고, 자네는 김영삼과도 잘 아는 처지이니 어떤 것인지 김영삼을 만나 생각이 어떤 것인지 타진해보게…. 자네한테 나의 결정을 일임했다는 뜻으로 메모를 써줄테니 이를 김영삼에게 제시하고 이야기를 해보게.
박정희씨가 쓴 메모의 내용에는「신민당은 앞으로 질서파괴나 폭행을 수반한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이 원칙을 수락하면 가처분을 백지화하고 신민당의 김영삼 체제를 인정, 대화한다. 의원직사퇴서는 반려하고 국회를 정상화한다.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구속학생과 제적된 학생의 원상회복을 고려한다.」등이 써 있었다.
10월 25일 아침 박종규는 황낙주 신민당 총무를 만나 박정희씨와의 대화를 설명했다. 이날 밤 박종규는 김영삼 총재를 만나 박정희씨와의 요담 내용을 전했다. 긴급조치 9호 철폐와 김총재 체제의 정상화를 강력히 주장한 데 대해 대통령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김총재와 대화를 가지도록 재촉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이에 김영삼 총재는 긴급조치 9호 철폐와 민주적 개헌 등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다시 말했다.
10월 25일 오전 10시경 박정희씨는 청와대에서 김용식 주미대사를 만났다. 김용식 대사는 제 12회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약 1시간 반 동안 지속된 이 자리에서 개각(改閣) 문제와 시국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이날 점심식사에서 박정희씨는 “官이 民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데 지난번의 부마사태를 보면 관과 민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면서 멀어진 민심을 인정하였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69년 3선 개헌당시 보안 사령관이었으며 박정희 씨와 같은 경북 선산(善山)이 고향이며 육사 2기 동기였다. 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며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했다.
10월 26일 오후 4시경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궁정동 연회를 통보받은 김재규는 오랫동안 박정희 암살을 생각해 온 그는 결심을 굳혔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 기사
PRESIDENT PARK IS SLAIN IN KOREA
BY INTELLIGENCE CHIEF, SEOUL SAYS;
PREMIER TAKES OVER, G.I.'S ALERTED
MARTIAL LAW IMPOSED
Slaying, at a Restaurant, Is Officially Reported to Be an Accident
SEOUL, South Korea, Saturday, Oct. 27 - President Park Chung Hee, South Korea's
ruler for more than 18 years, was fatally shot last night by the chief of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t a restaurant near the Presidential Palace, the Government announced early today. It said the death of the President was an accident.
According to the official version, the assailant, Kim Jae Kyu, a lifelong friend of the President and the host at the dinner, fired his pistol during an “emotional outburst” - an argument with Mr. Park's chief bodyguard. One bullet struck the 62-year-old President, the Government reported, and the bodyguard and three other persons were also killed. The three were not immediately identified.
More than three hours after the President's death, the Cabinet met in emergency session and named Prime Minister Choi Kyu Hah, an administrator who has held no real political power, as acting President.
Signal to North Korea
Martial law was imposed all over the nation except the southern resort island of Cheju, and all airports were closed.
The 38,000 United States troops in South Korea were ordered by Washington into an increased state of alert as a signal to North Korea not to attempt military action against
South Korea.
The Cabinet named Gen. Chung Seung Hwa, the army chief of staff, as martial law administrator, and he imposed a curfew from 10 P.M. to 4 A.M., decreed press censorship for the first time since 1972 and banned all meetings and outdoor demonstrations.
The Government announced that the director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Mr.
Kim, had been taken into custody for questioning.
It also announced that there would be a national funeral for Mr. Park.
President Park, who came to power in a coup on May 16, 1961, had previously survived two attempts on his life. In the second attempt, a Korean gunman from Japan tried to shoot the President while he and his wife attended a ceremony at the National Theater here to celebrate Korea's liberation from Japan's rule in 1945. The gunmam missed Mr. Park but killed his wife.
The earlier attempt came in January 1968 when 31 Communist guerrillas slipped into Seoul and sought unsuccessfully to fight their way into his official residence, the Blue House, to assassinate him.
The President's death followed a series of political protests against his authoritarian rule, including rioting and vast demonstrations in the southern port of Pusan and the nearby industrial city of Masan. The outbursts there, in which hundreds of were arrested, were the worst since student rioting in 1960 led to the ouster of President Syngman Rhee and the beginning of the Park regime.
Opposition Leader Ousted
The recent rioting was apparently touched off by the ouster on Oct. 9 of the leader of the opposition New Democratic Party, Kim Young Sam, a native of Pusan, from the South Korean Parliament, with onl y the members of the President's Democratic Republican Party voting in favor. Subsequently all 69 opposition members of Parliament resigned.
The sudden death of the President, who for the last seven years has ruled South Korea under a Constitution that he drafted to give himself vast powers, has thrown this nation of 37 million people into political uncertainty. The question being asked here this morning is whether the army will continue to back the present Government if it continues under the highly criticized constitution of 1972.
There were no immediate signs that Mr. Park's fellow generals had seized power.
The first official announcement of the change in administration came last night with a
broadcast saying that the Prime Minister had been named acting President under a section of the Constitution allowing the replacement of the chief of state because of incapacity. Rumors that Mr. Park had been killed swept through the capital, but these were not confirmed until this morning.
Restaurant Within Compound
According to the Government account, the President was shot at the Kungjong Restaurant, which is within a K.C.I.A. compound near the Presidential Palace.
Rushed to a military hospital, he was pronounced dead at 7:50 P.M. [5:50 A.M. Friday, New York time.]
The South Korean Cabinet met at 11 P.M., and shortly after it was announced that the Prime Minister would take over. Seoul was quiet at the time. Some troops were seen around the Government buildings, and there were tanks near the palace. But despite the rumors, there were no indications that anything violent had occurred or that any anti-Government action was in progress.
Before going to the restaurant for dinner, President Park had officiated at a dedication of a dam near Taejon, 100 miles south of Seoul. He returned here by helicopter.
PRESIDENT PARK IS SLAIN IN KOREA
BY INTELLIGENCE CHIEF, SEOUL SAYS;
PREMIER TAKES OVER, G.I.'S ALERTED
서울, 한국, 토요일, 10월 17일 - 오늘 일찍 한국 정부는 18년 이상 집권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어제 밤 대통령 관저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 한국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정부는 대통령의 사망은 사고였다고 말했다.
공식 설명에 따르면 대통령의 평생의 동반자이며 그 만찬의 초대자인 저격자 김재규는 박정희의 경호 실장과의 언쟁에서 감정의 폭발로 권총을 쏘았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한발이 62 세의 대통령에 맞았으며 경호실장과 다른 3명도 살해됐다고 보도했다. 다른 3명의 신원은 즉시 밝혀지지 않았다.
대통령 사망 후 3시간이 지나, 국무회의가 긴급히 소집됐으며 실질적 정치권력이 전혀 없는 행정가인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Signal To North Korea
남쪽의 휴양 도서인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으며 모든 공항이 폐쇄되었다.
한국에 주둔 중인 3만 8천의 미군이 본국의 명령을 받아 북한에 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기도하지 말라는 신호인 보다 높은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내각은 정 승화 육군참모총장
美 비밀해제 문건으로 본 한미동맹 50년史
날짜: 2003년 4월 자료원: 월간중앙
미 합참의 질타 “CIA도 6·25 남침 모르고 있었다”
1950년 7월10일/합참 합동정보단 1급 문서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전선을 시찰한 직후인 1950년 7월10일, 워싱턴에 있는 합참 합동정보단(Joint Intelligence Group)은 2쪽짜리 정보보고서를 작성한다. 미 공군 소속인 합동정보단의 레지널드 밴스 대령이 합참 정보처 부처장인 미 해병대 소속 V. E. 메기(Megee) 준장 앞으로 제출한 이 1급 비밀 보고서에는 ‘한국 상황: CIA의 북한군 침략 조기 경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CIA로부터 넘겨받은 한국 관련 정보를 놓고 합참 합동정보단이 나름대로 정보 가치를 평가한 일종의 정보 평가서였다.
합동정보단은 CIA가 작성한 일일·주간·월간 보고서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정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물론 합동정보단에 모이는 대부분의 정보는 군사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정치·경제 ·사회 각 분야의 정보 역시 유용하게 취급되었고, 한국 관련 정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의 사전 탐지야말로 정보기관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다. 한국전 당시 미 CIA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전쟁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합동정보단의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CIA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월1일부터 교전이 시작(6월25일)되기까지 CIA로부터 접수된 ‘CIA 일일 정보 요약’에는 한국에 대한 언급이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보고서 첫머리에서부터 CIA를 물고들어간 이 보고서는 ‘같은 기간중 CIA의 주간 정보 요약에서 언급된 한국 관련 사항은 다음과 같다’면서 4가지 항목을 지적하고 있다.
a. 남한 선거에 관련된 3종의 보고
b. 남한의 퇴폐적인 경제와 정치 상황에 대한 3월31일의 장문의 보고 및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남한군 전력 증강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
c. 남한을 피난지로 활용하려는 대만의 장제스에 대해 언급한 6월2일 보고. 이 보고에서 CIA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음: 남한은 소련과 중공에 너무 근접해 있기 때문에 피난지로는 적당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비상사태시 임시 피난처나 불편을 감수한 피난처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임.
d.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대해 언급한 6월16일의 보고. 이날 보고에서도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CIA가 북한군의 움직임을 알고도 합참 정보라인에 정보를 주지 않았을 리는 없다. 결국 CIA는 1950년 3월1일부터 6월25일까지 한국전 발발 가능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38도선에 대한 병력 증가가 남침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CIA도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5월15일에 작성 완료되어 6월19일 보고된 ‘북한 정권의 현 능력’이라는 제하의 ORE 18-50 문서가 북한군 침략에 대한 CIA의 가장 최근 언급이라고 볼 수 있음. 이 문서는 38도선상의 병력 증가가 ‘서울 점령을 포함, 남한에 대한 제한적인 단기 군사작전 전개를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
CIA는 국경 지대의 탱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국경 지대 마을의 주민 소개나 군사도로 건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G-2(정보참모부) 극동파견대(합참 합동정보단의 극동사령부 파견대)에 따르면 CIA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G-2가 북한군의 군사 능력에 대해 언급했음.
이것이 북한군 전력 평가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문서이며, 6월20일 통상 절차를 거쳐 합동정보단에 접수된 바 있음.
이 비밀 보고서가 CIA의 정보 수집 능력을 질타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로 들이댄 것이 바로 북한의 국경 지대 마을 주민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이다. 전쟁 발발의 대표적 징후들인 국경 지대 주민 소개와 도로 건설에 대해서는 CIA가 일언반구 없었다는 지적이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이 두 가지 징후에 대한 현지 보고가 왜 누락되었는지, 그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 보고 계통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군 정보 계통과 CIA가 한국전 발발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군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커다란 이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정보 수집 및 배포 책임자인 앤드루에 의하면 최근의 현지 답사 보고서 사본이 정보서비스단(SI, Service Intelligence) 요원들에게 연구 목적용으로 제출되었음. 마을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 건에 대한 보고가 G-2에 제출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정밀 검사가 진행중임.
극동파견대에 따르면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접수되었다면 매우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었을 것이나 두 건에 대한 정보는 전혀 그들에게 접수된 바 없다고 함.
3월에 작성된 두 종의 주간 정보 요약에서 G-2가 북한의 전시 대비 태세 강화와 전력 증강, 춘계 침략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움.
북한 병력 증강 상황에 대해 언급한 CIA의 ORE 18-50은 G-2의 요청에 의해 18개월 만에 처음 작성된 것인데, 북한군 병력 증강을 지적한 극동파견대 맥내어 대령의 의견을 CIA가 반대했음. 북한군의 군사 능력이 ORE 18-50에서 지적된 것만큼 높지 않다는 것이었음.
우리는 CIA로부터 북한군의 침략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결코 접수한 바 없음. 세계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북한 관련 정보에 관한 한 우리가 CIA로부터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
남한 주요 인사 2만명 극비 소개 계획
1951년 1월9일/극동사령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한국전의 전황을 180도 바꾸어 놓는다. 미군 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의 후퇴가 거듭되면서 1951년 1월10일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미 합참에 긴급 전문을 보낸다.
‘현재 여건 하에서는 남한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유엔군 철수는 불가피하다.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지킬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열흘 전인 1950년 12월30일 맥아더는 중국 본토 폭격을 합참에 건의한 바 있다. 맥아더의 기본 구상은 중국 공격을 통한 확전이었다.
사흘 후인 1월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친서를 발송한다. 전쟁은 한반도 내에 국한시켜야 하며, 38도선에서 휴전 협의를 시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미 8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는 한반도에서의 전면 철수에 대비한 한국 정부 피난 계획을 수립한다. 1월9일 작성된 미 극동사령부의 1급 비밀 (Top Secret) 보고서는 한반도 철수 및 한국 고위 인사를 포함한 요인들의 소개 계획을 소개 인원수까지 구체적으로 밝혀놓고 있다.
이 소개 계획에 따르면 미 극동사령부는 한국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명만 선정해 제주도가 아닌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이 검토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제주도를 소개지로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소개지 선택에 따른 고려 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완전 포기시 한국군과 미군의 병합(incorporation)을 제안한 점이다.
한국군 병력을 오키나와로 이전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고, 200명의 한국 망명정부 요인을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으로 망명시키는 계획도 입안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마지막 부분에 난민 소개 및 망명정부 계획이 ‘토의를 위한 시안(試案)’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기는 했지만, 소개 대상 및 소개 예상지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극동사령부와 합참 군 고위층에서 한반도의 완전 포기를 상정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 가운데 주요 부분을 옮긴 것이다.
제주도로 대규모 소개(80만~100만명)시킬 것인지, 아니면 제한된 인원(1만~2만명)만 선정해 세계 각지의 최적지로 분산시킬 것인지가 소개의 문제점임. 한국 정부 이전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의 이점은 다음과 같음.
1. 공산주의자의 보복으로부터 많은 인원을 구할 수 있음.
2. 공산주의자의 완전 승리를 부인할 수 있음.
3. 미국과 유엔이 결단력을 가지고 반격할 수 있다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4. 자유 한국 정부가 한국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5. 제주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을 지원하고 심리전을 펼 수 있음.
6. 한국 정부의 힘(energy)을 지속적으로 방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따라서 망명정부라는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있음.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 불리한 점은 다음과 같음.
1. 언제까지 한국을 방위하고 한국민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음.
2. 제주도 유지를 위한 유엔의 지속적인 지원을 얻기 힘들고, 참전 동맹국들 간의 이견이 증폭될 수 있음.
3.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타결될 경우 제주도를 포기하고 내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무력 대결의 결과로 지금 제주도를 포기했을 때보다 미국이나 유엔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
4. 제주도에 유입된 대규모 소개민을 원조하는 데 따른 심리적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음.
5. 제주도가 대만과 같이 인식되리라는 것이 불가피함.
따라서 제주도를 피난지로 선택할 것인지는 아래 사안들을 포함한 관련 제반 사항들을 검토해 결정해야 함.
1. 한국 본토에 대한 작전을 지속하기 위해 한국인을 활용할 것인가.
2. 제주도를 차지해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군사적으로 중요하며 실용적인 것인가.
3. 미국이 일본에 준하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제주도를 방어하고 지원하기 위한 군사력과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책임을 떠맡을 용의가 있는가.
4. 제주도를 차지하거나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경우 한국 영토 및 피난지에서 한국 정부와 상당수의 요인들을 유지하는 데 따른 정치적 이익이 군사적 불이익보다 과연 클 것인가.
만약 제주도로 소개시키지 않기로 결정될 경우 다음과 같은 우선순위와 일반적 중요도에 입각해 제한적 소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
1. 대통령, 내각,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 고위 경찰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와 가족들(4,000명)
2. 한국군 선임 장교 및 기술 요원과 가족들(3,000명)
3. 종교계 및 교육계 인사 등 사회 지도자를 포함한 비정부기관 요인들과 가족들(1만명)
4. 정보 계통에 의해 선정된 주요 전쟁포로 및 요원들
5. 한국군
한국군 소개는, 그들을 어디로 소개할지 소개 지역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요인이 되기는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한국군의 잠재력에 대한 군사적 판단에 기초해야 함.
즉, 만약 제주도를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나거나 한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정날 경우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날 경우 한국군 소개는 기본적으로 한국군이 미군에 병합(incorporation into US armed forces)된다는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함.
그러나 이런 관계가 설정된다 하더라도 한국군에 대한 극동 지역 전반의 시각을 공정하게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한·미 병합군은 오키나와 같은 고립된 지역에 기지를 두고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할 것임.
망명정부
유엔과 미국이 원칙적으로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의 존재는 계속 인정받고 지원받을 것임. 정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대통령과 내각 및 국회로, 대략 200명의 인원임.
유엔의 책임 하에 한국 정부를 존속시킨다는 원칙이 유지된다면 한국 정부에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에 피난지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위에 언급한 것들은 다만 토의를 위해 마련된 시안일 뿐임. 합동참모부의 일반적 견해 외에, 하기 질의 사항에 대한 답변을 특별히 요청함.
1. 군사적 관점에서 제주도를 차지하고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실용적인가.
2. 상기 질의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일 경우, 국방부는 제주도에 거주하게 될 약 8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방어하고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준하는 우선순위를 가지고 군사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한국 정부와 대규모 피난민들이 현재 제주도로 이동중임을 감안할 때 위 사항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며, 제주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내려질 경우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
미, 박정희의 과음과 변덕, 북한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다
1968년 미 국무부 기밀문서 :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 기도와 푸에블로호 납치
다음은 칼럼니스트인 짐 만(Jim Mann)이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를 바탕으로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와 북한 무장 공비의 청와대 침투 기도 사건을 주제로 ‘로스엔젤레스 타임스’(2001년 1월28일자)에 쓴 기사 가운데 주요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최근 비밀해제된 미 행정부 문서에 따르면 냉전이 한창이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과음과 변덕스러운 행동(heavy drinking and erratic behavior) 때문에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고 보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집권했고 한국 ‘경제 기적’의 설계사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동안 강인하고 엄격한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북한 무장공비들이 박대통령 살해를 기도하고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직후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존슨 행정부는 박대통령의 동요를 무척 우려(fear)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서 사본에 따르면 특사로 한국에 가 박대통령을 만났던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내각 관리들에게 “그는 변덕스럽고 잘 흥분하며 술을 많이 마신다”고 보고하고 있다. “박이 느닷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인가”라는 존슨의 질문에 밴스는 “아니다. 꽤 된 일”이라면서 “부인에게 재떨이를 던지기도 했고, 보좌진에게도 몇 차례 재떨이를 던진 일이 있다”고 답했다.
이 문서들은 국무부의 정기적인 정보 문서 해제 작업의 일환으로 공개된 것인데,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을 당시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질까봐 존슨 행정부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백악관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똑같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했다.
한 회의에서 CIA의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국장은 “북한에 푸에블로호를 지정된 날짜에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중대한 사태를 맞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묻자 존슨은 즉각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중국·소련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되쏘았다.
이 문서들은 냉전 당시의 역학관계가 한반도의 현 정세와는 전혀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 보다 평화적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는 가운데 김대통령 지지자들은 북한에 대해 미국이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1968년 당시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미국은 협상을 선호하면서 지나치게 호전적인 박정권을 우려했던 것이다.
한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1968년 통일원을 설립했을 때 미 관리들은 서울의 의도가 분명히 ‘평화적 통일’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은밀히 애썼고, 한국은 그런 확답을 주지 않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8년간 정권을 유지한 박대통령은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서울CIA 지국장과 주한 미 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최근 소식통들에게 박이 “술꾼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68년 서울에서 근무했던 다른 관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박이 과음하고 미국에 대해 대노하자 “전쟁이 일어날까봐 아주 걱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1968년부터 78년까지 박의 개인비서로 일했던 김두영 씨는 이달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박대통령이 점점 더 북한의 공격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박대통령이 북침을 머리 속에 두었다고는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양쪽 모두 공멸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박의 음주에 대해 “박대통령은 항상 술을 좋아했고, 과음하고는 했다”고 말했다. 박은 1979년 암살당했다. 박의 딸이자 한국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 박근혜 씨는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공개된 문서들은 또한 미 정부가 1960년대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박대통령에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개방을 종용하기는 했지만 워싱턴의 일부 관리들은 박대통령의 권위 독재주의 정권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국가안보위원회 관리였던 로버트 코머(Robert Komer)는 1964년의 한 메모에서 ‘대체적으로 볼 때 한국을 좀더 민주화시키라고 박을 몰아붙이는 대신 우리는 이 어수선한 땅에서 약간의 독재는 너그럽게 봐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쓰고 있다.
30여 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한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한 직후인 1968년 1월 존슨 행정부와 박대통령 간에는 위기가 고조되었다. 생포된 무장공비는 나중에 자신들의 임무가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암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공비들은 관저 입구에까지 침투했고 총격전을 벌여 한국인 수명을 사살했다.
북한의 무장공비는 전원이 죽고 오직 1명(김신조)만 생포됐다. 사건 발생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1월23일, 북한은 북한 영해 바깥에서 첩보 수집 활동중이던 푸에블로호와 83명의 승무원을 납치했다. 문서에 의하면 처음에 존슨 대통령과 그의 고위 측근들은 푸에블로호와 그에 딸린 정보 장비를 회수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그들은 북한 함정의 나포 또는 격침, 항구 지뢰 부설, 해상 봉쇄, 공습 또는 비무장지대 습격 가능성 등을 검토했으나 존슨과 측근들은 재빨리 푸에블로호 선원의 송환을 위해 북한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1월29일 점심식사 자리에서 존슨과 고위 측근들은 그들의 목표가 선원들을 송환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미군과 계속 협력하도록 만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 제2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미 관리들은 한국 대통령이 청와대 습격 사건에 격분했다고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공비 침투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 대해 군사행동으로 북한을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는 ‘박대통령이 거의 이성을 잃은 채 북한을 칠 필요가 있다는 데 사로잡혀 있다’고 워싱턴에 타전했다. 박대통령은 북한의 훈련소들을 공격해 없애 버리고 싶어했으며, 미국이 청와대 사건보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존슨 대통령은 사이러스 밴스를 서울에 보내면서 백악관이 북한과 협상하기로 한 결정 뒤에는 미 국내정치라는 요인이 있다는 것을 한국 대통령에게 이야기해줄 것을 지시했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다. 밴스에게 전달된 서면 지시서에는 ‘올해는 미 선거가 있는 해이고, 푸에블로호 문제는 한·미 관계 및 동남아에서의 미국의 입장과 관련, 선거의 주요 현안이 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존슨 행정부는 이렇게 한국을 달래는 한편 경고 메시지도 보냈다. 만약 박대통령이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할 경우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밴스는 존슨에게 박대통령이 “위험한 인물이고 다소 불안하다”(a danger and rather unsafe)고 말했다.
밴스는 “박대통령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을 내린다”면서 “박대통령의 장군들은 그 명령에 따른 모든 조치를 이튿날 아침까지 연기해 놓으며, 다음날 아침 박대통령이 아무 말이 없으면 간밤에 박이 말했던 것을 잊어버린다”고 말했다.
결국 박은 푸에블로호 선원 송환을 위해 북한과 협상하려는 미국에 협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근심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내부 문서에 따르면 2개월 후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이 ‘병력 이동’을 고려하고 있으며 심지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워싱턴에 경고했다.
푸에블로호 선원은 미국 협상팀이 북한에 사과한 후 1968년 12월에 풀려났고, 미국은 선원들이 석방되자 즉각 혐의 내용을 부인했다. 박대통령은 그의 부인을 살해한 북한의 또 다른 1974년 암살 사건에서 살아남아 그 후로도 10년 동안 권좌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북한이 아닌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1979년 살해당했다.
박대통령,
무릎을 떨며 포터 주미 대사와 일대 설전 벌이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박정희 면담록-
1970년 8월3일/국무부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닉슨 미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에 군사물자는 지원할 수 있어도 더 이상의 병력 지원은 없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발효된 것은 1970년 2월이다. 닉슨은 이미 1969년 7월 괌에서 미국의 이 새로운 외교정책의 기본 개념을 밝힌 바 있다.
당장 문제된 것이 주한 미군의 철수였다. 닉슨 독트린이 선언된 직후부터 한·미 간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비밀 교섭이 시작된다. 주한 미 지상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을 철수시킨다는 것이 골격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미군 철수에는 반대라는 것이 한국의 강경한 입장이었다. 미국도 좀체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마침내 주한미군 철수 건은 양국 간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1970년 8월3일. 윌리엄 포터 대사가 미8군 사령관 마이클리스(Michaelis)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박대통령을 찾아간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한·미 양측 모두 긴장된 분위기였다.
오후 4시30분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포터 대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박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국무부에 전송한다. 8월4일 오전 1시56분과 2시24분, 7시5분 등 세 차례에 걸쳐 보낸 이 극비 전문은 총 8쪽 분량. 국가 안보에 직결된 사안인만큼 박대통령과 포터 대사 사이에는 열띤 논쟁과 서로 밀고 당기는 한판 신경전이 펼쳐졌다.
박정희 면담록
1. 요약 : 미군 감축에 대한 협조나 감축에 대한 합동계획을 계속 완강하게 거부하던 박대통령은 우리가 점점 더 압력을 넣자 현재 진행중인 한국군 현대화 작업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런 계획을 시행하지 말 것을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했다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음.
나중에는 결국, 아직 현대화 작업 그룹의 중간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보고를 받을 때까지는 합동계획에 대한 견해를 유보할 것이며, 보고를 받은 다음에 우리를 다시 만나겠다고 함으로써 입장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였음.
그에게 철군 문제를 제기하자 말투가 거칠기는 했지만 결심을 못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의 협조가 있든 없든 미국의 결정은 그대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그에게 분명히 전달했음. 그는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반복해 거론하면서 자주 ‘불쾌감’을 표시했음.
그는 호놀룰루에서 타진된 미국의 의사표시에 대해 모르고 있었음. 사전에 국무총리가 우리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배석할 것이라고 했지만, 박대통령은 인터뷰 자리에 장관들이 배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통역자를 포함해 청와대 참모 2명만 참석시켰음.
2. 우리의 입장을 점검하고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협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라고 내가 말문을 열었음. 나는 철군에 대한 한·미 간의 합동계획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더욱이 미 의회에서 현대화 문제를 호의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좋으며, 괜스레 문제를 복잡하거나 위태롭게 만들 필요는 없으므로 공개적인 논쟁이나 문제점은 최소화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음.
또 호놀룰루에서 우리가 제공한 해명자료대로 하면 이 문제들을 잘 처리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며 현대화에 대한 대화가 진행중인만큼 그에 필요한 유익한 밑그림이 그려지리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제는 미군 감축에 대한 합동계획으로 진전시켜볼 만하지 않은가 하고 물었음.
3. 박대통령은 대답하기를 한국의 입장에는 변동이 없다고 했음. 그의 견해는 호놀룰루에서 미국에 전달된 바 있음. 다음은 박대통령의 답변임.
“현대화 협의의 성과물이 없고 한국 국민에게 안보에 대한 보장이 있기 전까지는 병력 감축 계획에 관한 한 어떠한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일이 선행되고 나면 합동 협의가 시작될 것이며, 미국의 입장은 이해하나 어렵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이 더 어렵다.
한국 국민 100%가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만약 감축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협정(agreement)이 있지 않는 한 감축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토의가 일반 대중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 가서는 미군 감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그때 가서 협정에 따라 규모나 시간, 조치 등을 토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보장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한국 정부가 감축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4. 박대통령의 이런 답변에 대해 나는 우리와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에 대해 유감을 전달하면서 미군 감축 논의에 따른 관련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음.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불행하게도 한국 정부가 참여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측이 단독으로 마련한 안이다. 1970년 12월까지 5,000명을 감축하고, 71년 3월까지는 8,500명을 추가 감축하며, 71년 6월30일까지 4,900명의 병력을 추가로 감축하는 것이다.”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박대통령은 눈을 감고 앉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무릎을 떨다 커피를 시켰음.
5. 박대통령은 거듭 말하기를, 의회를 포함해 미국이 어려워하는 점을 잘 알고는 있지만 한국군 현대화와 관련해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 없는 한 한국 정부는 대화에 응할 수 없다고 했음.
“만약 미국이 감축을 진행시킨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협조할 수는 없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한국 정부가 비협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했음. 왜냐하면 이 결정이 나기에 앞서 한국 정부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임.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또 한번 강조했음.
6. 나는 우리가 합동해서 계획을 세우자고 한국 정부에 제안했을 당시에는 미군 감축에 대해 결정된 사안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대답했음. 다음은 본인의 발언 내용임.
“따라서 국민감정, 정책, 예산, 인적자원 등을 고려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정부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계획 입안 과정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합동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력 감축을 한 직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군 장비의 처분 같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이런 문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일반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한국 정부가 우리와 같이 계획을 짜고 입안하는 작업을 거절함으로써 그 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게 된다면, 그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장비 목록은 아주 대단하다. 예를 들면 수백 대의 탱크와 한국 공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장비가 포함되어 있다.”
7. 일방적으로 선언만 해대던 분위기에서 좀더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박대통령은 목록에는 단위 부대 장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음.
8. 나는 또 말하기를, 한국측의 생각이 전혀 접수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계획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음. 한국의 생각은 아주 유익하겠지만 참여하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마이클리스 장군이 이 문제의 군사적 측면에 대해 답변할 것이라고 말했음.
9. 박대통령은 이에 대해 오히려 화를 내면서, 3월27일에 미국의 입장을 밝힌 최초의 공식 문건을 받고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는데도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유감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음. 그는 계속해서 향후 몇 년 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 문제를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그러나 미 국내의 상황이 정 어려워 기다리기 힘들다면 한국군이 침략을 저지할 만큼 강화되고 단독으로 안보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조건 하에서는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음.
박대통령은 또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토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성실한 자세가 부족하고 한국의 요구 사항이 미국의 입장과 상충되어 절충점을 찾지 못하게 될까봐 한국에서의 병력 감축을 반대하는 것이며, 미국이 계획대로 병력을 빼내간다면 미국군은 미국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했음.
10. 이에 대해 나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결국 신뢰의 문제에 귀착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음.
“우리는 한국군 현대화에 대해 최고위급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보장을 제공했으며, 한반도 안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취한 것 이상의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의도와 언급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11. 박대통령은 그때 내가 언급한 ‘불가능하다’는 표현을 딱 꼬집어냈는데, 내가 한국측의 추가적인 안보 보장을 미국이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음. 나는 이렇게 대답했음.
“만약 한국 정부가 조약(treaty) 이상의 어떤 언질(commitment)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조약의 한계를 넘어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한국 정부가 추가적 보장을 위해 조약의 재협상을 원한다면 현 상황에서는 그런 재협상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12. 박대통령은 이어 말하기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믿음, 미국에 대한 한국의 믿음 등 양국 간에 신뢰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사실일 수 있다고 했음.
“상호방위조약에 크게 의지하지는 않고 있다. 한국전이 터졌을 당시에 그런 방위조약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적시에 아주 귀한 도움을 주었다.” (이때 박대통령은 약간 흥분했음) 양측의 신뢰성 문제에 대해 박대통령은 1년 전 닉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를 상기시켰음.
1년 전 닉슨 대통령은 그의 독트린과 해외 미군 감축의 의도를 설명했음. 닉슨 대통령은 한국에는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미군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음. 이런 언급은 실질적으로 공동선언에서 나타나 있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때도 비치 장군(General Beach)은 서신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는 한 한국에서 미군이 빠져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음.
이때 내가 뭔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박대통령을 바라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했음. 그는 흥분된 상태였고, 나는 잠시 생각 끝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음. 비서실장과 통역자가 있는 앞에서 박대통령이 틀렸다고 고쳐주기보다 일단 넘어가기로 한 것임. 어떤 경우에라도 그는 상대방이 잘못을 지적하려는 틈을 주지 않았음.
박대통령의 말이 빨라졌음. “이제 한국이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을 할 때가 왔다. 한국이 이제는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략)
12. 마이클리스 장군이 실질적인 장비와 자금 조달, 우선순위, 훈련에 필요한 시간 등 한국군현대화위원회에서 토의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설명했음.
13. 마이클리스 장군과 나는 박대통령이 지적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보장’을 충족시키기에는 정말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언급한 병력과 장비 감축은 곧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음. 장비를 싣고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리는 다시 박대통령에게 물었음.
14. 박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다시 끼어들었음. 우리 얘기를 듣자니, 한국 대표는 감축 합동계획에 가 앉아서 미국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었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한국 대표들은 우리와 만나야 하며, 부대와 장비 정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하는데 한국측의 아이디어를 알 수 없으니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음.
15. 박대통령은 감축에 대한 미 대변인 성명을 보니 미국 정부는 그대로 실시할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화 작업 토의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가 도출된다면 미군 감축에 대해 토론할 용의가 있으며 미국측과도 만나겠다는 말이라고 했음. (중략)
16. 박대통령이 마이클리스 장군에게 자세한 감축 계획과 이미 승인된 사안의 윤곽을 알려달라면서, 부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인지 부대 일부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음. 마이클리스 장군은 차트를 보여주면서 주한미군 철수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설명했음.
17. 그러자 박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인 계획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그때 내가 다시 나서서 한국측이 우리와 같이 작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음. 박대통령은 유감스럽다, 불만스럽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미군이 비상시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그건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이번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서 한국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음. (중략)
18. 나는 인터뷰 자리를 떠나면서 박대통령에게 우리의 견해를 밝힌 비공식 문건을 남겨놓았음.
19. 박대통령은 아무런 반응 없이 한동안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음.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중간보고를 아직 받지 못했다. 보고받기 전까지는 합동계획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 보고받은 다음에 다시 만나자.” 이에 대해 나는 곧 뵐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음.
20. 박대통령의 태도에서 느낀 보다 구체적인 것은 차후 언급하겠음. 인터뷰가 끝났을 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음.
작별 인사를 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막 나서기 직전에 나는 다시 한번 돌아서서 박대통령을 쳐다보았음. 박대통령은 마이클리스 장군이 건넨 감축승인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음. 이상하기 짝이 없었음. 인터뷰 내내 박대통령은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임.’
플레이보이 정일권과 김종필의 야망
1970년 12월/국무부
박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선거를 4개월 앞두고 70년 12월 말에 당정개편을 단행했을 때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주요 인사 개편에 대한 견해를 국무부로 보냈다. 당시 한국 언론은 당정개편에 대한 사실만 보도할 수 있었을 뿐, 개편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해설 기사 보도는 싣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을 때였다.
6년 반의 장수 국무총리 정일권이 물러나고,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김종필의 당 복귀는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판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판 분석
국무총리: 정일권의 퇴진이 예상되기는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음. 6년 반 만에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남. 사임의 표면상의 이유는 국회의원직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정일권은 최근 총리 업무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가 대통령에게 퇴진을 간청했음.
그의 플레이보이로서의 평판과 지난 봄 정인숙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정치적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었음. 박대통령이 정일권을 백두진으로 교체한 주요 원인은 10년째의 행정부에 새 인물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님. 정일권과 마찬가지로 백두진 역시 개인적인 힘이 없고 이승만 때부터 이어져온 인물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김종필이 당 지도부로 복귀해 선거를 총괄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후락으로 하여금 중앙정보부를 맡게 한 놀라운 결정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임. 이후락이야말로 KCP(김종필)가 당에서 얻게 될 힘을 견제할 수 있는 적임자로 평가되는데, 박대통령은 김종필이 이후락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간주하고 있음.’
김종필-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1969년의 3선개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종필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에게 면담을 신청한다. 1970년 12월의 일이다. 국무부는 즉각 김종필의 최근 활동 및 정치적 입지, 방미 목적 등을 작성해 키신저에게 보고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좌에 오르게 만든 쿠데타의 설계사 김종필씨가 현재 개인 업무로 미국을 방문중인 바, 한국대사관을 통해 키신저 보좌관과의 면담 약속을 신청했음. 김종필 씨는 1963년 언젠가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서 키신저 보좌관 밑에서 공부
<외교문서> 한국외교관의 기막힌 월남탈출기
[연합뉴스] 2008년 01월 15일(화) 오전 00:00 가 가| 이메일| 프린트
"나라가 힘이 없으면.." 美 비협조.日ㆍ佛 무관심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유현민 기자 = 1975년 월남의 패망 당시 사이공에 있던 한국 외교관들은 도와주기로 했던 미국의 비협조와 일본과 프랑스 등 현지 열강의 무관심으로 탈출하지 못하다가 일부 교민들과 함께 사선을 넘으며 어렵게 베트남을 벗어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15일 외교부가 공개한 1977년 외교문서에 포함된 '김창근 주월남대사관 2등 서기관의 탈출 수기'에는 월남 패망 당시 대사관 공관원들과 교민들의 절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이들은 미 대사관이 탈출 포인트로 정한 장소로 갔으나 미국이 자국 국민을 우선 분류하느라 한국인들의 요청을 거절했으며 이 와중에 한국 대사는 먼저 빠져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탈출에 실패해 5년간이나 베트남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와 함께 현장에 갔던 김 서기관은 이어 일본과 프랑스 대사관측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마저 허사로 돌아갔으며 결국 교민들과 탈출을 감행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에서 5일간 떠돈 끝에 싱가포르를 거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탈출수기에 나타난 내용은 월남 패망직전인 1975년 4월 28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상황이다. 다음은 김 서기관의 수기를 요약한 것이다.
『월남 패망 이틀 전인 4월28일 사이공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관은 긴박한 월남 상황을 인지하고 탈출계획을 세웠다. 이에 미국 대사관과의 협조체제를 마련하고 29일 탈출을 위해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미 대사관이 애초 주월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을 집결시킨 곳은 포인트3 (국제개발처 직원 숙소 근처)란 곳이었다. 김영관 주월 대사와 김창근 서기관 일행이 미국측의 연락을 받고 포인트3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어 곧바로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 대사관의 상황은 일행에게 여의치 않았다.
미 대사관이 자국 국민을 먼저 분류, 헬기를 이용해 탈출을 시켰고 우리 대사관 직원 및 교포들의 탈출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미 대사관에 도착해 대사실로 들어갔던 김 대사가 먼저 떠났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이대용 당시 공사가 미 대사관에 확인하니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김 대사가 떠난 후 미 대사관측은 미국인을 우선 철수시키고 한국인을 월남인에 우선하여 철수시키라는 본국지시가 없었는데 왜 여기로 왔냐며 우리 공관직원들과 교민들을 탈출시킬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다음날 (30일)까지 미 대사관에 남아있으며 탈출을 모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탈출 막바지 마지막 남은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서 애써봤지만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 대원의 위협에 물러서야 했다. 미 해병대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까지 쏘았다.
마지막 헬기가 떠난 후 일행은 일본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을 통해 탈출을 모색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시 암흑뿐이었다.
이때 떠난 김 대사의 뒤를 이어 탈출을 지휘한 사람은 당시 탈출을 하지 못해 5년동안 베트남에 억류되었던 이대용 공사였다. 이후 이 공사, 본인(김 서기관) 일행은 당시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 병원(Gaall Hospital)에 몸을 숨기며 다시 탈출 방안을 강구했다. 하지만 병원측에서도 베트콩들의 위협에 한국인들을 보호할 수는 없다며 병원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더욱 더 절망에 빠진 일행은 청산가리와 수면제 등으로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일단 병원을 떠나긴 했지만 그대로 탈출 의지는 포기하지 않은 일행이 현지에 있던 교민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본격적인 독자 탈출방안을 교민들과 모색했다. 처음 나온 안은 서해안지역인 락차를 통해 태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공산군 소굴이라는 이유로 일행들이 반대했고 무산됐다.
그 다음으로 고려된 방안이 붕타우 북쪽에 있는 롱하이로 가서 탈출한다는 것. 하지만 일행은 또 다시 탈출을 포기했다. 탈출하다 잡히면 오히려 생명이 보장되지 않으니 앉아서 보호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렇지만 본인(김 서기관)만은 예외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결행하는 교민일행과 함께 하기로 혼자서 결심했다. 병원에서 이미 자결을 결심했기 때문에 두려울게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공관 직원 중 본인(김 서기관) 혼자만 독자 출발하게 됐고 일행은 5월 3일 오전 11시에 사이공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이들은 오후 2시 롱하이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 동안 6개의 검문소를 맞닥뜨려야 했다. 도중에 베트콩을 태워주기도 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이렇게 롱하이에 도착한 일행은 돈을 주고 배를 사 바다로 나섰다.
이후 5일간의 긴 항해 끝에 5월 8일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무사히 월남을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는 11일에 도착했다.』
lwt@yna.co.kr
hyunmin623@yna.co.kr
그러니 미국은 믿을수없는 국가이다 그것이 미국 국가가 가진 한계이다 워낙 일를 벌리기를 좋아하지만 수습은 못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한계 그러니 박정희 대통령게서 미국에 대한 신뢰를 미국 스스로가 만들어놓은셈 그래서 핵무기의 보유에 대한 집착은 당연한 국가 안보 자세다
왜 미국은 그동안 세계수많은 국가들을 향해서 동맹을 외치지만 어디 한두개 국가인가 그들 국가마다 그들 국가의 안보를 책임져준다고 말하지만 미국은 그렇게못한다 우는애 젓을 먼저 주듯이 이것이 미국의 패권 전략의 속성이다
임시적 일회적인것이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고 기준이다 월남전에 대한 미국의 두가지 얼굴을 보면 처음에는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서 도와달라고하고서는 나중에 꽁무늬를 뺀 사실이나
일본이 대동아 전쟁시에 미국과 일본간의 약속에서도 미국이 또 꽁무늬를 배니 일본은 열받아서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것이나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게서 이 당시 남북관계에서 당연히 핵무기를 보유해야만 하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그러할수밖에 없었다
모든것은 양국간에 미국이 잘못을 해놓고서는 모든것을 박정희 대통령 잘못으로 돌리는것이다
30여년이 다되어가지만 지금보아도 손익계산서를 뚜뜨려보면 미국이 얼마나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지 한 단면을 볼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은 문제의 잘못을 보지못하고 있다
싱글로브 장군의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주한미군 장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당시 미 언론은 “존 W 베시 유엔군·주한미군사령관이 철군계획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또 존 번스 부사령관은 “미 지상군의 계속 주둔이 바람직하며 철군계획은 한반도 군사균형에 치명적인 변화를 야기하지 않고 미국 공약(公約)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글로브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지난 12개월간 철저한 정보수집 결과 북한 전력이 부쩍 증가했음이 드러났다. 내가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이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미 군부에서는 최초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철군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한 싱글로브 장군의 발언은 워싱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 발언을 불쾌하게 여긴 카터 대통령이 싱글로브 장군에게 소환명령을 내려 진상 해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카터는 싱글로브 장군을 주한 미8군 참모장 직에서 해임,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군부의 철군 반대론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77년 5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한 싱글로브 장군은 “철군이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보는 나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천명하고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사령부에 철군의 파급 효과에 관해 물어온 적이 없으며 미 합참본부와 육·해·공 3군 사령부도 철군의 타당성을 해명해 달라는 미8군의 요청을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 한국 정부와 군에 싱글로브 장군의 카터 정책에 대한 정면비판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공개비판을 했다고 군 최고통수권자가 일개 지역군 참모장을 곧바로 소환해 야단친 것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같은 군인으로서 본받을 만하다고 싱글로브 장군을 격려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카터 대통령도 나중에는 싱글로브 장군을 미 육군 지원사령부 참모장으로 영전시켜 싱글로브 장군이 받은 해임의 수모를 지워주었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군부와의 불필요한 대결을 피하려는 카터의 전략적 후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튼 싱글로브 사건을 계기로 철군에 대한 미 군부의 입장은 당초의 `전면 철군 반대'에서 `적절한 보완 조처가 뒤따른다면 감내할 만한 모험'(미 육군 참모총장의 하원 군사위원회 증언)이라는 선으로 후퇴했다. 반면에 이제까지 주위의 눈치만을 살피던 미 의회에서는 철군 반대론 혹은 신중론이 일기 시작했다. 한 육군 장성의 외침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보수파인 더몬드 상원의원은 카터의 철군정책은 선거 공약을 실천하려는 위험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공격했다. 마침내 미 상원은 공화당 내 철군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크게 반영한 로버트 버드 민주당 원내총무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버드 수정안은 카터의 철군계획을 지지한다는 원안(原案)의 문구를 삭제하고 어떠한 미군 철수계획도 `대통령과 의회의 공동결정에 의해서만 취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마침내 카터 대통령은 78년 4월21일 성명을 통해 철군계획의 일부 수정을 발표했다. 즉 78년 제1진 철수 규모를 당초의 6000명에서 3400명(전투요원 800명·비전투요원 2600명)으로 축소 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우스먼의 전화
1977년 5월17일, 그러니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李東馥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駐韓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李보좌관과 하우스먼은 다음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駐韓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짐 하우스먼은 5월18일 12:15∼13:30 當部 부장 특별보좌관을 접촉하고 베시 유엔군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음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1. 5월24일에 내한하는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을 맞이해 베시 사령관은 駐韓 美 지상군 철수문제에 관하여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할 계획임.
가. 베시 사령관은 1차적으로는 駐韓 美 지상군을 현재의 상태에서 동결, 어떠한 규모의 감축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할 것임. 사령관의 논거는 6·25 때 駐韓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駐韓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임.
나. 만약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을 통해 美 행정부의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이 기정방침으로 확인될 경우 베시 사령관은 차선의 방안으로 다음 사항을 건의할 방침임.
1)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은 상징적인 규모로 국한할 것. 美 육군 제2사단의 3개 여단 중 1개 여단에서 여단 建制는 그대로 둔 채 2개 대대만을 1979년 6월 이후에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최소한 5년간) 한국에 잔류시키도록 결정할 것.
2) 철수하는 2개 대대의 각종 화기와 장비는 한국에 남겨두어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3) 현재 2개 대대 弱의 규모인 駐韓 美 공군은 완전규모의 3개 대대를 각기 거느리는 2개 비행단으로 증강시키되 증강되는 항공기는 태평양 공군으로부터가 아니라 본토의 공군으로부터 가져올 것(태평양 공군은 駐韓 美 공군의 후비로 이미 사실상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실질적으로는 증강이라고 볼 수 없음).
4) 한국軍 현대화를 위해 다음 조치들을 강구할 것(생략).
2. 베시 사령관은 앞으로 있을 韓美 협의 때 朴대통령 각하께서는 물론 고도의 정치적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하겠으나 관계장관 이하의 실무자는 이상 베시 사령관의 기본입장을 감안해 그보다 더 강경한 주장을 할지언정 더 온건한 주장을 하지는 말아 줄 것을 요망함.
3. 베시 사령관은 하비브와 브라운 來韓 이전에 극비리(駐韓 美 대사관에 대해서도 비밀로) 韓美 양 국군 간에 사전 의견조정을 가질 것을 희망함. 그 방식은 1단계로 합참의 孫章來 장군이나 柳炳賢 장군과 유엔군사령부의 번스 副사령관, 싱글러브 참모장 또는 콜러 작전참모 간에 협의를 갖고 2단계로 베시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 만나기를 희망함(단, 이러한 접촉은 베시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美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극도의 보안을 요망함).
4. 베시 사령관은 지난번 渡美,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駐韓미군 철수 문제는 절대로 졸속한 결정을 회피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도 『장군과 먼저 협의하지 않고는 駐韓미군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므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감축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만약 카터 대통령이 이러한 약속을 저버릴 때는 『군복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우스먼은 말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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