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대적인 신은 인류에 어떠한 사람을 선택하는가?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금은 똑바로 진실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모든 진실을 솔직하고 거짓없이 이야기 할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처지로 인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에 해냈던 것처럼 다시 또 해낼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라며 취임했습니다
지구 행성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상세계의 문제들과 난제들 지금 지구의 인류가 달려가는 문명의 속도 시간과 그로인한 문제점들 그리고 물질적인것과 정신적인 것을 살펴보고 있다
지금 인류는 1987년을 기해서 2008년 동안 가장 인류의 인구가 급작스럽게 대략 18억명 정도의 근사치로 인구가 폭발했다
그동안 1900년대세계 1,2차 대전을 치루기전의 인구가 24억명인 반면에 나머지 기간동안 인구가 80년내지 90년동안 인구는 점진적인 증가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문제는 인류의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나는만큼 인류가 깨달아야 하고 깨어나야 하는데 그러하지못한데에서 지금 인류의 모든 모든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소생이 참으로 인류를 생각하면 다 제각각 생명의 고귀함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느 생명체 고귀함이 왜 없겠는가?
이 지구가 이 인류가 현존의 사람들과 생명체들을 끝으로 산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만은 그대들이 선조분들의 피와 땀으로 어떻든 이 지구를 이 인류를 지탱해왔다라는 사실 잘했왔든 못해왔든간에 분명한 사실은 현존의 사람들이 인류가 더 많이 깨달아서 인류의 후손분들에게 되돌려주어야하고 후손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환경을 돌려주어야 한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후손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현존의 인류가 위험의 위기로 가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다 인류가 현존의 사람들이 깨닫지못하고 깨어나지못하고 지어온 죄가 모두를 위협 해 오고있기에 이는 깨닫지못한 인간들의 욕망에 대한 죄가 너무 크다
훗날에 누군가는 흘려야만 하는 인류의 피를 받침에 있어서 그대들의 흘려야만 하는 피를 아픔을 통해서 살아남은 인류사람들이 더 뼈를 깍는 노력으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갖고 실천하면서 살아가야하고 더욱더 깨달아서 진정한 깨달음의 해탈의 열반 경지에 올라가서 신성한분들을 만나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인류가 만들어놓은 그동안의 발자취는 정해진 하늘의 도수에 의해서 돌아갈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이 현실입니다 지금이라도 인류가 많이 깨달아서 다음내생에 오시면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줄이는데 더욱더 깨달음을 정진해서 절대적인 신을 만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에서 언급하기는 뭐하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님의 지구촌 인류에 반평생 넘게 인류를 그나마 평화롭게 인도해주신 감사하며 동시에 여왕님의 건강에 절대적인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리며
앞으로 인류가 또 한번의 진통이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인류의 변화와 혁신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그동안의 인류가 걸어온 모습보다도 더 내실있는 지구 행성 관리가 되고 인류의 삶이 내실이 깊어진 인류의 미래가 되도록 해 드릴것입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신께서 직접 보살피고 계시기에 소생이야 인류들에게 전달해드리는 메시아의 종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신의 믿음이 부족하고 믿음을 실천해온 국가가 없었다라는 사실이다 다만 흉내들은 내는 국가나 민족은 있어도 실천하고 일심으로 믿음을 보여온 국가나 민족이 없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어떠한 경로로든 인류가 변하드라도 이것을 다시 정하게될것이고 오늘날 같은 인류가 되풀이시에는 향하 인류가 지구나 우주공간에서도 살아남지못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지구행성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못하면 뭔 신분계급에 종교적 종속적 배타적 논리에 국가적 논리에 인종적 논리에 자신들의 집안하나 제대로 관리못하는 아둔한 현재의 인류의 모든 생명체들이나 국가형태를 보면서
더욱이 가난한 국가들이 더많은 식량도 부족한데도 동물의 본능적인 개체수 종족보존의 성격과 그리고 국가적 묵인하에 깨어나지못한 인간들의 짐승들의 불랙홀의 습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것이 결론은 다 자신들에게 되돌아가고있다라는 사실을 현재 인류는 목격하고 있는것이다
인류는 시간과 공간이 가면갈수록 종전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하는 세계의 각 국가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어있는 지구촌 인류의 과학기술문명 시대로 가고있기에 그런데 게속해서 인류의 인구는 증가하고 그들으 일자리가 필요로 해지고 있으니 당연히 세계 실업률은 일자리의 부족현상은 심화되어가고있으니
거기에다가 인류의 미래의 새로운 경제 동력산업 역시 고부가가치 비노동집약형으로 가기에 참으로 세계 각 국가마다 세계 경제의 정체와 더욱이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니 지금 세계 각 국가들은 80:20의 논리에 의해서 형성된 자본을 가진자들의 자본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함에 있어서 이 투자에 미래 인류앞날을 위하는 투자로 전환해주어야 한다
분명한것은 이러한 세계 변화와 혁신의 패러다임에 무조건 인구의 증가를 방치하는것은 이제는 통제해야할것이다 굳이 방치하면 할수록 그 부담은 훗날에 늘어만지기에 말이다
인류 미래의 신동력 성장 인류 산업은 이제 바다에 있다고 보여진다 바다를 통한 산업 개발에 대한발굴을 해야 할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너무나 육지에 치우처 온 인류 산업이면 이제는 바다를 통한 인류의 새로운 산업 개발에 연구를 해야 할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속에서 인류의 개개인들의 고통과 불행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것이다
더욱이 인류의 깨달음은 게을리하면서 동물의 짐승의 탐욕의 욕구는 멈추지않고 욕망을 추구하니 당연히 재앙이 화가 닥치는것을
그래서 지금 지구의 환경 문제 식수문제 군사적 안보 문제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 인류의 고통과 불행 문제 깨달음을 게을리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의 문제등 모든 문제들을 일괄타결할것이다
짐승같은 동물같은 유형으로 늘어만 나는 인구증가 폭발 속도에 비해서 그렇다고 지구행성의 수명이 진행해가는 속도와 인류가 우주 과학기술 문명 진전 속도보다도 빠르게 지구행성 환경을 파괴해가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현존의 인류가 얼마나 짐승같은 인류를 운영해온것이다
너희들의 죄를 보자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절대적인 신은 깊은 마음으로 인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있다라는 사실을 모르면 어떠한 국가든 민족이든 어떠한 지구상에 생명체든 사멸시키게될것이다
지금 지구의 핵무기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나약하기가 그지없는 인류가 얼마나 환경에 취약한 동물인지 짐승인지 아시는분들을 알것입니다
단지 인류 그대들이 그동안 이러한 보이지않는 절대적인 신의 보살핌을 되돌아보지않는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왔기에 그 귀중함을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나약함을 발견하게되니 말입니다
이번만큼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스스로 용서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약속하고 믿음과 실천을 해가는 국가와 민족들을 구하고 나머지는 사멸되거나 이들 국가들에게 복속당하게될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만들고 세계 전체를 천하통일 하고자한다 그만큼 엄청난 흘린 피의 댓가로 그 정도는 해야지 그래야 인류가 정신차리고 두번다시 아둔한 우를 범하지않고 죄를 범하지않기에 말입니다
절대적인 신의 성령의 통해서 세계 천하 통일에 초강력하게 절대적인 추진력과 지도력으로 집행해갈것입니다
세계 3차 대전을 그러한 각도에서 집행하게될것이니 지금 세계 모든 국가들은 연합이든 연대를할것이고 이미 기존에서 해온 연대국가 세력들도 있는것을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처신들을 하세요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실천을 소생에게 예우하지않으면 소생도 그대들을 믿지않습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신의 믿음도없고 자신의 육신도 불안정된 물질의 구조의 상인것을 그러니 그대들에게 신뢰 그 자체가 존재하지않는것이다
오직 그대들을 신뢰하는 매개체는 절대적인 신의 믿음에 대한 실천 모습뿐이다 그 모습들을 통해서 그대들을 신뢰여부를 판단할뿐이다
전세계 모든 국가와 민족과 모든 생명체는 아시겠습니까?
세계 지구촌 국가들을 하나로 세계 천하를 통일을함에 있어서 이미 이렇게 공개적으로 언급하는것은 세계 어느 국가든 세계 천하 통일의 주역이 될수가 있음을 동시에 지금 현재 세계 구도 질서속에서 깨어나지못한 그대들 국가나 세력들이나 종교 세력들이나 세계 천하를 통일하기위해서 진행해가고 있다라는 사실은 누구도부인하지못하므로
그래서 세계 천하가 통일 된후에 어느 세력이 어느 국가가 이기든 인류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의 희망찬 세게가 하나의 국가속에서 통일된 지금과 같은 국가 체제의 시스템이나 인류의 시스템으로 해서는 아니된다라는 사실은 중국의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이룬대업에 더 승화할수있는 깨달음을 갖추지않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세계 모든 국가들이나 사람들이 인류의 빛나는 업적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한 소생의 대안과 깨닫지못한 그대들의 대안을 상충시켜서 더 나은 인류의 미래 설계를 기대하는바이다
중국이 진시황의 중국천하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중국 그당시 백성들의 고통과 불행을 악업을 줄일수있는것을 보드라도 세계 천하의 통일의 필요성은 이미 인류의 고통과 불행을 줄이는데 크나큰 업적이되지않을수가 없는것이다
단지 진시황이 중국의 첨예하게 이해득실이 복잡한 그 당시의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 진시황이 좀더 많은 준비를 하고 중국을 천하 통일했드라면 중국 천하 통일의 정권 기간을 더 길게 연장할수가 있었는데
어차든 빛나는 중국 국가의 업적임은 인류의 빛나는 업적임에는 틀림없다 그에 비하면 이 대한민국 남북한은 참으로 부끄러워할줄 알고 많이 반성해야할 남북한 민족이다 살아가는 국민이라고하는 사람들은 반성을 하면서 살아가라 그러하지못하면 절대로 이제는 용납하지않을것이다
어떻게 하면 세계를 천하통일 할수가 있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세계가 제각각 나름대로 토론을 해가고 궁리를 많이 해가야 할것입니다
세계를 하나로 통일 하려면 먼저 자신들의 국가부터 높은도덕성과 책임성 청렴성 국가 사회 기강이 바로서야 하고 국민들로부터 권력의 자본의 힘으로부터 신뢰를 받는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지지의 힘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이것부터 준비가 되어있지못하다 그러면서 타국가를 정복하기위한 별의별 지랄같은 묘책만 세우고 헛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그러한 국가들이 세계 천하 통일을 이룬들 오래가지못하는것은 당연한일 자 그러니 세계 각 국가들은 자신의 국가에 내실화에 만전을 기하라는 이유를 알겠는가?
위의 진시황제 동영상을 보고나서
진시황제의 중국의 천하통일의 필요성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살아가는 사회와 정치권력 그리고 수많은 사상가들 지금 세계 인류가 살아가는 깨닫지못한 그 당시들의 사람들의 모습이나 지금의 세계 각 국가마다 인류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다를바가 없다고 본다
즉 그동안 인류는 태초이래로 지금까지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믿지않았고 실천해오지도 않았고 그리고 깨닫지도않았고 깨달음의 교육의 수행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도 않았고 그저 닫힌 인류의 세게에서 많은 인구를 번식해서 더 많은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려고 하고 그로인한 경제적 부국을 위한 종족번식증가를 위한 문제에 깨어나지못한 습성과 습관이 지금 현재 인류에도 여전히 반영되어왔다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 당시 진시황은 중국의 여러개 국가를 통일할 해야만 하는 당위성은 어느 국가든 추구해왔고 그것을 지금은 세계 각 국가들을 이점은 지금의 현존의 어느 국가든 이부분에 대해서 역시 지금 인류의 깨닫지못한 국가들이나 종교세력들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이의를 제가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진시황 그당시 사람의 육신으로 와서 대업을 달성한것 역시 다 하늘의 뜻으로 보면 좋고 천자로 보내진 육신의 영이다
여기서 만약에 그 당시 진시황제께서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만약에 권력을 잡지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부분에 이 점에 대해서는 조선의 임진왜란 7년전쟁을 통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면목을 비유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 임진왜란 승리를 거두고도 혁명을 꿈꾸지않고 위정자들손에 죽지않으려고 자살또는 죽음을 자초한 당시의 전쟁 상황을 중국의 천하통일을 하고 난 진시황이 그러한 권력 세게를 떠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것이다
역시 조선의 역사를 보면 그렇게되었다면 중국은 간만에 중국 천하통일을 대업을 달성하고도 다시 중국이 과거로 회귀했을것으로 단정한다
그 이유는 깨닫지못한 인간들의 욕망이 구심축의 인물이 사라졌기에 다시 오합지졸로 되돌아가는 깨어나지못하는 인간들의 짐승들의 동물들의 본성이기에
그러니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다시 강력한 통치 제도를 발휘하지않으면 아니되는 주변 인간들의 깨닫지못한 습성들이 강력한 통치를 요구되는 환경이다라는것이다
모택동의 문화 혁명이 제2의 진시황제인셈이지요
중국이나 다른 나라 국가와 이 대한민국 남북한 국민들의 확연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바로 중국이나 다른 나라 국가 사람들은 시대가 변해도 정권이 변해도 하늘에서 자신의 국가에게 획기적인 국가와 민족의 기로에 선 운명을 구해준 인사를 참으로소중하게 다루고있다라는 사실이고 그뜻을 정치적 시대적 관계없이 일관성있게 감사함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현실에 반영하고 있다라는점이다
그것이 이남북한 민족과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의 차이점이다 대한민국을 하나놓고보드라도 그러하다 그러니 그대들 국가나 민족이 잘될 이유가 없는것이다
충무공이순신 장군님 한분을 놓고보드라도 삼국통일한 김유신 장군을 놓고보드라도 그만큼 하늘에서 천자를 보내줌에 천자인지 똥개인지 이 조차도 구분못하는 국가와 민족은 항상 불행과 고통의 수난의 역사로 되풀이하는것이다 그러니 정신부터 무너지니 외세에 무너지는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소생은 천안문 광장을 가서 모택동 사진을 보면서 역시 중국은 그래서 흔들림없이 중국이 지금까지 진시황제의 중국 천하통일 정신을 잊지않고 실천해왔기에 어려운고비에 다시 중국 국가에게 모택동이라는 육신의 이름이지만 하늘의 성령으로 중국 국가의 최대 위기를 문화혁명으로 다시 구해준사실 그것이 지나고나서 역시 그정신을 이어받고자 기리는 자세 그러한점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였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가에 살아가는 국민들이 확고한 주인정신을 가지지못하기에 자신들이 이 시대의 국가의 주인임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데 그러한 정신 결여가 불행과 고통을 더욱 자초한다라는 사실이다
주인이면 범죄를 책임을 회피하면서 살것인가 개,노예이기에 책임을 회피하고 온갖 범죄를 짓고 살아가니 앞으로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은 뽑아버릴것이다 주인정신을 가지지못하는 남북한 국가영토에서 모조리 없애버린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신분를 막론하고 ..............
참으로 진시황제나 누구나 절대권력을 가지는것도 그러하지만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후의 절대권력을 누려야만 한다라는 당위성을 놓고 역사속에 수많은 절대권력자들이 그것을 이유로 명분으로 자발적으로 놓는다라는 사실은 즉 물려날줄아는 때와 시기를 모르면 항상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강박관념과 주변의 반대 세력들의 저항 절대 권력을 잃어버리면 발생하는 초조감 자기자신에게 다가올 위협적인 정치 생명의 힘에 자유로울수 없다라는 더욱이 깨닫지못한 세상사 사람들의 인심에 그래서 더더욱이 절대권력을 놓지않으려는 진시황제의 그 당시의 심적부담이나 현대의 세계 각 국가의 대통령들 역시 권력에 중독되어서 특히나 국회의원들
왜 사람들은 다들 권력을 쫓아서 살려고 하는지 다 자신의 인생 육신을 편안하게 살아보려고 그러면서 명예와 지휘를 행사하고자하는 국민들의 미려한 육신들의 깨닫지못한 삶들의 피눈물의 혈세를 통해서 자신의 부와 명예를 취득할수가있기에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충족시키려고 권력에 무임승차하려는 깨닫지못한 인간 육신들의 이해득실로 사람들은 권력을 쫓아서 공짜로 국민의 피눈물을 쉽게 벌수가 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인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개선되지못한 인류이다
앞으로 이러한 부분은 반드시 지구 전체에 근본적으로 개선될것으로 본다
소생은 오히려 지금 심정은 하루속히 이 세상을 이 지구를 떠나고 싶으나 지난번 저승사자가 말했듯이 더욱이 천명때문에 그래도 지금 단식하고 있는것이다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향해서 그대들때문에 즉 깨닫지못한 인간들때문에 세상에 온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신께서 이 인류를 위해서 베풀어주실 일때문에 지금 소생이 생명을 괴로워도 인내하고 있다 그러니 진시황제의 그러한 절대권력을 누려본들 뭔의미가 있나 다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서 해탈의 경지 열반에 올라가는 수행 정진이 제일 모습이다
온 세상 천지가 다 깨닫지못한 인간들의 세상인데 무엇을 더 육신에 집착하고말고할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이 지구전체의 앞으로 미래앞날을 신의 나라가 현실화되는 그 세계까지는 깨달음의 수행이 필요하고 수행하는 이유가 될것이다 이때가지의 모든 도수작업을 설계를 마치고 돌아갈것이다
인류가 깨닫지못한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죄인지는 그 자체도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짐승들이 태반이지요 지금도 이러한 글을 보고도 깨닫지못한 세계의 인간육신들이 태반이고 세계가 지금 세계 각 국가마다 변화와 혁신을 진행하는 시간이기에 이것이 끝나고나서는 집행시간이 들어갈지는 상황 체크를하고서는
그대들의 온 인류의 죄를 생명체들에게 죄를 묻게될것이다 세계 각 국가들이 변화와 혁신을 어디에 두고 할것인지는 실상은 어느 국가든 다 하나의 같은방향이다 그런데 그동안 세계 각 국가마다 본질적인 변화와 혁신을 해야 하는데 다른 공사를 해왔기에 수명이 짧아서 되풀이하는 변화와 혁신들을 인류는 해가고 있는것이다
인류에게 전세계 국가에게 공통적인 국가 사회마다 변화와 혁신안을 소생이 간략하게 언급해드렸지만 기본 원칙은 달라질수가없다 앞으로 미래의 시간과 공간세계를 지나가드라도 변화하지않는 절대적인 신의 가르침과 동시에 깨닫지못한 인간짐승들의 삶의 패턴 속성을 통해서 변해질수 없는 변화와 혁신의대안을 세계 어느 국가든 원한다면 알려드릴것이다
아래의 귀절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혁신 그러한 변화와 혁신은 임시 방편 인류 그대들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와 혁신의 대안이고 진정한 인류의 절대적인 신의 관점에서 부응하는 변화와 혁신의 안으로 대처하면 그러한 국가나 나라는 누가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흔들림이 없을것이다
그러니 가장 든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될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주인 제국의 주인이 되는 바탕을 이루게될것이다 여기에 최첨단 우주과학 기술문명에 융합적인 국가 시스템으로 얼마나 누구나 다 상상해보는 국가가 현실화될것이기에
참으로 깨달음의 수행에서 천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다려지는 마음 얼마나 힘든지 진시황이야 영원히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나 육신의 수명의 한계가 정해지듯이 소생은 하루속히 지구에서 절대적인 신의 대업을 마치고 지구를 떠나고싶다 지구안에 있으면 숨이차다 그것이 지금의 소생의 심정이다
더더욱이 절대적인 신의 믿음이 없는 실천하지않는 지금 이 대한민국 국가안에서는 절대적인 신의믿음을 그나마 실천하려고 흉내를 낸 국가에서는 그나마 숨이 트이겟지만 상대가 있어야 벗이되는것을
우주공간에 무수한 별들속에 외로이 떠있는 태양과 같다 태양의 이상의 빛을 발하는것이 깨달음의 해탈의 경지의 힘이고 절대적인 신께서 그빛을 내시는 힘이시고 그러한 수행 정진에 다가가기위한 일련의 어려운 수행정진 과정 참으로 쉬운 과정은 아니네요
하루속히 지구촌 어디에 어느 구석에 처박혀 계시는지는 모르나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구원을 기도하셔서 조속히 소생과 만나주시기를 바랍니다 소생을 너무 힘들게 만들지마세요
역사적으로 어느 혁명가든 바로 강력한 통체제도를 발휘하도록 그 나머지 사람들이 스스로 개닫지못한 습성에 의해서 혁명가들은 강력하게 통치 해가야만 하는 깨어나지못한 권력 주변의 환경이나 그리고 수많은 외부의 그러한 환경이 놓여있기에
그래서 진시황 당시의 물론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 역모하는 세력들이 생겼을것이고 어느 혁명시대이건간에 그러한 반대 세력들이 역시 혁명가들이나 천하를 통일한 구심축의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암사시도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함을 그러나 그들이 깨어나지못한 단순한 권력의 욕망을 추구하려는 그릇에 불과하다
혁명가든 천하통일을 한 자들의 육신은 얼마든지 인간세게로 보내나 문제는 하늘의 선택을 받지못한 영들이 대다수이고 그러한 대업을 달성추진해가는 자들은 하늘에서 선택받고 육신의 몸을 빌어서 영으로 성령으로 와서 그러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하지못하는 대업들을 달성하는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대업을 달성하고 자신의 육신과 육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집착에 있어서 진시황이 그 당시 통치의 하늘의 뜻을 알고 제대로 통치했드라면 물론 2000년이 다된 이 시각에 이러한 소생의 깨달음의 대한 지혜를 그 당시 진시황이 알았다면 다 절대적인 신의 도움으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충무공 이순신장군님도 전장에서 사악한 내부의 ,외부의 적들을 살상함에 있어서 과감하게 그들의 명을 거두어갔으나 그래도 진시황과 충무공 이순신장군님의 육신적인 측면에서 정신적 측면에서 진시황도 그렇게 했으면 육신은 죽어도 그 영은 불로장생할수도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깨닫지못한 육신들은 다 제각각 좋은음식에 좋은 권력에 좋은집에 부귀영화와 절대권력을 누리려고하지만 그것은 다 깨어나지못한 하나의 일장춘몽의 허상들이다
진정한 불로장생과 부귀영화와 역사의 승리자는 진시황의 모습과 충무공 이순신장군님과 융합된 지도자가 되는것은 않인지
어차피 자의든 타의든 의사에 관게없이 이미 인간의 육신의 몸으로 와서니 세상을 살펴봄에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서 절대적인 신의 인도로 동시에 이 세상에 깨어나지못한 이 지구촌 행성안에 모든 생명체들의 살아가고있는 모습속에 불행과 고통 악순환 끝임없이 이어오고 있으니 그래서 소생은 세계 3차 대전을 집행함에 시작은 진시황제처럼 강력한 통치적인 집행을 해 가야만하다라는 사실은 변함이없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렇게 하지않을수가 없기에 그러므로 개닫지못한 국가나 민족이나 모든 생명체는 이미 생사 여타권을 거두어갈수있는 지휘권을 절대적인 신으로부터 하사받았기에 그렇게 해 간다
진시황도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나서 모든 제도와 법규 국가 통치제도를 시행하였으나 지금 현재 소생은 세계 천하를 통일함에있어서 이미 통일후의 대안을 통치해갈 시스템을 미리 언급해주고 있다
이는 그만큼 통일후의 진시황처럼 국가제도정비를 하려면 많은 장애물이 생기고 동시에 반발 세력들이 많이 생기기에 안그래도 깨닫지못한 백성들에 피배를한 국가들의 반발 민심에 그리고 이틈새를 노리고 권력을 챙기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기에
지금 현재 지구 전체를 세계를 천하를 통일한들 별반 다를게없기에 그리고 대안을 미리 언급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드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므로 더나은 세계 천하를 통일한후에 더나은 인류의 미래 희망의 지구가 되기에 말이다
지금 지구가 195개 국가로 되어잇지만 소생은 진시황은 6개로 지자체 연방형식의 국가 통치제도를 했다면 소생은 이 지구전체를 7개의 국가의 지구 제국의 연방제로 관리 통치 해갈것이다
진시황당시 역시 국가마다 중앙집권제형태와 유사한 일률적인 통치방식을 사용했지만 그 당시 역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이 약한 시대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도 세계 5000개 종교가 있으면무엇하나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실천하는 국가가 없고 민족이 없는데 그래서 절대적인 신의존재를 인류를 통해서 보여줄것이고 세계 지금의 모든 종교를 사상을 존중하나 하나로 융합하는 원칙속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것이다 그래서 얼마전에 언급한대로 깨달음을 중심으로하는 국가 통치운영과 그리고 깨달음을 깨닫지못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살아가는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들의 삼라만상 생명체들을 특별히 통치해가는 시스템으로 나누어질것이다
그래야 인류의 악순환의 고리가 단절되고 통치자의 천자의 국가 통치부담에서 심적으로 자유로워지기에말이다 항상 이러한 깨닫지못한 인류의 역사의 시간에는 부패하고 불행과 고통이 신음하고 하면 등장하는 금기운이다 어느 역사를 지나도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제는 항상 세계 7개 국가통치함에 이들의 엄선된 금인들이지만 깨달음의 도량을 수행받아서 이들의 금인 금기운 군부 세력들이 각 국가마다 그 중심에 세워놓고 깨닫지못한 백성들을 강력하게 통치해갈것이다 굳이 자발적으로 깨달음을 강요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의 도량이 나오지않기에 그리고 적절한 인구 활동증가의 기폭제로 삼기 위해서 적절한 통제력속에서 통치해갈것이다
그동안 과거나 지금처럼 절대적인 신의 믿음도 없고 완전히 개망나니처럼 무절제 무통제의 깨닫지못한 사람의 형상을 사람으로 보지않고 짐승과 같이 취급해간다 그리고 모든것이 맞춤형으로 통치되어갈것이다
세계 7개 국가핵심브레인 축을 지금의 UN역활보다는 강한 그러한 축을 구성해서 세계7개 국가를 통치해간다
그렇게되려면지금의 195개 국가의 무질서와 각 국가마다 국민들의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모든것을 통치가능한 획일화 작업을 구조조정 작업을 하게될것이다
그래서 세계3차 대전을 통해서 시행되고 집행될것이다 그러니 지금 7개 국가을 선정함에 살펴보고 있으니 소생에 대한 예우를 아직도 하지않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나의 노여움을 쌓게 하지마라
소생이 이러한 대업을 기틀을 다져주고 소생이 육신이 역활이 끝나면 차후에 다시 7개 선택받은 국가중에서 왕중왕을 가리게 될것으로 본다 역시 구심축이 소생이 사라지기에 그대들이 역시 깨닫지못한 습성이 도져서 그러면 그동안 지금보다도 많이 대청소가 되고 안정궤도로 진입하기에 다시 절대적인 신의믿음이 충실하게 실천해온 국가에게 왕중왕의 자리를 주게될것이다
군사의 힘으로 주는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우주과학 기술 문명도 상당한 진정을 이룩했을것으로 본다 그리고 지구행성의 수명도 가팔라지고 있을것이다
그러면 또 여기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실천해온 백성들을 가려내어서 다음 행성에 안주하도록 인도해줄것이다
아주 크나큰 스케쥴 메뉴얼에 의해서 지금 인류는 진행되어가고잇는것이다 그러니 세계 어느 국가든 강대국이든간에 세게 천하통일을 진정으로 해야만 하는 이유를 절대적인 신의 믿음앞에서 실천하는 자세를 보여라는것이다 그것도 보이지못하면서 세계 천하를 통일한다고 소생앞에서 주름잡는것인가?
비록 진시황께서 폭정도 있었겠지만 이미 그 정도는 하늘에서 예상하고 육신의 죄를 알기에 그래도 진시황제의 공덕이 빛나기에 지금까지 중국이 분활이 안되고 2000년간 지켜온것은 다 하늘의 보살핌은 바로 진시황의 살아생전의 빛나는 공덕때문이다라고 본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 남북한 민족을 보아라 얼마나 추잡하게 살아왔는가? 이놈들을 보면 아작을 내버리고싶으나 이번이 마지막이다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을 했으면 그것에 대한 그 당시 역사적인 관점에서 감사하게 절대적인 신에게 여겨야 하는데 감사하기는 커녕 통일에 대한 진정한 신의 고마움을 모르니 여태까지 코닥지만한 나라하나가지고 분단되어서 질라발광하니 이제는 용서해주지않는다
이 당시 삼국 통일에 대한 역사적으로 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을 모르니 지금 남북한 4343년동안 그모양 그꼴로 살아온것이다 지금의 남북한의 현존의 모든 정치 세력들을 역사적인 심판을 받고 싶지않으면 처신들을 똑바로 해라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앞으로 세계 천하를 통일해감에 있어서 대한민국이라고 남북한이라고 보아주지않는다 그대들이 깨닫지못하고 깨어나지못하면 지금도 노무현정권보다도 더 살얼음이 녹아서 한순간에 빠져들어가는 형국이니
세계적인 관점에서 국가운영의 정책의 실수를 용납하지않는다 너희들은 언제 소생에게 예우를 갖출려고 하나 소생은 지금 단식한지가 어제인데 아직도 소생을 베프게 만들것인가?
세계 3차 대전까지의 대한민국 남북한 전세계의 모든 동향들을 다 기억할수가 잇기에 그것을 지금도 6년동안 글을 기록함에 하루하루 분석하고 연계해서 이어져온것임을 알아야 할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상황 역시 그러할것이다 그러니 현명한 처신을 그리고 개달음을 수행하시기를 그리고 절대적인 신의 믿음에 대한 실천을 보이고 소생에 대한 예우를 보여라는것이다
그것이 다 절대적인 신에게 예의를 갖추는것과 같다 지금 이러한 글을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한번 기록하는 글들은 하게된다라는 사실이다
소생이 어느 나라로 먼저 갈까요 세게 각 국가들이 소생을 초청하면 얼마든지 가서 지원해드릴것이다
최소한 세계 천하 통일의 야망을 꿈꾸지못하는 국가나 민족이 있다면 포기를 하시고 문을 닫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일본을 먼저 갈까요 일본이 초청해주면 이 역시 가서 힘을 실어드리이다
러시아로 갈까요 영국으로 갈까요 차라리 미국으로 갈까요 이스라엘로 갈까요 아프리카로 갈까요 중남미로 갈까요 그러니 국제 사회가 지금 합의된 의견을 보여라는것이다 올림픽 하나 가지고도 국제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대립을 바라는 그대들의 정신 상태 기본이 되어있지않다
그러고는 뭔 패권주의 세계 지하조직 삼합회와 야쿠자 그리고 지하 무장조직들에게 갈까요 이들은 그래도 행동파들이기에 속시원하게 지금 국제 사회의 정치 세력들보다는 잔머리들을 굴리는 세력들이 아니기에 이들에게 세계 천하 통일을 세우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줄까요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받들어모시는 국가나 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서 힘을 보태들릴것이다
진시황제(BC 259~BC 210)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을 건국한 중국최초의 황제이고 이름이 정(政)이다.
여불위의 공작으로 왕에 오른 장양왕의 아들로 13세에 즉위하였다. 여불위가 자신의 첩을 잉태시켜 진나라에 불모로 잡혀있는 진 공자 자초(子楚)에게 바치고 그가 진나라 태자로 선정되도록 주선한 후에 그가 귀국해 태자로 봉해지니 안국군이다. 안국군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가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곧 진시황이다. 황제 출생의 비밀을 눈치 챈 정왕이 여불위를 제거하여 자살케 만들었고, 태후와 불륜을 맺고 있는 노애가 장수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사(李斯)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16년여 동안 한(韓) ·위(魏) ·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한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고 아방궁을 지었다. 그러나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고 대규모 공사를 벌이는 등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기원전 210년 지방 순시 중 죽었으며 그가 죽고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는 통일된 지 16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진왕 정은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228년에 조나라를, 225년에 위나라를 멸망시킨다. 223년에 초나라를,222년에 연나라를,마지막으로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다. 수백년간 춘추전국시대를 펼쳤던 중국이 순식간에 통일된 원인은 무엇일까? 단순히 진시황의 영웅적인 카리스마 때문인가?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제후국은 140 여개국이 넘었다. 춘추시대 200여 년(기원전 722-481년) 사이에 제후국간의 합병전쟁으로 수많은 제후국이 사라진다. 결국 춘추시대 말기에는 수십개 국만 남는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전국칠웅이라고 불리는 7대 강국과 몇 개의 소국만 남는다. 말기에는 소국마저 다 사라지고 7국만이 남는데 최종적으로 진나라만 남고 다 사라진다.
天時란 하늘이 때를 주었다는 말로 이는 사실 사후적인 승인의 의미 밖에 없다. 제갈량이 온갖 노력을 하고도 한황조 부흥을 못하자 천시를 못얻었다고 하였듯이. 물론 이 천시를 진나라 통일에 적용하자면 주나라의 토대가 된 지역을 진나라가 차지하게되었다는 점이 진나라가 주나라라는 천시를 이어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 여기에대해서 필자대신에 2008년 4월 11일 현재 김칠기(wneswkcic)
소생의 입장은 이미 누차 언급 해 드렸습니다 천명은 받아놓았고 지금도 앞으로도 천시를 향해서 이미 이 역시 시간을 시대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 될지 선몽을 받았기에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변화와 혁신 그리고 내실화를 다져가라고한것이고 대한민국 남북한도 예외가 아니기에 역시 강조해드렸습니다 그러니 소생이 절대적인 신으로부터 천명과 천시를 받아놓았습니다
이 정도 설명해주면 소생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가고 있는지 다 절대적인 신의 보살피으로 인도해가는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가치보다도 아주 큰변화의 회오리 바람이 불게될것입니다
중국의 천하통일을 만약에 변방의 신라 삼국 통일이 먼저 이루어졌으면 어덯게 되었을까?
참으로 국토지리적으로 바다를 끼고있기에 지리적으로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린 삼국 국가의 지리였기에 불가능하지만 만약에 먼저 중국의 천하 통일보다도 먼저했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리고나서 다시 중국이 천하통일을 즉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한후 얼마가지못하고 삼국지의 속에 진시황의 중국 천하통일이 그첫단추이면 두번째 중국 천하통일을 안정시키기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므로 중국 천하가 통일이 되었다고 그 당시의 패배한 국가들의 국민들 우러나오는 마음까지 통일된것이 아니므로 다시 격동기를 겪어야만하는 중국 천하통일의 고난인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대륙 전체를 통일했을것이다 그리고 안정된 통일을 하기위해서는 끝임없는 통일의 대의명분에 반하고 자신의 국가나 민족을 찿으려는 세력들의 반발이 나오기에 그러한 세력들을 잠재우는데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므로
그러나 변방에 수세에 몰린 신라는 동해바다를 끼고 있기에 이것이 중국 본토 동남부에 위치하였고 지금은 지금의 한반도는 가야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가야가 지금의 일본으로 내려가고 한반도에 있든 가야는 광개토왕이 밀어버린것이고 그 빈자리를 중국 본토에 있든 빈약하기 그지없는 삼국의 국가들이 중국의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한지가 언제인데 거의 500년내지 600년의 다소 시간의 차이가 나지만 어렵게 시리 삼국 통일을 한셈이다
아마도 이 당시에 삼국 통일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그 댓가로 즉 지원해 준 댓가로 실상 중국 본토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원래는 하나의 자손아래에 나온민족인데 다 제각각 주인이라면서 부족을 만들고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그렇게 해오다보니 중국 본토가 여러민족으로 갈려진것이고 삼국국가 민족은 역시 도토리 키재기의 역사를 낭비하고 있든 시간이다
그래서 신라가 대의명분에 진시황의 중국 천하통일을 한 500년내지600년 지나서 여기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을 하기위해서 200년동안 준비해온것과 가야가 한반도 영토에서 물려나고 지금의 일본 열도로 나가게된것 등 맞물려 동아시아 역사는 돌아간것으로 추정한다 그동안 역사왜곡이 워낙 기나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대로 성립된 역사가 나올리 만무하기에
소생이 보기로는 이러한 정황속에서 진행되어온것이다
일본어 문자와 중국어 문자가 유사하다 일본어 어원의 출발점은 중국어이다 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동아시아의 주인이 바로 삼국이 주인임을 환인의 후손이 이들임을 강조하기위해서 한자어도 동아시아 공용어로 사용해왔지만 독창적인 우리 언어를 한글을 창제하신것도 삼국 통일의 가치를 가진것이다
지금도 한글을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로 여기지않고 퇴색시키려는 무리들이 어디인지는 잘알고 있다 이제는 그러한 행보는 무의미함을 알기에 알려주는것이다
이제는 세계 천하를 통일 해 가야하므로 세계 천하를 통일함에는 반드시 한글로 세계 천하를 통일하게될것이다 사용하는 언어는 수많은 국가의 언어로 사용하드라도 가르침은 분명히 한글로 한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비판하는 세력의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수천년간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당시 신라로서는 삼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처신이다라는것은 분명하다
세계 천하를 통일해도 후에 그러한 부작용 반발 세력들이 생길것이다 이제는 모든것을 시간을 속도를 단축시켜서 조기에 국민들 스스로 우러나오는 세계 천하 통일의 당위성을 알게될것이다
진시황의 중국 천하 통일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유가 있는것 같다 중국를 천하를 통일 해 주는 대신에 절대적인신께서 우리 인간이 알수없는 참뜻을 배려한것으로본다 그것이 무엇이나하면 ....ㅎㅎㅎ
가르처줄수가 없다 나중에 기회가 생길것입니다 그때에 아시게 될것입니다
어느 역사이든간에 혁명가옆에는 항상 하늘에서 보낸준 책사가 있는것이다 즉 책사가 있기에 진시황이 중국 천하 통일을 한것이지 모택똥의 문화혁명에도 바로 아무개 책사분이 상당한 공로를 하신것으로 안다 이는 역사적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를 불문하고 그러하다
충무공 이 순신 장군님에게 하늘에서 더 책사를 보내주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확고한 과거의 조선이 아니라 진정한 조선을 세웠고 일본을 복속시켰을것이다 그리고 혁명을 해서 이러한 미래의 조선의 불행을 고통을 막았을것인데 책사가 없었기에 지는 싸움은 애시당초부터 하지않는 이순신장군님의 전술에서 보듯이 그러하다
임진왜란7년전쟁을 일으킨 깨닫지못한 조선의 죄가 너무나 크기에 이미 그러한 토양인데 하늘에서 책사를 보내준들 무의미함을 하늘에서 아시기에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장군님도 조선의 정치 권력의 위정자들의 염증이 신물이 났을것이다
항상 책사들을 토사구팽시키니 역사는 마치 대업을 주인공 자신이 성공한것으로권력의 힘으로 깍아내리니 권력의 불행은 연속성을 갖는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인것이다
地利는 지리적 이점을 말한다. 진나라의 경우 국경이 천혜의 지형조건으로 둘러쌓여서 지키기가 용이했다. 동쪽의 경우 함곡관이라는 아주 훌륭한 관문이 있어서 이 관문만 지키면 더이상 적이 국경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한번도 수도를 침략당한 적이 없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정국거를 비롯한 여러 수로건설로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늘린 경험도 있다.
: 여기서 세계 지도를 놓고보면 그래서 세계 질서의 두개으 큰 구도에서세계적 군사적 힘의 수평적 균형을 러시아와 중국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에게 강조해드린것이고 동시에 남북한은 대한민국은 그러한 지리적 영향에서 자주중립 통일 국가릐 중립적인 위치로 서고자합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두 구도의 대전에서 중심을 잡아야 생존이 가능하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강대국의 미국이나 어느 국가의 주장에 지금 아프카니스탄 파병같은 과오를 범하지않을것이며 말려들어가지도 않을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이 중국을 올림픽을 이유로 압박하는 이유도 그러한 맥략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세계 어느 국가의 정상이 참석하지않아도 신경쓰지마세요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에게 중동 국가들에게도 그만큼 지리적 상황을 고려해서 그동안 알려드린것입니다
人和란 인간관계가 화목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나라의 행정제도의 장점 등을 말한다. 전국시대 중기에 각국에서 변법을 시행했지만 진나라만이 가장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그 결과 국력도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인화부분에서는 인류가 절대적인 신의 존재와 믿음을 보시는 날이 올것으로봅니다 즉 인류가많이 깨달아지도록 그래서 인터넷으로 무한정 글을 기록하는것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세계인들이 많이 깨달아지는데 도움이되고 훌륭한 용맹스러운 전사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기록해드리는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을 지나도 인류의 진정한 평화는 먼저 인간 자신의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와 안녕에 기여하는데 있습니다
변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해서 진나라의 국력을 신장시킨 이는 진효공 때의 상군(상앙)이다. 그는 법체계를 세우고 이를 실행하고, 생산력을 증가시켰다. 다만 그는 상업을 억제했다. 그의 사후에도 그가 세운 체제는 그대로 이어져서 혜문왕과 소왕 때에 계속해서 국력이 신장된다. 특히 진소왕 때에는 이미 나머지 6국이 모두 진나라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된다.
: 여기서는 전세계가 경제가 어렵고 불안정한 세계 안보정세는 서서히 다가오기에 그래서지금 세계가 정체되어있는 국가 운영의 통치모델이 이미 한게에 봉착했습니다
국가라는 조직 시스템이 고장이난것이지요 그러한 고장난 국가라는 기계를 붙잡고 살아가니 인류가 정체가되고 지금 인류가 어려움을 겪고있기에 그에 대한 대안을 맛배기로 내놓고잇습니다
더욱이 깨어나지못한 국민들이나 정치 세력들이나 종교세력들이나 이구동성으로 남탓을 하고 있는셈이지요 다 자신들의 탓인것을
진나라가 다른 6국과 달리 강한 이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 단순한 지리적 이점과 경제,법시스템 만으로 모든걸 설명할 수 있을까?
1. 진나라는 왕권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신권이 약하다. 다른 6국이나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은 대개 왕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왕족들이 벌이거나 신하들이 왕권을 농락했다. 곧 비명에 죽은 왕들도 많고,쫒겨난 왕들도 있고,신하들도 한번 밀려나면 일족이 몰살되기도 하고, 임금을 우습게 알고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진나라의 경우 철제 주조권이 왕에게만 있어서 왕족이나 신하들이 왕권을 넘보지 못했다.
2. 진나라는 타국인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신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탓에 가능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기득권 세력들이 강하기 때문에 타국인이 크게 등용되기 힘들었다. 물론 몇몇 예외는 있다. 오나라가 손자,오자서를 등용한 점, 연나라가 악의를 비롯해 많은 이를 등용해서 제나라에 설욕한 경우 등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경우 그때 한번 뿐이었다. 잠깐 국력이 신장되었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이에 비해 진나라는 목공 때에 백리해,건숙, 효공 때에 상앙, 이후에도 누완,장의,범수,채택이 있었다. 진시황 때에는 여불위,이사 등이 있었다.
3. 변법의 성공
왜 진나라에서 변법이 가장 성공적으로 시행되었을까? 이는 일단 진나라의 기득권세력이 약하고 왕권이 강한 면에도 기인하지만 상대적으로 문화가 낙후되어서 쉽게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야만족이라고 하는 민족이 가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게 바로 이런 요인 때문이 아닐까? 어줍잖은 지식,문화,의식에 젖으면 더이상 발전이 없다. 조선왕조가 대표적인 경우 아닐까? 노나라가 제나라에 항상 끌려다닌 이유도 비슷한 경우다.
진시황의 경우 여불위가 상앙이 세운 시스템에 더해서 상업을 발전시킨다. 이미 천하대세는 진나라로 모아지고 있었다. 여기에 뛰어난 장수들과 행정관료들이 즐비했다. 물론 이들 모두에게 알맞은 직분을 주고 전적으로 맡긴 진시황의 용인술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구체적인 진시황의 업적이나 행적은 생략한다.
많은 이들이 전국시대 말기에 다른 나라들이 지리멸렬했다고 평가한다. 왕은 무능하고 귀족들은 탐욕스러워서 결국 다 망했다고. 그러나 그걸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전체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너무나 지쳤고, 진나라라는 제대로된 강국을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 아닌가? 진나라가 통일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희생도 작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런 천심이 통해서 진나라가 통일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천하백성들의 믿음을 진시황이 배신한 순간 진나라는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진나라 또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진나라가 잘나서만도 진시황이 위대해서만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진시황은 지가 잘나서 통일됐다고 오만해져서 결국은 대업을 이루고도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미디어몹] aciles
http://blog.joins.com/choys56/8503311 등록일 : 2007-09-16 09:59:33
[列國志 兵法 ·마지막 회]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일 벌이지 않고 쉬는 게 난세 수습 첫걸음
박동운 언론인
난세에서 살아남은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가. 난세의 위정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그 통일제국의 멸망은 이에 대한 답을 던져준다. 선군(先軍), 강권 정치로 통일한 지 15년 만에 무너진 진제국, 그리고 ‘국민과 더불어 휴식한다’는 ‘與民休息’ 정책으로 태평성세를 이룬 한(漢) 유방. 그들이 통일의 과제를 안은 한반도에 던지는 교훈은 무엇인가.
진시황(秦始皇·기원전 259~기원전 210)은 여러 나라가 할거하던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선구자이자 중국 문화권 최초의 통일제국 창건자였다. 개인적 선악시비의 평판을 초월해 그가 역사에 특기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한 해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본격화해 6국(韓·魏·楚·燕·趙·齊)을 각개격파로 정복할 때까지 17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이로써 500여 년 춘추전국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이 됐다. 통일제국 진은 진시황 사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는 분단국가의 통일 여정에서뿐 아니라 통일국가의 멸망 과정에서도 중요한 시사적 교훈을 후세에 남겼다.
우선 춘추전국의 통일 과정을 보자. 6국이 멸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진시황의 무력을 첫손에 꼽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국을 멸망시킨 주체는 6국 왕조와 신하 자신이었다. 그들은 전쟁 내내 ‘바보들의 행진’만 거듭했다. 침략자를 욕하는 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엉터리 지도자를 추대하고 맹종해온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멸망 전야의 정치현실에 절망, 책임을 느끼고 멱라강에 투신자살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진시황은 무력행사 이전에 항상 외교와 모략을 선행함으로써 희생을 극소화하는 동시에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개혁, 또 개혁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동방 진출을 본격화했을 때 이에 맞서 총동원 체제로 저항한 나라는 조(趙)와 초(楚)뿐이었다. 두 나라는 면적과 인구 등 모든 면에서 덩치가 가장 컸으나 지도부가 어수룩해 온 나라에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나머지 나라들의 지도부는 부패와 무능, 기회주의에 찌들어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 전국시대 6국의 공통점은 간단명료하다. 한결같이 개혁에 실패한 국가라는 사실. 6국의 무지몽매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욕심만 챙겼을 뿐 유능한 개혁 인재의 등용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그에 반해 진은 지도부의 확고한 개혁의지 아래 생기와 의욕이 넘쳐흘렀다. 상앙(商?) 이래의 개혁 성공과 그 지속은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증대’를 확신하게 했고, 천하를 향한 ‘개방적 인재등용’의 길을 열었다. 진나라와 6국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향후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지를 예언하고 있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출현시킨 진제국은 고대 중국 문화권에선 최초로 중앙집권적 전제 군주제하의 통일 관료국가였다. 이는 중국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특기될 만한 ‘대사건’이었다.
중국은 현재 한(漢)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을 아우르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자 13억명을 거느린 세계 최다 인구 국가다. 국토의 총면적은 960만㎢로,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 중국은 이러한 양적 거대함 이상으로, 문화와 국민 자질의 질적 우수성 때문에 세계의 이목을 끈다. 이미 중국인은 나침반·화약·종이·활자 인쇄술이란 4대 발명품으로 인류문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은 또 어떤가. 오랜 ‘정체의 잠’에서 깨어난 발랄한 기상으로 온 나라가 약동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중국의 ‘초강대국’ 진입은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한(漢)민족 고대사에 기록된 맹목적인 혼란과 불안의 연속, 즉 난세(亂世)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주(周) 왕조에서 시작되고 춘추전국시대에 갈피를 잃은 종법제(宗法制·문벌주의)와 분봉제(分封制·할거주의와 당파싸움, 지역감정 등)를 전국적 범위에서 타파하고 일소했다. 그 대신 군현제(郡縣制)와 율령제(律令制)를 실시했다. 이는 중앙에서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하고, 법률과 규칙 및 특명에 따라 일하게 하는 참신한 제도로,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관찰되는 한(恨)풀이, 분풀이식 인사나 사찰, 정보정치에서 비롯된 정실 인사와는 판이했다.
진시황은 통일과 동시에 법과 규칙,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특히 문자 표기의 통일을 이룩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국어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로마자 표기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정리해 후대 교육에 기여하는 것과 같았다.
공(功)이 더 큰 ‘희대의 폭군’
진의 통일은 한(漢)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대하고 국가의 경계선을 명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백성에게선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외적을 막기 위한 국방관념도 정착됐다.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축조하다 중지된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연결해 비록 토성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면모를 갖춘 것도 바로 이즈음. 만리장성은 그후 명(明) 왕조 때 벽돌 등으로 개축됐다.
진시황은 산업과 경제의 중앙집권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경제력을 수도권으로 집중시켜 일부 야심가들의 지방할거를 예방한 것. 지방의 부호들은 자신들의 수공업 시설을 정리해 서울로 이사를 와야 했다. 또한 각지의 목축업자와 광산 개발자 등 신흥재벌을 중앙으로 초청해 상여(賞與)를 베풀면서 조정의 의식이나 회의 등에 참석케 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한 지방 관료에겐 이를 그의 치적으로 인정했다. 변방의 이민을 장려하고, 이주민에 대한 보호에도 노력했다. 오늘날의 광둥성과 랴오닝성 지역에 농부들을 처음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케 한 주인공이 바로 진시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 대한 호칭이 ‘차이나’ 또는 ‘시나’로 표기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진(秦=Qin 또는 Chin)이 중국을 대표해 그 존재를 세계에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위대성은 그만큼 크다. 특히 마오쩌둥 이후 현대 중국에선 진시황의 역사적 역할을 유난히 높게 평가한다.
사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과 조선 왕조는 진시황을 형편없이 폄하했다. 그는 항상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됐으며, 그의 학정은 중국의 발전을 지연 또는 추락시킨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한 ‘격하작전’에는 유학자들이 선두를 섰으며 관계(官界)의 위선적 왕도(王道) 정치론자들이 합세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의 통일 정치에는 분명 공(功)과 과(過) 양면이 있다. 하지만 공이 더 컸다는 게 현대 중국인의 시각이다.
진시황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매번 노력으로 돌파한 난세의 정복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박해했거나 반대한 자들은 모조리 죄인으로 단정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혼란과 난맥 속의 시대 환경에서 기강을 확립하고 질서를 정립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강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15년을 넘기지 못했다. 짧은 정권수명은 독재와 강권, 그리고 정보정치의 공통적 말로이지만, 진제국의 멸망은 진시황의 개인적 실정(失政)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계속되는 난세에 지치면서 살아남은 한국인은 흔히 ‘어디를 바라봐도 제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없다’고 개탄해왔다. 피로곤비(疲勞困憊)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동원보다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춘추전국 말기의 중국인 또한 그러했다. 옥스퍼드대가 펴낸 사전 해설에 의하면 ‘난세(turbulent days)’란 ‘정신 차릴 수 없는 돌연한 변화와 혼란의 연속, 그리고 국론 분열에다 드물지 않게 터지는 폭력사태가 거듭되는 세월’이라고 씌어 있다. 간명하고도 빈틈없는 설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열된 상태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태평성세의 안거낙업(安居樂業)을 보장하려면 새로운 ‘건설’에 앞서 우선 ‘휴식’부터 부여해야 한다.
독일 통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독 헌법 체제로의 흡수’라는 형식으로 격동 없는 휴식을 우선 선택한 것. 한마디로 독일의 통일정치는 ‘보살핌의 정치’였다. 그것은 흡수 통일의 중심인 서독이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사회복지가 결합된 사회국가(Der Sozial staat)였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선군(先軍) 정치의 전국적 확대를 의미했다. 곳곳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으며 천정부지의 세금부담 증대, 징수와 징발의 남발, 무자비한 징용과 징병의 강행 등 서민들로서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을 계속 강요했던 것이다.
천하통일 15년 만에 ‘천하대란’
막다른 절망은 최후의 용기를 부르는 법.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로 즉위하자(기원전 210년), 천하대란의 여명은 새롭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기원전 209년 7월 장마철에 징병돼 북쪽으로 끌려가던 농촌 청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소문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으며 삽시간에 퍼졌다. 9월에는 벌써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등의 세력이 등장했다.
진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천하통일 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항우와 유방 간의 초한(楚漢)전쟁이 벌어져 3년을 끌었다. 진의 통일제국은 또다른 천하대란으로 이어지면서 합계 6년간의 난세를 초래한 셈이다.
진의 통일이 난세 수습에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방이 창건한 한(漢) 왕조는 국민이 갈망해온 시대적 요청인 태평성세를 이룩했다. 그 비결은 바로 ‘국민과 더불어 휴식한다’는 이른바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실천이었다. 이는 이미 왕조 초창기에 정책 기조로 확립된 것이었다. 한 왕조는 새 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말 바꾸기를 하지 않았다.
서구의 현대 학자들은 ‘정치학의 어머니는 역사’라고 단언한다. 또 역사적 교훈을 존중하는 중국의 전통적 문장학에서는 ‘옛일을 말하면서 오늘의 시사 문제를 평론한다’는 이른바 ‘담고론금(談古論今)’을 중시한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뒤이은 진시황의 통일천하 전후사는 21세기 남북통일을 앞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적 교훈을 던져준다. 시대환경의 변천과 입지조건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자타(自他), 고금(古今)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유사한 과오는 언제든 되풀이될지 모른다.
오스트리아의 경험
일찍이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회고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서 배운다지만, 나는 남의 경험에서도 배우기를 즐겼다”고 갈파했다. 한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기성찰’도 중요하지만 ‘주변관측’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야 할 시점이다. 반도국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외교적 자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분단이 타율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듣기에만 흐뭇한 ‘자주통일’ 구호에 현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 중국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이뤄졌다. 당시 통일에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뿐이었다. 중심 국가로서의 종합국력 증대, 특히 무력의 강화와 민심(民心) 장악이 바로 그것. 민심의 장악은 통일국가의 난세수습과 국정안정 과정에 있어 필수 조건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점령하에 분단됐던 독일어 사용국 오스트리아의 통일 과정을 분석해보자. 우선 그 나라의 좌우 정치인들은 ‘외세의 작용’이라는 분단 현실을 직시하고 성급하게 ‘자주통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무렵 미·소·영·불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전범국가인 독일제국과 같은 국가라는 의미에서 징벌적 성격의 ‘분할점령’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제국을 약화하기 위해 중립국으로의 분리 독립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좌우 정치세력은 진정한 자주통일을 위해 한길에서 협력했다. 즉, 속으로는 자치능력을 배양하면서 밖으로는 외세를 자극하지 않고 체면을 세워줬고,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세련되게 적응하는 ‘솜씨’를 보였다. 그들은 일단 연합국과의 협상 대상을 단일화하기 위해 좌우 합작을 형성했다. 완전한 통일·독립에 앞서 사실상의 단일 정권을 수립한 것.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애호 중립의지’를 한결같이 홍보하고 또 법제화했다. 외교에서는 주변 세력의 어느 일방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자세를 고수해 모든 이해 당사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
이렇듯 슬기롭고 자주적인 정치환경 적응 능력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통일·독립은 1955년 5월 ‘1+4’의 합의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복 직후의 남북한은 제각기 ‘일변도 외교’와 ‘사상투쟁’의 고집스럽고도 우매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복수(複數)의 외세에 의한 민족해방이라는 희비 쌍곡선의 현실을 몰각하고 있었던 것.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광복 직후, 냉전체제 돌입 직전의 시점에서 남북통일의 첫 번째 기회를 놓친 셈이다.
독일인의 지혜
그렇다면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독일의 국토분단은 애초에 복수의 외국 군대에 의한 분할 점령이라는 징벌적 의미가 컸으며, 독일의 재통일은 동서독 쌍방 주변국들의 한결같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후 미소의 ‘동서 냉전’이 표면화하면서 쌍방이 각기 자국 점령지역을 군사동맹의 전초 기지로 이용했다.
그러다 1989년 12월3일, 드디어 경천동지의 역사적 전환이 도래했다. 소련의 붕괴 기운과 동구의 대변혁을 배경으로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회동한 미소 정상이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하의 동독과 미국 조종하의 서독은 각기 냉전시대의 이용 가치를 상실했다. 나아가 주변국들에 대한 ‘무해성’만 보장된다면 독일 통일도 마다할 바 아니라는 국제정치의 통념이 묵시적으로 성립됐다.
냉전 종식을 전후한 이러한 국제적 환경을 양독(兩獨) 정치인과 국민은 슬기롭고, 또 침착하게 이용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 개혁), 동구의 대변혁(자유화, 민주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서산낙일(西山落日), 냉전의 종식과 같은 객관적 통일조건의 성숙에 대해 양독 정치인들은 영토론과 민족주의의 포기, 주변국들에 대한 전방위적 친선외교로 응대했다.
우선 동독의 통일운동은 소련의 의심과 반발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동구 각국의 보편적 개혁운동과 보조를 맞춰 나갔다. 처음에는 통제된 계획경제의 관료주의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다가, 점차로 민주화·자유화 요구를 부각시켰다. 군중 동원에서도 결코 정당이 서둘러 표면에 나서지 않고, ‘연대(連帶)’나 ‘시민 포럼(Forum)’을 앞세웠다. 객관적 조건 형성을 보아가면서 점차로 통일운동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확대해나간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한편 서독의 경우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사회복지에 걸친 3위 일체 ‘사회국가’ 건설이라는 통일조건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매력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독일의 통일은 ‘2+4(분단 쌍방에 더해 미·소·영·불)’의 납득과 합의조인에 따라 햇볕을 봤다. 1990년 10월3일의 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해방’의 이름으로 분단된 나라의 통일이, ‘징벌’ 대상국가의 통일보다도 더 늦어지는가. 왜 동북아의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는 냉전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도래한 통일 기회를 놓쳐야 했던가. 당시의 시대 환경이 독일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쌍방에 걸쳐 단결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즉 민족적 구심을 만들어낼 지혜와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부터 나무라야 할지 모른다. 한편으론 정치세력의 기득권 고수와 이기주의적 타산, 서민층의 지도자 선출 오류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 분석일 따름이다.
우리 겨레의 자치능력 부족과 같은, 이런 분석의 밑바닥에는 거듭된 민족적 비극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이는 현재도 우리 모두가 딛고 서야 할 문제점이기다. 또한 그 이상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반도국가가 처한 지정학적 조건이다. 즉 해륙(海陸) 쌍방의 열강 대국들이 각기 이 반도를 바라보면서 간직해온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이다. ‘역사’는 민족공동체가 잊지 못할 전쟁과 평화, 문화와 교류, 국책과 관행에 얽혀 있다. 한편 ‘좌표’는 개인의 처지와 인간관계처럼,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국제 관계에 결부되어 있다. 자타의 그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얽히고설켜 한반도의 역사는 불행을 거듭해온 것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점철됐던 동서냉전은 확실히 사라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에도 일반 중국인과 러시아인은 북한의 편의를 돌보는 일이 마치 자기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거꾸로 이런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은 남한 동포들에게도 살아 있다. 비록 늘 자각하진 않더라도 잠재의식 속에 건재하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작동한다. 고정불변은 아니겠지만 바로잡히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2+4’의 현실 인식과 자주정신
1945년 8·15광복은 잠깐 동안의 환희에 이어 오랜 기간의 고통과 비애를 맛보게 했다. 만약 앞으로 도래할 남북통일마저 그 모양으로, 순식간의 감격에 이은 새 난세의 개막과 더 큰 희생의 전란을 초래한다면 이 민족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부푼 기대가 실망으로 돌변하여 새로운 부조리와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을 상상하면 그 불행의 질과 양은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한 ‘마이너스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려면 이미 언급했듯 통일 직후의 정책 기조가 ‘휴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보살핌과 조정의 정치가 필요하다. 민심이 통일에 기대하는 바는 난세 수습과 태평성세이기 때문이다. 절대 ‘새 건설의 시작’이니 ‘주체혁명’, ‘과거 따지기’ 등을 선행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인권유린과 기아(飢餓)정치의 ‘주체’가 통일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대국적인 동질화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이때 집권세력과 정치인의 자질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 동서에 걸쳐 사심 없는 ‘공익 우선’의 경향이 뚜렷했다. 서독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동독 인민에 대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통일 비용을 서슴없이 감내했다. 동시에 동독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조국통일을 위해 그들의 권력, 지위, 특권, 체면 등 온갖 것을 주저 없이 내놓으면서 희생을 감수했다. 지도자 선출에서도 오류란 없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 또 이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외교적 필요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그 답은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반도국가의 내부단결과 자위태세가 만만치 않아서, 이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시도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지출·희생을 요구할 때다. 중국 수(隋)제국의 양제(煬帝) 후반기 한반도가 바로 그런 시기. 다음으론 해륙 쌍방의 외세가 국경 밖에서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세력균형을 설정할 때, 예를 들면 구한말 러·일 대결과 청·일 대결 국면 당시의 한반도와 같은 경우다. 그 외에 주변 강대국들이 각기 내란이나 분규에 바빠서 반도 진출에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주변 경합 세력 중 어느 일방의 침략이나 독주를 방관하지 않을 세계적 규모의 감시·견제가 가능할 때 등이다.
한편 한반도에는 안보를 넘보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감시망이 있어야 한다. 위기의 도래에는 항상 선행하는 조짐이 있다. 모든 위기는 ‘관계’에서 조성되기 때문이다. 그 조짐을 제때 감지하기 위해선 동물의 촉각처럼 식견에 바탕을 둔 통찰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안보가 위협당했을 때는 항상 위험신호가 있었다. 대륙 혹은 해양의 열강 중 어느 하나만이 반도에서 독주하면 우리나라는 그 종속국이 되든지 또는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또한 반도에 들어선 복수의 외세가 경합했을 때 우리 조국은 그들의 싸움판이 되거나 국토 분단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반도국가의 정부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변도 정책을 일삼으면, 소외된 다른 쪽의 개입 욕구를 부채질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일방 세력의 안보 정책에 위배되거나, 그 명예 내지 가치관을 손상하는 감정외교는 절대금물이다. 유사시에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응징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 ‘자주성’이니 ‘중개’니 하면서 전시효과에 분주하다가는 분규에 말려들어 발뺌하기가 어려워지고 국제적 빈축을 사기 쉽다. 실속 없는 허영외교에 들뜨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 여기서 위의 지적에 대해서 이미 수년전부터 이 대한민국 국가의 불행과남북한 민족의 불행을 막 고자 소생은 소생 나름대로 한국 위기상담센타 카운셀링업을 인터넷을 통해서 위기 감지를 체크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체크하고있고 대한민국의 톱니바퀴와 남북한 민족의 톱니바퀴 그리고 동아시아 톱니바퀴 전세계 톱니바퀴의 속성을 모든 전략전술을 다 파악했기에 세계 3차 대전의 미래 위기 역시 잘알고 있고 그래서 소생은 남북한이 자주중립 통일 국가를 언급해드린것입니다
이미 대한민국 위기는 30년동안 내리내려온 국가 위기 상황으로 흘려온것이고 그래서 이 남북한 민족이 4343년만에 최대의 위기이고 기회이다라고 언급해드린 이유도 여기에 있고 그러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민족의 호국신께서 나타나셔서 얼마나 다급하면 나타나셨는지 그러한 위기로 돌아가고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흘려온 남북한의 위기를 풀려면 세게 정세의 구도를 통해서 풀어진다라는 사실은 이미 소생이 언급해드렸기에 세계가 국제적인 합의도출속에서 가능하므로
누가 대한민국을 망치기를 좋아하고 바라는지는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가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들 남북한 민족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 인내의 고통없이는 아무것도 얻을수가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가 중국을 러시아를 중심을 잡아가야만 세계 질서가 그나마 안정이 지속된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은 동아시아 중심을 흔들기위해서 갖가지 묘책을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하고있다
여기서 대한민국 남북한도 이제는 합류해야만 할것이다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정치병법’ 등
독일의 통일조건 형성에서 으뜸으로 중시된 것은 ‘2+4’의 납득이었다. ‘2’란 분단 쌍방이고, ‘4’란 미·소·영·불이었다. 환언한다면 독일 통일은 서독의 흡수력 있는 내실 갖추기와 동독의 현실직시 등 지혜로운 민족의 자체 대응력과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현실의 파악과 순응 등 국제 환경에 슬기롭게 적응해 낸 합작품인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근 100년 민족사에 깃들인 겨레의 비원은 요컨대 ‘난세 수습’이었다. 곧 신뢰의 인간관계와 안정된 사회생활의 영위였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오는 ‘6’이란 결국 ‘2+4’가 아니던가. 오직 그 성원들과 객관정세의 유동성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끝)
[월간 신동아 2006.04.01 통권 559 호 (p636 ~ 645)]
원제: Global Employment Trend January 2008
ㅇ 2007년
- 세계 GDP 성장률: 5.2%
- 15세 이상 취업인구: 약 30억명 (전년대비 1.6% 증가, 10년전 대비 17.4% 증가)
- 2006-2007년 창출된 신규 일자리 4,500만 개. 그 중 대다수(28%)는 남아시아에서 창출됨.
- 생산성수준 향상 (고용수준 향상은 1.6%)
- 실업인구: 1억 8,990만 명 (전년대비 소폭증가)
- 전세계 실업률은 6.0% 수준유지
ㅇ 2008년 전망
-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사태와 고유가 충격
* 선진국과 EU: GDP 성장률을 2.6% (4월)에서 2.2%로 하향조정, 일자리수는 24만개 정도 감소 예상
* 선진국과 EU국가 외 지역: GDP 성장률을 당초 전망에서 상향조정, 일자리수는 200만개 증가 예상
* 세계: GDP 성장률을 4.9%(4월)에서 4.8%로 하향조정
세계 경제의 성장이 둔화될 수 있지만 나머지 지역 경제가
선진국의 경기부진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전망
고용은 4천만 증가, 실업은 5백만 증가, 실업률이 6.1%로 약간 상승할 것으로 전망
ㅇ 2008년 세계 노동시장 전망
- 경제활동참여율: 65.6%; 청년: 54.6%; 여성: 52.5%
- 인구대비고용률: 61.7%; 청년: 47.8%; 여성: 49.1%
- 실업률: 6.0%; 청년: 12.3%; 여성: 6.4%
- 산업분야별 고용비율: 농업: 34.9%; 산업: 22.4%; 서비스업: 42.7%
- 불안정고용비율: 49.9%
- 노동생산성: 연간 2.1% 성장 (1997-2007)
한국 국가경쟁력 세계 38위…9단계 떨어져 대만·중국·인도에 뒤져
[파이낸셜뉴스 2006-05-11 08:21]
올해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이 지난해보다 9단계 낮은 세계 38위라는 평가보고서가 나왔다.
정부행정효율과 기업경영효율이 낮은 게 경쟁력 평가가 낮게 나온 주된 이유여서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규제개혁과 제도개선을 통해 정부 행정 및 정책의 효율을 높이는데 주력해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국가경쟁력 세계38위
스위스 국제경영대학원(IMD)은 10일 ‘2006년 세계경쟁력 연감’을 공개하고 우리나라가 전 세계 조사대상 61개국 가운데 38위로 평가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순위는 지난해보다 9단계나 하락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쟁력 순위는 아시아 지역 경쟁국가인 홍콩(2위)·싱가포르(3위)·일본(17위)·대만(18위)은 물론 중국(19위)과 인도(29위)에도 뒤졌다.
대만과 태국이 한국과 동반 하락했을 뿐 중국이 12단계, 인도가 10단계 급등했고 말레이시아·일본 등은 전년보다 순위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국가(15개) 중에서 13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 이상 국가(36개) 중에서 30위를 기록하며 바닥권으로 추락했다.
우리나라의 IMD 국가경쟁력 순위는 외환위기로 지난 99년 41위를 기록한 뒤 2000년에는 29위까지 회복했으나 2003년 다시 37위로 후퇴했다. 이후 2004년 35위, 2005년 29위로 상승세를 보여왔다.
한편, 미국이 지난 89년 이후 17년째 1위 자리를 유지한 가운데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호주, 캐나다, 스위스, 룩셈부르크, 핀란드 등도 10위권 이내에 들었다.
■정부행정효율 분야 순위 대폭 하락
IMD는 국가경쟁력 평가를 위해 ▲경제운영성과 ▲정부행정효율 ▲기업경영효율 ▲발전인프라 등 4개 분야로 나눠 분석했다.
이 가운데 경제운영성과 분야가 2단계 상승한 것을 빼고는 정부행정효율(47위), 기업경영효율(45위), 발전인프라(24위) 분야는 모두 하락했다. 특히 정부행정효율 분야는 지난해보다 16단계가, 기업경영효율 분야는 15단계가 각각 하락했다.
정부행정효율 분야의 경우 총외환보유고(4위), 소비세율(6위) 등은 높게 평가됐으나 외국인노동자의 취업금지관련 법률(59위), 성과 인종 등 사회적 차별(58위), 환율 안정성(55위) 등이 부정적으로 평가됐다. 기업경영효율 분야에서도 노사관계와 우수한 금융전문가 활용의 용이성이 나란히 꼴찌(61위)를 차지하며 경쟁력 상승의 발목을 잡았다. 주식시장지수(9위), 세계화에 대한 긍정적 태도(13위)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운영성과 분야는 유일하게 순위가 상승했으나 순위는 41위에 그쳤다.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강점은 장기실업률(1위), 실업률(6위), 상품수출(12위) 등이 꼽혔으나 생계비지수(59위)와 교역조건(52위), 관광수입(50위) 등은 약점으로 지적됐다.
발전인프라 분야는 24위로 분야별 순위는 가장 높았다. 광대역통신망 가입자비율(1위), 특허생산성, 광대역통신 비용(2위), 고등교육 비중(4위) 등이 호평을 받은 반면, 초등학교의 학생/교사 비율(56위), 대학교육의 사회요구 부합 정도(50위) 등은 바닥권이었다.
■규제개혁 통해 경쟁력강화해야
조원동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은 이번 조사결과에 대해 “조사시점인 지난 2∼3월의 고유가와 환율 급락 등 대외불안 요인과 함께 국가채무논쟁, 양극화 논란,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논란, 기업 로비자금 수수관련 회계투명성 문제 등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며 의미를 애써 축소했다.
그러나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 부문 효율성이낮은 것은 지난 몇년 동안 계속됐던 것”이라면서 “앞으로 이를 바로 잡는 게 경쟁력강화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는 글로벌 경쟁체제에 부합하게 규제완화와 제도개선을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세계는 세계 각 국가들이 국가 개혁 즉 변화와 혁신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가 향후
자국가의 국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될것으로 본다
영국의 불레어 전총리의 영국 국가 개혁이든 지금 프랑스의 사르코지의 개혁 의지 그리고 독일의 총리의 개혁 성공한점 그리고 중국의 개혁도 성공진열에 진행해가고 있는 중이고 미국의 개혁은 오리무중이고 러시아 국가는 지금 개혁의 시작중이고 일본 역시 개혁이 성공이지못하는것같습니다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국가도 지금 변화와 혁신을 하지못하면 이 기회를 놓치게되므로 부단한 혁신과 변하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으니 대한민국도 남북한도 이제 모든 그림들이 맥이 나왔고 우리 남북한 국가와 민족도 중대한 변화와 혁신의 기로에 서서 승공이나 실패냐 관건에 따라서 향후 국가와 민족의 머나먼 향해의 방향이 결정될것입니다
참으로 미국 국가를 위해서 한마디 언급해드립니다 지금 미국은 조지W부시 대통령 공화당 미국 국가 운영을 해오셨지만 미국의 차기 2008년 대통령에는 미국 국가도 대대적인 변화와 혁신에 적합한 인물이 미국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함을 알려드립니다 루즈벨트 같은 변화와 혁신을 하는 동시에 미국 국민들이 합의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이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미국을 구해낼것으로 믿습니다 (2008년 4월11일 김칠기 작성)
대한민국은 그동안 개혁을 외쳐왔지만 역시 실패이고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냐 절반의 성공도 거두지못한 개혁에 이 명박 정부가 들어셔서그리고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국가의 변화와 혁신을 실천할지 이것에 따라서 대한민국 국가의 운명이 달려있다
아울려 이명박 대통령에게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개혁 정책이라든가 리더?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싶습니다
참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당선하셔서 미국 국가의 어려운상황과 세계적 환경이 지금 이명박 정부에게 그리고 대한민국과 남북한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명박 대통령게서 ?아서 참고해주시면 국가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아시겠지만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인것을 미완성에 그친것을 이명박 대통령께서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적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 국내 처지로 보아서 큰 도움이 될것으로 판단되어서 권해드리고 싶네요
반환점을 돌아가는 참여정부( 오마이뉴스)
이제 참여정부 임기의 반환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각 개인들의 기대와 염원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참여정부의 개혁에 대한 성과를 평가할 때에도 만족과 때로는 실망으로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는 일반 국민대중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비교적 보수적이어야 하고 급진적인 개혁 보다는 충격이 적은 점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사회 일부분의 모험적이거나 부분적이거나 이론적이기만 성급한 주장은 조절되어야 하고 비교적 보수적인 주장을 써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반환점을 돌아가는 현실에서 변화에 대한 충격과 위험(Risk)만을 염려하여 지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처럼 성과 없이 세월만 허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경제부분에 대한 개혁과 성과를 되돌아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재벌의 개혁은 얼마나 되었으며? 금융시스템의 개혁은? 노동시장의 개혁은? 부동산 투기 문제의 해결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는? 지역 균형 발전론은? 금융허브론은? 동북아 물류 허브론은?
물론, 참여정부 출범시점을 돌아보면, 지난 세기말의 세계경제의 불황과 이와 함께 디커플링 되지 않으려고 국민의 정부에서 실시했던 개인신용 확대 정책과 부동산 부양 정책과 같은 단기적인 성장정책의 거품을 빼야 했으며, 세계화와 더불어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경제 흔들기 속에 위태롭게 시작된 참여정부 경제가 사상 유례없는 탄핵과 보수 기득권 세력의 끊임없는 발목잡기 속에서 숨가쁘고 어렵게 진행되어온 제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분만 돌아보더라도, 개혁을 이루고 시스템을 변화하지 않는다면 더 큰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세계 경제의 역사적 교훈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경제 부분의 개혁을 드잡이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공황시의 미국과 우리의 닮은 점
1929년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경제공황은 전 세계에 파급되어 자본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기와 불안을 가져 왔습니다. 지난 세기 최대의 비극이었으며 완벽한 시장을 전제로 하고 자유무역을 기초로 한 고전적 경제이론이 종말을 고하고, 국가의 간섭이나 계획을 인정하게 된 현대적 경제이론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가 성립되고, 이러한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제 2차 세계대전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 공황이나 경제적 비극을 앞두고는 투기가 만연하게 들어나게 됩니다. 적정 이윤보다 수익이 많을 때는 돈이 몰리고 한쪽으로 치우친 자본들이 과잉생산을 유도하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시키게 되어 경제공황이나 경제위기와 같은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1929년부터, 세계를 강타한 공황의 시작도 이와 같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수혜로 경제 중심지가 된 미국은 더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며, 기술발전으로 생산은 점점 늘어 나는데 반해 기계가 노동력을 대신함으로써 일자리는 급격하게 줄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소비가 줄어들게 되어 생산에 대한 수요가 부족한 상태가 된것은 당연한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급격한 수출증대로 미국 내에 자금이 넘쳐나고, 이러한 넘치는 자금은 건전한 투자와 생산과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식시장의 급등과 부동산의 급등을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수출은 증가하여 돈은 넘쳐나는데 소비는 늘지 않고, 부동산 투기가 만연해지는 오늘의 현상에서 지난 세기의 세계공황과 같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또한, 그때도 전임 후버 대통령이, 과잉 생산으로 인한 불황의 기미를 보이자, 집집마다 할부로 자동차를 2대씩 사고 냄비마다 닭고기를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이라며 개인신용 확대정책과 소비 확대 정책을 쓴 것이 전임 DJ정부의 카드를 매개로 한 개인신용 확대 정책과 닮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자동차 할부로 인한 개인신용 문제는 공황의 깊이를 더욱 크게 하는 한 요소로 작용 했습니다.
정작 생산과 소비에 쓰여야 할 돈이 투기의 용도로 쓰여져, 주가가 폭등하거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거품이 빠질 때에는 세계 공황이나 IMF 외환위기 때의 교훈에서 보듯이 정부도 속수 무책이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올 위기가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될 위험이 존재합니다.
미국과 영국의 개혁
1929년 10월말 이른바 하루 아침에 주가가 반토막으로 변했다는 블랙먼데이로 시작되는 미국의 공황으로 말미암아, 반이상의 주식이 휴지가 되고 부동산이 폭락하며 수많은 금융기관과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미국에서만 실업자가 1600만을 기록하는 등 4~5년을 불황의 늪에서 헤메이다가 잘 아시는 것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의해 극복 되었습니다.
물론 뉴딜 정책은 비상시의 정책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산업을 부흥시키고 분배의 불평등을 시정해 나가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새롭게 정비하는 개혁 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루스벨트도 산업 부흥법, 농업 조정법 등의 개혁법안들이 보수주의 자들의 반발을 가져와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는 등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당시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정책이 위헌 판결을 받은 것과 같은 일이 벌여졌던 셈이지요.
그 당시 영국도 보수당이긴 하지만 맥도널드 내각이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파운드화를 평가하며, 또한 실업수당을 삭감하고, 공공기관의 근무자들의 임금을 감봉하고 사회정책비를 삭감하며 직접세, 간접세를 인상하는 약간의 개혁(?)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영 연방을 통한 보호무역 정책으로 이러한 공황위기를 탈피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됩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개혁 실패
프랑스는 급진 사회당이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펴는데 주저하게 됩니다. 미국과 같은 과감한 SOC 정책이나 구조조정을 하지 못하고 영국과 같은 수당 삭감이나 임금이나 사회정책비를 조정하지도 못합니다.
뒤늦게 1935년에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펼쳐 출범한 ‘레온 블룸’의 인민 전선이 미국의 뉴딜 정책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뒤늦게 실시했지만 시기 문제로 이런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결국 시기적인 개혁의 실패가 프랑스를 불황의 나래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해 국가의 힘이 나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치주의자들이 집권하게 된 독일의 먹이가 되어, 자기 조국을 2차 세계 대전의 중심 격전장으로 만든 결과가 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회복하였던 경제가 대공황을 맞아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연일 계속되는 시위 앞에 무능력한 정부의 모습을 보이면서, 무능력한 공화국에 대한 환멸과 분노, 그리고 심리적 불안 속에서 국민들은 무언가 확실한 걸 원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제대군인 나부랭이들이 만든 나치당이 힘을 얻게 되고, 경제위기를 계기로 좌익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시위가 만연해 지게 되는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이때,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자본가들이, 제 2당으로 성장한 나치당에 가세하게 되고 이들에 의해 당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도록 조정하게 되어, 나치 전제주의 국가를 탄생하게 하는 배경이 만들어집니다.
그후, 히틀러는 1년 후 대통령까지 겸임하는 총통이 되어, 개혁을 빙자한 독재와 무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전제정치를 실행하게 되고, 결국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전범이 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눌려 개혁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한, 무능력한 정치인들이 기회주의적인 자본가들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했던 나치 정권을 만들게 되고, 인류 최대 비극인 2차 세계 대전의 씨앗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보의 주장만이 개혁은 아닙니다.
역사에서 보듯이 진보의 주장만이 개혁이 아닙니다. 요즘 비정규직 논란에서 보듯이, 무조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사회 정의에는 맞을지 몰라도, 일자리의 감소나 국민 전체적인 복지에서 볼 때에는 오히려 악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노동계나 경제단체들의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개혁이라면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간의 노동계 투쟁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노사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머지않아 긍극적인 쌍방의 패배로 연결 되어진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회색분자적인 어중간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정규직, 그 이면에는 정규직의 방임에 가까운 노동경직성이 담보 되어있고, 정규직의 상대적 혜택과 비개혁이 상존하기 때문임도 기억해야 합니다.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탄압을 하기 위하여 당근으로 주어진 혜택들이 아직도 여전히 비개혁적으로 존재하는 현실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형식만 산별노조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외국과 비교하여 전임자 수가 월등히 많은 것도 그렇고,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의심하게 하는 전임자 급여를 사측에서 지원받는 그런 행위들은 자신들의 개혁은 내동댕이 친 채, 기존의 기득권만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기업별 노조 체제가 될 것입니다.
재벌을 개혁하는 반면에 노동시장도 개혁하고,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 집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방의 개혁만 추구하거나 한쪽의 저항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기만 한다면 개혁을 위한 황금 같은 시간과 기회들을 날려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의 개혁이 미진하다면, 아직 이런 일방의 개혁만을 추진하는 세력들을 잘 조정하지 못함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글쓴이: 나다
조회수 : 31
06.11.29 01:54
http://cafe.daum.net/belt05/h5S/13
루스벨트 배우기 나선 노무현, 어떻게 다른가
[심층분석] 성공한 ‘뉴딜’과 발목잡힌 노무현 개혁의 비교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사람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개혁지향적인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역사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경제상태를 물려받았지만 취임직후 100일간 ‘뉴딜’로 불리는 일련의 개혁입법을 통해 각종 개혁정책들을 신속하게 집행함으로써 미국을 파산상태로부터 구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뉴딜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기업가와 부유층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도전에 맞서 혈투에 가까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처럼 루스벨트가 직면했던 정치환경은 현재의 한국과 비슷했다. 루스벨트가 속한 민주당은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32년 동시에 실시된 대통령 및 의회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 저항에 부딪친 개혁…루스벨트와 노무현 닮은꼴
이는 29년 발생한 대공황 국면에서 무능했던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과 의회에 대한 심판의 결과였다. 혁명적이라 불릴 만한 뉴딜정책이 루스벨트의 취임직후 신속히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주당의 의회장악으로 조성된 정치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행정부와 의회를 민주당의 손에 넘긴 보수세력은 사법부를 통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얼마전 한국에서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이전 위헌결정을 연상시킨다. 보수세력의 딴죽걸기는 시공을 넘어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일까. 보수파가 장악한 미 연방대법원은 국가산업부흥법과 농업조정법 등과 같은 핵심적인 뉴딜법안들에 대해 잇달아 위헌 판결을 내렸다. 국가산업부흥국과 농업조정국 등이 폐쇄됐다. 뉴딜은 큰 위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우회전략을 구사했다. 대법원이 위헌판결한 법들의 대체입법 제정으로 맞섰다. 그리고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자 그는 대법원과의 정면승부를 택했다. 우여곡절끝에 대법원은 뉴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서 갈등은 종식됐다.
보수파 장악 미연방대법원 뉴딜법 잇단 위헌판결…루스벨트 정면승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비롯 각종 개혁법안에 대한 보수진영의 격렬한 도전에 부딪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루스벨트가 통과한 험난한 세월은 여러모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대규모 ‘한국형 뉴딜’정책을 비롯해 여권 일각에서 보여주고 있는 루스벨트 열기는 두 사람이 직면해야 했던 시련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후 2년이 다 되가지만 경기불황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악화되는 게 아니냐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할 정도로 경제현실은 암울하다. 개혁을 최우선적인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노력했지만 이렇다할 가시적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3월 국회의 탄핵안 가결을 전후해 80%대까지 치솟았던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20%대로 곧두박질했다. 개혁은 지지부진한 반면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왜 루스벨트와는 대조적으로 노 대통령의 개혁이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진단하기에 앞서 격동의 루스벨트의 시대로 거슬러가보자.
지지도 낮은 노 대통령의 개혁…루스벨트와 무엇이 다른가
1. 경제살리기 뉴딜정책
루스벨트가 1933년 취임했을 당시의 미국은 한마디로 파산 직전에 있었다. 전임자인 후버 대통령때 발생한 대공황의 짙은 먹구름이 여전히 미국 경제를 뒤덮고 있었다. 전인구의 약 25%인 1300~1500만명이 직장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했다. 농촌에서는 농산물이 썩어넘쳐날 정도로 남아도는데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경제는 반토막났다. GNP는 44% 감소했으며 기업수익율도 50% 줄었다. 은행은 약 5천개 이상이 문을 닫았다. 미국인들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다.
이같은 참담한 현실에서 루즈벨트는 개혁의 최우선 순위를 경제살리기에 두었다. 뉴딜(New Deal)로 불리는 그의 개혁정책은 Recovery(부흥, 회복), Relief(구제), Reform(개혁)의 3R로 대부분 경제회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당장 일자리를 잃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극빈층에 대한 구제가 시급했다.
루스벨트는 우선 5억달러의 연방자금을 각주에 긴급 방출해 극빈자에게 무상으로 제공해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어 대대적인 공공건설사업에 착수했다. 토목사업국(Civil Works Administration)을 설립해 6백만명의 극빈자들에게 도로보수, 운동장, 공원건립 등에서의 공사장 일을 제공했다. 또 공공사업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을 설립해 다리와 댐건설, 병원 및 도서관 등 공공시설을 전국 각지에 건설했다. 유명한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도 그 일환이다.
루스벨트는 청년실업자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민간자원보존국(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를 설립해 미혼청년실업자들에게 나무심기 등과 같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CCC는 이들에게 먹을 것과 살 곳, 매월 30달러의 급여를 제공했다. 대부분 도시 빈민촌 출신들인 이들은 CCC가 마련한 캠프에서 같이 생활했다. 또 국가청소년국(National Youth Administration)을 설립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교생 및 대학생들에게 학교에서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공했다. 이들이 받는 금액은 월 5달러에서 15달러로 소액이었지만 수령자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총 900만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또 루스벨트는 정부의 고통분담 차원에서 공무원의 급여와 퇴역군인 연금을 약 15% 줄였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공무원 월급에는 손은 전혀 대지 않는 한국으로서는 생각해볼 대목이다.
이런 대대적 구제정책은 대공황하에서 가장 고통받는 저소득계층의 빵문제를 일시적이나마 해결시켜주었다. 그의 뉴딜이 열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생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피부에 와닫는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개혁(Reforn)정책이 Recovery(부흥) 와 Relief(구제)와 병행돼 실시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개혁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설득 절차가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을 통해 혜택을 보는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 정치적 기반의 강화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정치는 홍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2. 정치 홍보의 달인
루스벨트는 정치홍보에 매우 능한 지도자였다. 자신의 개혁정책을 ’노변정담’(fireside chats)으로 불리는 라디오 연설이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TV가 출현하기 전이었던 당시 라디오는 가장 효율적인 매스미디어였다. 루스벨트는 홍보매체로서 라디오의 뛰어난 효용성에 주목하고 이를 적극 활용한 최초의 정치지도자였다. 그의 노변정담은 12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30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언론과의 기자회견도 적절히 활용했다. 하지만 그는 관행으로 여겨졌던 회견방식을 내던졌다. 그당시의 관행은 기자회견시 기자들이 질문할 내용을 미리 루스벨트에게 준 뒤 일문일답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70년이 지난 현재도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회견이 이처럼 문제를 미리 보고 시험을 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회견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큰 발상의 전환이다. 루스벨트는 이같은 딱딱한 회견방식이 활력을 없앤다면서 사전 질문서 제출없이 즉석회견 형태로 바꾸었다.
정치지도자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메시지가 일관되고 반복적이며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루스벨트의 노변정담은 바로 그 전형이었다. 첫 노변정담에서 루스벨트는 은행들의 줄도산으로 자신들의 은행예금에 대해 불안해하던 미국 국민에게 자신의 수습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안심할 것으로 호소했다. 첫 연설의 청취자는 당시 미국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6천만명이었다고 한다. 국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은행위기가 진정국면에 들어가게 되는 등 대성공이었다. 그는 노변정담 때마다 당시의 핵심이슈에 대해 국민들이 궁금하는 내용들을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상세히 설명하고 정부의 대책을 제시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가최고지도자가 자신의 입장과 대책을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할 때 국민적 신뢰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노변정담의 성공사례를 통해 재확인하게 된다.
언변이 뛰어난 노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왜 성과없나
언변이 뛰어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도 솔직하고 직설적인 어법, 분명한 메시지, 호소력있는 화술로 지지자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대선승리도 이에 힙입은 바가 컸다.
그는 취임 초기에는 루즈벨트의 노변정담처럼 정기적으로 라디오 연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진행방식을 둘러싼 방송사와의 견해 차이로 무산됐다. 그 뒤 노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국민과의 대화’ 형식의 대담 이벤트를 몇차례 가졌지만 기대했던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예상밖의 부진은 작위적으로 연출된 인상이 너무 강해서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 점에 있었다. 대담의 내용도 문제였다. 국민들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거의 거론되지 않고 대통령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노 대통령의 주요지지자들이었던 네티즌들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싶어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세대들이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뒤 대국민 홍보전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스타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은 이른바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들이 노 대통령에게 악의적 보도를 일삼는 바람에 현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여론이 형성됐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청와대와 국정홍보처는 이에 대항해 인터넷을 통해 적극적으로 방어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5일 MBC라디오 여성시대 프로그램에 출연해 서민들의 민생고 등 경제문제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경제가 위기는 무슨 위기냐고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반복하던 그가 처음으로 서민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얘기하고 아픔을 같이 한 것은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국가지도자로서 구체적인 대책제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미흡하다.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프로를 듣고 과연 감동을 받았을까. 현시점에서 국민들이 갈망하는 것은 국가최고지도자의 구체적 대책이지 홍보성은 행사는 아니다.
3. 대공황의 진단
다시 루스벨트시대로 돌아가자.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미국이 직면했던 대공황이라는 경제위기를 전임자인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후버는 자신의 임기중에 발생한 대공황을 경기순환의 부산물로 간주했다. 경제체제의 구조적 문제로는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온적이고 영양가없는 대응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잘못된 대책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실업문제가 외국 상품의 수입에 따른 결과라고 오판했다. 그래서 수입을 줄이기 위한 차원에서 수입관세를 인상했다. 이는 교역상대국의 보복적인 관세 인상을 가져오고 결국 세계무역전쟁을 촉발시켰다. 그 결과 미국 공산품의 수출시장을 잃게 돼 제조업의 침체로 이어지는 등 상황을 한층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또 농산물 생산과잉에 따른 가격폭락으로 재배농민들이 큰 고통을 받자 후버는 정부가 농산물을 구매해 일정기간 보관한 뒤 다시 이를 시장에 방출했다. 생산과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재배과정의 합리화 등 농업생산성의 증대에 따른 결과였다. 생산과잉은 멈추지 않았으며 정부가 구매했던 농산물을 시장에 방출하자 더욱 큰 폭의 가격폭락이 초래됐다.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정책으로 문제를 악화시킨 것이다. 후버의 불황대책은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정책이 국가경제에 어떤 재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후버의 정책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던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원인을 경제체제의 구조적 문제로 파악했다. 만성적인 농산물 과잉생산과 가격폭락에 따른 농민의 상품구매력 저하, 포드 스템으로 상징되는 생산자동화에 따른 제조업의 생산성 급증, 그 결과로서 나타난 노동자의 구매력 저하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자유시장경쟁만으로는 수습이 어렵다고 봤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과당경쟁을 규제하고 정부의 중재하에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여 수요부족에 의한 경기불황을 극복해 나가자는 게 뉴딜정책의 주요 뼈대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국가재정에 의한 유효수요의 창출을 통한 케인즈적 처방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재정적자를 통한 공공소비 증대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뉴딜이 시간이 지난면서 경기부양 효과가 점차 반감되면서 그 효능성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됐다.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접어든 것은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였다.
가장 핵심적인 뉴딜정책은 국가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NIRA)이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노사정 대타협과 비슷했다. 노동자의 임금, 생산품의 가격 및 생산량을 노-사-정의 상호협상을 통해 결정함으로써 경제를 회생시키자는 내용이다. NIRA는 우선 노동자에게 처음으로 노조의 조직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최저임금제, 주당 작업시간상한제 등도 도입됐다. 이에 대해 기업가에게는 생산과잉을 막기 위한 생산량 및 가격 통제, 반트러스트법하에서 엄격히 규제되던 기업연합 등의 특혜조치를 허용했다.
뉴딜의 또다른 핵심인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은 농산물 과잉 생산과 농산물 가격 폭락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농작물의 경작면적을 제한하고 휴경농작지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상토록하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뉴딜정책 덕분에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 회복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워낙 경제상황이 위기적이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뉴딜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숨죽이고 관망해오던 기업가를 중심으로한 보수세력은 반격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루스벨트는 정치적 사활을 건 보수세력과의 한판 싸움에 들어갔다. 취임뒤 약 1년쯤 된 시점이었다.
4. 보수세력의 반격 “뉴딜은 사회주의적 정책” 색깔론
반뉴딜 공세는 나일론 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 세계최대의 화학기업이자 당시 미국 최대의 기업 이었던 듀폰사의 일가가 선봉에 섰다. 듀폰 일가는 다른 굴지의 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뉴딜정책이 반기업적이며 독재적 정책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공세는 조직적이고 색깔론 형태로 전개됐다. 뉴딜정책은 반기업적이고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이었다. 듀폰 일가는 "뉴딜은 반미국적이며 볼세비즘과 같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보수인사들은 "뉴딜은 미국사회를 슬금슬금 스며들고 있는 사회주의"라고 매도했다.
보수세력이 이처럼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뉴딜의 기본철학이 자유경제체제와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국가의 경제개입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루스벨트의 뉴딜식 경제회생정책을 스탈린이 주도했던 러시아의 사회주의식 경제개발로 의심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계각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가 이끈 전체주의적 경제개발 방식이 대공황 같은 심각한 결함이 없는, 자본주의적 발전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여기고 주목했다.
특히 노조의 조직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함으로써 기업가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는 점도 기업가들의 거부감을 불러온 또다른 이유였다. NIRA하에서 산별노조가 미국사상 처음으로 인정됨으로써 노조의 교섭력은 비약적으로 게 강화됐다. 노조의 활동도 크게 활성화됐다. 실제로 산별노조의 출현으로 자동자와 철강 등 대형제조업 분야에서 공장내 농성파업과 같은, 당시로서는 과격한 투쟁도 빈발했다. 기업가들은 이런 노조의 불법 과격행위가 루스벨트의 친노조적 뉴딜정책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다.
특히 루스벨트가 34년 상하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계기로 보다 선명하게 좌선회하자 기업가들의 반발 강도는 한층 거세졌다 역사적으로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의 중간선거 압승이 뉴딜에 대한 미국 유권자의 지지라고 판단하고 뉴딜을 지지하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자신의 정치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루스벨트의 좌선회는 실업자, 노령자,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의 복지를 위한 사회보장법 제정으로 절정에 달한다. 35년 1월 제정된 사회보장법은 미국사상 최초로 퇴직후 노후의 생활과 장애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까지 미국에는 유럽과 달리 사회보장제가 전무했다. 개인의 복지는 개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풍토 때문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가난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 탓이며 도태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다. 뉴딜정책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가난이 개인적 무능이나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사회경제적 지배력의 산물이라는 진보적 이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같은 사회보장법이 의회에 제출되자 보수세력은 반루스벨트 공세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사회보장법이 미국을 사회주의체제로 바꾸려는 기도라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기업가들을 비롯한 부유층은 사회보장제의 재원을 자신들에 대한 고율의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사실에 더욱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사회보장제의 재원을 고율의 누진소득세(연간 5만달러 이상의 개인소득에 대해서는 누진율을 적용하며 500만달러를 초과하는 고소득의 경우 75%의 세율 적용)와 법인소득세로 충당한다는 점은 이들로서는 수용하기 곤란한 제도였다.
5. 운명의 승부처 연방대법원
루스벨트 진영과 보수진영의 싸움터는 연방대법원으로 옮겨졌다. 의회조차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의 마지막 보루는 보수파가 지배하고 있는 연방대법원이었다. 연방대법원은 1935년 1월 뉴딜의 가장 핵심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산업부흥법을 위헌 판결함으로써 루스벨트에게 일격을 가했다. 연방대법원의 위헌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방대법원은 36년 1월에는 농업조정법을 위헌판결한 데 이어 퇴임철도노동자 연급지급법, 뉴욕최저임금제법 등 10개의 뉴딜법에 대해 줄줄이 위헌판결했다.
뉴딜법이 입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우월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연방헌법의 기본정신인 3권분립을 위반하고,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함으로써 연방제도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판결이었다.
당시 미 연방대법원은 9명중 7명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출신의 찰스 휴즈 대법원장, 윌스 반 디반터, 조지 서덜란드, 할란 스톤, 오웬 로버츠, 벤자민 카로조, 피어스 버틀러 등 공화당정권 때 임명된 보수파 대법관들로 채워져 있었다.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로 기존의 뉴딜정책은 일단 중지됐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굴하지 않았다. 위헌판결난 국가산업부흥법 대신 국가노동관계법(와그너법)을 제정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다 명확히 규정하고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도 명시적으로 규정해 노조활동의 철저한 보호를 보장했다.
루스벨트와 보수세력의 승부는 36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결판이 나게 됐다. 루스벨트가 재출마한 이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뉴딜정책이었다. 양 진영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으며 선거전도 총력전으로 전개됐다. 공화당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미국의 자유경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혁명세력을 증대시키고 있다고 색깔공세를 펼쳤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자신의 진보적 정치노선을 명확히 선언했다.
루스벨트는 뉴욕의 유세에서 “대결의 때는 왔다. 특권계급은 단결해 나를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고 보수진영과의 정면대결 자세를 천명, 지지자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선거결과는 루스벨트가 일반투표의 61%, 선거인단 523명을 획득하는 압승이었다.
6. 루스벨트의 연방대법원에 대한 반격 ‘대법원조직개편법’
이 선거에서 루스벨트의 압승은 뉴딜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던 보수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었다. 루스벨트는 대선의 압승으로 크게 고무됐다. 그 여세를 몰아 보수세력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일차적 공격목표는 연방대법원이었다. 보수파가 장악한 연방대법원을 그대로 두고서는 대선에서 아무리 압승을 거두어도 의회를 민주당이 장악해도 뉴딜개혁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재선 임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37년 2월5일 루즈벨트는 법원조직개편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9명의 대법관중 70살이 넘은 대법관 1명당 추가로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전체 대법관의 수는 15명을 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루즈벨트가 추가로 6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보수파가 장악한 대법원의 인적 교체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제정,시행될 경우 대법원의 대법관 분포는 보수파 7명, 진보파 8명(기존 2명에 추가될 6명을 합친 수)으로 진보파의 수중으로 넘어오게 된다.
37년 2월7일 루스벨트는 연설을 통해 뉴딜 위헌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을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대법원이 사법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정책결정기구로서 변질됐다"면서 "대법원은 사법부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초법적인 제3의 의회로서의 기능까지도 하고 있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법원조직개편법은 역풍을 불러왔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대법원개혁안을 지나친 행위라면서 반발했다. 루스벨트가 독재정치를 하려는 것 아니냐고 맹비난했다. 대법원 개편에 공감하는 일부 루스벨트 지지자들도 이같은 개편은 법률개정이 아닌 개헌을 통해서 실현되야 한다며 이에 동조했다. 비판자들은 이 법안을 ’대법원 봉쇄법’(Court-packing)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루스벨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부쳤다 그러나 의회의 반발이 워낙 거세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표류하던 법안은 보수파인 오웬 로버츠 대법관이 기존의 입장을 바꿔 뉴딜에 대한 지지를 천명함으로써 해결의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9명을 구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변경을 설명했다. 루스벨트의 법원조직개편법 제출로 위협을 느낀 대법원의 보수파가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 이어 또 다른 보수파 대법관이 정년퇴임했다. 이런 흐름속에서 대법원은 최대의 쟁점이었던 사회보장법과 국가노사관계법 등이 뉴딜관련 법들을 잇달아 합헌판결했다. 대법원의 보수파가 루스벨트와 타협한 결과였다. 루스벨트와 연방 대법원과의 뉴딜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법원조직개편법안은 의회에서 끝내 부결돼 루스벨트에게 상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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