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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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작성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비밀 파일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관련한 미국CIA정보 공개


이 자료는 다시한번 점검해 보는 차원에서 모 언론 잡지사에서 2000년도에 기사화된것을 다시 올려봅니다
지금 미국 CIA는 정보 공개 차원에서 60~70년대 시절의 대한민국과 관련한 정보 파일중에 고 박정희 대통령 암살에 대한 X파일을 공개 해 준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모 인터넷 방송사에서 그 파일을 입수한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미국의 지금 정치권에서 그 부담을 덜어주시는것이 좋을듯합니다

중요한것은 한미간의 불미스러운 사건과 오해에 대한 진실도 다 밝혀지고 풀어내는것이 새로운 한미 동맹간의 신뢰구축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라는 사실은 그 맥을 소생은 더욱 정확하게 뚫고 있으니 미국 정보 당국에서 광범위하게 공개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것이 미국 국가에도 대한민국에도 한미 양국에도 양국의 국민들에게도 크나큰 도움을 받을수가 있기에 드리는 말슴입니다

소생이 왜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암살을 집착하는가라는 반문에 명성황후 사건이나 임진왜란 사건이나 과거의 잘못된것을 바로 잡지못하니 국가가 불행해졌기에 그러한 악순환이 이어져온것이다라는것이며 미 국무부가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관련한 미국CIA정보 공개할지 안할지는 자유이지만 지금의 싯즘에서 소생은 다각도적인 측면에서 요구하고 있는것입니다

미국이 남북관계를 가지고 미국이 북한에다가 대한민국에다가 양다리작전하는 이유는 잘 압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래서 소생이 남북한을 북한이든 대한민국이든 바로 세운다라는 목적이 거기에 있기에 지금 남북한이 민족이 무엇을 지향해가야 하는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향하기는커녕 똥구멍딱아주느라고 바쁜 남북한 정치 세력들인것을 그만큼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그래서 민족과 남북한의 운명에 배수진을 치고 국제 사회를 상대로 처리해갈것입니다

지구의 운명도 당연히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해주고도 남북한 민족이 정신을 차리지못하면 이제는 하늘이 그대들 외세들의 국가보다도 먼저 버릴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하니 정신차리지못한 국가나 민족은 더는 용서하지않을것입니다


미국 정치 관료분들도 쥐도 새도 모르게 비일비재하게 암살당하는 사례가 한두건있나요

그런 의미의 미국 정치가 이루어지면 미국 국가 자체 존재 여부가 의심될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미국 정치의 양심을 살리고 대한민국 남북한 정치 양심도 살리기 위해서 요구하는바이니 알아서 하시요

소생도 미국 국가의 본질을 잘 알려고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살아야만 미국의 영주권을 얻어야만 미국인이 되는가 소생은 전세계인이 되고자합니다

그래야 미국이 잘못걸어가면 어드바이스 해주고 대한민국이 잘못 걸어가면 어드바이스 해주고 세게에 중요한 국가들이 잘못걸어가면 어드바이스 해주는것입니다

그대들과 생각하는 관점과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단순하게 할일없어서 이런데 찿아와서 글을 적지도 않으며 시간 낭비도 하지않습니다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인류사가 새로운 정치 모델을 패러다임을 설정 해 가야만하기에 그렇게 소생이 주장하는바입니다


미국이 작성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비밀 파일

70년대 초 한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이분법이었다. 힘을 가진 자들의 경이로운 권력 유지술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처절한 생존술의 교차점이 바로 한국 정치의 현주소였다. 한국의 정객들이 넘나든 것은 명분뿐이었던 민주와 반민주의 분계선이라기보다는 야망과 좌절의 경계선이었고, 모든 것은 ‘박정희’ 대 ‘반(反)박정희’로 귀착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저 멀리 제3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야 마땅했다. 그러나 미국은 실제로 한국 정치의 제3자가 아닌 당사자였다. 여당과 야당 사이, 민주와 독재 사이, 언론인과 정객 사이, 남한과 북한 사이,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는 늘 미국이 있었고, 심지어 이후락과 정일권, 박정희와 김종필 사이에도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양극단 사이에서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속삭였고, 때로는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미국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모든 것을 기록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보관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는 한국 정치의 이면사가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한국 현대사 자료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워싱턴 소재 비영리재단 인터내셔널 센터의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팀은 최근 워싱턴 시내 펜실베이니아 애버뉴와 인근 메릴랜드 주에 있는 제1, 제2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한국 관련 비밀 자료들을 수집, 주제별 분류와 한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 작업은 미국의 정보공개법(FOIA, 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올해 초부터 비밀 해제되기 시작한 1973년 이전의 국무부 자료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가장 최근 비밀 해제된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방대한 비밀 문건(A4 용지 총 1만2000장 가량) 가운데에서 한국의 국내 정치에 관련된 자료를 ‘신동아’가 KISON 프로젝트 팀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이흥환·정광호 미국 KISON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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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의 김대중 비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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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27일)


1970년 12월27일 윌리엄 포터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은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이른바 ‘개인 파일’이다. ‘김대중 이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전문의 내용은 김 의원의 개인 이력에서부터 정치 경력, 미국에 대한 태도와 주한 미 대사관의 김대중 의원에 대한 평가 등을 담고 있으며, 4개월 남짓 후에 치러질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점이 김대중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것인지를 분석해놓고 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미국관과 주한 미 대사관이 김 후보를 평가한 항목에는 ‘제한 인원만 열람 가능’이라는 비밀 분류 급수가 매겨져 있는데, 이 전문을 작성한 포터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근무한 4명의 요원이 시기별로 김 후보를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에 대한 대사관 평가’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파일에는 4명의 각기 다른 대사관 관리들이 별도의 시기에 작성한 김대중 씨의 성품에 대한 자료가 있다. 첫 번째 것은 1960년도에 작성된 것인데, 그를 ‘유쾌하고 지적이며 솔직하다’고 기술해 놓았다. 두 번째는 1965년에 작성된 것으로 ‘솔직하며 독단적’이라고 평했는데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긴 하지만 대사관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한 대화 비망록에는 ‘긴밀한 접촉이 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 초반에 작성된 평가서에는 그가 ‘진지하고 온건하며 사려 깊은 정치인으로서, 대사관과는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씌어 있다. 가장 최근의 평가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지 일주일 후에 작성된 것인데,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드러내 보이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온건하긴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 전문의 요약문에는 주한 미 대사관이 보관하던 ‘대사관 파일’과 당시 조사 자료를 기초로 김대중 파일이 작성됐다고 밝히고 있는데, 4가지로 분류된 ‘대통령 선거에서의 취약점’이라는 항목에서는 박 정권 때 활동한 김대중 후보의 ‘수입원과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지적해 놓았다.


김대중 후보가 미국에 밝힌 초기 이력


김대중 의원이 신민당의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1970년 9월이었다. 같은 해 12월17일 포터 주한 대사가 국무부에 전송한 ‘김대중 이력’ 보고서에는 다음 해(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분석해놓은 부분이 들어 있다.

‘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됐음. 그러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0년대 후반, 전에 한때 친(親)공산주의자들이었던 멤버들이 조직한 보도연맹를 위해 반 공산주의 연설을 행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대중은 초기 한때 좌파에 경도됐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反)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지적해줌.

10일 전 김대중은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자신의 초기 활동에 대해 말해준 바 있음. 이에 따르면, 해방 후 그는 약 6개월간 좌익 신민당에 관계했으나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에 반대해 당을 떠났음. 김은 또 자신이 1946년 10월 목포 파출소 습격사건에 참가했던 것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는 장남을 출산하는 부인 옆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음.

김은 또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1950년 목포가 공산주의 점령 하에 있을 때 공산당에 의해 감금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음. 그는 공산당 패주로 구출됐음. 미 육군 정보참모부가 한국 정보계통 관리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보계통 인사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상황을 종합해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수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김대중의 출생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시 그는 24세였으나 한국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대중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기피로 불릴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대중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에는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공민 해안경비대는 지역 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인 자원 단체임.


71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 국무부의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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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이긴다"


70년대 초 한국의 국내 상황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69년 3선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권 대파란의 후유증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10월17일까지 전국 40여 개의 대학이 한 달 넘게 문을 닫고 있었다.

70년대가 열리자마자 정인숙 사건이 터져나온다. 3월 초였다. 정 여인 사건은 정치권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해 11월에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났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좀체 가라앉을 줄 모르고, 정치권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나 야당인 신민당 할 것 없이 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를 향해 줄달음친다. 이러한 혼란과 혼탁의 와중에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국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워싱턴의 국무부와 서울의 미 대사관은 한국 대선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정보력을 다 가동했다. 이미 국무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년여 전부터 한국 정치권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선거 판세 분석을 위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70년도의 국무부 비밀 전문 가운데 최소한 20% 가량이 71년 한국 대통령 선거의 추이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내용이었다.

71년 4월15일 국무부의 유서 깊은 정보 분석 연구팀인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 내놓은 ‘한국: 역대 선거 분석’이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 역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반영하는 문건 가운데 하나다. 이 보고서는 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평가서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박 대통령의 지도 아래 비교적 공정한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만약 매력적인 야당 후보의 활기 찬 선거운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과잉 행동을 보일 경우 분위기는 뒤바뀔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48년 이후 한국의 선거는 부정 부패와 폭력으로 얼룩졌다’며 역대 한국 선거사를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시대, 정치 공백 시대, 박정희 시대의 개막, 1967년 대통령 선거, 1967년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A4 용지 석 장 분량에 각 시대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이 비밀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1971년에 대한 관점’이라는 항목에서 조심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다.

‘김대중 후보의 약진세가 계속될 경우 비교적 공정하고 평화로운 선거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과 그의 측근 추종자들이 패배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과잉 행동을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과 행정부 내의 하급자들이 행정부의 권력과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엉망이 되다시피한 1967년 국회의원 선거의 재판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불행이 겹치는 꼴이 된다. 즉 강력한 힘의 전략은 국내의 안정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박에게 있다. 김대중이 운동가로서 재능이 있긴 하지만, 박이 공정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일을 불과 닷새 앞둔 71년 4월22일. 미 국무부의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 장관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마샬 그린(Marshall Green) 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도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4월22일자로 비밀 분류된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망록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일일 보고를 보내오고 있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60만 명의 청중을 동원하며 정력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 하루 전인 4월26일. 긴장 속에 서울에서 선거전을 지켜본 포터 미 대사는 ‘선거 최종 요약’이라는 제목의 비밀 전문을 워싱턴으로 띄운다. 여야 후보의 마지막날 유세 상황을 주로 담고 있는 이 전문은 ‘선거를 취재한 일본 기자들은 주한 일본 대사관 요원들에게 이번 대선 경쟁은 너무 아슬아슬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번 선거가 내가 후보가 되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박정희 후보의 마지막 유세와 “이번 선거야말로 한국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150만 표 차이로 승리를 장담하는 김대중 후보의 막판 공세 등 최종 유세 상황을 균등하게 다루고 있는 이 전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선거일의 일기 예보는 전국적으로 맑고 따뜻할 것이라 함.’

박정희 후보의 승리였다. 득표 차이는 90만 표였다. 미국이 ‘타고난 캠페이너’라고 평한 김대중 후보의 탁월한 연설 솜씨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후보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박 정권이야말로 꺾기 힘든 상대라는 것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워싱턴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이런 비관론을 펼치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워싱턴에서 국무부 고위 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 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냐?”고 물었던 사람이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국무부의 비밀 문건들은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에 이미 박정희 후보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통령 당선 확정 발표가 있기도 전인 4월28일, 국무부가 백악관 헨리 키신저 보좌관 앞으로 보낸 문서에도 미국의 이런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 박정희 한국 대통령에게 보낼 축하 전문.

박에 대한 신임을 확인한 투표였다는 말 외에는 선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 야당에서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지만,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와 언론 보도에 의하면 차분하고 질서 있는 가운데 치러진, 그런대로 공정한(reasonably fair) 선거였음.’

선거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은 ‘한국: 선거 이후 권력 구조의 새로운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는다. 정치적 유동성이 증대한 상황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정치력 복원, 김대중의 부상 등 3인의 향후 정치적 위상에 초점을 맞춘 이 비밀 보고서는 한국 정치의 미래는 역시 ‘불투명’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다음은 이 비밀 보고서의 내용 중 위 양김씨에 관련된 부분이다.

‘당의 보스이자 정보부장이었고 최근에 총리로 복귀해 장기간에 걸쳐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김종필은 한국의 가장 강인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가장 숙련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한때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지만 1968년 3선 개헌을 둘러싼 갈등의 와중에 권력을 잃었다.

4월의 대통령 선거 직전 그에게 선거 운동의 핵심 역할이 주어졌고, 김은 이 기회를 유효 적절하게 이용해 선거운동 연설가로 대중적 이미지를 굳혔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세 번째 임기가 마지막이며 후계자를 양성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김종필을 박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무총리로서 김의 위상은 취약하다. 정부의 실수에 대한 비난과 불신을 한몸에 받게 되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며, 박 대통령은 다른 국무총리들을 그렇게 해왔듯이 그를 희생양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내에서 김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허락할 것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김은 또 신민당 의원이 의석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상대해야 한다.

선거 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야당 의원 김대중은 대중 앞에 나타나 활기 차고 강도 높은 선거 일정을 잘 소화해냄으로써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달리 김대중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슈를 가지고 선거를 치렀는데, 현상 유지를 반대하고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면서 정부 정책과는 다른 제안을 내세웠다. 이 제안들은 선거판을 휘어잡았고 신민당에 대한 평판은 부쩍 좋아졌다.

김대중은 이제 대통령과 김종필을 제외하고는 어떤 현역 한국 정치인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 뛰어난 대중 연설 기술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할 당내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했는데, 전통적으로 분열 양상을 빚어온 신민당을 1970년 11월 치열한 전당대회에서 하나로 묶어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냈다.’


정일권이 본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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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1월15일)


1971년 1월15일자 미 국무부의 비밀 대화 비망록은 3개월 후에 치러질 한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국무부 고위 관리들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국과 미 의회의 관계, 정일권의 방문 일정 가운데 하나인 미국 농업용 관개수로 시찰 및 세미나 참석 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명석하고 활력있는 사람으로 평가함. 그러나 김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함. 1950년 한국전 당시에 김대중은 20세였으나 군 복무를 하지 않았음. 한국의 안전은 군에 의지하고 있음. ‘김이 어떻게 그들(군부)을 컨트롤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더욱이 김대중은 학자 같아서 이론과 원칙에만 치중하고 실제에는 취약함. ‘임금은 올리고 세금은 낮추면서 예산을 짜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가?’ 한국은 ‘실무에 밝은 사람’, 즉 박대통령 같은 사람이 필요함. 정일권이 생각하기에 박대통령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

박대통령이 한 번만 더 임기를 채우면 한국은 북한보다 우위에 설 것이며 통일에도 대비할 수 있을 것임. 박대통령의 통일관이 김대중보다 훨씬 나음. 박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도발 행위를 중단하라, 그러면 교류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김대중은 반대로 ‘지금 북한과 서신왕래, 인적 교류 등 모든 것을 열겠다’는 것이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이렇게 평한 다음,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의견을 물어본다. 미국의 대답은 이렇다. “베스트 맨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김종필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1969년의 3선개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종필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70년 12월의 일이다. 국무부는 즉각 김종필의 최근 활동 및 정치적 입지, 방미 목적 등을 작성해 키신저에게 보고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좌에 오르게 만든 쿠데타의 설계사 김종필 씨가 현재 개인 업무로 미국을 방문중인 바, 한국 대사관을 통해 키신저 보좌관과의 면담 약속을 신청했음. 김종필 씨는 1963년 언젠가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서 키신저 보좌관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음.

현재는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김은 여전히 한국 정치에서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는 인물임. 그의 비상한 재주(야망이 있고, 아주 지적이며 조리 있음)를 감안할 때, 44세의 나이에 정치 생활에서 영원히 물러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국무부의 이후락 파일


1970년대 초 주한 미 대사관 관리들이 가장 빈번하게 접촉했던 한국 인사 중에는 이후락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교의 신봉자’라 불릴 만큼 권력의 핵심에 속했던 인물인 데다가, 그를 접촉해본 미국측 인사들의 공통된 표현대로 ‘미국인과 아주 잘 어울리고 판세를 잘 읽어내는,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락은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1969년 3선 개헌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나흘 후인 69년 10월21일, 이후락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다. 63년 12월부터 69년 10월까지 6년간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일한 끝이었다. 3선 개헌의 1등 공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김형욱과 함께 박 대통령이 물리친 것이다. 이후락은 아무 말 없이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여기저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 김형욱과는 달랐다. 그리고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채 석 달도 안 된 70년 1월, 이후락은 주일 대사로 임명된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후락 신임 주일 대사의 신상기록과 함께 당시의 활동 상황 등을 미 국무부에 타전한다. 이씨가 주일 대사로 임명된 지 한 달 후인 70년 2월20일이다. 이 비밀 전문은 이후락의 과거 정치적 입지 및 향후 거취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인물평도 덧붙여 놓고 있다.

‘최근 다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이후락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한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되었음. 그 과정에 그는 대통령 측근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치부를 했다는 이유로 많은 적을 만들어냈음.

3선 개헌에 앞장서 박 대통령을 도왔으나 박 대통령은 마침내 이후락을 물리치고 말았음. 그러나 이후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고 있음.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그는 재치 있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 자신이 맡은 업무는 무엇이든 잘 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며,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개인의 이득도 아주 잘 챙기는 것으로 평이 나 있음. 미국인 동료들과 꾸준히 협조하면서 잘 지내고 있음.

대부분의 한국인 정치 관찰자들은 이후락이 곧 주일 대사 자리를 떠나 내년(1971년) 봄에 있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요 직책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음.’

이후락은 이 비밀 전문이 예견한 대로 10개월 후인 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비서실장에서 해임된 지 1년 2개월 만에 권력의 중추로 복귀한 것이다. 그 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유신과 7·4 남북 공동성명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적인 두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이후락의 권력 내부 복귀를 예측했던 70년 2월10일자 주한 미 대사관의 비밀 전문 끝부분에는 이후락의 개인 사정에 대해서도 언급돼 있다.

‘최근 이후락의 부인이 자녀의 가정교사와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후락이 알게 된 다음 남편인 이후락에게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서울에 나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부인도 그와 함께 도쿄로 갔음. 도쿄로 떠나기 직전, 이후락은 자청해서 소문을 부인했음.

이후락은 영어와 일본어가 유창함. 미국인과 쉽게 잘 어울리기는 하나 술을 몇 잔 마시고 나면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함. 난 기르기가 취미이며 골프도 즐김. 불교도.’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한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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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12월28일)


1970년 12월 주일 대사에서 신임 중앙정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이후락은 4개월 후에 있을 71년 4월의 7대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대과제를 맡아 또 한번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이 70년 12월28일 작성한 비밀 보고서 ‘정보 노트(Intelligence Note)’에는 신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 대한 평과 함께 그의 정치적 역할을 분석한 보고가 담겨 있다.

‘업무 능력은 뛰어나지만 각종 스캔들로 얼룩진 비도덕적 인물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이 주일 대사로 11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다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이어받아 한국으로 돌아왔음. 김계원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의 대선 상대인 야당 후보 지명에 대한 정지 작업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될 것인지조차 예견하지 못했음.

이후락의 업무 수행 능력은 따라갈 자가 없으며 대통령에게 맞서 고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음. 부패에 연루되어 한때 일본에 보내지긴 했으나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여전히 두텁고, 전투를 방불케 할 내년 봄 선거에 대비해 이미 갑옷을 입고 무장을 끝낸 박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이후락을 지목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평가됨.’

‘박정희, 선거전에 대비해 무장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보고서 서두에는, ‘박 대통령이 71년 봄에 치열하게 전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의 책임자로 임명해 측근 진영(inner circle)에 불러들였으며, 김종필도 박 대통령 팀에 합류시켜 정치 일선에서 활동시키려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어 이 보고서는 ‘이와 동시에 박 대통령은 금년 초 섹스-살인 스캔들(정인숙 사건: 역주)에 이름이 연루된 정일권 국무총리를 교체하고 청와대 참모진을 새로 임명해 행정부의 이미지 쇄신을 꾀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70년 12월26일,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전송한 비밀 전문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63년부터 70년 12월까지 국무총리 역임: 역주)가 미 대사관 요원을 만나 민주공화당의 임박한 당직 개편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정일권은 자신이 김종필과 함께 당 부총재로 임명될 것 같다고 전하면서, 김종필은 당 의장 자리를 원했는데 부총재가 될 것 같아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정일권이 대사관 요원에게 전한 정보 가운데 특기할 만한 부분은 당시 주일 대사로 도쿄에 나가 있던 이후락의 복귀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 당정 개편의 ‘큰 이변’은 이후락 임명인데, ‘대중 이미지’가 큰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찌감치 이 문제가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후락을 도쿄에 그대로 두고 싶어했으며,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마도 이후락이 자신의 거취 문제를 항의하기 위해 12월9일부터 12일까지 서울을 방문했을 때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나쁘긴 하지만 중앙정보부장으로서의 그의 재능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잠재적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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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BRP)


미 국무부의 정보력은 미 국방정보국(DIA) 및 중앙정보국(CIA)과 더불어 타 정보기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해외 공관을 통해 해당국 유력 인사들의 인사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비밀리에 관리하는 ‘잠재 지도자 신상명세 보고 프로그램(PLBRP, 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도 국무부가 가동하는 비밀 정보의 파이프라인 가운데 하나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를 포함해 국제 정세의 격변기였던 1970년대 초, 미 국무부는 한국 각계의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PLBRP 리스트를 비밀리에 작성하고 관리했다. 1973년도 국무부의 PLBRP 리스트에는 정계 언론계 학계 및 행정부와 군부 인사 등 84명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군부에서는 육군 공수단의 전두환 준장과 김복동 준장의 이름이 올라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비밀 전문에 따르면, 미 국무부의 이 리스트는 1년 4회 주기로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일종의 개정판인 셈인데, 가장 최근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주한 미 대사관이 차기 작업에 들어가기 전 리스트를 먼저 국무부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되,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관에 특정 조사 대상자의 리스트를 하달하기도 한다.

1971년의 경우,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관에 하달한 비밀 전문을 보면, 대사관에서 119명의 리스트 가운데 22명에 대한 정보와 10명의 사진을 국무부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71년 1월26일 국무부가 초안을 작성해 2월10일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가운데 당시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내용의 일부분이다.

‘알랜 크로스(주한 미 대사관)는 김대중에 대한 아주 훌륭한 신상 보고서(1970년 12월17일 A-506)를 제출했다. 그의 성품, 경력, 개인 이력과 정치관 등 자세한 사항이 담겨 있다. 크로스와 윌리엄 킹스베리, 리처드 피터스 등은 대화 비망록을 통해 김씨에 대한 통찰력 있는 관찰기를 추가로 보고했다.’

대사관이 수행한 PLBRP 작업에 대한 국무부의 평가서이기도 한 이 2월10일자 비밀 전문에는 또한 대사관이 가동시키는 ‘국별 팀(Country Team)’ 멤버들이 이후락 신임 중앙정보부장, 백두진 신임 국무총리 등 행정부나 입법부에서 새로 인사 발령을 받은 인사들에 대해 별도의 개인 정보를 보고한 것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있다.

이 PLBRP 리스트 작성은 작업 효율성을 위해 FS-405라 불리는 국무부의 ‘신상기록 양식’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 별도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상 정보는 따로 초안을 첨부하게끔 되어 있다. 71년도 3차 리스트의 경우 유진산 장덕진 백선엽 이낙선 씨 등의 개인 신상 정보가 별첨으로 처리됐다. 신상 정보를 작성할 때는 우선 순위에 원칙이 있다. 즉 특정인의 최근 활동 및 태도, 조직 내에서 잘 어울리는 사람의 명단 등을 최우선으로 보고하게 되어 있으며, 국무부가 발행한 ‘신상 기록 지침(Biographic Handbook)’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취득한 특정인에 대한 개인 정보도 포함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PLBRP와 관련된 또 하나의 1972년도 평가서(1972년 11월6일 A-10909)에는 ‘한국 내 잠재 지도자들의 새로운 목표 명단(a new target list)이 아직 서울에서 제출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매 주기 혹은 매년 새로운 지도자급 인물을 탐지해 보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리스트 작성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대사관의 풍부하고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마련된 일종의 ‘비공식적인 경험 원칙’이다. 내각에 들어갔거나 이와 유사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은 ‘잠재적 지도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미 정치적 주요 인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연령은 잠재적인 지도자 기준에서 무시된다. 중년이거나 그 이상이라도 여전히 ‘잠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무부가 마련해 대사관에 하달한 기준에 따르면,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같이 당 최고위직에 있는 정치인의 경우에는 이 리스트에서 제외시키도록 되어 있다. 특히 야당의 경우,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당 내에서 상당한 파워를 행사하는 인물은 리스트에 포함시킨다. 군부 인사의 경우, 소장급 이상은 역시 리스트에서 제외한다. 이미 정치적인 영향력이 상당한 인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 군에서 전역을 했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다시 복귀할 것으로 보이는 인사는 리스트에 포함시킨다.

1973년 3월30일자로 국무부가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잠재적 지도자 리스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정치인: 민병기, 장기영, 한병기, 김영도, 김용태, 길전식, 박준규, 이해원, 이병희, 이범준(여, 전 이화여대 정치학과 교수), 소영희(여, 전 경희대 신방과 부교수), 고흥문, 이철승, 김영삼, 엄영달, 조윤형, 김대중, 이중재, 김수한

정부 관리: 노신영, 장상문, 지성구(외무부 아시아국장), 박경원, 조동원, 함병춘, 김정렴, 최광수, 박종규, 홍성철, 김성진, 정소영(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 김만재(KDI 회장), 이재술(경제기획원 부원장), 박필수, 김원기(한국개발은행장), 김용환, 김동수, 김형기, 황병태, 이선기, 한성준(한국과학기술원장), 이건개, 강인덕, 이규현(문공부 차관)

언론계: 박태영(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 심범식(서울신문 사장), 서인석(코리아헤럴드 사장), 박권상(동아일보 편집국장), 남재희(서울신문 편집국장), 신상초(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상만(동아일보 사장), 진철수(동아일보 편집 부국장)

학계: 한배호(고려대 아시아연구센터 정치학과 교수), 한기천(대통령 경제 자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권두영(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김영원(서강대 학장), 이영희(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옥길(이화여대 총장), 이한빈

군부: 서종철 대장(대통령 안보 담당 자문), 채석천 소장(합참 작전계획과장), 강창성(육군 보안대장), 진종채 소장(수방사령관), 최성택 준장(한국대학 ROTC단장), 전두환 준장(육군 공수단), 김복동 준장, 조종성 소장(육군 특전대장)

기타: 이동원(전 외무부 장관), 이범석, 한기수, 이명환, 김말룡, 이종영(대림건설 회장) 박성일(두산개발 회장), 조정식(한일개발 부회장), 정조수(대하실업 회장), 강원용(크리스천 아카데미 목사), 남궁윤(한국조선 회장), 이건희(중앙일보 사장), 정인영(현대건설), 김수한(추기경)


김영삼의 박정희 평가, 미국의 김영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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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24일)


1972년 10월24일자 비밀 전문은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국무부 마셜 그린(Marshall Green) 차관보와 나눈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이자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한 달 전에 이루어진 만남인 데다가 야당 지도자와 미 고위 정책 입안자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시기적으로나 사안으로나 중요한 때였다.

김영삼 씨도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 만남을 요청했든 주한 미 대사관이나 국무부의 고위 관리들과 자주 접촉하는 주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영삼 의원이 국내 정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부분이나 상대방과 나눈 대화 과정 등 국무부의 비밀 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깊이 있는 정치 분석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용어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거나, 자기 주장을 강변하는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정치권 내의 일반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면서 자신의 심중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것도 특징이며, 간혹 부정확한 예측을 불쑥 거론하기도 한다.

12월30일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김영삼 씨를 만난 후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는 자신의 사적인 견해(comment)를 덧붙인 내용이 있는데, ‘탁월한 야당 지도자라는 김영삼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가 말한 것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다음은 1972년 10월24일자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인데, 김영삼 씨가 7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무부 관리들을 만나 나눈 대화다. 남북한 지도자인 박정희와 김일성을 김영삼 씨 자신의 어휘로 비교한 부분, 헌법 개정안의 핵심적인 성격에 대해 미 국무부 관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장면들이 이채롭다.

‘10월20일 신민당 지도자인 김영삼이 그린 차관보를 방문해 한국의 발전에 대해 토의했다. 그와 그의 가족이 박 정권과의 관계 때문에 묘한 상황에 처해 있는 탓으로 말을 삼가서 하겠으며, 이전과는 달리 이 만남을 전후해 언론과는 접촉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는 무한정한 권력 유지에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 국민 대다수는 지금 계엄령이 남북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박의 강변에 어리벙벙해 있다. 그러나 10월27일 헌법 개헌안이 공고되고 나면 국민들은 뭔가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군부에서도 분노가 확산되고 있다.

김은 또한 남북간의 핵심적인 차이점에 대해서도 느낀 점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권위 독재주의를 구축하면 박과 김일성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마저 부족한 반면 김일성은 최소한 부를 나누어주려고 시도했다. 만약 남북한을 구별짓는 점이 흐릿한 채 오래 지속된다면 북한을 좋게 바라보는 남한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정치 구조가 다른 나라의 정치 구조를 본뜬 것인지를 그린 차관보가 물었다. 김은 프랑스 시스템의 요소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린 차관보는 김영삼에게 프랑스에서는 입법부와 대통령이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고 말해주었다. 한국과장인 레너드(Ranard)는 발의된 헌법 개정안의 특징은 이전에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법적 개정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린 차관보는 헌법 조항을 살펴보니까, 정부가 인권을 제한하기로 판단했을 때를 예외로 하고 인권을 보장한 1889년의 일본 이토 헌법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김영삼이 차관보가 헌법 개정안 전문을 검토해볼 시간이 있다면 검토하고 나서 그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거나 충고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린 차관보는 헌법 개정안을 찬찬히 살펴보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그에 대해 충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발의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계엄령하에서 실시돼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하도록 권고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박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늦어도 2월 전에 실시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점과 관련해 김은 한국 정부의 변화에 대한 미 의회 반응을 주시하면서 의회의 주요 인사들에게 이 점을 설명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의회 주요 인사들이 지금은 모두 선거 때문에 워싱턴에 있지 않으므로 김은 지역구로 몇몇 인사를 찾아갈 계획이다.’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1971년 12월30일자 비밀 전문의 제목은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견해’다. 12월29일 신민당 간부회의가 끝난 직후 하비브 미 대사와 김영삼 씨가 만나 나눈 대화록이다. 국내 정치 상황 전반에 대한 김영삼 의원의 견해가 A4 용지 2쪽 분량으로 기록돼 있는데, 비밀 전문 마지막 부분에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내분과 박정희 대통령의 과도한 음주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김영삼은 또 말하기를 민주공화당에는 세력이 둘로 나뉘어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하나는 이후락과 백남억이 주도하고 또 한 세력은 김종필과 오치송이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김은 또 주장하기를 박 대통령이 최근 들어 늦게까지 과음을 한다고 했다(박 대통령은 원래 과음을 한다. 그러나 본 대사관은 이 점과 관련해 다른 정보원들로부터 특기할 만한 확증적인 징후를 들은 바 없음).

본인의 견해: 탁월한 야당 지도자라는 김영삼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가 말한 내용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


국무부의 개인 기록 비밀 파일들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은 한국의 외무장관, 주미 한국 대사 등 고위직 외교관 면담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통상 및 외교 등 한미 관계, 남북 관계, 유엔을 포함한 한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한국 정부의 의견이 미국 측에 전달된다.

따라서 미국 쪽에서는 한국 외무장관이나 주미 한국 대사 등을 가장 빈번하게 접촉한다. 이들의 개인 이력은 물론 취향이나 성품, 협상 태도, 한국 내에서의 평가 등 모든 것이 국무부의 비밀 파일 속에 기록되어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67년 6월30일부터 1971년 6월3일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미국과 공식 채널을 가동했다. 1971년 4월에 작성된 미 국무부의 이른바 ‘최규하 파일’ 가운데 일부분.

‘최규하: 베테랑 외교관. 1967년 6월부터 외무장관 재직. 언행이 느리고 따분하다는 평을 얻고 있으며, 현직 업무 수행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고 활기차지도 않음. 표면상의 외교 능력은 있는데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 부족으로 유효성에 한계가 있는 듯함.

외형적으로는 협조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자기 자신의 생각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으며, 상황 고려와 의전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함.

최는 풍채가 좋고 옷매무새가 말끔하며 세련됨. 신장은 5피트 10인치로 평균 한국인보다는 큰 편이고, 약간 등이 굽었음. 일어와 중국어가 유창하며, 영어 실력은 좋은 편. 약간의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구사. 정원 가꾸기가 취미.’

최규하 외무장관의 뒤를 이어 71년 6월에 신임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김용식 씨다. 다음은 미 국무부가 비밀 분류해 보관했던 김용식 파일 중에서 학력이나 경력 부분을 제외한 개인평 부분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다.

‘김용식: 58세. 1971년 6월3일 외무부 장관에 임명. 주한 미 대사관 요원에 따르면 김은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하며 극도로 조심스러움. 한국의 외무부 관료들은 김이 유엔에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적절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동료나 하급자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업무 수행을 비판함. 영어와 일어가 아주 뛰어남.’


아래는 전쟁을 찬미하기보다는 한 국가나 민족은 자신의 국가나 민족이 불행해지는것을 막는일에는 항상 가상의적으로부터 돌발적으로 오는 공격을 침략을 봉쇄할수있는 국가안보능력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이점을 강조하시것으로 보기에 이글을 올렸습니다

국가 안보 능력이란 말 그대로 모든면에서 건강한 국가와 건강한 민족이 건강한 국민 건강한 정신 건강한 국민의식 건강한 정치 건강한 사회 되어야만 이를 바탕으로 물질적인 군사 무기를 활용해서 신의 도움으로 모든 침략이나 선제 공격에 막을수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진실공방 수준은 어느정도 판가름났고 앞으로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고나면 그에 대한 치부가 다 드러날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요

중요한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발판을 토대로 삼는 역활을 어느정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부분이기에 지금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이면속에서도 각 국가의 이해득실도 갈려있는것도 잘압니다 그러나 분단 체제는 평화 체제로 가야지요

북한 핵에 대한 보유는 어느 국가고 바라든바입니다 왜냐하면 무소불위로 핵을 이용한 경제 종속적인 힘을 내세워서 약소국을 침탈하는것이 약소국민들의 고통은 당연한것이고 그래서 수많은 약소국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자하는것입니다

러시아도 중국도 핵을 보유한면서 시장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국가이지요 그만큼 자본주의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핵 보유다라는 사실을 말해주는것입니다

핵의 보유는 전쟁은 항상 준비되어있음을 말해주는것이다 전쟁을 사랑하지못하면 평화는 지킬수가없다 누가 대신해서 지켜주지않는다 그동안 미군 주둔 비용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도 보유하고도 남안 비용이지요



그런데 비용은 비용대로 들어가고 국방수호는 아직도 미군에 손에 의지하니 남는 국방 장사를 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미국과 동맹은 동맹이고 자국의 국방 안보는 안보인것이다 같이 결부하는것은 강자의 논리이지 약자의 논리에 부합되지못한다라는것이다



미국도 이점은 알고있지요 그만큼 대한민국이나 남북한 국민이나 민족의 의지가 얼마나 있는냐가 중요한것이다

그래서 그현실이 바로 대한민국에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세우는것이고 대통령되는 당사자들은 문제점 투성인자들이 대통령직을 당당하게 수행하지못하고 그리고 다른한편으로는 언론과 방송사를 통해서 허수아비 대통령을 쥐어흔드는 양면작전을 감해해온 대한민국 정치사인것을 그러니 대한민국 국운이 이렇게 추락해온것이다



물론 주변국들은 득을 보았으니 이러한 현실적의 내면의 실체를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악마 프리메이슨 세력들이 세운 자는 대통령이 될수가 없고 그들의 세력을 지지한다고해서 대통령을 만들어서도 아니된다라는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 악마 프리메이슨 세력들을 색출해내는것이 첫 걸음마가 될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의 그분들의 바램은 바로 국가와 민족을 바로 세우는것이 그분들의 바램이고 천명인것입니다 이것이 주어진 대한민국의 처한 상황이고 분수이다



그래서 이번 대한민국 대통령은 중요하다라는것이다 문제점이 많은자가 대통령이되면 그것은 역으로 허수아비 대통령임을 말해주는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워낙 문제들을 산적 해 놓았기에 참으로 국가적으로 큰 짐들을 해결하기에는 머리가 띵 할 정도다 그것도 모르고 정치 설치는 세력들을 보면 국가 사회전반을 보면 그러기에 더더욱이 하루속히 단합하고 합심해서 바른길로 가는데 게을리하지말아야 하는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남는 국방장사를 하지못하도록 정치적 수단 사회적 수단을 동원하여 교란 정치를 하는것이고 매수를 하는것이고 그러다 미국이 볼일이 없으면 떠나면 주변국이 가만히 있나 일본이 중국이 구한말로 돌아가는것이지요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치 세력들은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핵무기 보유에 대한 소망을 이러한 중요성을 알지못하고 정신상태들이 썩어서 국가와 민족에게 그동안 시간과 공간 비용의 부담이 가중되었지요 미국도 어리석게 자신들이 저질러온 사태를 그러니 미국도 바보이다

이제는 미국이나 중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남북한이나 한걸음 한걸음이 신중할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가니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지는 아무도 장담못한다 그러니 누구에게 강요하는 국제 외교 패턴은 의미가 없다

지금 남북한도 미국이나 중국에게 실험대상국으로 민족으로 정한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로부터 실험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라는것이다

물론 미국도 중국도 실험대상국이고 그러니 누가 누구를 실험하겠는가?ㅎㅎㅎ

그래서 대한민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지못한것이 남북한 민족에게는 큰 손실을 초래한것입니다 그나마 북한이 핵을 보유국으로 인정받지만 만약에 북한에서 핵 보유가 거짓으로 판명되면 이는 두고두고 민족의 죄를 짓는것이 될것입니다

그런차원에서 북한만이라도 핵을 보유했으니 대한민국 서민들은 강대국의 힘의논리에 대항할 최소한 국가와 민족을 스스로 지탱할수있는 힘을 가지게 된것이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생각하고 있는것이 그 당시 서민들의 심정입니다

이 남북한 역사가 2천년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았든 이유가 무엇인데요 바로 국방력을 지탱할 힘이 없었기에 그러한것을 그래서 자연적으로 국방이 부실하니 경제력 또한 부실하고 내부적으로 정치적 혼란과 고통이 가중되어온 역사가 바로 남북한의 역사인것이다 임진왜란이나 일제 식민지 36년 치욕 역시 국방력이 부족해서 당한것을

남북한이 국방력이 부실하면 중국 대륙이 불안정해지는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니 단지 지금 북한의 핵 보유 해체를 주장하는 이유를 대는 국가는 미국이나 일본이 자국의 미래 안보이익을 얻기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고 공략 해 오는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북한의 핵을 보유하지않으면서도 북한의 핵을 해체하라고 쇼를 한다면 민족의 운명은 뻔한것이될것이다

바로 지금 살아가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고 후손들은 국가와 민족이 사라지는 운명의 시간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겠지요

그렇다고 지구가 안전하나 그러하지못한것을 이러한 패턴으로는 절대로 지구가 안전하지못하며 지구도 한번은 인류역사상 큰 곤욕을 치루게될것입니다




국제 사회는 모든 조약은 상생하는 대안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각오해야

2006/10/05 오후 10:47 | 생각과사고

敵이 전쟁을 각오하고 핵실험을 하는데 우리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항복뿐이다.
趙甲濟

북한의 핵무장이 기정사실이 된 지금 대한민국은 생존투쟁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민과 국군과 지도부가 단결하여 전쟁을 각오하는 것이다. 敵이 전쟁을 각오하고 핵실험을 하는데 우리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항복뿐이다. 전쟁을 각오한 국가는 바깥으론 당당해지고 안으로는 건강해진다. 전쟁을 각오한 나라에선 말장난과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實力과 實利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핵위기를 그런 사회를 만드는 기회로 이용한다면 대한민국은 사이비 좌파의 도전을 극복하고 한 차원 성숙할 것이다. 전쟁을 각오하려면 국가 지도부의 死生觀이 확립되어야 한다. 死生觀이 바로 선 지도부라야 위선적 평화론을 누르고 국민들을 끌고 갈 수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은 너무 많이 쓰여지고 있지만 진실이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에 즈음하여 필자가 月刊朝鮮에 썼던 기사는 지금도 유효하다. 참고로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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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나라인가(1)
<1994년 3월 월간조선>

수도권을 북한 다연장 로켓포의 집중 포격권 아래에 놓아두고도 굳이 [한반도에 긴장은 없다]고 우기는 이상한 반전론(反戰論)엔 역사적 뿌리가 있다. 한국은 김유신(金庾信)의 통일전쟁 이후엔 한 번도 자위적 전쟁을 결단해 본 적도, 자주 국방을 해본 적이 없다. 북핵(北核)문제를, 한국이 책임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한 대각성의 계기로 삼을 때 위기는 호기(好機)로 바뀔 것이다.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의 공통점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은 1천3백년이란 간격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唯二)한 지도자이다. 신라(新羅)의 김유신(金庾信)은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唐과 일전(一戰)을 벌여 평양-원산선(線) 이남 지역을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1천3백여 년을 살아올 수 있도록 한 토대는 바로 金庾信의 이 전쟁의지였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전성기에 있었던 세계적인 대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는 것, 이로써 우리는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얻은 것이다. 군대는 국가 요소의 하나이지만 국가는 그 군대를 딛고서만 존립(存立)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잃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효과적인 군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19년(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대원군(大院君)에 대해 일본이 무력 간섭을 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淸)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3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그 목적이 지원이든 간섭이든 일단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독립성의 손상을 가져온다. 더구나 오장경(吳長慶)의 청군(淸軍)은 군영을 방문한 이 나라의 실권자인 大院君을 군란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한 뒤 천진으로 호송해 버렸다. 한 국가로서의 붕괴, 그리고 식민지화는 여기서부터 결정된 셈이다.

전쟁이란 명제(命題)로부터의 도피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수많은 침략을 당하고 강요된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왕건(王建)이 치른 내전(內戰), 월남 파병·대마도 정벌·여진족 토벌 수준의 전투를 국가 대 국가의 전쟁과 구별한다면). 조선조 건국 이후의 6백년 동안엔 자주국방의 능력과 의지마저 잊어버렸다. 임진왜란 때는 명군(明軍)의 도움으로, 한국전쟁 때는 남한은 미군,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력(自力)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을 때, 즉 병자호란과 개항기(開港期)에 우리는 실패했다.

전쟁을 스스로 결단해 본 적이 없는 국가는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와 비교될 수 있다. 전쟁이란 것은 지도층과 국민이 개인적 운명과 체제의 존망을 걸고 국가의 힘을 총동원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이다.

그 사회의 가치관, 정부와 국민의 총체적 능력과 의지력,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명예를 거는 집단적 고뇌·각오·결단·희생·욕망이 전쟁인 것이다. 이기면 노예가 주인이 되고, 지면 남편이 아내도 지킬 수 없게 되는 전쟁을 통하여 국가·민족이 탄생, 소멸, 성장, 성숙을 거듭해왔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을. 통해 민족적인 대 각성을 이룬 나라는 선진국으로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 인간이 어른으로 성숙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주먹다짐이 필요하듯 한 국가로서 존립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위선적 평화론의 지배

그러함에도 한국은 이 명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피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을 평화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지만 강요된 방어전을 하는 것과 자신의 철학·책임·계산·의지 하에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깊이가 다른 행위이다. [스스로의 전쟁 결심 없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한국 역사의 특이성은 우리의 민족성 형성에도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책임감과 명예심의 문제=목숨을 걸고 민족과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전통이 없는 지도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 관계의 문제=대외적(對外的)으로는 나약하여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권력은 대내적(對內的)으로는 가혹하게 행사되었다. 바깥에선 얻어맞고 집안에선 동생을 구박하는 형(兄)을 누가 따르겠는가. 국민은 무능하면서도 비열한 권력층을 불신·저주하면서 생존을 위한 요령을 터득해갔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비숍(Bishop) 여사는 [한국 민중은 가난 속에서 보호를 구한다]고 썼다. 돈을 벌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들이 몰려와 착취해 가니 [가난 속에 머무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다는 뜻이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는 고래뼈가 발굴되지만 그 뒤 한국 어민들은 포경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하면 어민들이 몰려나와 바다로 밀어 넣어 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관리들이 알면 어민들을 동원하여 고래를 해체시키고 기름을 뽑아낸 뒤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고래를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산업이 발달했겠는가. 유교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천 년을 이어온 이 나라에서 지난 1백 년 사이에 기독교 신도 수가 전국민의 약 4분의 1을 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배층의 논리와 윤리에 대한 민심(民心)의 이반 때문이었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고 그런 권력층과 국민 사이엔 착취·경멸·저주·불신만 쌓인다. 그런 가운데서 올바른 공직자-시민, 정부-국민 관계가 생길 리가 없다. 무사·기사 집단이 나라를 세우고 이끌었던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공직자-국민 관계와 문약한 지식인들이 지배했던 한국의 공직자-국민 관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의 지배층이 불신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착취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즉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의 논리=한 민족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다. 국가는 국가의 명예,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지고, 군인은 국민을 책임지며, 가장은 가정을 책임지고,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관계 속에서 국가는 국민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국민은 국가에 따른다. 비로소 떳떳한 국가, 국민, 그리고 국가-국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지배충의 생존 요령은 변명과 위선이다.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된다. 전쟁을 결심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선택했고, 그 평화란 것도 적국(敵國)의 평화이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아니었다(평화를 사랑한 민족이 왜 평화롭게 살지 못했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면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단했어야 할 경우가 많았으나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평화가 아닌 고통을 맞아들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의 역대 지배층을 이루어 온 지식인 사회에서 발견되는 위선적 명분론과 비열함, 그리고 산업·군사 경시사조는 자주국방과 전쟁이란 거국적 승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란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무조건 악이요, 피하고 볼일이라는 사조(思潮)가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남한 사회를 풍미하고 있다. 위선적인 반전론(反戰論)이 절대가치처럼 횡행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주된 지배층이었던 유교적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의 변동기 때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라를 유린당하도록 함으로써 아내가 겁탈 당하도록 방치한 남편의 신세가 되었다. 무식한 남편이었다면 아내에게 사죄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겠지만 논리라는 무기를 가진 지식인들은 달랐다. 겁탈 당한 아내를 부정한 여자라 하여 내쫓거나 자살하게 하고 침략 당한 민족이 침략한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전쟁은 무조건 악이라는 위선적인 평화론을 개발하였다. 이 평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분위기가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방어용 무기가 북한 자극?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하나의 계기가 있다. 기자는 지난 1월 말 유럽을 여행했다. 거기서 아침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紙)를 사 보았다. 매일 북한 핵 관련 기사가 1면에 실리고 있었다. 미(美)CIA 국장 울시가 의회에서 증언했듯이 북한 핵 문제는 러시아의 물가폭등에 의한 정치불안 및 러시아 대(對) 우크라이나의 핵 대결 위험과 함께 세계적인 위험성을 가진 3대 주제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쟁점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한이 지난 수년간 다 연장로켓포를 남하시켜 전선에 배치함으로써 서울이 그 사정권 하에 놓이게 됐고, 주한미군(美軍)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할 것을 검토중이라는 보도를 읽었을 때는 불과 며칠 전에 떠나온 서울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느낌을 갖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사든 신문은 기자를 두 번 놀라게 했다. 핵 관련 기사가 장영자(張玲子) 여인의 사기사건과 돈 봉투사건에 밀려서 [가장 큰 기사감]이 못되고 있는 데 놀랐고, 일부 언론·야당이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논의를 비판적, 음모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데 놀랐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이 시점에 배치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할 위험성이 있다느니 무기상들이 한국에 낡은 패트리어트를 팔아먹으려는 계산 하에서 꾸미는 일이라는 식의 보도가 대종을 이루었다. 우리 정부 당국자도 미국 언론이 한반도의 상황을 과장 보도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를 전달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는 북한의 스커드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용이다.

항만과 공항 주변에 배치할 계획인 것은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군 증원부대가 본토에서 올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도 우리 정부가 사는 것이 아니라 미군(美軍)이 자체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한국과 주한미군, 그리고 미군의 증강을 위해 필요하고 우리로서는 고맙게 생각해야 마땅할 패트리어트 배치에 대해서 일부 언론·야당인사들은 왜 시비를 걸고 있나?

[북한을 자극하여 핵 협상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란 설명은 그야말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방어용 무기로 어떻게 자극을 할 수 있으며, 핵 개발을 하는 나라를 자극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북한이란 집단은 자극을 받아도 세(勢) 불리하면 사찰을 받을 것이요, 자극을 안 해도 세(勢) 유리하면 사찰을 거부할 체제라는 것을 모른다면 평균적인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한쪽에선 주한미군의 잔류와 전쟁시의 신속증강을 애타게 호소하고, 다른 쪽에선 방어용 무기 배치까지도 음모적 시각으로 보고 있는 나라!

젊은 기자들이 쓴 해설기사는 비판적·음모적 시각이고 같은 지면의 사설은 옹호적인 언론. 이런 언론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정보 부서에선 [아주 특이하면서도 당혹스러운 구조… 같은 날 신문의 한쪽에선 국가적 재앙이 임박했다고 쓰고 바로 그 옆에는 대북(對北)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실린다]라는 분석보고를 워싱턴에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자주국방 의식 없는 정치는 공허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국론 분열적인 심리상태는 정상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지킬 힘이 모자라 옆집의 힘센 남자를 집안으로 모셔다 놓은 남편의 속마음은 과연 [감사]로 가득 차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등감으로 해서 그 이웃남자를 질투하고, 혹시 아내를 탐하지 않나 의심도 하게 될 것이다. 자식을 볼 면목이 없을 땐 {저 아저씨는 우리를 지켜주려고 여기 와 있는 게 아니야. 도둑놈을 붙들어 현상금 타려고 와 있는 거야. 미안해 할 것 없어}라고 둘러댈 것이다. 어쨌든 그 가장의 행태는 병적인 것이며 그 집안의 분위기나 부부, 부자간의 관계도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자주국방을 못하는 나라와 국민들은 정신건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던 가장 큰 동기는 {국방을 외국에 의탁한 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다}라는 절실한 문제의식이었다.

국방을 외국군대에 의존한 나라의 정치는 국가의 생존이란 정치의 제1주제를 놓아버린 공허한 말싸움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늘 있다. 중동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 외교관은 {이스라엘과 한국은 비슷한 안보상황이지만 이스라엘은 자주국방으로 책임 있는 정치를 하고있고 한국은 국가의 생존문제를 도외시한 미숙한 정치를 연출하고 있다}고 비교하였다. 얻어맞기는 일쑤인데 결투신청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인간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경제력, 세계사의 흐름, 국제역학관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으면서도 저들이 세계 유일의 강대국을 상대로 결연하고 의연하게, 때로는 우월하게 게임을 끌고 가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되는 것인가?

전쟁을 결심해 본 지도자로서의 김일성(金日成), 자주국방을 신조로 삼아온 지배층, 그리고 무력통일을 기약한 국가총동원체제-여기서 우러나는 자존심, 생존의지, 일관성이 미국과 대등한 외교협상을 벌이도록 뒷받침하는 근원일 것이다. 유태인은 원래 문약한 민족이었다.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당하기만 했다. 겁먹은 양떼처럼 수백만 명의 유태인은 나치의 게슈타포에 순종하면서 가스실로 걸어갔다.

그런 민족이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우고 [민족의 생존권]이란 명제를 직시하니까 [자위를 위한 선제타격], 즉 예방적 공격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독종으로 표변했다. 국가의 생존의지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그런 국가관이 있는가. 국가관을 논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과연 국가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검토해 본다. 국가의 형식은 갖췄으되 그것의 운용 면에선 국가가 아니라 협회나 친목회 같은 사회단체로 보이는 점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한국은 국가인가, 협회(協會)인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남한은 북한을 흡수통일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요지의 말을 자주 한다. 한완상(韓完相) 전 부총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흡수통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피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흡수통일이란 무력통일이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흡수, 통합되는 식을 뜻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흡수통일 이외의 대안을 알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한, 남한의 자유민주·시장경제 체제와 북한의 신정(神政)체제·폐쇄경제를 적당히 섞은 절충형이 개발됐다는 뉴스는 아직 없다.

국민이 바라지 않는 것은 급작스런 흡수통일이지 흡수통일 그 자체가 아니다. 바라지 않지만 흡수통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통일하는 수밖에 없다. 남한이 손해를 본다고 통일을 거부한다면, 그 것은 손해 보면서는 합병이 안 되는 기업간의 관계이지 민족국가의 행동윤리가 아니다.

흡수통일 반대론은 코너에 몰린 북한과 남한의 일부세력이 만든 허구의 논리인데, 6공 정부 때부터 정확한 단어의 선택도 없이 공직자들까지 막연하게 편승하고 있다. 흡수통일 반대론에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대한 일부 남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냉담이 끼여있기도 하다.

월간조선(月刊朝鮮) 3월 호에 소개돼 있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국적의 동포들을 극히 선별적으로 귀순시키고 있다. 북한국적을 유지하느라 숱한 고생을 하면서 중국에서 살다가 고향을 찾아온 한 여인에게는 일단 내주었던 주민등록까지 취소했다. 그 여자는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에선 패소했다. 중국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몰려올 것을 두려워하여 그런 정책을 세웠단다. 조선족은 외국인이고 북한국적 자는 북한 주민으로 취급해야 하는 게 아닌가.

러시아에서는 지금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 노동자들 수백 명이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대사관에서 망명신청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청년이 우리 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외국배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인천으로 귀순한 적이 있다. 그런 목숨 건 모험을 한 북한사람들만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통일을 하자는 나라인가. 북한 탈출자를 다 받아들이면 남한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명분인데, 그런 부담도 감수 못한다면서 2천만 주민을 어떻게 통일하겠다는 것일까. 통일의 날이 다가오면서 남한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이기심은 좌익세력의 反흡수통일론과 뒤섞여 국가와 통일의 기본 논리를 혼란시키고 있다.

자위권 천명에도 뭇매 가해

이인모(李仁模) 노인의 인권문제는 북한이 먼저 제기하고 남한의 언론이 이에 따른 뒤에 우리 정부까지 빠져든 경우이다. 李仁模 노인보다 더 심각한 오길남(吳吉男)씨의 재북(在北)가족(아내와 두 딸)에 대해서는 정부와 언론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1986년에 북한을 탈출했던 吳씨의 在北 세 가족을 양심수로 지정하고 북한에 대해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송환을 요구했었다. 외국의 사설단체가 우리 정부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였는데 우리 정부는 그 뒤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았다. 신문·방송에서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제기하는 인권문제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고 자국민에 관해서는 냉담해 버리는, 그러면서도 李仁模 노인의 북송을 남한 정부의 도덕적 우월성이라고 선전하는 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은 왜 한국에 와서 전사자 유골을 발굴하고 있는가. 국민에 대해서 국가는 저승까지 찾아가 보호해 준다는 믿음을 심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우러나오지 않겠나.

무탄무석(無彈無石)이란 말은 대한민국이 국가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공권력의 최루탄은 합법이고 시위대의 투석은 불법이다. 합법과 불법, 공권력과 폭력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투석도 나쁘지만 최루탄도 나쁘다고 보는 언론의 시각은 국가를 사회단체의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자세이다.

통일원은 지난해 한 교수를 통일원 기관지 [통일문제연구]의 편집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 교수는 [한국전쟁의 침략자는 북한이 아니고 미국이었다. 북한 정권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다. 통일원이 지향하는 통일은 [無이념형]이 아닐진대 차라리 북한 노동당 간부를 편집위원으로 모시는 게 더 좋을 뻔했다.

1991년 봄, 이종구(李鍾九) 당시 국방 장관은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엔테베 작전 같은 특공 작전도 검토할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발언에 대해 언론과 야당은 뭇매를 때렸다. 냉전적인, 호전적인 발언이란 것이었다. 냉전이 계속되는 한반도에선 냉전적인 발언이 정상이며, 국가의 자위권을 천명한 발언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전쟁은 악이며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위선적 평화주의자의 허위의식은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인을 포로로 삼고 있다(李장관의 발언은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선 비판받을 만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 우리는 국가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언론이 [무력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고 알아서 써줄 것인데 너무 직설적인 표현을 했었다).

아웅산 사건에 보복 자제한 대가(代價)

정부와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권은 [북한을 너무 자극하면 도발을 자초하게 된다]는 논리를 애용하고 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지난 년초(年初)에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은 일전불사의 자세로써만 막을 수 있다. 깡패가 한판 붙자고 하는 데 이쪽에선 말로 하자고 대결을 피하면 계속 눌려 사는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도 샌드백 치고 로드워크를 해서 한판 붙을 자세를 보이면 깡패도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나도 이빨 나가고 머리 터지겠구나 하는 계산을 하게되고 그러면 말로 하게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의 행태를 관찰해 보면 그들을 통제하는 수단은 [자극을 않겠다]는 저자세가 아니라 무력을 앞세운 고자세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북(對北) 유화론과 저자세는 연속적인 도발만 자초하였다. 1968년 1·21 청와대습격 기도사건, 푸에블로호 납치를 묵인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그 해 11월의 삼척·울진 공비침투 사건이었다. 우리는 대통령의 부인이 북한 공작으로 암살되어도 보복하지 않았고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국가지휘부가 거의 전멸했는데도 저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국가 원수와 그 측근들의 암살을 노린 이 사건은 명백한 개전(開戰) 사유였다. 1차 세계대전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에서 비롯되었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서울 올림픽 개최라는 계산 하에서 보복을 자제했으나 북한은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4년 뒤에 KAL 858 공중폭파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웅산 사건 때 한·미 양국이 압도적인 무력을 배치시킨 뒤 원산항(또는 주석궁) 같은 곳을 보복 폭격했었더라도 북한은 감히 전쟁을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승산 없는 전쟁을 신경질 차원에서 하는 나라는 없다). 그랬었다면 KAL858편 사건의 희생자 1백15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는 미군이 국지전까지 각오하고 나서자 김일성(金日成)이 사과 친서를 보내는 저자세를 보였다. 북한 지배층 입장에선 국가 원수를 노린 여러 번의 공격에 대해서도 [자제]로 일관해온 한국 정부가 국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내비치고 있는 남한에 대한 군사적 자신감과 정치적 경멸감에는 이런 역사적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국가적 수모를 연속적으로 당하고도 {보복하자}는 여론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을 빼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정권이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이란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민정부 하에서 북한 핵 개발이란 더한 위기에 처해서도 군사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노태우(盧泰愚)와 이승만(李承晩) 비교

우리의 정부·군대·언론·국민은 침략을 받으면 저항은 했지만, 그 이전에 미리 자신들의 책임 하에서 스스로 안보와(安保)와 전쟁을 놓고 고뇌하면서 결단해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국가와 국민이 위기에 대해서 일체감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1988년 7·7 성명에서 [남·북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 서로를 불신·비방하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고통스런 분단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남한의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논평하는 언론인의 문법을 쓰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아니라 남침전쟁이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선 안될 한국전쟁의 책임소재를 애써 애매 모호하게 만든 노 대통령은 이 성명에서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까지 했다.

그 뒤 우리정부는 과연 그런 협조를 해오고 있는가. 북한의 허물은 덮어주고 북한을 감싸주는 것이 정치적 인기를 높이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일부 재야, 정치권 인사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과 북한이란 장르가 정치적 인기를 높이는 황금어장이라고 본 일부 정치인들은 지금도 남과 북의 중간에 서서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토해내고 있다. 남북한 대결구도에서 과연 중립적 입장이 가능한가.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중립적 입장이 가능했던가?

UN의 승인 하에, 즉 국제사회의 공인 하에 세워진 국가, 그것도 민주화된 국가를, 그런 공인을 받지도 못한 노예사회와 평등하게 놓고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사람은 한국인인가 외국인인가. 그런 입장을 유행시킨 노(盧)대통령의 6공정부가 휴지화 돼버린 남북합의서를 제외하면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실질적 진전도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북한을 움직이는 힘은 그들에 대한 아부가 아니라 힘이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두 대통령은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던 지도자이다. 두 대통령은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미국이 하자는 대로하다가는 한국의 안보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데서도 같다(이스라엘은 미국이 하자는 대로 안하고 독자적인 국방정책을 폈기 때문에 살았고 월남은 미국이 하자는 대로 순응했다가 망한 경우다.

일본(日本)은 미국에 국방을 의존함으로써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적 역할과 책임을 못 다하고 있다). 이승만(李承晩)은 북진통일이란 카드로써, 朴대통령은 자체적인 무기체제 개발이란 카드로써 미국을 위협하고 자극하여 국익을 도모하였다.

1954년 2월4일 이승만(李承晩)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는 최근의 외교 문서 공개 때 포함돼 있었다. 이 친서는 외교적 문체를 무시한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으로 차있다. [당신은 {우리와 협력하고 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말자}고 말하는데, 한국의 생존을 부차적인 중요성으로 다루고 있는 나라와 어떻게 협력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한다면 우리는 중국처럼 적화되든지 지난 40년간의 한국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적에게 팔려갈 바에야 차라리 싸워서 같은 민족과 통일을 이루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자유민이 될 것이 홀로 싸워 실패하면 노예가 되겠지만 어쨌든 통일은 되는 것이다] [좌우간 우리는 결심을 해야 할 때다. 한국의 통일에 대한 당신의 현재 정책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알려주시오] {예스냐 노냐}고 단독 직입으로 들이대는 李承晩의 대담한 안보외교 덕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제의 구축과 한국군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오늘의 한국안보와 경제번영, 그 토대는 李承晩 대통령의 처절한 자주국방 의지가 마련한 것이다.

북핵(北核)문제를 외국사건 다루듯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려버렸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선 [힘의 논리]를 대담하게 구사함으로써 그들의 도발의욕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통제하면서 경제안정·정권교체·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노(盧)대통령은 북방외교엔 성공했으나 남북한 협상에선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김일성(金日成)과의 정상회담을 기대하면서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북한핵(核) 문제에 대해서 애써 과소평가 하려는 자세를 유지하였다.

1989년 여름 미(美) CIA팀이 한국 정부에 대해 북한 核개발의 의혹을 브리핑한 뒤에도 정부와 대부분의 언론은 그 심각성을 축소, 또는 은폐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초기에 북한 核문제를, 외신기사를 인용하여 주로 보도함으로써 마치 외국문제 다루듯 하였다.

기자는 지금도 1990년 봄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 고위 관료들을 찾아다니면서 북핵(北核)문제가 머지않아 세계적인 뉴스가 될 것 같으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미국이 알아서 하겠지} {통일되면 우리 核론 될 텐데} {그런 게 왜 기사거리가 되죠?}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군인 출신인 노(盧)대통령까지도 우리 국방은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核문제를 등한시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盧대통령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면 지금쯤 그런 비화가 흘러나올 만한데 아직 그런 게 없다. 기자는 김종휘(金鍾輝) 안보담당 수석비서관을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직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도 그는 북한 핵(核)개발의 상황이 별 것 아닌데 과장되고 있다는 인식을 내비치고 있었다.

헐값에 판 [재처리시설] 카드

주한미군 측이 같은 군인 입장에서 전(全), 노(盧) 두 사람을 보는 태도는 경멸과 증오심이었다. 대북(對北) 안보는 자신들에게 책임지게 해놓고 등 뒤에서 안심하고 12·12와 같은 유혈하극상과 5·17과 같은 정치드라마를 꾸미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직과 명예를 장교의 2大 덕목으로 생각하는 미군장교들은 12·12 때 全장군쪽에서 한 속임수를 잊지 못했다. 노(盧)대통령은 처음부터 북한 核문제를 [민족생존의 문제]로서 절실하게 끌어안지 않고 미국에 의탁하는 자세를 취했다.

1991년 11월 盧대통령이 비핵화선언을 하면서 핵 재처리 시설의 영구 포기를 천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미국은 박(朴)대통령 시절부터 한국이 재처리 시설이나 기술을 개발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왔다. 북한 核개발이 남한을 자극, 그 쪽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해했다. 우리의 원자력 기술연구 상황은 명백했다. 재처리 시설을 가질 필요도 가까운 장래에 가질 이유도 없었다.

굳이 장래의 가능성을 담보로 하여 결백증명을 해 보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점 의혹이 없었다. 그러나 [핵 재처리 시설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중요한 카드가 된다(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남한이 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주면 美·中·日은 더욱 열심히 對北압력에 나서게 된다). 한국은 이 카드를 對美, 對北용으로 두루 쓸 수 있었다. 적어도 李, 朴대통령이었다면 브래지어를 벗으라니까 팬티까지 벗어던지는 식으로 값싸게 카드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핵 재처리 시설 포기는 남한에서 미리 화근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종용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핵 재처리 시설의 포기를 근거로 하여 북한의 재처리 시설 포기약속을 남북비핵화 공동선언에 담을 수 있었다고 변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북한은 재처리 시설을 갖고 있는 상태이고, 우리는 갖고 있지 않는데 전과자와 선량한 사람을 같은 조건으로 속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공동선언은 현재까지 아무런 실천도 결과하지 못하고 있다.

말로써 對北 설득이 되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북한 핵(核) 대책은 {평화적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서,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란 말로 요약된다. 말하자면 말로 하겠다는 것이다. [힘의 외교]의 대가(大家)인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이 [진짜 전쟁](Real War)이란 책에서 말한 것이 있다. [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하책(下策)은 자신의 카드를 보여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하지하책(下之下策)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는 일이다]

金泳三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수단은 쓰지 않겠다]는 下之下의 카드를 쓴 셈이 된다. 특공작전, 예방폭격, 대응개발, 재처리 시설 도입 가능성 따위의 여러 카드를 쥐고서 상대가 이쪽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말로만 하겠다고 해버렸다.

말로들을 북한인가. 그 길로 우리의 대북 지렛대는 날아 가버린 것이다.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대북(對北) 핵 정책은 대미 완전의존 및 대북 유화 제스처로 시종하고 있다. 對北의존의 결과는 숱한 오판이다. 지난해 3∼4월에 기자가 만난 정부 내 핵문제 담당 관료들은 {북한은 외교용으로 핵 개발을 하고 있으므로 채찍과 당근을 적당히 쓰면 포기할 것이다}는 견해였다. 북한 귀순자들과 북한 전문가들은 그러나 {김일성(金日成)은 국가 생존차원에서 핵을 개발하고 있으니 끝까지 갈 것이다}고 전망했다.

1년 뒤의 결과는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 옳았고, 외교관들은 지난 1년 세월을 북한의 생리를 배우고 깨닫는 데 허비했음을 보여주었다. 외무장관과 당시 통일원장관은 {북한은 앞으로 두 달 버티기 어려울 것} {9월까지는 특별사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식의 公言을 거듭했다. 그 예측이 빗나가도 두 장관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읽은 적이 없다.

두 장관을 몇 번 만나본 기자의 느낌으로 그 들이 핵 문제를 과연 민족생존의 차원에서 절실하게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있는지 하는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북한 핵 개발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어느 나라보다도 북한과 김일성(金日成) 체제에 밝은 우리로서는 적어도 그 들의 핵 전략에 대한 해석은 미국보다도 더 정확히 할 수 있어야 했었다.

몇 달 전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종합 분석한 [국가정보 판단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이 한 두 개의 핵 폭탄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 며칠 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엔 {핵 문제가 연초에 해결될 것이다}고 말했다. 왜 金대통령은 굳이 애써서 [근거가 약한 낙관론]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돈 역시 북한 핵은 미국의 문제이며 우리의 안보는 미국이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대북(對北)비관론이나 강경론은 인기를 얻는 데 불리하다고 판단하는가?

최근의 안보장관 회의에서 金대통령은 또다시 {북한 핵 문제가 UN 안보리로 넘어간 이후에도 대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이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북한이 남한 정부를 상대로 核문제를 논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데다가, 그들을 실질적인 대화로 끌어들일 수 있는 카드를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이젠 알게 돼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희망이나 예측과는 달리 긴장국면이 조성되고 우리 정부의 오판(誤判)과 무력증이 드러날 때 김영삼(金泳三) 정부엔 위기가 올 것이다. 안보대처능력의 문제는 다른 행정적 실수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을 부를 것이다.

개방에 의한 붕괴보단 전쟁 승률이 더 높아?

북한 핵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핵 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에 있다. 핵 개발에 대한 투명성 이전에 그것을 개발하는 체제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김일성(金日成) 체제의 대남(對南) 무력통일 전략과 폐쇄정책이 해결되지 않는 한 핵의 투명성은 영원히 확보될 수 없는 목표이다. 金日成 체제를 투명한 쪽으로 변화시키면 그 결과로서 핵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그런 변화는 곧 金日成 체제의 붕괴를 뜻한다.

미국 국무성은 북한이 특별사찰을 받아들인 후에도 인권 및 테러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할 것이라고 이미 공언한 바 있다. 이는 핵 문제 해결에의 접근방식이 핵 개발 저지에만 집착하는 각론식이 아닌 체제변혁으로의 유도라는 총론식임을 뜻한다. 체제를 지키려고 손댄 핵(核)개발 때문에 金日成은 체제의 변화를 강요당하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던진다. 급속한 체제 변화에 따라 통일의 날이 예상외로 앞당겨질 가능성과 金日成이 전쟁을 결심할 가능성이 있다.

강요된 체제 변화가 金日成 정권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는 전쟁에의 유혹을 느낄 것이다. 체제의 변화가 정권붕괴를 가져올 것이란 확신이 높을수록, 즉 개방하면 망한다는 인식이 굳어질수록 개방보다는 승률이 더 높은 전쟁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정보 부서에선 북한 군사력은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증강되는 추세라고 말하고 있다. 내년까지는 상승 곡선이 계속 이어질 것이란 얘기다.

이 증강추세가 피크에 왔을 때, 즉 군수산업의 피폐와 외화 부족으로 무기체제의 현상 유지가 어렵게 되기 직전이 가장 위험하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때쯤이면 원자폭탄도 확실하게 갖고 있을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이 더 약화되기 전의 그 순간에 최후의 도박을 걸 가능성이 제일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때 남한이 약하게 보이면 전쟁에의 유혹은 더욱 강해진다. 결국 북한 핵 문제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서야 돌파구가 나올 것이다. 그 순간이 통일전야일지도 모른다.

장거리 로켓포의 인질 된 수도권

정부와 일부 언론은 지금이 긴장 상태가 아니라고 자꾸만 국민을 설득하려고 한다. 영어로 [결정적인 순간]을 [진실의 순간] (The Moment of Truth)이라고 하듯 현실을 직시해야만 결단의 순간을 맞는 자세를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다. 정부와 언론이 그 심각성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지 않은 휴전선상의 변화가 하나 있다. 북한군이 지난 2∼3년 사이에 다연장 로켓포(북한에선 방사포(放射砲)라고 부름)를 후방에서 남쪽으로 전진배치 함으로써 수도권을 사정거리에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민군은 약 2천문의 로켓포를 갖고 있다. 18개의 발사대로 구성된 1개 대대는 수초 사이에 7백20발을 쏠 수 있고, 이는 2㎞×0.5㎞의 지역을 불바다로 만든다. 정확도는 미사일보다 약하지만 지역집중사격을 하면 도심지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다.

서울은 그런 집중포화의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다. 적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 나라의 수도권이 거의 알몸상태로 적의 장거리포에 노출돼 있는 곳은 한국뿐이고 그런데도 긴장이 없다고 우기는 곳도 이 나라뿐일 것이다. 북한의 남침은 입체적 기습으로 시작된다. 지휘소·비행장 폭격, 단·장거리 땅굴과 공정부대를 통한 후방침투, 장거리포에 의한 서울 도심 무차별 포격, 그리고 기계화사단의 全로선 돌파… 이런 상황은 각오해야 한다. 스위스 민방위체제의 논리는 [일선 전투부대의 사기는 후방이 교란되지 않고 든든하게 자신들을 받쳐준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유지된다]는 계산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인과 한국군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습을 받고 붕괴해 버린 오점을 한국전과 임진왜란 등 여려 번의 전사(戰史)에서 남기고 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 그 사회의 가치체계에 대한 확신, 군대의 기율, 개인적 명예심과 책임감 등 국가체제를 채우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한꺼번에 무너질 때 군대는 군중(群衆)으로, 병기는 고철(古鐵)로, 시민은 도망자로 변한다.

이런 국가적 전의(戰意) 상실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초전(初戰)에서 아군이 밀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보다는 {김일성(金日成)이도 동족인데 같이 살아보지 뭐} 하는 자기합리화의 심리변화가 내 가슴속에선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는가. 그럴 만큼 우리의 체제 및 가치관에 대한 신념이 강한가. 현역 육군 소장인 김희상(金熙相)씨는 [중동(中東)전쟁]이란 책의 [교훈]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기습을 달성치 않고는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기습이란 통상 기습당하고자 준비된 사람에게만 성공하는 것 같다. 인간이 기습을 당하는 경우란 교만 나태하며 적을 경멸하거나 방심하는 경우이지 진지하게 사태에 대처하고자 하면 기습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자위적 선제기습도 배제 않아야

주한미군의 한 간부는 이런 경고를 기자에게 했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인민군이 한국군에 대해서 백전백승한다고 본다. 한국군 장교들 중엔 괜히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있지만 3성 장군 이상만 되면, 즉 군단 급 이상의 대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자는 호언장담을 하지 않게 된다. 기습을 당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지휘체제의 정위치 문제이다. 과연 지휘관들이 몇 시간 이내로 지휘소에 도착할까? 그 순간에 눈이 왔다든지 교통체증이 심하다고 했을 때…}

북한 핵(核)문제는 다행히 한국인들로 하여금 전쟁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함으로써 기습을 예방하고 정상적인 국가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의미심장한 화제(話題)를 제공하고 있다. 이 화두를 제대로 살려나가면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정직하게 인식하면서 아직도 진행중인 국가건설의 길을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핵(北核) 위기는 호기(好機)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북핵(北核) 위기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뻔히 눈뜨고 살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인 사회에선 6·25 북침설이 나돌고 집권자들마저 전쟁 책임론을 기피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한국은 통일 뒤에도 강대국 사이에서 자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스위스, 이스라엘과 같은 고슴도치 식(式) 국방전략이 우리의 모델이 될 만하다. 침략을 위한 전쟁은 할 생각이 없지만 자위를 위해선 언제든지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국가란 인상을 주변국에게 강하게 심어주어야만 민족의 활로를 영구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연합군에 의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자 국제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고 선제공습을 감행, 개전 30분만에 적 전투기의 90% 이상을 비행장에서 파괴해버림으로써 전세를 결정지었다.

1973년 10월 전쟁 때는 전쟁개시 8시간 전에 {전쟁이 확실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스라엘 군 지휘부는 선제기습을 주장했으나 장관들이 반대하였다. 국제 여론을 두려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때 이스라엘은 이미 비밀 핵무기 개발에 성공, 원자폭탄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대처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군도 인민군 기습작전에 의한 전쟁 임박을 상당히 빨리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럴 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도 이스라엘식의 [정당 방위적인 선제기습]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할 만한 배포와 논리를 국가 지휘부가 갖고 있을 것인가. 그것을 국민들이 납득할 것인가. 그리하여 그 기습으로 파생되는 부담을 한국은 감수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 핵위기를 전국민적인 주제로 승화시켜 전쟁, 국가, 국민, 책임, 명예란 단어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뇌해 간다면 통일 이후까지 有用할 거대한 집단적 깨달음을 우리는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국가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고, 전쟁을 절단할 수 있는 국민만이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정상적인 나라를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다


지구 행성을 빨리 끝장내는 방법:

수소폭탄 4발이면 지구 멸망합니다.그것도 아니면 급작스러운 소행성 충돌
그것도 아니면 우주쓰레기 낙하로 수소폭탄 파괴시에는 핵폭탄 파괴시에 돌출상황으로 지구 멸망

대한민국 정치,남북정치 세계 정치 똑바로 하지못하면 전쟁통으로 만들어버릴것입니다

이러한 아래의 여러가지 전쟁상황 예상 시나리오가 있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못한다

해결책은 이미 알고 있지요 일단 대한민국 정치나 남북한 정치, 세계 정치를 바로 하지못하면 전쟁통으로 V대재앙통으로 만들어버릴것입니다

지구가 기사회생하려는 모습을 보이지않으면 절대적인 신의 노여움을 받게될것입니다

소생은 지구촌의 전쟁에서 20억명 죽는것 그것도 적습니다 더 많이 죽어야 하기에 왜 이러한 발상을 하는가 하면 그것은 깨달아보시면 아시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정치를 가르처 준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개과천선하지못하면 더는 구제하지않습니다

전쟁후의 사상자의 시신관리, 위생관리, 전염성 관리, 화장터 관리, 식수관리,환경 해양 관리,인구통제관리, 무기 관리,국가 관리등 기타 처리방안도 검토가 이루어져 있어야 겠지요

이러한 준비들이 예상해 놓고 전쟁을 치루어야지 무댁발로 전쟁 치루면 되나요 ㅎㅎㅎ

효과적인 전쟁 즉 짧은 시간안에 위의 관리들를 함에 있어서 시간과 비용을 적게들어가고 부담이 적은 최대한 효과를 내는 전술로 해야겠지요

그러고보니 전쟁도 최첨단 고난이도의 전략과 전술 준비관리가 필요한 기술인것 같습니다

^^ 1,유럽국가하고 미국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나?^^^

미국의 군사력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세계 해군 화력을 분석하면 미국이 53.46%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해군의 절반 넘게 가지고 있단 뜻도 되고 돌려 말하면 전세계 해군이 덤벼도 미국해군을 이기지 못한단 뜻이됩니다..


군대가 전멸하면 항복한다는 전재를 내새운다면 미국이 이기는건 당연합니다...
먼저 미국은 항공모함을 12척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항공모함 하나당 평균 80대의 전투기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항공모함 혼자서 움직이는 법은 절대 없죠, 그 아래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함대의 파워도 대단 합니다...그 유명한 이지스함만 76척입니다.
이런 해군 앞에서 전세계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육군이 아무리 강하면 뭘 합니까? 미국 12척 항공모함들에서 나오는 무수한 전투기들의 폭격이 될껍니다... 아무리 총들고 200만이 덤비면 뭘합니까 총으로 전투기 요격합니까? 그 200만 병사에 폭탄 떨궈주면 끝이란 말입니다. 뭐 쪽수 많다고만 되는게 아니라 어떤 무기가 몇개 있느냐를 분석해야됩니다.
이런 압도적인 파워로 전세계에 폭탄을 갖다 부어서 잿더미로 만들고 미육군이 상륙해서 깃발 꼽으면 끝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군대가 전멸하면 항복한다는 전재하에 입니다
설령 상륙한 미군이 전멸해도 어디에서도 미국을 건드릴 수 조차 없습니다(핵전쟁이 아니라면)
전세계와 미국사이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미해군이 바다 건너는 모든 것들을 바다에 가라앉혀줄테니까요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전쟁나간다 하더라도 그 병사들을 무슨 수로 미대륙에 상륙 시킬 겁니까?
다 대서양이나 태평양 건너오다가 바다에 몽땅 가라 앉습니다...
바다 떄문에 미국과의 전쟁은 해군의 역량으로 승부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미국과 유럽의 해군력을 비교해드리죠, 미국 해군은 세계 해군 전체의 53.46% 화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뒤로 영국이 8.11%고 러시아는 8.03% 일본은 4.66%입니다. 그냥 순식간에 박살이 난다는 거죠.

자 그럼 일본은?
일본은 전세계 해군 화력의 4.66%를 가지고 있습니다.(미국의 10분의 일-_-)
미국이 일본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문제는 경제겠죠
일본 해군이 강하다고 해도 일본 해군은 미국에서 나중에 제 2의 6.25때 자기네 항공모함 끌고 왔을 떄 쓰기 위해 만들어 논 호위전대에 가깝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항공모함 같은 대형 함대를 호위하는 구축함이나 순양함이 주력이란 말입니다, 일본은 항공모함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다량의 항공모함을 보유한 대양함대입니다... 12척이죠...
일본은 2100대 전차 밖에 없는 우리나라도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약골인 육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일한 자랑인 해군이 깨지고 나면 남은 건 미육군이 상륙해 점령하면 끝입니다. 현제 미국은 3세대 전차 8000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_-


유럽전체와 미국 해군을 비교해볼까요?

여기서 미국과 유럽의 해군력을 비교해드리죠, 미국 해군은 세계 해군 전체의 53.46% 화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에 반해 유럽은 다 합쳐도 26.69%밖에 안 됩니다.
여기서 러시아와 영국둘만 8%씩 차지 했다는 것을 알립니다.
한마디로 유럽 전체를 다 합쳐도 미국의 절반 수준의 해군 밖에 안 됩니다...
그냥 순식간에 박살이 난다는 거죠.


그럼 숫자 놀음은 그만하고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가 볼까요?



현재 미국이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항공모함은 12척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건조하고 있는 니미츠급 조지부시함까지 취역하면 13척이죠.

적은거 같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하시는겁니다.

먼저 미국 항공모함은 세계에서 제일 큽니다.

한척당 80대 정도의 전투기등을 싣고 다니며 항공모함으로써의 구실, 즉 떠나니는 공군기지 구실을 제일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항공모함 다 합쳐봤자 21척입니다. 그런데 태국은 정말 그야말로 항공모함있다는 이름걸려고 만든 감히 항공모함이라 할수도 없는 항모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제외할까 합니다. (만재 배수량 11,000톤에 해리어 6기 운용, 심지어 이탈리아 항모도 최소한 14000톤에 해리어 18기 운용합니다)



그러면 전세계 20척 항모 중에 12척이 미국꺼라는건데 그게 다냐...

아니죠 전세계 어느 나라도 미국만한 항모 보유한 나라 없습니다.



미국의 니미츠는? 10만톤에 달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작은 항공모함이 8만톤입니다.

유일한 매치인 러시아도 유일하게 갖고 있는 항공모함 배수량이 고작 7만톤입니다.

미국 항모 80기의 함재기(전투기)운용합니다.

다른 나라 항모를 볼까요(태국 제외)



영국

인빈서블 3척 보유중 (만재 배수량 20,300톤에서 21,000톤으로 확대) 함재기 시해리어 25기 가능



프랑스

드골함 4만톤 함재기 40기



이탈리아

경항모 가리발디(만재 배수량 13,850t) 보유중- 시해리어 18기 운용가능



스페인

경항모 Principe De Asturias 16,900 t 보유중 시해리어 및 전투기 25기 운용



브라질

상파울로 함 24,200톤 (32,500톤) 40기 운용가능



인도

Viraat (만재 28,700톤) 해리어및 함재기 40기 정도 운용가능




이 중에 미국 항모의 반만한 구실이라도 할 수있는 항모 가진나라여 봤자

영국(항모는 작지만 워낙 현대화가 잘되서) 프랑스 러시아 답니다.

나머지는 너무 작거나 구식이어서... 스페인은 그나마 상태가 낫습니다.

그러면 쓸만한 항모는 17척이라는 건데 이중 미국이 12척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죠.



이제 미국이 항모에서만큼은 전세계 어디서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거 아시겠죠?

이 항공모함전력은 미국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니미츠 급 한척 건조비용이 45억불입니다.(한화 1불당 1000원 잡아도 4.5조)

이런거 10척만 건조해도... 유지비용도 장난 없죠.

따라잡을 전력이 아닙니다.



거기다

이 항공모함들은 절대로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그 유명한 이지스 함들이 호위를 하죠.

이지스함들은 동시에 최고 200개의 목표를 탐지·추적하고, 그 중 24개의 목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목표는 뭐겠습니까? 미사일이죠. 한번이 미사일 200개를 추적하고 24개의 미사일을 동시 요격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 짓는데 우리나라돈으로 1조 정도 듭니다.

공식 이지스는 현재 일본에 3척, 스페인에 1척입니다.

영국이나 러시아는 비슷한 스펙에 배는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은 8척, 러시아의 경우 몇척이다 라고 단정짓기가 제일 힘든 나라입니다. 워낙 돈이 없다보니까 유지비가 딸리게 되고 그 결과 퇴역시키는 핵잠수함이 엄청나고(타이푼만해도 6척이나 지어놓고서 예산 부족으로 1척밖에 운용못합니다) 정비를 제때 못해서 쓰지 못하고 썩혀두고 있는 군함들이 워낙 많아서 몇척인지 예측이 힘듭니다. 대략 45척 정도?



미국은??? 76척입니다....



자 뭐가 또 있을까요

아 잠수함



미국은 핵미사일 발사할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인 Ohio 급을 14척

공격 원자력 잠수함은 50척...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 붙이자면... 미국의 기준은 엄청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있는거보다 미국해군은 더 크게봐야합니다.

우리나라 가장 큰 구축함이 광개토급으로 3800톤인데 미국에서는 가장 작은 급인 frigate이 4100 톤입니다. 미국에서의 구축함은 8000톤입니다. 엄청나죠?



아까 언급햇던 항공모함... 다른 나라에서는 2만톤, 커봐야 4만톤을 항모로 쓰고 있었죠?

미국에서는 다른나라에서 4만톤짜리 항모로 쓸 수 있는 군함들을 강습양륙함으로 써서 항모로 치지도 않습니다. 이런 배가 12척이 있습니다. 전쟁시 이건 항모로 사용가능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까 언급했던 21척(크게 인심써서 태국꺼도 친다면)에 12척 합치면

33척 중의 항모중에 미국혼자서 24척을 가지고 있는거죠... 미국의 해군은 정말 일반인 상식을 초월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죠? 하지만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놔야지 미국해군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나거든요. 이러니 전세계 해군 화력의 53.46%를 보유하고 있는겁니다.



어쩃든 전세계전체와 미국이 전쟁을 해도 미국이 이겼으면 이겼지 절대로 지지는 않습니다.

핵전쟁이면 어떻게 되느냐?
핵전쟁이면 전세계 멸망입니다, 미국과 러시아 둘이서만 1만발이 넘는 핵미사일을 사이좋게(?) 나눠가지고 있거든요,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도 공식 핵보유국가구요. 세계 멸망이면 미국이 진것은 아니죠, 비긴거지.



그리고 뭣도 모르는 사람이 "미국하고 전세계하고 전쟁하면 핵전쟁 나고 전세꼐 멸망해요" 이러는데요.... 핵무기는 뺼수 밖에 없습니다. 핵무기는 쓰려고 만든 무기가 아니기 떄문입니다.1945년 핵이 처음 사용되고 나서 핵무기는 실제로 전쟁에서 쓰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핵을 가진 영국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질 뻔한 상황에서 쓰지 않았죠.
핵은 쓸 수 없는 무기 입니다.(물론 쓸 수는 있지만 좀 생각 있는 지도자라면 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핵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니까요. 핵을 보유하는 것은 선제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시대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국가들이 전세계를 몇번은 멸망시킬 수 있을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니까요.한마디로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핵보유국들이 핵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이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Deterrence Theory 인데 누가 먼저 핵을 쓰든 공멸한다는 거죠.이게 냉전 떄 전쟁을 막았다고 전 봅니다.
한마디로 핵은 그 파괴력 보단 존재한단 사실이 엄청난 위협을 강하는 정치적인 무기죠.게다가 여러분도 핵전쟁나면 전세계 멸망한다는거 아는데 핵무기를 쓸 수 있는 높으신분들이 그걸 모를까요? 북한같이 막가는 나라가 아니라면 핵무기 못 씁니다.어쩄든 전쟁이 터져도 핵은 여간하면 쓰이지 않을 무기이죠

^^^2,통일 한국하고 일본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나?^^^

안타깝지만...일본이 이깁니다...



일단 자위대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후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자체적으로는 대외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정도의 군대...라기보다는 미군의 허락 아래 군대의 아래수준의 개념을 만들었다라고 보시면됩니다. 하지만...현재 일본자위대는 일본GDP 즉, 국내총생산의 단 1%로 운영하고있습니다. 말이 1%지...그 1%가 우리돈으로 50조원...;;;

징병제는 아니지만 모집제로 육상, 해상, 항공 자위대원은 총 23만여명입니다...유사시 일본도 징병제로 하겠죠...요즘 자위대의 자위군 격상으로 여러가지 시끄럽죠...자위군이 된다면...당연히 국방비는 증가하고 더욱 강성해지겠죠?



1. 해상전 해군 VS 해상자위대



대략 일본 해상자위대의 이지스 6대와 한국의 모든 구축함이 붙는다해도 일본 해상자위대가 모든 구축함을 탐지해 격추합니다...한국이 가지고있는 모든 구축함...기껏 해야 얼마되지도 않고...일본해상자위대 소속 구축함 숫자가 더 많습니다...잠수함도 일본이 더 많습니다...게다가 일본은 재원능력 및 과거 야마토 같은 전함을 만든경험도 있기때문에 더 좋은 살상무기를 만드는데 수월 할 뿐더러 전쟁 경험이 많기 때문에...이기기는 힘듭니다...즉, 유사시 일본에 유리한 변수가 많습니다...

한국해군이 이지스 건조했습니다...그런데...현재 배치는 안됬구요...미사일도 한발에 몇억 짜리라서 국방비예산이 모잘라 배치기간이 길어진다는...;;;



2. 상륙한다면?



죄송합니다만...상육하기도 전에 모두 침몰 되어버립니다...일본의 정보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고 현재 조기경보기를 17대나 가지고있습니다...전투기도 몇배나 많구요...(한국군은 1대도 없는;;;) 게다가 일본은 한반도를 감시하는 위성도 2대나 있고요...잠재적으로는 자위대가 자위군으로 격상된 후 대형 항공모함도 건조할 가능성이 있는;;; 핵미사일도...



3. 공군 VS 항공자위대



이것도 안됍니다...일본항공자위대 소속 전투기가 공군 전투기보다 숫적으로 많구요...당연히 북한하고 합쳐도 많습니다...게다가 최신 전투기이고...중요한건 공중급유기가 4대, 조기경보기가 17대라는...한국은 1대도 없고 구입할 계획도 없는;;;



4. 중국이 도와준다면?



중국이 도와준다면...미국은 일본편에 설테고...영국, 프랑스, 대만 같은 미국 우방국도 일본편에 설테고...러시아, 독일 같은 나라는...참전안하고...그럼 캐안습되는겁니다...



결론...



억울하면 강자되라...아직도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위에 글쓰신 분...뭘 모르시나본데...한국 육군이 세계3위면...미국, 라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이스라엘 육군은 뭡니까? 한국 육군이 3위라는게 말도 안돼는거 아닌가? 탱크 숫자가 많나...아니면 탱크가 최신형이기나 한가? 지대공방어미사일이 있기나하나...? 아니면 전쟁 경험이 풍부하기나하나? 아니면...상륙은 어떻게 할껀데?



한국군이 육군으로 상륙하려고할떄 이미 일본은 최첨단 무기로 중간에 차단을 하기때문에 결과적으로 안됀다는 말...딱총부대랑 최첨단 시스템이랑 붙으면 누가 이길까여~?

^^^3,한국,미국등등vs북한,러시아,중국 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나?^^^

사실대로 말해서는 중국은 쓰레기 가튼 나라이고 미국도 별볼일 없는 나라입니다

여러 경제학자들은 중국은 발전은 빛의 속도로 발전하지만은 '잠재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국도 약간의 잠재력이 있지만 이정도로는 쓸모가 없습니다

현재 무수하게 중국처럼 빛의속도로 발전하는 러시아는 잠재력이 무수하게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인해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은 러시아 시베리아 자원에 저극적

투자하는 이유도 이 '잠재력'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잠재력 뿐만아니라 20~30년지나면 석유가 고갈될텐데 러시아는 아닐뿐더러

미래의 자원 하이라이트가 있을 뿐더러 자원초강국이고 이로인해 더욱더 강해져야한다는

점입니다 러시아는 패배한 경험이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인해 미국과 다시 냉전을

치뤄질수 있습니다 제2의 냉전이 시작되면 러시아는65퍼센트의 승리할 확률이 있고

엄청난 잠재력과 자원초강국뿐더러 강한 군사력을 가진나라입니다

현재 미국은 수천의 해군과 공군 육군이 있지만

러시아도 제2의 냉전이 시작되면 지금껏 모두 숨겨두었던 수만의 육군과 해군 공군을

모아 훈련 시킬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군인많던 미국보다 많을것입니다

러시아는 속을 알수없는 나라입니다 어디서 언제 육군 해군 공군은 비밀 훈련을 하고있습니다 러시아는 장담하는데 미국보다 군사력은 강합니다 제2의 냉전이 시작된다면...

미국은 모두 군사력을 보여주는데 러시아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겉은 가난한데

속은 미국보다 많고 막강하고 우수한 군사력과 엄청난 경제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모든 국가는 투자를 하는것이고 ...

말이 길었군요



중국과 러시아의 협동 훈련은 두가지 경우가 있는데 제가 말해듯이 러시아는 속을 알수없는 국가이고 겉은 미국과 친하지만 속은 다르다 이겁니다

이것을 트집잡기위해 중국과 훈련하고 언제어디서 미국을 치기위해 중국과 친해지고

훈련을 계속할것입니다 그런데 40~30년이 지난다면 어떻게될까...



미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30일도 못버텨서 우리나라는 모두 터질것입니다

그이유는 그쯤되면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1~3위 정도 될테고 미국이랑

맞먹는 군사력을 뛰게되니까요

아무리 핵을 만들었다해도 핵을 발사했다면 우리나라 국민은 차별받고 쓰레기 가튼

존재로 살것입니다 왜냐하면 핵을 발사하고 남은 누출된 원자때문에 다른국가에서

눈치때문에 발사는 절때 못합니다



미국이 도와준다면 유럽연합과 한판 붙게될것입니다

유럽연합은 곧바로 러시아로 처들어올테고 모스크바에서 전쟁이 일어나겠죠

결국 러시아는 혼자서 유럽모두를 경쟁해야하는겁니다 결국 중국과 미국만의

전쟁이 일어나는거죠



러시아편

러시아는 강대국의 힘으로 모스크바로 유인하여 작전을 짭니다 모스크바의 추위로

제2차세계대전처럼 유럽군사들을 얼어죽게하려고요 하지만 여기서 실패하면

이 추위와합게 유럽과 전쟁을 이르킵니다 역시 무수히많은 러시아 육군 때문에

유럽은 밀리고 밀려서 유럽반정도를 러시아가 점령하고 항복하자 러시아도 많은

피해를보아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을 받고 전쟁으로 인해 가난해진 러시아가 다시

경제초강국으로 떠올릴테고 유럽은 그대신 구질구질해진 가난한 국가가 되버린거죠

다시 러시아는 과거에 땅을 조약을 주는 일이 없어지고 오히려 얻어먹게되고

과거처럼 가난을 이르킬수없어 땅을 돌려주지못하고 동유럽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유럽연합을 건전히 제치자 약 3년이라는 기간이 걸렸습니다

스칸다니비아반도는 조약으로 인해 합병되어 미사일 기지로 변하였고

서유럽도 합병되고 옛소련에 합병되었던 국가들은 러시아와 합병되게 됨니다

결국 러시아는 다시 소련의 영토를 되찾았고 전세계의 영토 6분의1을 지배하자

미국과 전쟁을 치룰준비를 합니다 그전에 일본이 참전하자 일본과의 전쟁을 하고

거뜬히 승리합니다 약 이전쟁으로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중국편

중국과 미국은 엄청난 해전이 일어남니다 해전에서 약한 중국은 다행이 러시아와의

협동작전으로 인해 유럽과 전쟁중이던 러시아가 해군으로 지원해주자 협동작전이

시작됨니다 항모가 6척이던 중국과 러시아가 미래의 자원 하이라이트를 팔아 직접만든 15척 그리고 미국은 13척이였습니다

항모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구축함이 일어나고 초계함 잠수함등 여러 함대가 뜨자

결국 엄청난 전쟁이일어나고 특히 무수한 러시아 해군때문에 미국은 패배하게되고

자랑하던 육군과 중국의 무수한 육군이 붙자 너무 수가 많아 항복하고 조약으로

영토상실 결국 러시아 중국 승리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다시 군사를 이르켜 제 3차세계대전아니면 숨겨왔던 핵을 발사하겠죠

물론 미사일 방어시스템이 있지만



한국편

한국이 전쟁을 하지않다면 이는 경제국가로 탄생할것입니다 결국 통일 하고 중국에게 영토를 달라 요청하겠죠 중국이 반대하자 한국은 전쟁을 이르킬지.. 이러자 제3차세계대전으로 전락할지.. 아니면 공짜로 줄지 하여튼 우리나라는 경제국가뿐아니라 군사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역시 결론은 세계 군사력은 미국하고 러시아가 막강하네요 그 다음이 유럽이고

만약에 세계 3차 대전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나올것인가?


3차 세계대전은 아랍권의 나라와 예상하시는것 보다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중국



과 공산주의 체제와 미국과의 대립이 더 설득력 있을것입니다...



지금의 아랍권 실정으로 보았을때 미국을 상대로 최소 1년이상 전쟁을 유지할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현대 아랍권 국가들은 모두 미국에게 실권을 잡혔거나



미국의 이유있는 침공에 손을 든 나라가 파다합니다...따라서 미국과 아랍권의



나라는 자본은 풍족하다 할지라도 미국만큼의 국방력이나 경제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이라크 처럼 별거 아니게 끝나버리는 양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급격한 상향세를 타고 있는 중국은 가파른 국방력 상승곡선에



러시아의 기술력을 합친 신흥 군사강대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와 동맹구도



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이 펼쳐진다면 핵전쟁 혹은 인류 말살의 위기가 초래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중국또한 IBCM 등의 전략 핵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3국가의



전쟁은 인류 말살을 야기할수도 있는 전쟁이 될수도 있기에 이들 3국가의 3차대전이



더 설득력 있다고 말씀드릴수 있겠네요...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계속 반란과 테러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이 기회를 타서 같은 공산국가



중국, 바르샤바 동맹 군을 투입하여 2차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이라크에 있던 미군은 전



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미군이 당연히 패했고, 미국은 분노해 세계평화군(UN군)을 개



입, 공산의 확대에 대응한 나토까지 개입함으로써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가담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독재자가 나타나여 또다시 군국주의, 전체주의로 돌아섰다.



일본은 역시 또 한국, 북한 등을 침공하여 전쟁에 빠져들었다. 남한은 특히 UN이며 나토이



기 때문에 미군은 일본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일본은 어차피 전쟁중인데 미국말 안들으면



그만이다 하며 핵무기를 대량생산했다. 미국은 극단의 위기에 처했다. 이로써 2차 이라크



전은 막이 내리고 3차 세계 대전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2차 대전 보다 훨씬 큰 규모로, 러



시아, 미국, 일본 등이 핵무기를 앞세워 공격준비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 2차전때는 유럽



전체, 일본, 북미의 국가들만 참전했지만, 지금은 전쟁의 시작이 공산주의과 자본주의 국



가들의 충돌로 이어졌기 때문에 전세계 국가들이 참전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미군말을 안듣고 핵무기를 대량 생산하자 미국은 일본에 경고를 주었지만 일본은



무시했다. 미국은 다시 핵무기를 일본의 핵무기공장에 전격투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폭격할 순 없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격하여 워싱턴 D.C,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



아 반도를 모두 핵폭탄 세례를 시켜준 뒤,미국에 항복요구를 했다.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대로 항복했다간 세계가 명망해 버릴 것이다고 생각한 미국은 전쟁을 계속했다.



그런데 많은 나토의 국가들은 미국이 핵세례를 받은 것을 보고 하나 둘씩 항복하거나 협



조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럽은 러시아와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러시아는 유럽점령에 포기했다. 왜냐하면 허약해진 미국을 치다가, 유럽이 지원하면 다시 유럽침공을 시작해, 유럽의 국방비 소모 작전을 편 것이다.



유럽은 이 작전에 속속 말려들었다. 이렇게 유럽이 힘들자, 프랑스는 유럽이 단체로 위험



하니,비상 통일을 합시다.라는 제안을 했다. 유럽 국가들은 승낙하여, U.S.E(United Stats of Europe)



이라는 연방국가가 탄생했다.스위스도 유럽을 위해 EU도 아니지만 중립을 깼다. 미국은



유럽연합과 함께 엄청난 피해를 입어서, 더 전쟁을 계속했다간 일본, 러시아, 중국 등에 짓



밟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바르샤바 동맹군은 벌써 러시아, 중국과 함께 점령당해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한반도는 다시 일본이 점령해 버렸다. 이라크는 미국에 복수를 한다며 러시아, 일본의 허락을 받아 핵무기를 생산했다.



그래서 미국은 전쟁 대표참전국(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유럽연합)과 만나 휴전협상을 요



청했다.그래서 각국 대표가 모였는데,다행히 러시아, 중국, 일본의 국토소유를 나토, UN의 인정으로 휴전이 조인되었다.





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국은 국방비에 거의 나라의 모든 돈을 물쏟듯 퍼부었다.

유럽연합은 국방비는 물론, U.S.E의 단결에 힘썼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토 통일 협상을 했지만 중국의 국민소득을 높이게 돈을 대 달라는 조



건을 러시아가 거절하여 협상은 해체되었고, 얼마 후 러시아가 국방비에만 힘써준다는 내



용으로 협상을 했지만 3차 대전때 이미 백성들이 쥐어짜여 있어서 중국이 거절했다.



두 나라간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러시아도 중국대륙 통일을 포기하고, 몽고와 카자흐



스탄을 강제 합병, 유럽의 영토복귀 요청을 전쟁으로 이었다.



중국은 이 틈을 타 일본과 동맹 후 러시아 침공에 나섰다.



러시아에 두 강대국들의 공격이 이어지자 러시아는 유럽에게 땅을 돌려주고 중국, 일본과



싸웠지만 패망하여 두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중국, 일본 동맹군과 미국, 유럽연합, 나토, UN평화군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먼저는 미국이 러시아, 일본, 중국이 전쟁을 하자 패망위기에 처한 러시아에게 알래스카를



탈환하고, 세 나라가 싸운다는 이유로 UN평화군과 유럽군을 개입하여 국력이 쇄약해진



두 나라를 군사제제하기 위해 4차 대전을 다시 시작했다. 러시아는 전쟁중에 마지막의 지



역 시베리아 비밀장소에 모든 핵무기를 모아 두었다가, 중국 베이징,난징 등 유명도시들과



일본 도쿄, 교토 외 많은 지역과 미국 의 유명도시, 유럽의 프랑스 파리,영국 런던,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독일 베르린과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빈,덴마크 코펜하겐 등 수도권 지역에 핵세례를 퍼붓고 점령당했다.



미국은 유럽연합과 함께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무서운 핵전쟁을 계속했다.



미국- 일본 전국토, 중국 5분의 4를 핵세례시키고 겨우 승전했다. 마지막으로 일본도 점령



지에 만든 핵공장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해 미국의 예비수도 보스턴(이 지역은 핵의 피해를 입이 않았음)을 폭격 후 항복했다.



이로써 러시아, 중국, 일본 외 바르샤바 동맹군이 승전할 것 같던 세계 3~4차 대전은 예상치도 못한 미국, 유럽연합, UN국가들, 나토 국가들이 승전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한 인구피해



(단위 : 만)

미국 : 17984

유럽연합 : 18924

러시아(패망 후 영토복귀 후) : 14896

일본 : 11843

중국 : 119837

몽고 : 198

카자흐스탄 : 1498

이라크 : 1578

한반도(3~4차 대전 발발로 긴급 통일) : 1798

동남아 : 2866

그외 등등 : 4986



전체 사망자 수 : 196408만 명 즉 1964080000 = 약 20억명 = 세계인구 3분의 1

제2의 한국 전쟁 예상상황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 한다.



미국은 결국 북한을 폭격한다.



이에 보복으로 북한은 휴전선에 배치해둔 무기로 남한 주로 서울을 타겟으로 선공을 한다.



남한의 서울은 모두 파괴 되어버린다.



서울은 밀리고 수원에서 부터 반격을 해나간다.



그리고 미국, UN이 남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북한은 휴전선위 까지 밀리고 평양성을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결국 미치고 핵무기를 사용 하려고 한다.



결국 한반도 북쪽 끝까지 북한은 밀리고, 결국 핵무기를 사용한다. 타겟은 부산.



부산은 순간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다.



김정일 정권은 무너지고 북한은 항복을 한다.



이렇게 되서 3차 세계대전은 끝난다. (북한을 도와줄 우방국은 하나도 없다.)



결국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어, 모든 정권은 남한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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