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곡물 폭등에대한 국가적 대책이 현재 없다라고하는 자세만큼 복지부동한 자세가 없다
과연 그럴가요 대책을 진정으로 없다고보는지 아니면 의지가 없다라고 해야맞는지 능력이 없으면 내려와라 국민 피 눈물 혈세 축내지말고
정부의 기본작인 역활의 마인드부터 되어있지아않으니 이러한조짐은 이미 노무현정부때 몇년전부터 나왔으면 대비책을 세우고 국가 위기관리를 했어야지
국보1호급 숭례문 방화 사태나 구미 코오롱유화공장 페놀 유출사태 서해안 기름대형유출사태 지금 곡물가격폭등 물가상승가중 사태
국가가 총체적으로 위기관리 시스템이 그만큼 엉망진창으로 해온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대한민국 국가 사회전반적으로 비도덕적으로 운영해왔기에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위기관리 부실과 더불어서 복지부동의 안이한 국가 운영을 전반적으로 총체적으로 해온것이다
아직도 저러한 발상을 하는 정부 당국자가 잇다니 내려오너라! 무엇을 노력하고 그러한 답을 내놓는지
그러한 정신 상태의 끝이 어디인지지 잘 알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제 곡물 가격 움직임이 심상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곡물 가격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다”며 “여기에 시기가 정권 교체기와 맞물리면서 이렇다 할 가격 안정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위의 말을 한 정부 당국자는 변명에 불과한 발언이다 무책임주의 발상이다
그대들과 같은 머리 정신 상태로 앞으로 앞으로 세계 경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턱도 없을것이고 보리고갯길에서 먹고살려주어도 고마움을 모르니 고마움을 알았으면 국가와 민족이 더욱더 깨달아야함을 그러나 게을리한 죄 그래도 정신차리지못하니 정신을 차리게 해줄것이다
동태 눈알 썩어무드러진 정신상태로 뭔 국가와 국민을 책임지나
공직자들은 정권의교체와 관계없이 자신의 본분에 충실히 했다면 국가가 위기를 맞이하지도않거니와 부패하지도 않거니와 국민들의 고물가부담에 고통을 겪지않을것이다 그만큼 국민들을 진실로 섬기지않았기에 그러한것을 정권교체가 변명이 될수가 없다
세계 곡물 수급 부족으로 인한 파동이 예상됩니다
이것을 국무회의에서 심각하게 대처방안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문제이기에 더욱이 우리나라와 같은 경제 상황에서 매우 타격을 지금도 입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게서 얼마전 국내 물가에 대책을 세워라고 지시한바가 있으니 대통령께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주도로 이 심각한 국내 물가 상승과 곡물 수급 부족으로 인한 치솟는 물가에 대한 대책과 곡물 수급문제에 대한 외교적 대책과 현실적 대비책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식량안보 상당히 중요한 국내 경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에 대운하보다도 중대한 당면한 과제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되신것 축하드리며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지않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미 식용유 밀가루 곡물과 옥수수와 관련한 물품들이 도매업자들이 사재기를 하고 있고 동시에 시장에 풀지않고 대량 사재기하여 창고에 보관하고 있고 가격 상승을 유도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국내 물가 정책 당국자분들은 알고 있으신지요
이 자료는 소생이 분석해서 V대재앙과 비교하고 동시에 지금 세계 정세의 정치 상황을 그리고 인류의 정신 상태 마인드등 세계 악마 프리메이슨 정신 상태등 최종 결과를 공개 해드립니다 앞으로는 절대적인 신이 직접 관장하실것이기에 지금의 인류의 상황은 과연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지 지켜보고 잇으니 그다지 정상적으로 소생이 이 지구 전체와 인류를 본 바로는 그러하지않다
인류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성경이든 성서책이든 창세기 1장 28절이 지구의 재앙 덩어리로 변질되었음을 그러므로 창세기 귀절의 일부분이 수정되어야야함을 그리고 창세기 귀절의 특징은 유상세계 물질의 허상을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있다 내면 세계의 깨달음의 중요성을 언급하지않았다
0과 1이 이론처럼 창세기 이론은 1의 이론을 중시하고 동양의 인도 종교나 불교는 0의 이론을 중시한 반면에
창세기 1장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과거에는 광활한 영토에 그다지 지구 기상 온난화나 식량부족문제나 식수난 지구행성의 수명 단축에 접근하지못해서인지 생육과 번성이 맞는 논리인지 모르나 지금부터는 아니다라는것이다
인간의 번성 개체수가 100년만에 40억명이 늘어난 그 자체가 지구 행성의 불행으로 다가오고잇으니말이다 인간 물질의 불랙홀 지구 행성의 물질의 수명을 단축하고있기에 그래서 창세기 1장28절의 글귀는 수정되어야함을 알려드린다
태초부터 우리 인류의 공동체의 고통이나 개인의 고통은 개개인 스스로에 의해서 고통이 나온것이다
그러한 고통의 죄업이 쌓여서 공동체의 고통의 악순환도 개인의 고통 악순환도 국가나 민족의 악순환의 고통도 끊어지지못하고 있고 늘어난것도 다 깨달음의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한 죄에서 비롯된것이다
그로인한 인류의 개체수의 증가가 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격으로 인류는 그렇게 달려온것이다
지구상에 수많은 생물의 종중에 인간의 종 역시 다른 동물의 종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다 단지 인간이 도구를 이용해서 과학 물질 문명의 도구를 활용해왔으나 다른 동물과 다른삶을 살아온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다른 생물의 종처럼 살아왔으니 인류의 악순환의 고통이 뒤따라온것이고 지구행성 자체를 위협하게 만들고 있으니 그러고도 우주시대로 간다고 하는발상 그만큼 어리석은 발상이다
동물들의 종의 사회상을 보면 유일하게 인간만이 동물들의 악순환의 고통과 개체수 증가를 막을수 있는 이 지구상의 생물의 종인 인간이 그것을 그동안 인간 스스로 통제를 하지못한 이유는 바로 내면적 깨달음을 개우침을 절대적인 신의 당부대로 행하여오지않았기에 외형적 물질에 치우쳐 온 결과가 인류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게될것이다
즉 인류가 태초이래로 손해본 장사를 해 온셈이지요 아름다운 지구행성을 인류가 자신들의 내면의 가치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야하는데 외형적 발전만 줄곳달려왔으니 둘다 손실보려는 직면에 와있는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지구는 이러한 점을 알고 행하여가야만 한다 이미 늘어난 인류의 인구는 그리고 이들의 고통도 조금만 참고 계시고 무엇보다도 개달음을 수행함에 게을리하지말아라!
과거의 국가 사회에 만들어진 법과 규제,법규,제도에 있어서 그 종류의 수가 현재 국가의 법규나 규제,제도의 수와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다
왜 국가에서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법규를 만드는지 본질적인 이유도 모르고 온갖 평생 기억하기도힘든 법규의 종류나 규제나 제도 이러한것을 만병통치약인것처럼 남발하는 현대 국가 정치 사회에서 그렇다고 과연 인류가 제대로 깨달으면서 살아왔는가라는것이다
원래 법이라는것은 제도라는것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자발적으로 개달음을 얻고 깨우치라고 단지 인도하는 수단에 불과한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되어서 탐욕의 밥그릇으로 변질되었으니 무지몽매한 인류가 제대로 깨달을턱이 있겠는가?
참으로 인간만이 과거의 시간과 공간세계에서나 현재 세계에서나 미래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과 내면의 싸움을 한다라는것은 어느 동물의 종에서 하루없는것을 하는것은 신의 축복의 선물이다
단지 자신의 내면의 싸움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하느냐가 문제이지만 내면과의 싸움은 언제나 외롭다 그러나 그것마저 광명의 희열로 승화시키는 수행이 우선이지만 자신과의 내면의 싸움에 출발점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출발점을 주고 있다라는 사실 단지 그들이 찿지못해서 엉뚱한 내면의 자신과의 싸움을 하드라도 허탕을 치고 만다
자신이 왜 자신의 내면의 싸움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찿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성취욕을 위해서 싸우는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서 싸우면서 살아가는것인지
그 이유를 아시면 살아가시는데 큰 힘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각 국가마다 24시간을 기준으로 공평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정작 현실적으로 모든 국가가 무사무탈하게 평화롭게 보낸다고 치드라도 국가마다 하루의 결과가 달라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리고 국가마다 하루동안 국가의 방향이나 의지나 뜻 방향,깨달음 모든것이 결속력이 어느정도인지 그로인한 총체적으로 국가마다 하루의 결산이 바람과 같이 보이지는않지만 탐처럼 쌓여가고 있다
이러한 국가마다 하루의 탑을 차근차근 쌓아올라가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쌓아올려놓은 탑을 깍아먹는 국가의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국가도 있고 이 역시 다양한 하루의 국가들의 유형을 보면 세계 각 국가의 시간표를 지금 잘 지켜보고 있는것이다
더욱이 깨어나지못한 깨닫지못한 생명체인 인간의 삶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한 존재이기에 탑으로 비유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지금 인류가 세계가 하나의 무대의 장으로 되어가는 가운데에서 국가속에 국가의 존재의 당위성은 소생도 인정해주고 싶다 그러니 권력속에 권력이 존재하고있는것도 사실이고
그것의 대표적인것이 바로 프리메이슨 세력이라고 인류사의 대표적인 국가속에 국가이고 세계 권력속에 권력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국가보다도 어느 권력보다도 어느 국민보다도 깨달음의 수행을 바르게 해야하는데 그리고 높은 도덕성 높은 정직성 최고의 최상의 지혜를 혜안을 가져야하는데 그리고 절대적인 신의 선택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못하고 그렇게 행하지못한것은 바르게 행하여오지못한것이
그들 자신의 불행뿐만 아니라 인류의 불행 각 국가마다 불행으로 이어진 사실을 그래서 소생이 지금 그러한 상황을 예의주시해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 국가마다 다 지부가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음지에서 활동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하지않을수가없기에
소생은 세계 프리메이슨 지휘부 세력들에게 세계 인류의 구심적인 역활 기여부분에는 일정부분 인정한다라는 말을 수년전에 언급 해드린적이 있다
지금도 소생은 그대들에게 그동안 방향 설정이 잘못 걸어온 부분을 소생이 바로가도록 인도 해 주고 싶은게 소생의 진정한 바램이다 그리고 참여해서 전세계 국가를 두루 분석하여 이 지구를 좀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자한다
그대들도 양보하고 소생도 양보해서 소생 역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그대들이 알려주면 정확하게 이 인류를 바른길로 인도 해 주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고 그 역시 그대들의 복을 짓는일이고 그대들 역시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존재함을 실천으로 보여야 할것이다
앞으로 깨달음을 게을리한 국가나 민족은 그래서 살려둘수가 없는것이다
대한민국과 남북한의 현실적 식량이든 자원이든 무역이든 자원대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바다위에 촛불인 형국이면 대한민국 남북한 정치 세력들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청렴해야하고 정치를 바르게 해야 할것이다 그래야 하늘의 도움을 받을수가 있다 자신의 민족의 분수도 모르고 나라를 민족을 망치는 세력들은 이번이 마지막임을 명심해라
이 지구상에 식량 자원은 한계적이고 지하 자원 역시 한계적이고 식량과 지하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은 없는 국가나 민족에게 정치 군사 권력 개입을 이유로 복속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한정된 지구촌 식량과 자원속에서 지구촌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니 더욱이 가나한 나라 식량자원과 지하자원이 없는 국가나 대륙들에서 인구의 증가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니
그 중에 대한민국이나 남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그만큼 이러한 국가에 속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대륙이든 국가이든 분수를 알고 탐욕을 더욱 더 절제하고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 국가 사회의 부패성을 줄어가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식량과 지하자원이 부족한 국가나 국민들은 음식의 소중함을 깊이있게 반성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 해야하며 에너지 절약 자원 절약 식량절약 정신이 국가적으로나 국민 개개인마다 몸에 베어있어야 할것이다
지금 지구촌 세계는 급속도로 흥청망청 고속 성장과 식량과 자원의 귀중함보다는 낭비 수준에 가까울정도로 소비 문화가 만연한것이 지금 지구촌의 현실이다
그러면서 인류가 특히나 식량이나 자원의 자급자족이 없는 국가나 민족들이 이러한 기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식량의 소중함 자원 소중함 자신들이 처한 국가 처지 상황 분수도모르고 인간의 탐욕 절재도 하지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국가나 민족이 인간들이 국민들이 허다하다
그러니 그러한 국가와 민족은 국민들은 불행을 당하는것 역시 사필귀정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여러가지 명분상 이유를 갖다붙치지만 총괄적으로보면 그들 스스로가 불행을 심지어는 자신의 국가와 민족 개인의 목숨까지도 자멸하는 행동을 하는것과 같다 더욱이 고통을 스스로 가중시키고 있으니 아울려 지구 행성의 수명가지 앞당기고 있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알고 있나?
그것이 깨어나지못하고 깨닫지못하고 살아가는 동물 본능 수준들의 인간이라는 삶의 모습들이다 그러고는 사람이라고 국가라고 국민이라고 민족이라고 떠들어 외치지만 가당치않은 소리이다
식량 자원이 부족하고 지하 자원이 부족하고 외국 국가로부터 의존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 지구촌 국가들이나 민족들은 인간의 욕망은 지구행성 전체를 주어도 채울수가 없다라는 사실이기에 인류 개개인의 욕망을 자제하면서 문명의 과학발전을 위한 발란스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인류는 기형적인 구도가 되어왔다 즉 지구촌 65억명의 가치 존재와 그로인한 과학문명 기술속도는 오히려 효용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지못한것이다
즉 이 지구가 적자 구조의 인류의 삶을 살아온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애기이다
그러므로 적자 구조의 지구촌을 해결하기위해서 그대들의 탐욕은 절제하지못하고 더욱이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 자신들 국가의 부패상을 개선하지못하고 자국 국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죽음의 길로가는 국가들이나 국민들은 정리해 버릴것이다
그것이 기타 성실한 국가에게나 그들의 국민들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구 행성의 수명을 연장하기위해서라도 선의의 인류의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줄어주어야 하기에 자신의 처한 국가의 분수도 모르고 그들은 식량자원과 지하자원이 부족하면 그만큼 외세의 의존률이 높아가고 인구가 증가하면 더욱 더 외세의 의존이 높아짐을 그러면 부패한 국가 정치권력들이 신세를 진 국가들에게 상생차원에서 더나은 미래를 모색해야하는데 부패한 정신 상태로 건전한 국가마저 위태롭게 만들고있으니
죽으려면 자신들의 부족하고 깨어나지못하고 개닫지못한 국가와 민족 국민들만 죽어도 되는일을 그만큼 지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 남북한 국가도 국민들도 그속에 포함된다 그러니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기타 유럽국가들에게 이제부터라도 부패한 정신상태로 타 국가마저 위험으로 몰지말고 그들 국가로부터 신세를 지면 신세를 갚으면서 살아라
그렇다고 부패한 정치 상태로 정치 권력을 의존하라는것이 아니다 스스로 도덕성을 높이고 청렴성을 높이고 식량자원과 에너지 자원 지하자원 모든 자원들을 귀중하고 소중하게 관리해가도록 하면서 이 인류가 더 나은길로 가는 길을 제시해주어야 할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부족한 부분을 아니면 미처 생각하지못한부분을 도와드리는것이 외교의 첫걸음마이다
그리고 상생의 첫 걸음마이다
그렇게하지못하면 거듭말했지만 대한민국과 남북한을 그러한 불순한 인간들을 국민들을 정치 세력들을 모조리 척살해버린다 이것은 앞으로 세계3차 대전을 위한 사전의 조치이기에 반드시 대청소한다
자신들의 저질러놓으죄를 묻자면 백번죽어도 그대들은 인간들은 할말이 없다 지금 그러한 도수가 정해져있거늘 이는 인류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남북한을 위해서라도 집행되는것을
그래서 그대들의 명이나 인류의 명들은 이미 생사 여탈권을 소생이 예지몽에서 받아놓았기에 죽고 사는것은 다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본질적으로 지금 인류의 문제를 다룸에 접근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이나 남북한의 과제물은 바로 이러한 과제물을 통과하지못하면 존재 가치가 상실하는것이다
각 국가마다 처한 분수에 맞는 과제물이 존재하고있거늘 대한민국 남북한 과제물이 이러한것이다
개떡 같이 갖가지 종교논리 ,정치논리, 경제논리 갇다부치지말고 이러한 사소한것 하나부터 제대로 실천해가야 할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나 남북한은 모든면에서 그 정점에 서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나 남북한을 통치하는 정치 세력들 자신들은 그 정점에 서 있기에 가볍게 처신하다가는 살아남지못할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의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명줄을 잡고 있으니 남북한 전체의 90%이상을 멸하여도 집행함을 알려드리는것입니다 이러한 불행도 다 그대들이 저질러놓은 죄에 대한 사필귀정이기에
깨어나지못하고 깨닫지못한 그동안 저질러온 죄의 댓가이다
물론 지구촌의 다른 국가들도 대한민국보다도 못한 국가도 수두룩하고 민족도 수두룩하고 그래서 지구촌 국가들이나 민족들을 구조조정이 들어가는것이다
일단 먼저 연합체제를 구축해가는것이 우선 순서다 지구촌 행성안에 벌어지고 있는 깨어나지못하고 깨닫지못한 인간들의 습성들을 그대로 방치해주면 미래 앞날의 수명만 단축되고 고통은 고통대로 가중되고 있고 생산적인 효율적인 지구행성 관리가 아니되기에 불가피하게 천명을 집행할것이다
이것이 다 인류 세상사 삼라만상 모든 생명체들의 물질의 허상의 한계인것을 그래서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초월해서 깨달음을 깨우치는 노력이 어떠한것보다도 제일 소중함을 알아야 하고 실천을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렇게하지않았다
지금부터라도 그러한 실천의 자세를 보여서 위에 언급한대로 하면 그것이 다른 국가 중생들에게 양들에게 고통을 구제해주는 실천의 자세이고 공덕을 베푸는것이되므로 물질 문명이 넘처난다고해서 흥청망청살지말고 음식도 귀중하게 자원도 귀중하게 에너지도 귀중하게 다루어야 할것이다
그러하지못하면 이웃에게 자신들에게 현실적으로도 고통을 가중시키는것과 같으니 죄를 짓는것이다
식량 자원과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구촌 몇몇 국가들은 특히나 정치위에 정치하는 세력들은 세상사를 두류섭렵하여 깨어나고 깨닫는 국가와 민족들에게 먼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깨어나지않는 국가와 민족에게는 도움을 주어도 물을 부어주어도 쇼쿠리를 들고 오기에 도움을 구제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깨어나지못하고 깨닫지못한 인류의 습성들이기에 그들의 생사권은 얼마든지 거두어갈수도 있다 남은 깨어난 인류를 위해서 희생되어야만 할것이다
불필요한 인간의 탐욕의 불랙홀이 한사람일때에는 의미가 없지만 수십억명의 인간 탐욕 불랙홀이면 이것을 차후에 오래동안 방치하면 지구행성의 자정능력마저 복귀할수가 없다 지구 행성을 위해서라도 모든 죄는 그들 스스로 자초하는것이다
그래서 소생은 세게 정세를 살펴봄에 소위 강대국이라는 국가들의 처신은 매우 신중해야하고 인류의 진행 속도에 어느 국가보다도 깨어나야함을 특히나 정치위에 정치하는 세력들은 기타 국가들의 정치 세력들보다도 국민들보다도 깨달음을 소흘히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깨달음의 수행과 결과는 결국은 인류를 고통을 구제하면서 더나은 지구행성의 미래를 나아가기위한 실천의 전 단계이다 이러한 부분에 종교적이유의 잣대로 들이대지도말고 있는 그대로 순수한 그 자체로 깨달음의 소중함을 알고 시행되어야 한다
강대국 국가들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못하고 오만방자한 식량이나 지하자원의 우위를 가지고 불손하게 처신한다면 얼마든지 언젠가는 그 자리를 두번 다시 내어주지않을것이다
절대적인 신은 인간들의 부질없는 탐욕의 욕망을 가지고 활용하고 잇음을 명심하라 무엇보다도 아무리 억광년 탐욕의 욕망을 내들 물질의 한계에 불과한 허상 이다라는 사실을 잊지말고 항상 죄인의 심정으로 인류는 거어갈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죄를 벗어나려면 깨달음을 수행하라는것이다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국가들에게는 그만한 복을 드릴것이다 그러하지못한 국가에게는 불행을 드리는것이 이치이다
현재 바이오에너지분야는 미국과 유럽연합, 브라질이 선도하고 있고, 미국은 최근 바이오에탄올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생산시설의 건설을 계속하고 있다. 브라질은 70년대부터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해 왔고, 바이오디젤 분야는 최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각국의 바이오에너지 개발 배경이 다르다. 미국은 안보적인 이유로, 유럽은 환경적인 이유로, 브라질은 석유 대체를 이유로 바이오에너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바이오에너지의 원료가 되는 곡물생산량이 세계 최고로 연간생산량은 아르헨티나 인구 7배의 소요량에 달한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브라질과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4개국이 세계 대두시장의 88%를 장악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바이오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지난 70년대 오일쇼크때 시작돼 알콜을 섞은 휘발유(알꼬나프따)가 실제 사용되기도 했으나, 설탕의 국제가격이 상승하며 관련정책도 멈췄다.
지난해 5월 바이오연료법을 제정하며, 향후 15년간 관련산업의 진흥과 장려제도를 실시하고 있고, 2010년부터는 바이오디젤을 5% 섞은 경유(B5)와 바이오에탄올을 5% 섞은 휘발유(E5)의 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바이오에너지정책은 중소기업 농축산업체의 장려를 위한 것으로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받으려면 내수시장에만 판매하고, 아르헨티나에 설립해야 하며, 대주주가 농축산업에 종사해야 하고, 소액주주는 기업의 운영권을 가질 수 없는 등의 내용이 명시된 시행령을 따라야 한다.
장려기업은 신청하면 모두 지정되는 것은 아니고, 에너지차관실에서 순위를 작성하면 경제부에서 정한 연간지정 총액 규모에 맞춰 선정한다.
B5는 대두경작면적의 8%, E5는 옥수수경작면적의 3%면 소요를 맞출 수 있고, 추수할 때의 손실을 줄이면 그 차이로 B5는 30%를 충당할 수 있고, E5는 소요량을 초과하는 양을 생산할 수 있다.
가축의 지방을 이용한 바이오디젤도 연구되고 있고, 파라과이의 공장에서 실제 생산되고 있는데, 기온이 낮은 곳에서 고형화하므로 사용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바이오에너지분야는 시작 단계로 아직 불분명한 것이 너무 많고, 정부의 가이드 라인도 불확실 한 면이 많아 장미빛 전망은 있으나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 아니면 장려혜택을 받을 수 없고, 직접투자보다는 현지 농업기업에 지분으로 투자하거나, 수출시장만 겨냥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현지의 대두유 유통망을 다국적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콩을 확보하는 문제도 관건이다.
◎ 끌라우디오 몰리나 이사
미국은 최근 향후 10년간 화석연료 사용의 20%를 줄이는 에탄올 소비 촉진 정책을 발표했다. 일본도 에탄올 소비를 장려중이고, 중국이 현재의 발전속도를 유지한다면 10년 후에는 생활수준도 높아져 연료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에너지 구매력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다. 또 한국을 비롯한 신흥경제국들의 바이오연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되는 에탄올의 50%가 유럽연합으로 수출되고, 음료와 화장품 등에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곡물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화석연료의 경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왔으나 근래 반전돼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고 중국의 수요가 급증해 전세계적으로 대체연료를 찾고 있어, 향후 2~30년간 바이오연료 관련사업이 번창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체에너지로 수소가 각광받고 있으나, 저장과 유통기술 개발에 시일이 요구되고 있고, 기존의 연료와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바이오에너지가 과도기 연료로 각광받을 것이다.
바이오디젤 생산 플랜트를 세우는 경우 18%의 기름을 추출할 수 있지만 82%의 찌꺼기를 처분할 방법을 찾아야 하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데다, 대기업이 많이 점유하고 있어 투자하지 않는게 좋다. 또 현재는 마진율이 높지만 앞으로는 낮아질 것으로 본다.
옥수수에서는 에탄올을 추출할 수 있고, 그 찌꺼기를 가축사료로 사용할 수 있다. 옥수수 에탄올 공장은 바이오디젤보다 시설투자가 더 큰데, 식용유 공장을 함께 겸한다면 좋은 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간 10만톤의 바이오연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우는데 3천만 달러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향후 10년 내에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고 투자비의 50%는 은행 등에서 융자를 통해 충당할 수 있다.
국제 석유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바이오에너지 관련기술이 발전하고 있어 전망이 밝다.
현지 정부의 외국인의 투자에 대한 차별은 없으나, 관련법상 현지 농축산업자와 공동투자를 통해 50%미만의 지분을 유지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많이 바이오에너지 시장에 뛰어들겠지만, 아르헨티나는 성공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이 중국의 ‘곡물 기지’로 변하고 있다.
농경지 감소와 농업용수 부족으로 식량자원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이 브라질에서 전례 없이 많은 농산물을 사들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6일 중국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농경지·농업용수 부족이 현실화하면서 콩 공급처를 찾아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며, 값싸고 풍부한 농경지를 보유한 브라질이 내수용 콩의 주요 공급처가 됐다고 전했다.
브라질과 중국 간 교역관계는 2004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브라질을 방문해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으면서 가시화됐다. 중국은 이때부터 브라질 상품 수입을 대폭 늘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콩 무역량이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브라질이 중국에 수출한 콩은 전년 대비 50%가량 늘어난 1100만t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올해도 브라질이 기록적인 콩 작황을 보였으며, 수확량 증가분 대부분을 중국에 수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브라질은 전 세계 농산물 시장에서 미국에 뒤져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대등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브라질은 아마존 열대우림을 훼손하지 않고도 현재 약 7000만ha인 농경지 면적을 두 배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콩 최대 생산국은 미국이지만 지난해 수출량에선 브라질이 수위를 차지했다. 미 농림부는 미국이 올해 콩 수출국 1위에 복귀할 수 있지만, 수출량은 2009∼10년까지 23%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브라질 농민들은 중국 농산물 수출 증가를 무조건 환영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고부가가치 상품이 아닌 농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발전 모델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브라질 농업이 카길, 아처 대니얼스 미드랜드 등 다국적 곡물회사의 영향권에 있는 상황에서는 실제 콩 재배 농민들은 수출 호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브라질 내 콩 생산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서부 마투그로수 주에서 7000ha 규모의 농장을 경작하는 호제리우 살레스는 “여기서 많은 콩을 생산한다고 해서 우리가 많은 돈을 번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2007-04-06]
룰라 '남미 공동방위 협의체' 구성 제의 시사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특파원 =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내년 1월로 예정된 남미국가연합 정상회담에서 남미국가들의 국방전략을 통합한 '남미 공동방위 협의체' 구성을 제의할 방침이라고 국영통신 아젠시아 브라질이 28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마르코 아우렐리오 가르시아 브라질 대통령 외교보좌관은 전날 "룰라 대통령은 남미국가연합 정상회담에서 이 같은 내용을 회원국 정상들에게 공식 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룰라 대통령은 이를 위해 넬손 조빙 국방장관 및 셀소 아모링 외교부 장관과 함께 수시로 협의를 가지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다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르시아 보좌관은 "새로운 협의체가 유엔 등 기존 국제기구를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남미국가들 간의 방위전략을 협의하고 상호 협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신은 협의체 구성안은 조빙 장관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최근 브라질이 군사력 강화를 도모하면서 남미지역에 긴장 요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브라질은 최근 군사무기 구입비 증액, 육상 및 해상 방어력 재편성 등을 통해 남미대륙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중재 능력을 제고한다는 명분으로 남미 최대 규모의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 같은 움직임이 베네수엘라와 칠레 등 인접국의 군사력 증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식수, 에너지, 식량, 광물 등 자원 보호를 위해 핵무기 개발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남미 인접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남미대륙의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남미국가연합 정상회담은 내년 1월 중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fidelis21c@yna.co.kr
(끝)
중동 산유국, 식량 앞에선 `美 눈치`
세계 자원 전쟁에서 중동과 미국의 공수가 바뀌고 있다.게임의 룰을 바꾼 것은 국제 곡물 가격 급등이다.원유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중동 산유국들이 식량 시장에선 반대로 세계 최대의 농산물 생산국인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다.특히 농산물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중동 산유국들이 '식량 안보'를 외치면서 '식량 전쟁'에 대한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수입 곡물가 상승으로 된서리 맞는 중동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식량 빈국인 중동 지역은 국제 농산물 가격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아랍에미리트(UAE)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인도ㆍ파키스탄산 바스마티 쌀 가격은 지난 한 해 동안 51% 상승했다.식용유는 80% 뛰었다.인도산 양고기는 지난 1년 새 무려 115%나 치솟았다.닭고기 가격도 66% 올랐다.카타르의 경우 식품 가격 상승으로 지난해 12월 물가 상승률이 13.74%에 달했다.
UAE 정부는 식품 가격 상승을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판단,지난해 바스마티 쌀의 상한 가격을 5㎏ 기준 4.90달러로 설정했다.하지만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수입업자들이 수입량을 줄이면서 쌀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올해 쌀 가격이 70∼75% 정도 더 오르는 등 식량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업계 우려다.식량 가격을 잡지 못할 경우 고유가로 이룬 경제 호황이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중동과 미국 간 미묘한 신경전
중동에서 '식량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중동과 미국 간에 미묘한 '한랭전선'이 흐르고 있다.세계 곡물 시장을 미국의 메이저들이 잡고 흔드는 데다 미국 달러화 약세가 중동 산유국의 물가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동 산유국들이 자국 통화가치를 미국 달러에 연동시키는 달러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만큼 약달러는 고스란히 수입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해수를 농업용수로 바꿔 사막에서 밀을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미국이 충분한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중동 유전에 투자하듯 안정적인 곡물 공급을 위해선 미국 농장을 사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달러 페그제 포기 움직임도 가속화하고 있다.지난해 5월과 6월 쿠웨이트와 시리아가 각각 페그제를 폐기한 데 이어 UAE도 폐지를 고려하고 있다.지난해 11월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담에서는 원유 결제수단을 달러에서 유로화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미국을 자극하기도 했다.
반대로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석유를 대체할 바이오 연료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FT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막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미국이 대체 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세계 경제의 효율성 측면에선 낭비"라며 "이 같은 자원배분 왜곡 현상이 세계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자원 전쟁에 대한 우려를 높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지구촌 식량대란 오나
■ 유럽-바이오 연료 확대…곡물값 최대 25% 오를 듯
|파리 이종수특파원|‘유럽 맑음, 아프리카 흐림’ 유엔 농업식량기구(FAO) 분석에 따르면 올해 유럽 곡물 생산량은 소폭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 아프리카 특히 북부 아프리카는 생산량이 급감해 식량 위기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의 올해 곡물 생산량은 4억 2230만t으로 지난해보다 4.3% 늘어날 전망이다. 재배면적이 2% 늘어났고 재배 조건이 점차 개선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옥수수값 2배나 ‘껑충´
그러나 변수도 있다. 예상대로 생산량이 증가하려면 북부·중부 유럽에서는 강수량이 더 필요하다. 지난 4월 한달여 계속된 고온으로 강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역내 주요 곡물 생산국가인 프랑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는 지난해 가뭄이 적었고 밀 재배면적이 소폭 늘어나 생산량이 늘어났다.
최근 2년 동안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었던 이탈리아의 경우도 저수 시설 개발과 경작지 비옥도 개선으로 생산량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동부 유럽권도 가뭄이 심했던 헝가리·불가리아를 제외하면 평균 수확량을 확보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러나 생산량이 소폭 늘어도 곡물 가격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전체 에너지원 가운데 바이오 에너지 비율을 점차 늘린다는 EU방침 때문이다.EU는 2010년까지 수송연료의 5.75%를 에탄올 등 바이오연료로 대체하고 2030년에는 25%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지난 4일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FAO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의 경우 유채, 피마자 등 각종 식물의 씨앗을 연료로 하는 바이오디젤 생산이 향후 10년 동안 1000만t에서 2100만t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유럽 농가들도 생산 곡물을 대량 바이오 에너지로 전용하고 있어서 가격 상승이 당분간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실제 영국 등 EU회원국 곡물가격은 최근 가파르게 상승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바이오 에너지용 원료로 각광받는 옥수수의 경우 지난해 2배나 인상됐다. 이밖에 우유(60%), 버터(40%), 돼지고기(20%), 밀(11%) 등의 가격도 상승했다.
●아프리카 생산량 급감 예상
반면 아프리카는 식량 수급상황이 전반적으로 심각해 곡물가격 상승이 겹칠 경우 ‘식량 대란’이 우려된다. 북부 아프리카의 경우 주요 생산지역의 가뭄과 홍수로 밀·보리·옥수수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밀의 경우 올해 예상 생산량이 1450만t인데 지난해보다 22% 줄어든 것이다. 보리도 320만t으로 28%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모로코의 경우 밀 수확량이 50% 정도 감소할 전망으로 5년내 최소치다.
수확량 감소에 일부 지역은 내전이 겹쳐 식량위기가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FAO가 진단한 원조 필요 국가 33개국 가운데 아프리카는 25개국이다.
수요 급증에다 바이오 에너지 개발 열기가 겹치면서 최근 곡물가격은 대폭 상승했다. 이런 추세가 향후 10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게 FAO·OECD의 분석 결과다. 이에 따르면 바이오 에너지원 개발 수요가 급증하면서 곡식과 종자 등 곡물가격은 10년간 20∼25%까지 오를 전망이다.
vielee@seoul.co.kr
■ 미국-내년부터 곡물수확량 30% 에탄올 생산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일 뿐만 아니라 농업·식량대국이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 단순한 식량 부족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바이오 에너지 생산 증가와 기상악화로 인한 식량 생산 감소 ▲중국 등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식품의 안전성 ▲식품을 통한 테러 가능성 등이 식량과 관련한 현안이 되고 있다.
●식탁의 옥수수, 연료 공장으로
미국에서는 몇년전부터 농산물을 식용이 아니라 연료용으로 재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른바 바이오 에너지 열풍으로 옥수수와 콩, 사탕수수 등이 가솔린과 디젤에 첨가되는 바이오 연료로 가공되고 있다. 특히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이런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은 내년부터 곡물 수확량 중 30%가량을 에탄올 생산에 투입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식량 생산은 줄어들고 식품 가격은 오르고 있다. 미국의 식료품 물가는 올해 1월부터 5월 사이에 6.7%나 올랐다. 지난해(2.1%)에 비해 상승폭이 세 배 이상 커졌다. 또 미국의 옥수수 생산지인 아이오와 주의 땅값이 지난해 35%나 오르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미국의 식량 생산 감소에 대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유엔환경프로그램(UNEP) 등 국제사회도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UNEP의 아킴 스타이너 행정책임자는 4일 기자회견에서 “식량 생산과 바이오에너지 생산이 경쟁하는 체제가 되면 매우 중대한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기상악화로 농산물 생산량이 감소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올해 미 동남부 지역은 100여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으로 농작물 수확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미 농무부에 따르면 앨라배마주 내 옥수수 재배면적의 88%, 콩의 85%, 목화의 74%가 발육이 부진한 상태로 파악됐다.
한편 미국 정부는 ‘식품을 통한 테러’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인의 식수원인 저수지나 농장, 식품가공 공장 등에 테러리스트들이 대량의 독극물을 투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 정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한 범정부적인 대책팀을 만들고 웹사이트(www.foodsaftey.gov)까지 설치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dawn@seoul.co.kr
FAO 경고, 곡물값 폭등 37개국 식량위기
입력: 2007년 12월 18일 18:30:01
전 세계적인 곡물 가격 폭등 속에 지구촌 37개국이 식량위기에 처해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17일 곡물가 상승이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난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내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크 디우프 FAO 사무총장은 이날 이탈리아 로마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곡물가 인상으로 인한 충격을 차단하고 곡물 생산을 증대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세계 곡물 값은 FAO가 1990년 곡물가격지수를 도입한 이래 사상 최고인 40%가량 상승했다.
로이터통신은 올해는 더욱 큰 폭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올해 주요 곡물가는 콩이 34년 만에, 옥수수가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치솟았다.
디우프 사무총장은 곡물가 인상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낮은 식량 재고량과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과 홍수, 그리고 바이오연료 개발 붐을 거론했다. 중국처럼 식습관 변화로 고기 수요가 늘면서 곡물 재배가 급감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올해 세계 식량 생산량이 과거보다 풍부했음에도 곡물 가격이 치솟은 것은 곡물을 원료로 하는 바이오연료 개발 붐이 확산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국이 추진하는 바이오연료 정책은 기아 퇴치라는 목표를 고려해 국제사회에서 조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곡물가 폭등에 의한 식량 위기 피해는 이미 분쟁과 경제 위기, 자연 재해 등으로 식량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의 가난한 나라에 집중되는 양상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디우프 사무총장은 “곡물 인상과 원조 감소로 내년에는 식량 위기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의 농부들에 대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FAO는 이를 위해 내년부터 극빈국 농부들이 종자나 비료 등을 구입할 때 정부가 지불을 보증하도록 한 바우처 제도에 1700만달러의 예산을 투입할 방침이다.
〈김유진기자〉
인류가 겪은 대재앙 1
머리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끊임없이 격동하고 있는 곳이다. 태고적부터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재난--지진, 화산 폭발, 홍수, 대폭풍--에 시달려 왔다. 천재지변은 경고도 없이 인간 사회를 강타해서 황폐한 파괴의 자취를 남겨 놓는다.
<인류가 겪은 대재앙>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상한 마지막 장을 포함하여 유사 이래 오늘날까지 발생한 가장 극적인 재앙들을 연대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 전체에 걸쳐 게재한 특집 기사와 화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한 그림들은 재앙 뒤에 숨은 자연의 힘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지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선조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지만, 아직도 자연의 힘에 대항하는 데는 거의 선조들만큼이나 무력하다. 비록 최근 몇 십 년간 지구의 기후를 관찰하고, 땅 속 깊은 곳의 지진현상을 감시하는 등 지구이 움직임을 꾸준히 탐색하는 데 장족의 진보를 이루었지만 재난을 예견하는 과학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다. 1980년 3월 20일, 세인트헬렌스산에서 최초의 진동이 기록된 순간으로부터 과학자들은 곧 본격적인 폭발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데이비드 A. 존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심지가 타 들어가고 있는 화약통이다. 그러나 그 심지가 얼마나 긴지는 아무도 모른다. 약 8주 후에 마침내 화산이 분출했을 때 발생한 희생자 가운데 존스턴도 포함됐다. 전문가들조차도 그 폭발의 격렬함을 보고 아연하였는데 그 힘은 인간이 만든 핵무기의 파괴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매년 전세계적으로 최소한 2만명이 천재지변으로 목숨을 잃는다. 어떤 해에는 그 수가 훨씬 많다. 막대한 인명 피해와 더불어 가옥, 학교, 댐, 공장, 때로는 도시 전체의 막대한 재산이 파괴된다. 자연재해의 마지막 결과는 경제적, 사회적 혼란이다. 그러나 참화와 고통 가운데서도 비범한 인간의 용기와 영웅적 구조, 그리고 모든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무사히 태어나는 기적의 어린아이 에 관한 극적인 일화들이 흔히 탄생한다. 이러한 일화들은 인간의 정신력이 자연의 거댜힌 위력만큼이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때때로 대재앙은 피해를 입은 지역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진흙 사태에 휩쓸려 간 빈민가에는 다음번 재난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가옥들이 세워지고 힘들여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파편 더미 위에 내진 건물을 세워 미래에 발생하는 지진으로부터 인명을 구할 수 있게 된다. 다 타버린 숲의 잿더미 위에서 그전보다 더 강하고 튼튼한 초목들이 다시 태어난다. 또한 하천유역의 농지들은 홍수가 퇴적해 놓은 비옥한 진흙으로 풍요로워진다.
지진과 화산 폭발, 홍수와 산불은 파괴와 재생이라는 자연 순환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류가 겪은 대재앙>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의 가공스러운 힘을 이해하고 존경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천재지변의 결과가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더 좋은 쪽으로 바꾸어 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창세기 시대의 대재앙들
공룡의 멸종
사라진 지중해
지울 수 없는 빙하시대의 흔적
노아의 대홍수
사하라 사막의 형성--기원전 2500년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기원전 1628년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한 괴질--기원전 430년
로마의 대화재--서기 64년
베수비오화산의 분노--79년
알렉산드리아의 지진--365년
안티오크에 일어난 죽음의 지진--526년
콘스탄티노플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542년
이집트의 기근--1200년
미국 남서부에 몰아닥친 가뭄--1276년
공룡의 멸종
1억 6000만년에 걸친 공룡의 지배가 갑자기 끝나다
오늘날의 포유 동물과 같이 공룡은 다양한 집단을 이루었다. 공룡들의 형태와 크기는 다양했으며 실제로 자연계의 모든 환경에 맞추어 적응했다. 길이가 24m이상 되는 거대한 종류도 있었는데, 이 공룡은 지구에 존재했던 피조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이었다. 그러나 갈가마귀보다 더 크지않은 조그만 공룡도 있었다. 트리케라톱스와 같은 공룡들은 네 다리로 느릿느릿 걸었고, 반면에 길이가 12m나 되는 티라노사우르스와 같은 공룡은 두 개의 뒷다리로 걸었는데 짧은 앞다리는 허공에 쳐들고 다녔다. 모든 공룡들이 전설에서 흔히 묘사된 것처럼 느리고 엄청난 무게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어떤 공룡은 커다란 새와 같이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빠르고 경쾌하게 걸었다. 날카롭고 굽은 이를 지닌 육식 공룡과 단순한 말뚝 모양의 이를 지닌 초식 공룡, 전혀 이가 없었던 공룡도 몇 종류가 있었다. 이가 없는 것은 이공룡이 아마도 과일과 곤충이나 알과 같은 부드러운 음식물을 먹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종류가 다양한 공룡들 중에 1억 6000만년 동안 계속 생존했던 것은 없었다. 공룡이 당시에 가장 번성한 육지 동물이 된 것은 변화하고 적응하여 증식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공룡들은 대략 2억년 전에 끝난 트라이아스기의 어느 시기에 악어의 일종인 초기 파충류에서 진화했다. 지구 역사상 쥐라기라고 알려진 다음 시기에, 공룡은 동물 왕국의 확실한 주인이자 주변 동물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백악기 말기까지 약 7000만년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종들로 진화했다.
중생대의 일부분이었던 이 장구한 기간 동안 지구의 기후는 대체로 온화했다. 계절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평균 기온이 높아 다양한 식물군이 무성하게 번식했다. 초기에 공룡의 거주지는 과학자들이 판게아라 부르는 하나로 된 광대한 대륙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이 초대륙은 분리되어 여러 개의 대륙으로 나뉜다. 이러한 점진적인 대륙 분산은 공룡에게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공룡의 뼈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최적암에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6500민년 전 지구 전체에서 공룡을 멸종시킨 참흑한 사태가 일어났다.
수백만년 동안 성공적으로 진화한 모든 공룡이 겉으로 보기에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백악기 암석의 단층마다 발견되는 풍부한 화석 퇴적물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해양 파충류인 장경룡과 모사사우르스, 그리고 익룡(날아다니는 파충류), 암몬조개(고대 형태의 납작한 나선형의 조개), 그리고 해수면 위에서 이회질을 형성하는 플랑크톤 역시 지상에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포유류, 조류, 그리고 소수의 파충류 등 그 당시 생존했던 생물들마저 그 수가 크게 감소했다는 증거가 있다.
공룡은 물론 공룡보다 열세에 있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왜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졌는가 하는 이유는 현대 고생물학에 있어서 가장 흥미를 유발하는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남작 조르쥬 퀴비에는 천지 창조 이후 지구는 여러번의 대대적인 천재지변을 겪었으며 이러한 재난이 반복적인 동식물의 대량 멸종의 원인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몇 종의 동물들이 언젠가 지상에서 소멸했다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당시에는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한 아주 새로운 이론이었다. 자연 역사가들은 어떤 특정 형태의 생명체가 소멸한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하기 앞서 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우선 포기해야만 했다. 즉, 신은 자신의 지혜로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을 지상에 살게 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신은 어떠한 종도 소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공룡의 뼈와 그 외의 화석들과 같은 단서들은 천지 창조 이전에 신이 범한 시행착오의 결과이거나, 자연이 장난으로 만든 작품들 또는 악마의 속임수로 생각하는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됐다. 그러나 퀴비에의 대담한 이론은 옳았다. 그는 화석에 관한 연구로 이미 명사가 되어 있었다. 이 프랑스 과학자는 출처 확인을 의뢰받은 엄청나게 큰 턱뼈들을 검사한 결과 오래 전에 소멸한 일종의 바다 도마뱀 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과 퀴비에가 날으는 파충류라고 주장한 또 다른 해양 화석의 발견은, 1820년대에 영국 서섹스에서 발견된 최초의 공룡뼈를 확인하는 길을 닦았다. 여기서 무시무시한 도마뱀이란 의미의 공룡(Dinosaur) 이란 말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획기적인 발견 이래 과학자들은 공룡들의 갑작스러운 멸종을 설명하는 수많은 독창적인 이론들을 내놓았다.
[사진 생략] 아래의 루돌프 잘링거의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파충류의 전성시대는 지구 역사에서 3억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이 그림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공룡들을 살펴보면 중생대 끝부분인 백악기(파충류, 암몬조개, 피자식물 등이 번성하였다) 말엽에 이르러 멸종되기까지 2억년(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동안 지구상에 살았던 종류들이다. 이 기간 동안에 동물계에서는 초기의 파충류보다 공룡이 수적으로 우세하게 된 반면에 식물계에서는 풀, 꽃식물과 경목림이 원시적인 양치류와 침엽수를 앞도하게 되었다.
공룡은 지능이 너무 낮아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하나의 이론은 공룡이 느리고 지능이 낮아서 경쟁자인 좀 더 약고 공격적인 동물과의 생존 경쟁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중적인 연구결과 반대의 사실이 밝혀졌다. 공룡들은 두뇌가 아주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오랜 기간 생존했을 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했던 동물군들 가운데 가장 적응력이 높은 동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공룡의 두개골의 공동크기에 비추어볼 때 기존의 어떤 파충류 못지않은 지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잠시 일반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또다른 견해는 공룡란절멸설이라고 불리었다. 일부 이론가들은 공룡의 새끼가 알에서 부회했다고 전제하고 알을 낳는 단계 중 어딘가에서 이상이 생겼을 것으로 가정했다. 그로부터 두가지 설명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어떤 다른 동물들이 공룡의 알을 주식으로 선호하여 공룡이 알을 낳는 속도보다 더 빨리 공룡알을 먹어치워 결과적으로 공룡의 번식을 영원히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론은 환경상 불리한 여건이 발생, 암컷이 생산한 알의 껍데기가 매우 얇아져 새끼들이 뼈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칼슘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한편 알 껍데기도 매우 깨지기 쉽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상의 불리한 여건이 공룡의 과도한 번식이나 기후 변화에 기인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본대학 고생물학 연구소의 하인리히 에어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새의 암컷은 과도한 호르몬을 분비하여 얇은 껍데기를 가진 알을 낳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룡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먹이 생태계의 변화도 공룡의 소멸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대규모로 번식했던 식물군은 양치류 같은 은화 식물과 소나무 같은 구과 식물들이었다. 초식 공룡은 이러한 푸른 잎을 좋아하여 한마리가 하루에 1톤이나 먹었다. 그러나 백악기에 속씨 식물과 같은 새로운 식물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꽃이 피는 낙엽수와 관목류, 잎이 많은 식물류, 야자수, 곡류, 대나무, 사탕수수, 그리고 애스터, 달리아와 민들레 같은 꽃 식물 등 새로운 식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공룡은 양치류와 침엽수만큼 속씨 식물도 왕성하게 먹어치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룡들이 대량으로 섭취한 이 새로운 먹이들을
소화시키지 못해 변비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도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속씨 식물 속에 포함된 독성이나 마약 성분을 지닌 스트리키닌과 모르핀을 비롯한 강력한 알칼로이드 성분으로 인한 일종의 만성적 약물 중독 때문에 공룡이 소멸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쓴 맛을 싫어하고 가장 독성이 강한 알칼로이드는 매우 쓰다. 또한 포유류의 상당히 진화된 간은 비교적 약한 독물을 해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룡이 중독으로 멸종할 단계에 이르기까지 혀의 미뢰나 간 같은 기관을 하나도 발달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알칼로이드 이론가들은많은 공룡의 골격이 마치 물로 인한 신경성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며 죽었던 것처럼 몹시 뒤틀린 자세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공룡이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다른 동물들처럼 사후 강직이 시작될 때 나타나는 골격의 뒤틀림 현상을 경험했다는 이견을 제기한다. 그러한 현상은 비정상적으로 목 근육이 길어 평균보다 더 크게 수축되기 쉬운 공룡 종류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사진 생략] 공룡 시대를 살아남은 두 생존자들은 미국산 주머니쥐와 은행나무이다. 주머니쥐(왼쪽 위)는 잭악기 이래 거의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살아있는 화석 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석화된 은행잎(아래)은 현대의 은행잎(오른쪽 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공룡뼈의 발견
공룡화석의 발견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1822년, 한 영국 여성이 산책길에 발견한 공룡뼈는 공룡화석 발견 초기에 속하는 것이다. 공룡 이빨이 화석으로 발견된 것이다. 1878년에는 300m이상 되는 지하에서 작업하던 벨기에의 석탄 광부들이 여러 개의 특이한 뼈를 발견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들의 신중한 탐사로 대부분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공료의 화석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침전물의 무게에 눌린 퇴적물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퇴적암에서만 발견된다. 근육과 동식물의 부드러운 부분들이 썩는다 할지라도 뼈와 기타 딱딱한 골격은 보존된다. 대부분의 공룡은 육지에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 밑바닥에 있는 퇴적암은 다른 많은 생물의 화석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공룡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주요 원천은 아니다. 강에서 형성된 최적물로 만들어진 바위들이 중요한 원천이다. 예를 들면, 한때 강의 모래들이었던 유타주 국립 공룡유적지의 절벽 표면에서 10여 개의 골격이 발굴되었다. 공룡의 시체가 물살에 의해 강둑까지 밀려가 퇴적물에 묻혀서 훗날 발견되곤 한다.
바위에서 화석화된 뼈들을 분리해 내는 일은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 화석들은 쉽게 바스러지기 때문이다. 화석이 발견된 현장에서 과학자들은 수동착암기, 곡괭이, 조각칼과 심지어 부드러운 붓을 사용하여 주위의 암석을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한다. 화석의 크기와 위치에 대해 세심하게 기록한 뒤 뼈들을 운반하기 전에 도료, 구운 석고나 풀리우레탄 등 하나 이상의 보호 물질을 입힌다. 화석들을 전시하기 위하여 완전한 골격을 조립하는 데는 여러 해 동안의 작어2ㅂ이 필요하다. 뼈를 맞추는 것은 복잡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완성하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조각이 전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구의 기후 변화 역시 공룡 소멸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중생대가 끝나갈 무렵 지구에는 큰 기후의 변화가 있었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육지가 솟아오르고 거대한 내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해류와 풍향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가장 큰 몇 종류의 초식 공룡에게 먹이를 공급했던 원시림이 부성한 습지대들은 낙엽성 초목이 지배하는 지역으로 점차 바뀌었다. 기온이 낮아지고 건조해지는 한편 계절 구분이 더욱 뚜렷해짐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초래된 것이다. 틀림없이 많은 종류의 공룡들, 특히 적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살고 있던 공룡들이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화들은 수백만 년 동안 수만 세대에 걸쳐 어주 서서히 일어나므로 공룡들은 수효가 대폭적으로 감소하기 앞서 좀더 살기 적합한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공룡들의 대량 멸절 후에도 오랜 기간 열대성 기후가 계속됐던 지역에서조차 공룡이 사라져버린 사실을 기후 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와 반대되는 설명은 전지구에서 일어난 화산 활동으로 인한 온실효과에 기초를 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생대 말기에 수백 개의 화산이 거의 동시에 활동했고, 끊임없는 폭발로 인한 연소의 산물인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대기를 가득 채워 태양의 복사열을 대기 속에 가두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 결과 지구의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모든 단계의 먹이 사슬을 붕괴시켰다. 이로 인해 공룡 수컷이 정자 생산 능력을 상실했거나 또는 암컷들이 과도한 열로 인하여 불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화산 활동이 온실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초고층 대기의 오존층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염소 가스를 일시적으로 산출했을지도 모른다. 오존층은 과도한 자외선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때문에 오존 의 고갈로 인해 지상 동물들은 심각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살갗이 드러나 있는 공룡과 같은 동물과 육지와 바다를 서식처로 삼는 양서류들은, 털이 있는 포유류, 깃털이 있는 조류, 굴을 파고 사는 동물들과 깊은 바다 밑에서 사는 해양 생물보다 더 많은 양의 자외선에 노출되었을 것이고, 그 걸과 선택적으로 멸종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구 중심적 이론들이 하나하나 과학자들 사이에서 결정적인 승인을 얻는 데 실패하자, 어떤 우주의 대변동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에 점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러자 고생물학자들의 이론에 천문학자들과 지질학자들, 지구물리학자들이 가세했다. 이 학자들 역시 멸종의 원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관해서 의견이 아직 일치하진 않았지만, 몇가지 가설들은 이 불가사의를 해결할 현실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러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는 별의 사멸과 관계가 있다. 사멸하는 별은 폭발할 때 막대한 양의 우주 방사선을 방출한다. 은하계에서 그러한 초신성 폭발은 평균 50년마다 한 번씩 일어나지만, 항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구에 아무런 해를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대략 500뢴트겐(보통 초고층 대기의 수준보다 거의 1만 7000배나 더 큰)에 해당되는 방사선을 지구에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는 경우가 약 5000만 년에 한번씩 생긴다. 그럴 경우 통계적으로 볼 때, 우리 은하계에 파멸적인 재난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초신성의 폭발이 지속될 수 있다.
낮은 수준의 방사선만으로도 공룡의 죽이거나 암에 걸려 서서히 죽게 하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방사선 때문에 공룡의 불임이 야기되거나 또는 새깨들이 극적인 돌연 변이를 일으켜 결국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한 화산 폭발이 대기의 열 보존 능력을 변화시켜 지구의 기온이 단기간이라도 영하로 냐려갔을 경우 피부에 보온 기능을 갖추지 못한 공룡들이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지지를 얻고 있는 이론은 지구와 소행성 또는 혜성간의 충돌울 포함하고 있다. 1979년에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지질학자인 월터 알바레즈는 공룡 멸종에 대한 새롭고 흥미로운 가설을 발표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산맥에서 백악기와 그 뒤의 제3기에 해당하는 석회암 최적물에 대한 일상적인 표본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알바레즈는 2.5cm 미만의 붉은 회색빛 점토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확인할 수 없어서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인 자기 부친 루이스 알바레즈에게 그 토양 표본들을 가져갔다.
화학적 분석 결과, 그 점토는 높은 수준의 중금속 이리듐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운석이나 그 외의 혜성들 속에 고농도로 들어 있는 성분이었다. 또한 비록 바로 위나 아랴 석회암층에는 화석 표본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점토층에는 화석이 없었다.
알바레즈부자는 이 표본에서 발견된 이리듐이 외계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고추정했다. 목성과 화성 사이의 궤도에서 태양 주위를 도는 수천 개의 작은 행성체들이 이러한 이리듐의 공급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직경이 적어도 10km로 추정되는 이 소행성이 궤도를 벗어나 시속 72만km의 속도로 날아와 지수와 충돌하여 지구 표면에 분화구와 비슷한 형태의 거대한 분지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그러한 분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1987년 6월에 두 명의 캐나다인이 놀랄 만한 사실을 발표했다.
노바스코샤로부터 동남쪽으로 200km 가량 떨어진, 대륙붕에 있는 그 분지에는 이리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강력한 충돌의 결과로 파편의 먼지 구름이 지구를 덮어 생명에 필요한 태양 광선이 차단됨으로써 지구 표면은 몇 달 동안 암흑에 싸였었다고 알바레즈부자는 결론지었다. 내륙지방에서는 무려 섭씨 26.6도나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일부 동물들과 식물들은 즉시 얼어붙었고 간신히 살아 남은 식물들도 성장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추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초식 동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었다. 육식성의 공룡들도 곧 이사했는데 초식 동물들이 그들이 먹이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1983년, 시카고대학의 고생물학자들은 과거 2억 5000만년 동안 약 3500과의 해양 유기체가 멸종한 기록을 도표로 만들었다. 그들은 대량 멸종이 2600만년마다 거의 규칙적으로 일어난 사실을 발견했다. 다음에 규명해야 할 일은 그렇게 방대한 시기에 걸친 주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우주 현상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천문학자들과 천체물리학자들의 과제였으며, 1984년에 독자적으로 연구한 두 조사팀들이 거의 동일한 학설을 제시했다.
두 학설의 중심은 네메시스, 죽음의 별 등 여러가지 애칭을 가진 태양의 신비스런 자매 별이었다(은하계의 대부분의 항성들은 짝을 이루고 있으며, 태양의 동료 별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별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 자매 별은 아마도 태양 질량의 10분의 1정도고, 태양을 한 번 도는 데 2600만년이나 걸리는 가늘고 긴 궤도를 운행한다고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말한다. 그 죽음의 별의 궤도인 태양계의 가장 바깥쪽에서 별들의 잔해가 구름처럼 밀집한 우주 공간을 지나가게 된다. 죽음의 별의 통과로 궤도 주변의 중력이 교란되어 한 번에 약 10역 개의 혜성이 소나기처럼 우주 공간 속으로 쏟아져 나간다. 이러한 우주의 대사건이 일어나는 동안에 통계적으로 10개 내지 200개 가량의 파편들이 지구에 떨어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늘날 혜성은 소행성보다 질량이 적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혜성들이 웅장해 보이는 것은 대부분 가스 때문인데, 어떤 혜성들은 바위처럼 단단한 핵이 있어서 지구와 충돌하여 지표면에 깊은 구덩이를 만들 수도 있고 소행성이 충돌했을 때와 같은 유형의 이리듐 퇴적물을 남길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월터 알바레즈는 즉시 지구상에 있는 13개의 작은 헤성크기의 구덩이들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분화구의 형성 연대를, 죽음의 별의 2600만년 공전 주기 그리고 해양 생물 대량 멸종의 2600만년 주기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일정한 유형이 존재했다. 구덩이들은 대량 멸종이 일어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혜성이나 소행성과 충돌한 단서들을 갈수록 많이 발견하고 있다.
1987년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미국 지질조사국의 연구자들은 거대한 소행성이나 혜성이 6500만년 전에 지구와 충돌했다는 알바레즈부자의 이론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지질학자들은 전세계에 걸쳐 8군데의 지역으로부터6500만년 된 퇴적암에서 발견된 석영의 미립자들을 분석했다. 퇴적된 이 석영의 미립자는 구조적인 균열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각각 변동을 일으킨 단 한차레의 거대한 층격으로 생긴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균열은 제곱 센티미터당 약 9만kg 이상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며 그보다 약한 화산 폭발과 같은 압력에 의해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끝으로 이 결정들은 비정상적으로 이리듐의 함량이 높은 퇴적층에 묻혀 있다.
혜성 충돌 이론이 언젠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될지, 혹은 다른 이론들이 그것을 대체하거나 수정하게 될지의 여부는 아직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즉 그 해답들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들이 지닌 의미는 공룡이 살았던 과거를 훨씬 지나 인간의 미래 문제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사라진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해가 증발하다
오늘날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한때 지중해 해분은 현재의 지중해 해수면보다 수백 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거칠고 메마른 사막이었다.
600만년 전, 마이오세말쯤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협곡--즈브롤터해협의 선조격이다--을 통해 대서양의 바닷물이 지중해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지질학 시계로 볼 때 극히 짧은 기간에 대륙이 이동하면서 충돌이 일어나 바닷물이 흘러 들어오던 협곡이 막히면서 지중해의 물은 증발되었고 그 안에 살던 모든 생명체는 멸종되었다.
수억년 동안 아프리카 지각판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유라시아판을 밀어부텼다. 마이오세말에 한동안 아프리카와 유럽대륙이 서로 마찰하면서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 결국 두 바다를 연결하는 앝은 수로에 자연적으로 댐이 형성되면서 대서양의 바닷물은 더 이상 지중해로 유입될 수 없게 되었다. 대서양에서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자 지중해 바닷물의 자연적 증발을 벌충할 수 없게 되자 지중해의 바닷물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마르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지중해의 수위는 낮아졌고 지중해 바닷물의 염도는 높아졌다. 이렇게 심각한 환경의 변화로 해저에서 살던 동물들이 제일 먼저 멸종했다. 호수나 강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없었던 물고기와 그 외의 해양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 사라졌다. 생명체가 풍부하게 살던 광활한 푸른 바다, 지중해는 몇가지 왜소한 연체동물 외에는 어떤 생명체도 지탱할 수 없는 짠물 호수 즉 함호수로 급격히 변화해 갔다.
잔인한 태양 아래 죽어가는 바다는 증발을 계속하여 극도로 건조한 사막 분지만을 뒤에 남겼다.
사막으로 바뀌면서 바닷물이 사라져버리자 막대한 양의 소금이 분지의 가장 아래쪽에 수백미터 두께로 쌓였다. 단 수천년 내에 지중해는 모래 언덕들과 바싹 마른 소금 평지로 아워싸이게 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무인 대륙에서 섬들은 높은 산과 고원으로 변했고, 예전에 수몰되었던 화산들은 다시 황량한 풍경위로 솟아올랐다. 한때 평화스럽게 지중해로 흘러들었던 강들은 이제 수백 미터 아래 사막 분지로 흘러드는 폭포로 변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나일강, 론강 등 강들은 암반을 깎아내 웅장한 계곡을 만들아냈다. 강들이 드러나 바다 밑바닥을 침식하여 흐르는 그 물길을 따라 자갈과 바위 파편들이 퇴적되었고, 아마도 이렇게 만들어진 자연제방을 따라 푸른 오아시스가 생겨났을 것이다.
아프리카 동물들은 말라버린 바다의 밑바닥을 지나 유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발가락이 세 개인 말의 조상은 지브롤터 육교를 통해 지금의 스페인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하마들은 사이프러스섬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바다가 없어지고 사막이 만들어지자 지구의 전반적인 생태환경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강우량은 급격히 줄었다. 이렇게 기후가 온난건조해지자 중부유럽에는 삼림이 사라지고 사바나 즉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스위스에 종려나무가 울창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역시 삼림이 감소하고 사바나가 늘어났다. 그 결과 나무에서 살던 동물들은 어쩔수 없이 초원 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어떤 경우에는 두 다리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한때 사막이었던 지중해는 오늘날 거의 400만km나 되는 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 바다는 어떻게 복원되었고, 지중해가 한때 사막이었다는 증거를 어떻게 바다 밑에서 찾아냈을까?
마이오세 말기에 지중해에서 무언가 커다란 자연변화가 일어났다는 첫번째 단서는 1833년대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화석에서 잡혔다. 다시 말하면 600만년 전 지중해의 해양 생물이 어떤 이유로 생물학적인 대변동을 겪으며 사라졌다는 사실이 발견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 화석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 후 약 100만년 후인 플라이오세초에 지중해의 토착 생물들과 그밖의 새로운 생물들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유입되면서 지중해는 다시 수많은 생명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19세기말 남프랑스 발랑스평원의 지하수를 개발하던 중 론강 하류의 하상 즉 강바닥에서 깊은 계곡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그 계곡은 리옹에서 론강 삼각주까지 320km 이상 뻗어 있었으며 론강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파헤치자 플라이오세의 해양 퇴적물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당시나 그 후 수십년이 흐른 후에도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런 계곡이 론강 아래에 생겨났는지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아스란에서 카이로에 이르는 약 1200km 길이의 거대한 계곡이 나일강의 협곡 아래에서 발견되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론강에서와는 달리 나일강에서 발견된 계곡에는 플라이오세의 퇴적물이 충적물에 덮여 있었다.
1961년 해양 지리 조사선인 체인호가 지중해를 탐사하던 중 새로운 단서가 나타났다. 체인호는 지진파의 감지 장치인 CSP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상에 부딪혀 돌아오는 음파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퇴적물에 덮인 해상 밑의 단단한 물질에 부딪혀 돌아오는 음파도 기록할 수 있었다. CSP장치를 이용하여 지중해의 해상을 조사해 본 결과 해상 퇴적물 위로 삐죽 삐죽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 모양의 구조물들을 발견했다.
[그림 생략] 지브롤터해협(위쪽)을 통해 대서양의 바닷물이 지중해로 흘러들어 지중해의 증발을 막아준다. 마이오세 후반, 이 해협은 몇차례 막혔다가 열렸다. 그 후 약 500만년 전 지브롤터 해협이 마지막으로 열리면서 세계 최대의 폭포(왼쪽)가 지중해 해분에 다시 물을채우기 시작했다.
체인호의 탐험 결과 연구한 미국 콜롬비아대학 레이먼트 도히티 지질학 연구소의 윌리엄 B.F. 라이언 박사는 해상에 묻혀 있는 이러한 구조물들이 미국 코스트만에서 쉽게 발견되는 암염의 돔 구조와 흡사하다고 보았다 암염의 돔 구조물들은 지하의 압력을 받아 퇴적층을 뚫고 밀려 올라온 소금덩어리이다. 지질학자들은 연안의 석호나 앝은 바다가 증발하여 형성된 두꺼운 암염에서 그런 구조물들이 유래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만일 암염의 돔 구조물이 얕은 바다나 석호에 소금이 퇴적하여 형성된 것이라면, 지중해 해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정말 암염의 돔 구조라면 그러한 암염의 돔 구조물들은 어떻게 지중해 해상에 파묻히게 되었는가?
1960년대 후반에 지중해 해저 수백 미터 지하에서 단단한 암석층이 발견--이것 역시 CSP장치 덕분에 가능했다--되면서 그러한 수수께끼는 더욱 증폭되었다. 전문가들을 당황하게 한 것은 해상의 퇴적물들이 해양 미생물들의 잔해로 구성된 부드러운 흙이라는 사실이었다. 퇴적층 아래 깊은 곳에 음향 신호를 반사할 만큼 단단한 물질층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물질층이 나타났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런 수수께끼는 심해 시추선인 글로마첼린저호의 두달에 걸친 지중해 탐사로 풀리게 되었다. 그때는 1970녀 늦은 여름이었다. 글로마첼린저호에는 스위스의 취리히 지질연구소의 라이언박사와 케네스 J. 슈 박사가 수석 과학자로 승선하고 있었다. 글로마첼린저호는 해면 밑 6100m지점에 위치한 해상에 수천 미터 깊이의 구멍을 뚫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비밀들까지도 밝혀낼 수 있었다.
8월 23일 저녁 글로마첼린저호의 선원들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남동쪽 160km 지점에서 시추작업을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경에 그들은 매우 놀라운 물질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자갈이었다 바다 속에서 자갈을 발견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뿐만 아니라 자갈 그 자체도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즉, 그 자갈이 근처 스페인 해안에서 씻겨 내려온 것임을 입증할 만한 어떠한 광물질도 자갈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갈은 바싹 말라버린 바다 밑바닥에서 생성된 것으로 여져졌다.
24일, 해상 바로 아래의 단단한 층에서 채취해 온 물질이 증발암(소금물이 증발할 때 생기는 잔류물)의 일종인 경석고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경석고는 섭씨 약 22도 이상의 온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기온이 낮은 지중해 심해의 해상에서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한때 지중해는 경석고가형성될 수 있을 만큼 수온이 높았고 수심이 앝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슈와 라이언은 6주 동안 지중해 해분 전역의 지반을 시추한 결과 그 불가사의한 암석층이 마이오세 후반에 형성된 증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경석고와 층적층 속의 자갈 외에도 녹조류, 미소한 식물 유기체등 햇빛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생명체의 화석 유물이 발견되어 한때 지중해의 수심이 깊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결정적인 탐사로 지중해의 역사에 대한 단서를 찾게 되었다.
10월 글로마첼린저호가 귀항을 위해 뱃머리를 돌렸을 때, 사르디니아 서쪽 약 130km 지점에 위치한 마지막 시추공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암염이였다. 암염은 증발암 중 가장 용해가 잘 되기 때문에 함수가 모두 증발한 후에야 응결되는 물질이다. 따라서 글로마호의 과학자들은 증발한 지중해의 최후 앙금이 축적되었을 가장깊은 해상에서 암염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약 300m깊이의 가장 깊은 중심부--아마 한때 거대한 염전이었을 것이다--에 수백 미터 두께의 퇴적층에서이제까지 찾았던 소금을 발견했다. 슈와 라이언에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즉, 마이오세 후반에 지각 변동으로 대서양의 바닷물이 흘러 들어오던 수로가 막히면서 지중해는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지중해가 증발했었다면 사라진 해양 생물들, 물 속에 잠긴 강바닥의 계곡들 뜻밖의 장소에 위치한 암염의 돔 구조물들, 해상 밑의 단단한 지층 등이 왜 생겼는지 안벽하게 납득이 된다. 심해의 해양 퇴적층 사이에 단단한 지층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지중해가 사막이엇던 시기 이후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심해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또한 지중해가 한때 사막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운 발견이 아닌 것처럼 증발암층의 두께와 그 내부에 존재하는 해양 퇴적물들로 미루어 볼 때 마이오세 후반에 몇 차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의 수문이 여닫히면서 지중해의 바닷물이 증발했다가 채워지곤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나일강과 론강의 하상 계곡의 퇴적물과 화석기록으로 추측컨대 약 500만년 전, 플라이오세초에 최종적으로 수로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이 증발한 지중해는 거대한 욕조로, 지브롤터해협은 수도 꼭지로 생각할 수 있다. 슈의 말이다. 대륙이 갈라졌을 때, 대서양의 바닷물은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굉음을 내는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흘러들어갔다.
연간 약 4만 2000km??나 되는 대서양의 바닷물이 나이아가라 폭포 1000배 규모의 폭포들을 이루며 물이 증발한 지중해 해분에 퍼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속도로도 지중해를 채우는 데 1세기나 걸렸을 것이다.
오늘날 아프리카 지각판은 유라시아 판을 향해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 또한 지중해는 대서양을 제외한 모든 수원으로부터 유입되는 것보다 많은 양의 바닷물을 증발로 상실하고 있다. 지중해가 다 말라서 다시 한번 광대한 사막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조만간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슈박사는 만일 지브롤터해협을 둑으로 막는다면 현재의 조건으로 볼 때 600만년 전처럼 지중해 물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1000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한다.
지울 수 없는 빙하시대의 흔적
전세계적인 추위로 지구상의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약 1만 5000년 전의 어느 여름날을 상상해 보자. 베링해가 생겨 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가 분단되기 전의 북태평양 해안에 일단의 남녀가 바다표범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있다. 여름 꽃들이 피어 있고 기온은 섭씨 10도대이다. 해안 너머로 황량하고 낮은 구릉지대가 북극해를 향해 북쪽으로 약 960km 이상 뻗어 있다. 그 지역에는 식물이 희소해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사양소떼와 그보다 작은 동물들만이 먹이를 구할 수가 있었다. 생존 수단을 제공하는 곳은 바다여서, 아시아로부터 북아메리카로 동쪽을 향해 이동하는 원시 시대 바다표범 사냥꾼들은 대개 먹을 것이 풍부한 해안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한 광경은 북극권에 거주하고 있는 현대의 에스키모족 조상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다. 그들도 우리처럼 언어를 사용했고, 집을 지었고, 음악을 연주했고, 심지어 보석을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는 몹시 추웠다. 북태평양 해안 지대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외의 지역은 매우 다른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림 생략] 빙하시대의 미술가들이 그린 수렵시대의 삶의 기록에는 유희와 예술이 혼합돼 있다. 그들의 작품은 수렵시대의 생활이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혹독한 투쟁 이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왼쪽의 우아한 사슴은 프랑스의 라스코동굴 벽에 그려져 있던 것으로 1만 5000면
이상 되었다. 아래의 온순해 보이는 말머리는 작은 뼛조각에 새겨져 있었다.
광대한 지역들이 거대한 빙상에 덮여 얼어붙었다.
북극 이남에도 대빙원이 형성되어 북아메리카 지역의 상당 부분을 뒤덮었다. 이 대빙원은 뉴햄프셔주에 있는 약 1900m높이의 워싱턴산의 정상을 덮어버릴 만큼 두꺼웠다. 서쪽에서는 또 다른 대빙원이 북부의 로키산맥에서부터 알류산열도까지 뻗어 있엇다. 이 대빙원의 돌출부들은 해안을 따라 이동하던 바다표범 사냥꾼들의 진로를 막았다. 영국의 도서 대부분을 포함한 북유럽은 얼음 속에 묻혀버렸다.
남반구에서는 안데스산맥과 뉴질랜드의 산들로부터 그 아래 지역으로 빙하다 이동하였다. 남극 대빙원은 북쪽 바다 멀리까지 확장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 7490만??의 물이 얼음이 되어 지구를 뒤덮었는데 그것은 현재 지구를 덮고 있는 얼음량의 3배이다. 그렇게 많은 물이 얼음이 되면서 평군 해수면 높이는 지금보다 약 130m 이상이나 낮아졌고, 그 결과 세계의 육지는 8펴센트까지 증가했다. 오늘날 베링해협이 있는 곳에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육교(현대의 지리학자들이 베링기어라고 부르는)가 있었고 바다표범 사냥꾼들은 이 육교를 통해 이동했다.
이 모든 현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된 기후 변화의 결과였다. 그 당시 지구 전체의 기온이 몇 도 낮아지면서 남북 양반구의 여러 지역에 1년 내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천년간 내려 쌓인 눈이 압착되어 대륙을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대빙원을 이룬다.
북반구에서는 6만 5000년 전 남쪽으로 이동하던 빙하가 잠시 캐나다와 스칸디나비아반도로 후퇴한다. 그 후 약 1만 8000년 전에 빙하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전보다 더 넓은 지역을 덮어 일리노이 남부지역까지 이동해왔다.
[그림 생략] 64km 이상 펼쳐진 알라스카의 콜롬비아 빙하. 한때 이같이 광대한 빙상이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을 덮었다.
대빙원과 계곡 빙하는 이동할 때 지표면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빙하가 거으 융해점에 도달하면, 수천 미처 두께의 얼음은 자체의 무게에 끌려 이동하며 지표를 긁어 흔적을 남기고 얼음 속에 박힌 파편들도 함께 운반한다. 엄청난 무게의 빙하가 비탈길을 내려갈 때 기반암에 평행으로 홈들을 판다. 빙하는 암석의 노두를 트럭 크기로 깨뜨려 수십 킬로미터나 이동시킨 후 바위절벽 끝에 위태롭게 남겨두기도 한다.
또한 빙하는 강의 계곡으로 흘러내려 V자형 계곡을 U자형 계곡으로 변화시키며 빙하 계곡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피오르드가 형상된다.
1만 5000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초원지대는 수백 킬로미터나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유럽을 거쳐 멀리 러시아 남부까지 황량하고 나무가 없는 툰드라지대가 펼쳐져 있어 영국 남부에서도 서늘한 여름날 순록이 이끼와 지의류를 한가롭게 뜯었다. 툰드라 남쪽에는 춥고 메마른 초지가 대서양에서 멀리 아시아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관목 숲들이 여기저기에서 자라고 있었으나 대규모 산림지대는 알프스와 피레네산맥 이남으로 후퇴했다. 북미에서는 빙하의 가장자리에 형성된 좁은 툰드라 지대가 사라지고 가문비와 전나무 숲이 나타났다.
심지어 빙하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들도 황폐했다. 지구의 기온은 한랭건조했으며 북위 30도와 남위 30도 사이의 지역에는 오늘날보다 다섯 배나 더 큰 사막이 형성되어 그 지역의 거의 반을 덮고 있었다. 지구를 애워싼 열대 우림지대가 적도쪽으로 축소되면서 몇몇 지역에서는 너비가 몇 백 킬로미터 이하로 줄어들었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의 산악 삼림 대부분은 그 당시 추운 초원지대였다. 현재 전형적인 열대우림이 울창한아프리카 자이레의 넓은 지역에는 모래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세계의 풍경은 빙하기마다 급격히 재구성되었고 마지막 빙하기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추가되었다. 즉 가장 거대한 포유류들 대부분이 멸종해 벼렀던 것이다. 우리는 동물학상으로 매우 빈곤한 세계에 살고 있다. 현재의 동물들에 비해 대단히 크고 사나우며 또 매우 이상한 형태의 동물들이 최근에 사라져버렸다. 저명한 동물학자인 앨프레드 월러스는 1세기 이전에 이렇게 기술했다. 실제로 극히 최근에, 초기의 미술가들이 동굴 벽에 남긴 멸종된 동물들의 그림 몇 점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동물로 구부러진 거대한 엄니가 있고, 어깨가지으 키가 4m에 달했으며 코끼리와 유사하게 생긴 매머드도 있다. 또한 사브르 모양의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난 고양이, 키가 거의 3.5m나 되는 캥거루, 몸무게가 흑곰만큼이나 되고 키는 2.7m나 되는 자이언트 비버, 몸무게가 3톤 이상이며 연한 나뭇잎을 먹기 위해 뒷다리와 굵은 꼬리로 섰을 때 키가 6m나 되는 나무늘보도 있었다.
이러한 기상천외한 동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러한 동물들의 멸종은 전세계의 다양한 기후대에서 대체로 짧은 시기에 일어났다.
다양한 동물들이 멸종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동물들은 사라져갔으나 대부분의 작은 동물들은 살아남았고 환경 변화가 별로 없었던 해양의 포유류는 생존했으나 육상 포유류들은 심한 타격을 입었다. 초기 빙하시대에도 생물의 멸종이 있었다. 그러나 빙하시대가 도래하여 생태학적 간극이 생겼을 때 새로운 동물들이 진화하여 그 간극을 메웠다. 이때에 멸종된 종들을 대체할 만한 동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형 동물들이 세계 전역에서 죽어갔다. 유럽에서는 2만년 동안 대형 동물의 종수가 거의 반이나 감소되었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사라졌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이러한 대형 동물들 가운데 몇 종류가 생존하였다. 이러한 떼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까? 기후와 서식지대에 일어난 변화들, 먹이 감소로 인한 종간의 경쟁 심화, 포식 동물과 먹이 사이의 불균형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한 결과, 전세계적으로 동물들이 멸종했던 것이다. 단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동물들이 적도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존에 적합한 서식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빙하시대에 인간은 폭발적으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15만년 전까지 네안데르탈인은 진화를 거듭하여 빙하 지역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 적응할 수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이마의 눈썹 부위가 돌출된 안와상융기, 경사진 이마, 앞으로 튀어나온 턱과 현대인들보다 더 큰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크기는 대략 우리와 같았고 신장도 비슷했으며 현대인과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많았다.
그후 새로운 인류가 나타난다. 최초의 아프리카에서 일반적으로 현대인의 조상이 진화하여 그 중 한 분파가 100만년 이전에 아시아로 이주하였는 데 학자들은 동의한다. 어느 분파가 현대적인 호모 사피엔스 형태--현대인--호 발전하였는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5만년 전까지 네안데르탈인은 새로운 인류로 대체된 것이 분명하다.
[그림 생략]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항상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는 매우 숙련된 건축가가 되었다. 매머드의 뼈로 정교하게 뼈대를 세우고 동물의 가죽으로 완전히 감싼 빙하시대 가옥이 위쪽 그림에 재구성되어 있다.
네안데르탈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마지막 빙하기의 또 다른 수수께끼다.
현대의 인류가 네인데르탈인을 소멸시켰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두 종의 인류가 이종교배하여 순수한 네안데르탈인의 특성들이 새로운 인류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이 독창적인 현대 인류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현대 인류는 창의력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능가했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은 사냥감에 바싹 접근하여 칼이나 곤봉 등으로 사냥했지만 현대 인류는 15미터 거리에서 창을 던져 사냥감을 잡는 투창 기술을 고안해냈다. 또 다른 발명품은 의복을 만드는 데 사용한 바늘이었는데 한 쪽 끝은 뾰족하고 다른 한 쪽 끝은 부싯돌로 구멍을 낸 작은 뼛조각이었다. 기술의 극적 발달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 출현한 현대 인류와의 생존경쟁을 이기지 못한 나약한 종류의 포유류는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빙하시대도 마침내 막을 낼리 시기였다. 아시아의 바다표범 사냥꾼들이 1만 5000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이미 세계의 기후는 따뜻해지고 있었다. 1만년 이내에 남극대륙과 그린란드 그리고 소수의 고산지대들을 제외하고는 대빙원이 사라질 운명이었다.
빙하가 사라지면서 생긴 알프스 산맥의 독특한 흔적이 스코틀랜드 같은 지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서야 소수의 선구적 지질학자들이 알게 되었다. 183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빙하로 인해 다양한 지구의 지층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단 한 번의 빙하기가 존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두세 번 심지어 네 번의 빙하기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아직도 남극대룩과 그린란드를 뒤덮고 있는 빙하의 심층이나 해양 퇴적물에 층층이 쌓여 있는 과거 기후의 흔적을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은 현대의 기술 공학 덕분이다. 이렇게 수집, 분석된 과거 기후의 기록들을 통해 빙하기의 역사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각 빙하기는 약 9만년에서 10만년동안 지속되었으며, 약 1만년 전에 끝난 한 차례의 빙하기는 적어도 300만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빙하기들 중 최후의 것이었다. 빙하기 사이에 비교적 온난한 기후가 유지되던 간빙기는 1만년에서 1만 2000년 동안만 지속되었다. 이러한 300만년 동안의 빙하기도 남극대륙이 남극으로 이동해 결빙하기 시작한 약 3000 내지 4000만년 전에 시작된 훨씬 더 오랜 기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랭기중 한난한 시기에 살고있는 듯하다.
과거 기후를 예측할 수 있는 흔적들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태양계의 역학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할 때, 그것들은 빙하가 왜 이동하는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대문이다. 태양으 둘레를 도는 지구의 궤도가 일정하게 변화하거나 지구축이 동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은 과거 기후의 증거가 되는 새로운 퇴적물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가장 큰 각도로 기울어짐으로써 태양 광선이 감소될 때 지구는 충분히 빙하기로 접어들 수 있다. 거대한 빙하가 지구의 표면을 덮게 되면 태양광선은 축적되어 지구의 기온을 상승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반사된다.
빙하기에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의문 중의 하나는 다음 빙하기가 언제 시작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빙기의 거의 마지막 시기나 또는 새로운 빙하기 직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구에는 앞으로도 몇천년 동안 온난기가 지속될 것인가? 먼 미래의 우리 후손들만이 그 대답을 알게 될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설사 인류가 과학 기술과 조직력으로 새로운 빙하기에 대처할 수 있을지라도 새로운 빙하기는 인류의 생존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지식 없이도 인류가 물리적 역경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가사의한 매머드
생존 당시의 매머드는 코끼리와 유사하지만 털이 많은 동물이었다. 사멸한 매머드와 마스토돈의 얼어붙은 잔해와 화석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불가사의한 둥물로 변형되었다. 중국인들은 매머드를 지하에 사는 동물로 믿어왔다. 시베리아에서는 아직까지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매머드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 매머드는 놀랍게도 동토 속에서 적어도 1만년 동안 매장된 채 거의 썩지 않고 보존된 것이다.
매머드의 잔해는 세계 도처에서 화석화된 뼈와 치아의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화석들은 전설을 만들어내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한 학자는 코끼리의 두개골의 중심에 거의 원형에 가까운 비강이 잇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한 비강은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눈구멍으로 착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스시대 초기에 뱃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이런 사실들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외눈 거인 키클롭스의 우두머리인 폴리페모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매머드의 엄니는, 그 약효로 유명한 유니콘 즉 일각수의 뿔처럼 높이 평가되었다. 매머드에 관한 또 다른 전설들은 고대에 살았던 거인과 관련되기도 했다. 한 예로서 성 크리스토퍼는 오랫동안 거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서유럽 전역에서는 매머드의 뼈들이 그의 잔해로서 숭배되었다. 거의 완전한 매머드의 표본들이 17세기에 발굴되었을 때조차도 매머드에 대한 과학적인 가정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06년에 뉴욕 북쪽에서 발견된 마스토돈의 치아는 성서 시대 인물인 노이의 대홍수 때 죽은 거인의 치아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유니콘과 거인족처럼 신봉해왔던 매머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지구의 파괴는 새로운 생명의 약속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최대의 재난이었다. 대홍수는 지구 전역을 휩쓸어 세계의 종말을 가져왔고 따라서 두 번째의 창조를 예고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노아의 대홍수 사건은 인간의 사악함과 신의 분노, 한 인간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무한한 정의 그리고 은총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대홍수가 결코 자연의 재난이 아니고, 인간의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홍수 시대에는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거인들이 지구상에 존재했으며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장수했던 경이의 시대였다고 창세기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제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부계의 1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홍수 이전의 유대 민족의 조상들은 첫아이를 낳은 때가 65세에서 190세 사이였으며 대부분 900년 이상 살았다.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노아의 조부 므두셀라인데 969세의 나이로 대홍수 때 죽었다.
그의 조상과는 달리 노아는 500살이 되어서야 셈과 함, 그리고 야벳 세 아들을 두었다. 그후 대홍수가 도래한 것은 이 3형제가 출생한 후 1세기--성경의 계보에 따르면, 아담의 창조 후 1656년--가 지나서였다.
대홍수 이전 세상은 인간의 사악함으로 타락하였다.
성경 첫머리에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후 보기에 좋다 고 했으나 세상은 인간의 폭력과 무법 행위가 가득 차서 타락한 장소가 되었다.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셨다. 자신의 천지창조를 한탄하면서, 하느님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인간 가운데 단 한 사람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노아는 그 당시에 올바르고 흠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을 대홍수에서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홍수가 있기 전에 노아에게 잣나무로 된 방주(ark) 를 만들 것을 명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tevah 란 말은 영어에서는 항상 ark 라고 번역되는데, 이 말은 궤나 상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것은 보통의 배와 같은 모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성경의 이야기 중 노아가 방주로 항해하거나 밖을 내다보았다는 암시는 결코 없다. 또한 하느님은 방주 안에 방을 만들어 물이 새지 않도록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할 것을 명했다.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며느리들이 방주에 탄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물에 살지 않는 모든 동물들은 인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으므로 방주에 타서 살아남을 동물들 역시 모아야 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목숨이 있는 온갖 동물 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생명을 보존케 하였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연대기를 우리의 역법에 맞추어 생각한다면 대홍수는 노아가 600살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된 셈이다. 바로 그날,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이러한 성경 기록의 어조는 창세기 제1장에 나오는 천지 창조와 매우 특별한 관련이 있다. 태초에 하느님은 땅 위의 물과 하늘의 물을 분리시킬 때 하늘이라고 불리는 견고한 지붕, 즉 창공 을 창조함으로써 질서를 민들어냈다. 그러나 이제는 땅 밑에 가두어 놓았던 물을 위로 분출하게 하고 창공으로부터 하늘의 물을 터지게 함으로써 하느님은 대지를 혼돈으로 되돌려 놓았다.
40일 주야로 비가 내려 물은 땅위에 가장 높은 산들을 잠기게 하고도 6m이상 수위가 올라갔다. 방주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제외하고 새나 집짐승이나 들짐승이나 땅 위를 기던 벌레나 사람등 땅 위에서 숨쉬던 모든 생물이 물에 빠져 죽었다.
40일 후에 비는 멎었고 물에 잠긴 땅 위에 바람이 불었다. 그리하여 물이 점차 줄었고, 대홍수 이후 150일째(우리의 달력으로 7월 17일)에 방주는 아라랏산 에 머물렀다.
노아는 방주가 정박한 후에도 몇 개월을 방주에 머물렀다. 11월 10일에 그는 처음에는 까마귀 한 마리를 그 다음에는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내 지면에서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알아보려고 하였다. 까마귀는 땅에서 물이 다 마를 때까지 이리저리 날아 다녔다. 그러나 비둘기는 발을 붙이고 앉을 곳 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일주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이때에 비둘기는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 이는 생명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확살한 암시였다.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년 정월 초하루,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과연 지면은 말라 있었다. 2월 27일에, 대홍수가 시작된 지 1년 하고도 열흘 후 하느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서 나오게 했다. 노아가 행한 첫번째 일은 제단을 쌓고 하느님을 위하여 동물로 번제를 드린 것이었다. 하느님이 그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 노아와 그의 자손과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에게 새로운 약속을 했는데, 이는 다시는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온 땅을 벌하지 않고 계절의 주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하느님은 노아를 축복하고 많이 낳아 온 땅에 가득히 불러나거라 는 아담에게 내렸던 명령을 다시 했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바 무지개는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새로운 계약의 표로서, 하느님은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 다짐했다.
노아와 대홍수의 이야기는 세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화 가운데 하나이며 많은 종교적 논쟁을 일으키고 숱한 고고학적인 연구의 실마리가 되었다. 실제로 전세계적인 홍수가 일어났던 것일까? 만일 그랬다면, 홍수의 증거가 발견될 수 있을까?
과거에 산꼭대기에서 발견된 조개 화석들은 전세게가 한때 물에 잠겼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로 생각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륙 이동과 그 밖의 지질학적인 힘이 범세계적 홍수의 이론보다 더욱 타당성 있게 조개 화석의 생성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증거가 있을까? 비교적 소규모의 범람이 일어나도 수천 톤의 진흙과 침니가 남을 수 있다면,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는 전세계 도처에 막대한 양의 홍수 초적층을 침전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그러한 범세계적인 홍수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퇴적층에 대한 연구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성서의 고향인 이스라엘에서도 예리코와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발굴물들의 기원이 기원전 8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승로 밝혀졌으나 전세게적으로 생명체들을 멸종시켰을 거대한 홍수에 관해서는 어떠한 증거도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상황은 다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계곡에서 홍수로 인한 파괴의 흔적이 몇군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수메르의 도시 우르이다. 1929년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레너드 울리 경이 그곳을 발굴한 결과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기원전 3500년겅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2.4m 두께의 진흙층이 다른 지층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다.
고대에 일어난 대홍수들
많은 학자들은 구약 성서의 홍수 이야기가 두 가지의 다른 히브리의 전설을 엮어 꾸민 것으로 믿고 있다. 성경의 이 기사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길가메시으 서사시에 나오는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다. 기원전 2000년경의 그 시는 영웅적인 왕 길가메시와 불멸의 생명을 찾아가는 구도의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배우기 위하여 대홍수에서 살아난 후에 신들로부터 불멸의 생명을 받은 바빌로니아판 노아인 우트나 피시팀을 찾아 나선다.
호전적인 엘린신이 주도한 신들의 회의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홍수를 일으켜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에아신은 우트나피시팀에게 네모상자 모양의 배를 민들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씨앗 을 그 속에 태우라고 말했다. 우트나피시팀 및 그의 가족과 장인들, 선원들, 그리고 구색을 맞추어 뽑은 동물들이 안전한 배 위에 타자 폭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6일 동안 계속된 후 폭풍이 끝났을 때, 거의 모든 인간은 죽어 흙이 되었다. 배가 7일 후에 니시르산에 정박했을 대 우트나피시팀은 먼저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비둘기는 배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 날려 보낸 제비도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날려 보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트나피시팀은 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린 다음 신들에게 희생물을 바쳤는데 신들은 달콤한 향내를 맡고 그 둘레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인간을 전멸시킨 처사가 현명했는가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엔릴마저 마음이 누그러져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에게 불멸의 생명을 주었다.
우트나피시팀과 노아 이야기의 유사성으로 인해 성경의 기사가 메소포타미아 원전에 기원을 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맏게 되었다. 그러나 이 히브리판 이야기는 전에 있었던 어떠한 이야기들과도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즉, 성경에서 기술한 인간의 사악함이나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생명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장엄한 계약 같은 내용은 우트나피시팀의 독단적인 세계와 그의 급진적인 신들과의 거리가 매우 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대에 일어난 홍수의 증거가 노아의 홍수와 연관이 있는가?
울리여사는 우르에 있는 진흙층을 보고 나서 노아의 홍수 가 남긴 자취라는 견해를 과감하게 개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우르에서 생며으이 자취가 단절된 퇴적층이 형성된 것은 노아의 홍수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 다른 큰 홍수가 일어나 생긴 결과였다. 레너드 울리 자신이 그 근처에 있는 유적들을 발굴해 보았지만 어떠한 홍수층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우르의 범람이 그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홍수의 퇴적물들이 니네메와 키시 같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의 유적지에서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이 홍수들은 아마도 우르에서 일어난 홍수와는 다른 시기에 일어났고 역시 일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한 범람이 나중에 아의 방주에 관한 성경 기사가 나오게 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홍수 전설들의 근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중 어느 것도 성경에서 기술된 것처럼 범세계적인 홍수라는 근거는 없다.
노아의 대홍수에 관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에 관한 유적을 발견하려는 희망에서 터키 북동쪽에 있는 산을 전설에 나오는 아라랏산이라고 여겨왔다. 그 산을 최초로 사람들이 오른 것은 1829년의 일이었다. 그 이래로 여러 탐험가들이 그 노아의 방주를 찾기 위한 탐험길에 올랐다. 그러한 탐험가들 중에서 페르낭 나바라라는 프랑스 기업가가 가장 유력한 증거를 발견했다. 나바라는 1955년에 자신의 아라랏산 원정을 기술하면서 4200m높이의 산위에 펼쳐진 빙하의 틈에서 손으로 작업한 목재와 그 밖의 다른 나뭇조각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나바라의 발견물들을 최초로 검사한 임학 전문가들은 이것이 기원전 3000년경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카본14 연대 측정 방법을 사용해서 검사한 결과 그 목재는 서기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잘려진 것임이 드러났다. 이제 과학자들은 나바라의 나무 구조물이 방주 일부라기보다는 방주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지방 수도사들이 지은 성소의 잔해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 이야기가 실제로 세계 전역에 일어난 대홍수에 근거를 두었든지, 아니면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고대의 홍수들에 대한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든지간에 그 실상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궁극적으로는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노아의 이야기는 인간이 잠재적으로 간직한 악에 대한 구체적인 고발이며 하느님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영속적인 번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과 아울러 인간의 사악함에 대해서는 멸망의 화를 불러일으킬 만큼 분노한다는 믿음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따라서 재앙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이 일화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희망의 부활에 대한 다짐으로 감동적인 끝을 맺는다.
사하라 사막의 형성
기름진 땅이 쓸모없는 사막으로 바뀐다
산과 메마른 고원, 자갈로 뒤덮인 평원과 끝없이 펼쳐진 광막한 모래의 바다를 이루어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세계, 즉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막 사하라는 대서양에서부터 홍해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을 가로질러 4800km 이상이나 뻗어 있다. 이 지역은 생명체가 살기 어려우며 자연조건이 극단적이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약 1만년 전에는 지금 사하라--아라비아어로 사막 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비가 오면 수위가 올라간 강이 나무로 뒤덮인 산으로부터 흘러내렸고, 호수와 늪에서는 하마가 살았던 푸르고 비옥한 곳이었다. 광활한 북아프리카 초원에서는 표범이 타조와 가젤영양을 뒤쫓고 코끼리, 코뿔소와 기린이 풍부한 식물을 찾아 이동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냥을 했으나 후에는 대량의 가축떼를 키우는 유목생활로 풍요를 누렸다. 몇 천 년 동안 사하라에서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절벽과 동굴 천장에다 그들의 생활을 기록했다. 선사시대에 돌에 새기거나 그린 이같은 기록은 사하라 전역에 남아 있지만 거칠고 외딴 사막 중심에 있는 남부 알제리의 타실리나제르고원의 기묘한 바위들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고 그 형태 또한 가장 아름답다.
동식물이 번성했던 초원이 어떻게 지구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황량한 불모지역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는가? 타실리나제르고원에 보존된 그림들이 그 변화 과정의 일부를 묘사하고 있지만 단지 가장 최근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하라의 건조 현상은 지금의 사막 형태로 변모된 때까지 영겁의 세월이 걸린 하나의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공룡들은 사하라의 우거진 열대우림에서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있었다.
사실상 오늘날의 사하라는, 수억년에 걸친 지질과 기후 변화의 결과이다. 오랜 옛날 빙하의 흔적이 타실리나제르고원 전지역의 바위에서 바력ㄴ되었다. 이것은 사하라 일부 지녁이 먼 옛날 만년설 밑에 묻혀 있었다는 증거이다. 약3억년 전 석탄기 동안 대부분이 바다였던 사하라 지역은 중생대에는 공룡이 거주했던 풍성한 열대우림역으로 변모했다. 대략 1억 3000만년 전, 백악기 초기에 공룡은 사하라 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의 사막 지역의 대부분이 다시 한 번 바다 밑으로 잠겼다. 그러나 백악기의 바다는 다시 소택지와 호수와 같은 습지로 바뀌었다. 그후 북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이 또 다시 수몰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250만년에 걸쳐, 빙하기와 간빙기의 교차와 유럽 간빙기의 온난한 기후변화가 북아프리카의 강우량과 기후에 영향을 주었다. 거대한 그물 모양의 강과 호수 때문에 많은 동물과 인간이 살 수 있었던 습한 지역이 사막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이는 건조지역으로 변해갔다.
지도 생략 사하라는 11개 국가에 걸쳐 있으며 총면적은 거의 미국 전체 면적과 같은 크기이다.
그림 생략 선사시대의 두 사냥꾼이, 한때 사하라 중심부에 풍부했던 사냥감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 그림은 타실리나제르지역의
깊지 않은 동굴 벽면에 그려져 있다.
1981년에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가 잡은 레이더 영상으로 인해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 전역에 걸친 구석기 시대 거주지의 묻혀진 유적들이 밝혀졌다. 또한 레이더 사진은 20만년 전 이 지역에 나일강 너비 정도의 계곡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지하에 묻혀 있음을 보여 주었다.
현재 가장 기온이 높고 건조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리비아 사막에서 발견된 화석은, 그 지역이 습했던 시기중 일정 기간 동안 현대의 코끼리보다 훨씬 더 크고 길이가 2.4m나 되는 네개의 거대한 엄니를 가진 자아언트 마스토돈인 스테고테트라벨레돈 시르티쿠스의 서식지였음을 보여 준다. 현재는 타는 듯한 불모지인 이 지역은 그 당시 거대하고 식욕이 왕성한 초식성 동물의 먹이를 충분히 제공할 만큼 풍부한 초목이 자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림 생략 약 5500년 전에 그려진 타실리나제르의 이 암벽그림은 그때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긴 뿔을 가진 가축들이 목초지로부터 돌아오고 (오른쪽), 매어둔 송아지들이 타원형의 오두막 앞에 서 있다(왼쪽). 한편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다.
사하라의 크기는 그 진화 과정에서 오늘날보다 커지기도 하고 상당히 작아지기도 했다. 1만 5000년 전에는 현재의 영역에서 약 480km 남쪽으로 사구들을 형성함으로써 삼막이 확장되었다. 한편 7000년 전 차드호수의 규모는 지금보다 10배 이상 컸고 현재의 사막 지역인 북방 640km까지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서쪽에서는 니제르강이 한때 아라완호수로 흘러 들어갔는데, 그 강의 본류는 바로 현재 말리 중앙에 있는 모래의 바다이다.
그러나 습한 시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라는 지리적 조건과 기후가 미치는 영향을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대륙 이동 때문에 북아프리카는 지구의 적도 건조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공기는 반복적인 빙하시대의 출현과 같은 특별한 환경하에 놓이는 때를 제외하면 끊임없이 높은 대기의 압력으로 인해 그름과 비를 형성하기 어려워 극도로 건조해진다. 또한 고대 사하라의 배수 체계의 독특한 성격이 사막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하라의 수로는 바다로 흘러가는 대신에 산으로부터 저지대의 폐쇄된 분지로 흘러들었다. 습한 시기에는 그러한 급류 하천들이 형성되어 산을 침식시켰고, 그 결과로 생긴 토사가 퇴적하여 분지를 점차 메워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레그스로 알려진 사하라의 자갈 평원이 형성됐다. 강의 침식작용에 이어 건조기에 바람이 모래알들을 불러올려 자갈 평원 너머에 있는 사막 외곽의 에르그라 불리는 모래 바다에 쌓는다.
사하라의 마지막 습한 시기는 마지막 빙하기의 끝 무렵인 1만 2000년에서 1만년 전에 시작되었다. 타실리나제르의 가장 오래된 암각화와 바위 그림은 기원전 6000년 혹은 이보다 더 오래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물 가축을 입고, 가면을 쓰고, 곤봉과 창과 부메랑을 들고 사녕감에 몰래 접근하는 사냥꾼들을 그린 것이다. 비록 조악한 그림이지만 이러한 초기 사하라에서의 사냥과 채집 생활에 대한 그림은 이 지역이 오늘날 사하라 사막 이남의 동부 아프리카 대초원과 매우 유사해 풀이 우거지고 사녕감이 풍부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또한 이 그림은 그 지역이 점차 건조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약 4000년경 사하라는 이미 코끼리떼와 그밖의 커다란 사냥감에게 충분한 먹이를 더 이상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물들은 죽어갔으나 먹이가 충분한 땅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해 갔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동부로부터(아마도 나일강 계곡 상류로 추정) 온 유목민으로 바뀌게 되며 그들은 대규모의 소, 양과 염소를 길렀다. 이러한 유목민들은 타실리나제르에 가장 훌륭한 바위 그림들을 남긴 세련된 미술가들이었다.
기원전 4000년에서 2000년 사이의 사하라 황금기으 그림들 가운데는 목초지로 가는 소떼의 모습과 야생 양과 영양, 가젤 영양 등 비교적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활과 화살로 무장한 남자들의 그림이 있다. 야영지를 묘사한 많은 그림들의 내용은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들과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 외의 다른 그림들은 병을 쫓아내고 동물들에게서 마력을 없애는 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사하라의 역사상 이 시기가 평화스럽고 풍요로운 시기였다는 증거는 바위에 그린 그림에 나타난 가축떼의 규모와 정교한 의상을 입고 춤추고, 놀거나 단지 다정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수없이 묘사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사하라의 풍요로운 환경에 대한 생생한 증거들은 주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타실리나제르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에서, 아마도 수령이 3000년에서 4000년 된 고대 삼나무와 올리브나무 몇 그루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비틀리고 마디가 생기고 재생할 수도 없는 타실리의 선사시대 나무들은 이따금씩 내리는 적은 양의 비에 의존하여 근근히 생존하고 있다. 이러한 추르렀던 사하라의 과거를 증언하는 나무들은 캘리포니아의 자이언트 세쿼이어와 함께 지구상에 가장 오랫동안 살아 있는 생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약 2500년경, 유목 문화는 사하라의 건조화가 가속화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자 시내와 습지 그리고 짐승들의 식수원은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초목은 시들었다. 목축을 했던 부족들은 과거처럼 스포츠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하여 부득이 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식수원과 가축들을 먹일 수 있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면서 동식물들과 함께 점차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하라의 황금기 문화의 기초였으며, 틀림없이 맹렬하게 풀을 뜯어먹어 그 지역의 몰락을 촉진시켰을 가축들은 기원전 약 1000년경 사하라의 암벽 미술에서 사라졌다.
사막: 황량한 미의 세계
사막이란 강유량이 매우 낮거나 불규칙적이어서 식물이 자라기에 부적당한 땅을 말한다. 반건조대, 건조대 그리고 극단적인 사막 지대는 지구 전체 지표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약 7만 ??의 육지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왜 사막은 이렇게 건조한가?
세계의 열대지방의 대사막들은 거의대부분이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부근의 기압이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지역의 공기는 매우 건조하여 대기의 습도가 매우 낮다. 중앙 아시아의 고비사막과 미국 서부의 모하비사막과 같이 중위도에 위치한 사막들은 바다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거나 커다란 산맥에 의하여 바다와 격리되어 있어서 건조하게 된다. 세번째 유형의 사막은 북극가ㅗ 남극의 한랭 사막인데, 이것은 단지 그곳의 공기가 너무 차가워 많은 습기를 함유할 수 없어서 생긴 것이다.
한랭 사막의 온도는 보통 섭씨 10도 이상 오르지 않고 그것도 단지 짧은 여름철 동안만 계속된다. 그러나 뜨거운 사막에서는 낮에 흡수된 강한 열기가 해가 진 후에 대기 속으로 급격히 복사하여 되돌아감으로써, 밤에는 급격한 기온저하 현상이 발생한다. 대단히 건조한 사막에서도 소량의 비는 내린다. 또 불모 지대에 아지는 폭우는 돌발적인 홍수와 침식력이 큰 일시적인 강을 이룰 수 있다. 사막의 특유한 지형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물과 바람의 복합적인 작용이다.
그림 생략 횡단 사구, 바르한 사구, 별 모양의 사구 바람에 의해 형성된 사구들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 충적선상지, 산계곡의 하천에 실려 내려오던 토사가 빠르게 평평한 평원이나 넓은 계고긍로 흘러들어갈 때 물흐름의 속도가 떨어지면서 생긴 부채 모양의 충적지.
* 건천, 또는 와디: 폭우가 내린 후에 일시적으로 시내로 변하는 마른 하천의 바닥.
* 볼손: 배출구가 없는 넓은 사막 분지. 근처 산에서 흐르는 하천은 본손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흔히 선상지를 형성한다.
* 사막 포석: 자갈로 빽빽이 메워진 모자이크 모양의 지표면.
* 사구: 모래가 바람에 날려 형성되어 모양이 항상 변하는 구릉이나 언덕.
* 에르그: 모래 언덕으로 뒤덮인 사막 지역을 가리키는 사하라 지역의 용어.
* 하마다: 풍식작용으로 드러난 암반의 표면.
* 케디먼트: 완만하게 경사지고 표석이 깔린 산기슭에 가가운 산비탈의 암반.
* 플라야: 일시적으로 형성된 호수가 빨리 증발하여 소금 퇴적물만이 남은 얕은 분지.
* 레그: 매끄러운 돌과 자갈로 된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사하라 지역의 용어.
그러나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거의 4퍼센트가 사막에 살고 있다. 심지어 타실리나제르와 같은 불모의 사막에도 수목, 야생화, 도마뱀, 전갈 나비 등 강인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한편 구엘타스(사막에 산재한 물 웅덩이)에는 물고기, 개구리 세우, 그리고 연체동물들이 생존하고 있다.
호전적인 새로운 기마민족이 계속 진화하는 사막으로 들어왔다.
말과 전차를 타고 북방에서 침략해 온 호전적인 민족들이 유목민들을 대신하여 점차 건조해 가는 사하라의 지배적인 민족이 되었다.
조용한 목가적 풍경 대신에 격렬한 전투 장면이 타실리나제르 지역의 바위 위에 그려졌는데, 이전 시기의 미술과 비교하여 경직되고 색체를 쓰지 않았다.
서기 초에는 말들이 이미 사하라에 적응할 수 없었고, 곧 낙타로 대치되었다. 이는 그때에는 사하라 지역이 사막이라는 것이 기정 사실로 된 명백한 증거이다. 유목민과 같은 매우 강인한 소수의 민족 외에는 사하라의 오아시스 이외의 지역에서 생존하는 것이 마침내 불가능해졌다.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
거대한 화산 폭발이 지중해 일대를 뒤흔들다
이 거대한 만의 세 면은 높이 솟은 절벽으로 돼 있는데 검은색, 회색, 분홍색 그리고 녹색을 띠고 있는 절벽 위의 들쭉날쭉한 줄무늬가 아주 오래 전에 발생했던 자연의 대격변 중의 하나를 증언하고 있다.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거대한 원형 분지, 기괴한 모습으로 파손된 절벽들, 중심부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섬들은 기억 조차 할 수 없는 먼 과거에 발생했던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의 잔유물이자, 상상을 초월한 화산분출의 힘이 만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다섯 개 섬은 흔히 산토리니라고 불리는데, 이는 중세의 베니스 지배자들이 성인 이레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붙였던 이름이다. 이 섬들은, 고대 이래로 에게해로 알려진 지중해에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 본토의 남동부에 고리 모양으로 연결된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다. 이 섬들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지역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폭발로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가운데 섬 자체가 파괴된 곳이기도 하다.
350년 전, 군도중 유일하게 비옥한 섬이었던 산토리니는 지름이 약 16km에 달하고 대칭을 이룬 웅장한 산봉우리가 1.6km나 솟아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당시의 이름은 산토리니가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아손의 아르고선의 전사들 가운데 한 명의 후손으로서 그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나중에 테라로 알려졌지만, 당시 그 섬의 명칭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청동기시대에 산토리니섬은 크레타섬과 함께 1500년전 지중해 동부를 지배하는 동안 고대 세계의 가장 위대한 해양 문명을 건설했다.
크레타섬은 미노스문명의 본거지로, 당시에 알려져 있던 세계의 모든 지역과의 교역을 발판으로 형성된 사회였다. 산토리니에서 발굴된 미노스 양식의 프레스코화에서 볼 수 있는 전복된 소형 선박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집트와 메스포타미아와 같은 강력한 문명지역에서도 내륙수로의 운항에나 적합한 크고 바닥이 평평한 선박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형선박으로 지중해상의 섬간 평균 거리인 320km 이상을 하루 반 만에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미노스문명의 선박들은 본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항해하여 청동물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구리와 주석을 사고 곡물, 도기, 대리석 등을 팔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기원전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키클라테스산 도기가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스페인의 미노르카섬과 같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된 바 있다.
당시 번성했던 미노스문명은 아직 완전해독이 안된 선형문자 A를 후세에 남겼다. 그러나 테라섬의 주요 발굴 지역인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된 미노스문명의 미술과 건축은 안락하고 교양있는 생활을 향유하던 상류 계급의 높은 생활 수준을 보여준다. 상류층의 가옥은 기법이 세련된 벽화와 놀랄 만한 예술 작품들로 장식되었다.
도시 자체도 고도의 기술발달과 사회조직을 반영했다. 2, 3층, 혹은 4층 주택들은 기술적으로 설계되고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아크로티리 거리 지하에는 잘 관리되었던 배수로 시설이 있었다. 테라는 분명히 약 112km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크레타섬과 분리되어 있는 조그만 섬이었지만, 석공과 목공, 그외의 장인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재능과 독창력을 지닌 미술가들로 구성된 대규모 사회계층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세련되고 발전된 풍요로운 사회였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테라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격렬한 화산 폭발로 파괴되어 과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테라섬에서 발생한 지각변동을 언급한 역사기록에도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역사가들은 테라섬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와 고대 문학, 그리스 신화 그리고 기타의 자료에서 찾아낸 단편적인 단서들이 도움이 되었다.
격렬한 화산 활동이 임박했을 때 첫번째 조짐은 지각의 연속적인 미진이었을 것이다.
때는 여름이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강풍 때문에 항구에는 미노스 대선단의 대부분이 정박해 있었다. 추수철은 아직도 몇 주일 더 기다려야 했으므로, 테라섬에서 밀과 보리, 마른 열매와 기타 주요 농산물들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던 항아리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상인들은 매일 그들의 무역 동업자들의 배가 지중해를 건너오는지 보기 위해 수평선만 바라보았다. 그때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을 예고하는 미진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대피를 촉구하는 사람들과 긴급조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결국엔 최소한의 안전조치가 취해졌던 것 같다. 최근에 아크로티리에서 발굴된 당시의 가옥들에는 금이나 은, 그 외의 귀중품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긴급히 대피할 때 그것들을 모두 가져갔음을 시사한다. 또한 가정용품과 비축 식량이 지하실의 창고에서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 아마 사람들이 지진의 위험을 피해 지하실로 피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곧 격렬한 지진이 뒤따르자 돌로 된 벽들이 갈라지면서 가옥들이 무너져내렸다. 아직 화산 활동에 대한 조짐은 없었으나 여진으로 인해 대피를 거부하던 사람들마저도 피신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미노스인들은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200km 떨어진 그리스 본토로 가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물정을 잘 아는 크레타항으로 향했을 것이다.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얼마 동안인지 알 수 없지만 한동안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주민들은 다시 모여들어 폐허가 된 지역을 청소하고 새로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크로티리의 발굴 결과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재건되어 가던 섬이 내부로부터 붕괴됨으로써, 재건 작업은 돌연히 중지되었다. 최후의 지각 격변이 장기간 지속되어 테라가 재에 덮인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 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기간의 격렬한 화산활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지각 변동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벽 꼭대기의 피라라는 마을 남쪽의 위치한 거대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화산재층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첫번째 폭발로 작은 경석들이 섬을 뒤덮었고 그 다음에는 좀더 큰 경석 덩어리가 섬에 쌓였으며, 나중에는 특이한 장밋빛의 경석--테라는 이 장미 및 경석으로 유명하다--이 쏟아져 섬을 뒤덮었다.
이러한 화산분출이 얼마나 계속되었는가는 좀더 연구해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화산분출이 끝난 후 엄청난 규모의 화산분출물이 테라를 뒤덮었을 것이다. 화산 폭발에 관한 지식으로 판단해본다면 압축된 물질과 과열된 가스가 시속 1920km 이상의 속도로 방출됨으로써 산정상에 분출구가 생긴다.
연기와 재가 지중해 위로 32km 이상 피어올랐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페르시아만에서 지브롤터까지 엄청남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거대한 화산 구름이 성층권 높이로 올랐다. 공기를 타고 먼지가 이동하면서 수백 킬로미터에 걸친 지역이 낮에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해졌고 광대한 지역에 엄청난 양의 먼지가 쌓였으며 그 결과 전세계의 일몰과 기후 조건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화산재와 화산 분출물로 테라의 대칭형 분화구가 여러 곳 파괴되었고, 그 결과 엄청난 야의 마그마가 저장되어 있던 화산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생겼다. 수억 리터의 바닷물이 백열의 분화구 속으로 흘러들어 그 결과 일련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들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발로 기록된 화산 폭발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으로 약 128km에 달하는 지역을 날려 버렸고,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크레타 해안과 그 외곽의 다른 지역을 강타했다. 어떤 사람들은 폭발의 힘과 에게해의 그 지형과 깊이 때문에 높이가 60--90m나 되는 파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진, 바닷물, 화산재 그리고 화염 등으로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단지 민족 고유의 기억 속에 앞뒤 가 불분명한 전설로만 흔적을 남겼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저술에 그 자취를 남긴 것은 참으로 의외이다.
기원전 35c년경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라고 불리는 사라진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했다. 즉 기원전 600년경, 이집트를 방문중이던 아테네의 시인이며 정치가인 솔론에게 한 이집트 사 제가 그 섬을 비롯한 여러 섬들을 지배했던 위대하고 강력한 왕국 에 관하여 최초로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틀 갈티스는 위대한 고대 문명을 건설했고 호전적이었으며 지부롤터해협 외곽의 대서양 상에 위치했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 동안 무서운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왕국의 전사들은 모두 땅 속에 매몰되었으며 아틀란티스섬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여러 세기 동안, 학자들은 아틀란티스대륙의 붕괴에 대해 논의해 왔고, 그것을 역사적 사건에 결부시키려고 시도했다. 어떤 학자들은 숫자를 잘못 해석한 결과 아틀란티스의 멸망 시기가 지나치게 앞당겨졌으며 실제, 아틀란디스가 ?괴한 때는 고대 초기가 아니라 테라의 화산폭발과 미노스문명이 몰락한 기원전 2000년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솔론이 묘사한 아틀란티스 대륙의 지질학적, 지형학적 특성들이 크레타섬과 테라섬의 위치와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멸망과 같은 전설들은, 거대한 화산폭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고대인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이 묘사한 그러한 광대한 대륙이 대서양 어느 곳에 가라앉을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실제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믿음은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존속되고 있다. 아틀란티스는 성경에 나오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호머의 이상향 및 켈트족과 튜튼족의 신비한 신화에 이르기까지 사라진 세계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이 혼합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한 이론은 한가지 기본적인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민족들 은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에 인간들이 고결한 목적 을 지니고 살며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피안의 땅인 아틀란티스 대륙을 동경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존재했다면 인류역사에서 파천황의 대사건이라 할 만한 아틀란티스 대륙의 실재여부와 멸망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어 주관적 해석만이 난무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아틀란티스 전설에 관한 ?부한 원천이었다 대륙을 침몰시킨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면 전설의 일부가 되는 것 은 필연적이다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합리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화산의 대폭발이 너무나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선원들은 황금 양털을 갖고 귀국하는 도중 리비아 해안을 거쳐 북쪽의 크레타 섬을 향해 항해했다. 그러나 청동의 거인인 파수꾼 탈로스가 평소의 습관대로 아르고선에 바위를 던졌기 때문에 이아손 일행은 상륙할 수가 없었다. 그때 메데아가 그 괴물에게 마술을 걸자 비틀거리던 거인의 발뒤꿈치가 바위에 긁혀 생명의 원천인 신성한 영액이 녹아내리는 납과 같이 쏟아져 나와 거인은 죽고 말았다. 여기서 발뒤꿈치 는 소분화구이고 영액 은 흘러내리는 용암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인 탈로스는 아르고호의 지친 선원들 머리 위로 화산 분출물을 폭탄 처럼 쏟아부으며 폭 발하는 거대한 화산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에게해의 테라섬 북방 약 101km 떨어진 델로스섬에서의 아폴로신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섬은 원래 별의 섬 이란 뜻을 지닌 아스테리라고 불렸는데 하늘에서 별처럼 떨어져서 에게해 위를 떠다녔다. 이 섬은 아폴로가 탄생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고정된 장소에 자리잡았고 델로스란 이름을 얻는다. 떠다니는 섬에 대한 이런 전설들은 테라에서 분출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막대한 분량의 경석을 목격한 고대 선원들의 이야기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몇 세기 전 태평양에서 테라보다 규모가 작은 화산이 폭발하여 40km 이상 긴 거대한 경석더미가 바다 위를 떠다녔는데 그 규모는 조그만 델로스섬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런데 호머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파에이셔인들은 쾌활하고 진취적인 사람들로 화물과 승객을 먼 지역까지 빨리 운송하는 항해술뿐만 아니라 춤과 온탕목욕과 안락한 침대생활을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들은 고국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도와주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다. 포세이돈은 그 벌로 섬의 배를 돌로 변화시키고 도시를 거대한 산으로 뒤덮어버리겠다 고 위협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의 사견--크레타섬의 북동 해안을 거대한 해일이 강타하여, 강대한 무역선단을 파괴하고 위풍당당한 미노스 문명에 치명타를 가했던 사건==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의 초기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헤시오드는 기원전 8세기에 제우스신과 거인 괴물 타이폰의 해전을 묘사하는데 명백한 화산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둘이 내뿜는 열기가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고, 천둥, 번개, 격노한 괴물, 불의 폭풍, 불꽃 튀는 벼락 등에서 뿜어나오는 열기가 천지를 뒤덮어 바닷물이 끓어 용솟음쳤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거대한 파도들이 밀려와 육지를 뒤덮었다. 이 시인은 틀림없이 거대한 화산 폭발 현상에서 기원하여 여러 세기 동안 전해온 전설을 토대로 이 글을 썼다.
이러한 유사한 기록들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여전히 미노스의 종말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스 왕국은 천재지변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침략해 온 외부 세력에 정복당해 멸망한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견해에서 볼 때, 크레타는 불과 파도와 화산재의 재난에서 살아남았지만 국력이 약화되어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친 그리스 본토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하튼, 미노스인들이 테라섬에서 일어난 지각 격변의 영향을 입은 유일한 사람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테라가 내뿜은 화산재의 거대한 구름이 지중해의 바람에 실려 남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지리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은, 고대의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연대 추정방법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으며 만일 그같은 결함을 바로잡는다면, 화산 폭발과 그 광범한 영향에 관한 생생한 묘사를 구약 성서에서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이다.
야훼는 그들이 주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
이는 모세와 유대민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출애굽기의 대목이다. 이 거대한 불과 구름의 기둥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3일 동안 이집트 전역에 짙은 어둠 이 덮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00km 떨어진 테라섬 위의 성층권까지 치솟은 화산재의 기둥은 지구 표면의 곡률을 감안하더라도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뚜렷하게 관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이동하는 화산재의 구름 때문에 3일 밤낮 짙은 어둠에 휩싸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 묘사된 기적들은 실제로 테라의 화산 폭발과 관계가 있을까? 테라의 출애굽기의 사건들을 관련시키려는 발상은 지지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나 또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고학적인 증거에 근거한 테라 화산 폭발의 추정연대는 대략 기원전 1470년이란 것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는데 출애굽기 시대와는 2세기의 차이가 난다. 테라와 출애굽기의 관련 가능성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왕조에 대한 연대추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지질학자들은 첨단 측정 기술을 이용하여 유사 이전의 사건의 연대를 매우 정확하게 추정하며, 19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연구들은 테라의 화산 폭발이 기원전 15세기가 아니라 17세기--아마도 기원전 1628년경으로 추정된다--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러한 결정적인 발견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노스 문명을 둘러싼 신비가 더욱 깊어지고 아무리 흥미를 유발한다 할지라도 테라와 출애굽기를 결부시킬 만한 증거가 미약해졌다.
오늘날 테라섬의 만 중앙에 드러난 두개의 갈색과 검은 색 암초는 테라가 죽어버린 섬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 섬들은 팔레아 카메니(과거에 불탄)와 네아 카메니(새로 불탄)란 이름이 붙여졌다. 기원전 197년에 일어난 화산 폭발에 관해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테라와 테라시아 사이의 중간쯤에, 나흘 동안 바다로부터 불꽃들이 치솟았고 바닷물이 끓었다. 그에 이어 섬이 하나 솟아나기 시작했는데 마치 그것은 대장간의 화로에서 달구어 낸 쇳덩이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팔레아 카메니가 탄생하였다.
1707년에 또 하나의 유사한 수중분화로 네아 카메니가 만들어졌는데, 1866년 또 다시 분화하여 원래의 크기보다 세 배나 커졌다.
카메니섬을 방문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 바와 같이 지표면을 조금만 긁어내도 태양열과는 무관한 지열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근래에 어느 전문가가 설명한 말이다.
지질학자 A.G. 갈라노포울로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군데군데 유황이 밝은 빛을 내며 타고 있는 검붉은 색의 화산 경석과 바위 더미의 사이에 미세한 화산재가 깔때기 모양으로 함몰한 자국들을 볼 수 있다. 그곳의 황량한 풍경을 자꾸 쳐다 볼수록 마치 악몽처럼 사람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성의 정상에는 가장 최근에 생긴 분화구가 약하게 부글거리며 유독한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 광경은 화산재와 쇳물찌꺼기를 닥치는 대로 들이붙고 휘저어 섞어 놓은 것처럼 보여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4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섬은 지난 200년 동안 산발적으로 일어난 비교적 작은 규모의 화산 폭발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잔잔한 파도가 평화롭게 밀려드는 만은, 3500년 전 바다가 이 고대에 존재했던 섬을 삼켜 버린 곳에 생긴 거대한 심연일 뿐이다. 햇빛에 빛나는 절벽들은 찢겨진 분화구의 남은 부분이다.
심연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대한 청동의 파수꾼 이 다시 한번 노호하며 이 유서 깊은 땅덩어리 위에 파괴의 재난을 뿌릴 것인가?
지각의 거대한 판들이 충돌하며 생기는 압력이 언젠가 다시 평화로운 이 포도주색의 바다에서 재앙을 일으킬 것인가? 현재로서 이런 의문에 답변할 길이 없다. 적어도 앞으로 얼마동안 테라는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테라의 화산 폭발
오늘날 전세계 500개 이상의 활화산 중 대부분은 거대한 대륙과 해저 밑에서 지각을 구성하는 거대한 지각판들의 접촉부분이 단층선을 따라 발견되었다. 주 단층선들 가운데 하나는 거대한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접하여 만들어졌으며 지중해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져 있다. 유사 이래 이 두 지각판은 서서히 상대편을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 압력이 가장 강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크레타섬과 테라섬
부근이다.
한쪽 지각판이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압력과 마찰력, 열 때문에 지각판 선단부분의 현무암이 녹게 된다.
화산 마그마는 수천 년 동안 지표면 밑 5km에서 160km에 있는 암석층 속의 공간인 용암실에 갇혀 있게 된다. 대류현상이 영향이 있을때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은 마그마가 밀려올라올 때 위를 덮은 퇴적암층을 녹여 부피가 증가하는 한편 열을 받아 팽창한 이산화규소와 수증기로 변한 물의 압력이 추가로 작용한다.
많는 경우 마그마에 가해지는 압력은 진동, 수증기, 용암류, 소규모의 분화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나 만일 화산의 주 분화구를 굳어진 마그마로 박힐 경우 거대한 시한폭탄이 되는데 이러한 천연적인 위력을 35세기전 지중해 주민들이 경험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한 괴질
전쟁과 괴질이 그리스 황금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다
그리스의 영광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이 영명한 군인정치가의 통치하에 정치와 예술, 그리고 철학에서 사상 유례 없이 폭발적인 창조력을 꽃피웠다 거의 2500년 후에도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위업--민주 정치,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진 건축상의 걸작. 피디아스의 조각,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의 희극, 소크라테스의 철학. 모든 분야에서 추구된 최고의 합리성과 능률 등--은 오늘날 현대 문명사회의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권력과 명예의 절정에 섰던 아테네와 대부분의 그리스내 동맹국들은 기원전 431년 사반세기 이상 계속되어 아테네 제국의 막을 내리게 한 동족상잔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민주적인 아테네와 해양 도시국가들이 결성한 동맹과 독재적인 스파르타가 육상국가들과 결성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충돌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어렵지 않게 승리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테네 인구의 4분의 l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명을 앗아가, 아테네 사회의 기반을 붕괴시킨 파괴적인 괴질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아테네는 육상전투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사실상 무적이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는 육상전을 피해 아티카 주변 지역을 적에게 내어주는 작전을 제시했다 그 당시의 전쟁은 주로 봄과 여름철에 치러졌기 때문에, 아티카 인근 지역 주민들은 매년 전쟁 기간 동안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테네 시내로 피난했다. 아테네의 방어용 성벽은 항구인 피라이우스까지 이르는 길이 8.4km 에 너비가 165m나 되는 장성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작전은 주민을 소개시킨 아티카에 들어온 펠로폰네소스군이 거리낌없이 약탈을 하는 동안 아테네측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일 아테네가 지구전을 벌이면서 해군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면 승리는 확실했을 것이다.
전쟁의 첫해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교전도 매우 적어 사상자도 극소수밖에는 없었다 그 해에 전쟁에서 쓰러진 아테네 시민들을 위해 페리클레스가 행한 추모연설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된 이 이정표적인 연설은 절정기에 있던 아테네 문명의 가치관과 이상을 훌륭히 요약한 것이었다.
기원전 430년 전투가 임박하자 아티카 주민들과 농부들은 다시 한 번 아테네 시내로 피난했다. 피난민들이 아테네시에 사는 친척들의 집에서 머무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곧 시내의 거의 모든 집은 만원이 되었다. 의탁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노천에서 오두막을 짓고, 대략 6주일 정도로 예상되는 전투기간의 피난생활 준비에 들어갔다.
아테네측의 예상대로,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무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군대는 즉시 아테네 주변 지역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펠로폰네소스군은 지난 해 전투 이후 아티카 주민들이 다시 세운 모든 건축물에 불을 질러 불타는 건물에서 치솟는 연기를 포위된 아테네에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한편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아테네 인근지역에서 약탈을 계속하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연안에 있는 스파르타의 강력한 동맹국인 에피다우루스시에 원정하여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항해를 시작하기도 전에--사실상 아티카에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도착한 지 불과 며칠 안되었을 때--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 괴질이 무서운 속도로 이집트, 리비아 페르시아를 거쳐 그리스에 침입했다 최초의 발병은 피라이우스에서 보고되었다. 괴질은 인구가 과밀했던 아테네시로 들불과 같이 삽시간에 번졌다. 여러 세기 동안 의학 보고서의 모범으로 간주돼 온 체험기에서,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이 괴질의 고통스러운 증상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아주 건강했던 사람들이 지독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환자의 눈은 붉게 충혈 되었으며, 입안에서는 목구멍과 혀에서 출혈이 일어났다. 또한 호흡은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워졌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증세는 재채기와 목이 쉬는 것이었다. 곧이어 가슴에 통증이 생기고 기침을 하게 된다. 다음에는 배가 아프고 심한 구토가 일어나 의학적으로 이름붙인 모든 종류의 체액을 고통스럽게 토해냈다. 이러한 모든 증세에 따르는 심한 고통을 참기란 매우 힘들었다. 마침내 많은 환자들은 헛구역질을 하며 몸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 피부에 열이 나지도 않았고 창백해지지도 않았다. 피부에 조그만 물집이 돋아나 곪으면서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그러나 속으로는 타는듯이 열이 나서, 환자들은 아주 얇은 천이 닿는 것도 견디지 못해 완전히 벌거벗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찬물 속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림 설명
스파르타와의 전쟁과 아테네의 괴질은 페리클레스 동치의 말기에 암운을 드리웠다. 위의 조각상은 독특한 투구를 쓴 이 위대한 아테네의 지도자의 모습이다. 오른쪽 그림은 적함이 아테네의 항구 피라디우스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했다. 괴질이 피라이우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은 전염 초기에는 스파르타 사람들이 이 항구 도시의 저수지에 독을 탄 것으로 의심했다.
많은 환자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커다란 물통 속에 뛰어들었다. 괴질의 초기 증세들 가운데는 발병한 지 일주일 동안 환자들이 겪는 불면증과 도저히 안정을 취할 수 없다는 절망감 이 포함된다.
투키디데스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대부분의 환자는 발병한 지 7, 8일 후에도 약간의 체력이 남아 있는데, 이때는 체내의 열로 인해 사망하는 시기이다. 8일이 지나도록 생존한 환자들은 심한 궤양과 걷잡을 수 없는 설사 의 후유증으로 허약해져 결국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다.
괴질 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면역이 생겼으나 많은 생존자들은 피부에 흉터가 남았다. 증세가 생식기와 손가락, 발가락에 나타난 환자들은 회복된 뒤에도 대부분 그 부위가 불구가 되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눈이 멀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친구를 알아볼 수 없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괴질에 대한 효과적인 의학적 치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환자들에게 유효했던 치료가 다른 환자에게는 증세를 악화시켰다.
본래 강한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라 해서 병에 대한 저항력이 허약한 사람들보다 큰 것도 아니었다. 괴질의 증세는 집중적인 치료와 적절한 영양 공급을 받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진행되었다. 환자를 치료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무더기로 죽었다(투키디데스는 양떼처럼 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괴질환자를 병문안하는 것을 점점 두려워하여 전가족 이 이웃의 외면 속 에 몰살했다.
아테네인들은 성벽을 둘러싼 적군과 내부의 괴질 사이에서 사면초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심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아티카에서 피난온 농부들과 주민들이었다. 거처할 가옥이 없었던 그들은 더운 계절 동안 환기가 안되는 오두막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치 파리와 같이 죽어갔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쌓였고 빈사지경의 중환자들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맸다. 갈증 때문에 샘물 주위에는 항상 환자들이 떼지어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새들과 개들까지 감염되었고, 오래지 않아 이러한 동물들조차 괴질 환자의 시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를 기습했으나 주된 공격 목표인 에피다우루스를 함락시키는데 실패한 페리클레스는 괴질이 창궐하는 아테네로 귀환했다.
펠로폰네소스 군대는 이미 아티카에서 철수한 뒤였다. 그해의 교전기간이 다른 해보다 길었다는 투키디데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파르타 동맹군이 철수한 이유로 아테네의 괴질 발생을 들고 있다.
그리스의 의학 기술
그리스 황금기의 가장 유명한 의사는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였다.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질병을 신의 징벌이란 통념을 부정하고, 질병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의 기능이상으로 간주했다 건강은 기본적인 체액들,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사이의 평형이 유지되는 상태라 믿었다. 병이란 이러한 체액들 사이의 균형이 깨진 상태다. 의사의 임무는 질병의 종류를 파악하고, 환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병세의 진행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식이요법, 운동이나 휴식, 그 리고 약물투여를 포함한 치료는 증세를 완화시키고 신체의 회복력을 강화시켜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은 일종의 기능이었다. 떠돌이 의사들이 장터에서 환자들을 끌려고 경쟁했다. 큰 마을에 상주하는 의사들은 치료실에 청동제 외과수술기구와 깨끗한 수건 및 붕대, 그리고 음료를 갖추어 놓았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에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치유의식이 신전에서 널리 행해졌다. 환자는 치료의 신인 에스큘라피우스 신전에 찾아가, 신이 꿈속에 나타나 치료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룻밤 이상을 보냈다.
그리스 의사들은 많은 병들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었고, 외과수술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체의 내부 작용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었으며, 질병의 전염방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들은 독기나 유독한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아테네의 괴질과 같은 전염병과 싸울 수 있는 어떠한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기윈전 430년 여름부터 428년 봄까지, 괴질이 아테데를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429년,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전염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해 여름 공격을 취소했다. 그러나 침략군은 병의 기세가 다소 약화된 것으로 판단된 이듬해 여름에 아티카를 다시 침공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소강상태를 보인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병은 427년 겨울에 맹렬한 기세로 재차 아테네를 강타했다. 그후 1년이 지나서야 괴질이 아테네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괴질로 사망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1만 5500명으로 추산되는 아테네의 보병 가운데서 중장비 보병 4400명이 괴질로 죽었다고 한다. 기병 1000명 가운데 300명이 또한 사망했다 만일 28--30 퍼센트에 해당하는 군대의 사망률을 31 만 5000명으로 추산되는 아티카 인구에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아테네와 그 주위에 살았던 9만명의 인구가 괴질로 죽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투키디데스는 괴질의 특성과 원인에 관하여 다른 저술가들 이 판단하도록 기록으로 남겨 놓으려 한다. 나 자신은 단지 괴질의 구체적인 증상을 상세히 묘사하여 후세에 다시 그 병이 발병했을 때, 식별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는 지식을 남기려 한다고 록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명확하고 상세한 증세 묘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아테네의 괴질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아테네의 괴질은 천연두, 선페스트, 성홍열, 홍역,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그리고 열곡열 등으로 추측되었지만, 이 중 어느 병과 결부시켜도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한편 현존하는 두 가지 이상의 병--예를 들면, 중독성 쇼크 증세가 수반되는 인플루엔자--이 거의 동시에 아테네에서 발생한 결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악성 괴질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시사되고 있다. 또한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괴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홍역과 같이 증세가 훨씬 약한 질병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괴질이 무엇이었든지, 투키디데스는 그 질병이 아테네 사회에 미친 참혹한 영향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아테네 시민들의 최초의 반응은 괴질의 원인을 인간적인 것에서 찾아 퇴치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이 피라이우스 저수지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아테네--적의 손이 우물들에 미칠 수 없는 도시--에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그러한 가정은 근거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적인 요인이 연루되지 않았다면 이는 필시 신의 저주일 것이다 사람들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이 역병의 돌발과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옛 신탁의 예언을 상기했다. 전쟁 전에, 스파르타 사람들이 델피 신전에서 아폴로의 신탁을 구하자, 신이 그들을 돕기로 약속했었다는 사실 또한 아테네에 알려졌다. 이것은 펠로폰네소스가 괴질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반면 아티카는 괴질로 황폐해진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발병 원인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전염병 퇴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명백해졌다.
시체가 삽시간에 첩첩이 쌓여 가고 문자 그대로 죽음의 공기가 감돌게 되자 도시 전체는 절망감에 휩싸였으며, 사람들은 종교나 법조차도 무시하게 되었다 고 투키디데스는 기록했다. 장례 의식은 무시되거나 서둘러 약식으로 치러졌다 화장터의 장작더미 위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던져졌고 신전 안에 시체가 그대로 방치됐는데 이것은 불과 몇 주일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이러한 전례가 없는 무법 상태 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방종을 일삼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성을 잃고 타락한 아테네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에게 등을 돌렸으며 심지어 그의 동의도 받지 않고 적과의 강화를 시도했다. 기원전 430년 여름 아테네 시민들에게 행한 탁월한 연설을 통해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단합시켜 자신의 정책과 아테네의 대의명분을 다시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감이 점점 높아가자 페리클레스는 군대의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되고 국가예산을 남용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소액의 벌금만을 물었을 뿐이다.) 노정치가는 429년에 권좌에 복귀했으나--아테네는 페리클레스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지도자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이때는 이미 그의 누이와 두 아들이 괴질로 사망했고, 그 자신도 괴질에 감염된 뒤였다. 페리클레스는 그해 가을에 죽었다 그의 사망으로 아테네는 부패와 정치적 혼란기로 접어들었고 급기야는
기원전 401년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페 리클레스의 죽음으로 아테네와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체 서구 문명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의 대화재
의문의 화재가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네로황제가 로마 시내의 좁은 거리와 도처에 산재한 빈민굴, 무계획적인 설계 등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겨 자신의 계획대로 도시를 다시 세워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서기 64년 7월 l9일 이른 아침. 네로황제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팔라티네 언덕 남쪽 전차 경주장인 서커스 막시무스 부근 상가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상점 안의 물건들이 가연성인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불길은 삽시간에 경기장을 거쳐 인구 밀집지역으로 번졌다.
로마시대의 저명한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나운 불길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처음에는 평지를 휩쓸다가 언덕으로 옮겨 붙더니 계속해서 저지대로 확산됐다. 꾸불꾸불한 로마의 거리에는 상점과 사원 촘촘히 붙은 주택들, 주로 목재로 지어져 불에 타기 쉬운 가옥들이 어지럽게 혼재돼 있었다
위용을 자랑했던 로마제국이 지옥의 불길에 휩싸이자 로마 시내는 금새 공포와 무질서에 빠져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타키투스는 당시의 공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이와 노인네들, 자기 먼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사람들, 이기심을 버리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들 그리고 도망자와 부랑자들까지 가세해 혼돈을 가증시켰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면 불길은 금방 이들을 향해 달려들어 앞을 가로막고 포위해 버렸다 겨우 이웃 동네로 피신을 해도 그곳까지 불길이 따라왔으며 멀리 떨어진 것으로 믿었던 지역도 이미 화재 지역 안에 들어 있었다.
졸지에 집을 잃어버린 수많은 시민들은 지하 공동묘지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타키투스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결국 더이상 피신할 길이 막혀 버린 이재민들은 시골길가로 몰려들거나 들판에 누워 버렸다. 당장 먹을 식량마저 모두 잃어버린 채 가까스로 피신한 사람들은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사상자를 구하지 못하고 혼자 달아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량배들이 횃불을 휘두르면서 시내를 활보하였고 소방대원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약탈자들은 이번 기회에 단단히 한몫 잡을 생각에 또는 소문에 의하면 황제의 명령에 따라 화재를 무방비 상태의 부유층 지역으로까지 확산시키려 했다.
로마에서 56km 떨어진 안티움의 호화 저택에 머무르고 네로황제가 시내로 황급히 돌아왔을 땐 새로 지은 궁전인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도 화염에 휩싸인 상태였다. 수많은 공공 건물들과 심지어 황제의 개인 정원까지도 난민들로 가득 찼다. 인근 마을에서 반입된 식량은 대폭 할인된 가격에 팔려 나갔다.
로마의 화재는 이런 식으로 6일간이나 계속됐다.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 있던 수많은 건물들을 모조리 태운 뒤에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첫번째 화재가 진화될 즈음 이번에는 카피톨리네 언덕의 북쪽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지역은 첫번째 화재 지역보다 인구밀도가 낮은 곳이어서 인명피해는 적었지만 신전과 공공 건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로마의 대화재는 9일 동안 도시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에야 완전히 진화됐다. 이 화재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의 14개 지역 중 4개 지역만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3개 지역이 완전히 파괴됐고 7개 지역은 시커멓게 그을린 폐허가 돼 버렸다. 당시 화재로 그리스 문화 유적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성시되던 기념물들이 상당수 소실됐다. 그 가운데는 로마제국 제2대 누마황제의 황궁과 로마의 수호신 상이 보관돼 있던 베스타 신전, 그리고 로마의 건국자 두사람 중 한 명인 로물루스가 직접 헌당한 주피터 신전 등이 들어 있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로마 대화재로 그 때까지 보존돼온 중요한 고대 기념물들이 모조리 소실됐다." 450년 전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약탈한 이래 그토록 가혹한 시련은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로황제는 파편 더미들을 치우고 약탈행위를 막기 위해 재난지역을 봉쇄한 뒤 주택 소유자와 거주자들도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또 비상 구호 식량을 싣고 온 선박들에겐 화재의 잔해들을 담아 도시 밖으로 운반하도록 했다.
로마를 재건하는 일은 엄청난 역사이거니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네로황제는 이 공사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그는 화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일련의 건축관련 법률들을 제정했다. 또 장차 들어설 신도시는 하나의 중심 계획에 입각해 우선 과거보다 넓은 도로들을 정연하게 건설하고 화재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기하학적 형태를 살려 수많은 공간을 확보하도록 설계했다. 아우구스투스황제 시절에 제정됐으나 오랫동안 무시돼 온 건물의 고도제한도 엄격히 적용키로 했다. 신축건물은 담벽의 공유가 금지돼 독립적으로 세워야 했으며 특정 높이 까진 내화성 석재의 사용을 의무화했다. 이와 함께 인구의 밀집을 막기 위해 신축될 주택들은 집안에 정원을 두고 주랑식 포치가 도로까지 나오게 만들도록 했다. 네로황제는 이 주랑식 포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넉넉히 지원했다. 포치를 세울 경우 화재시 건물 잔해가 도로로 떨어지더라도 이곳으로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시 곳곳에 공동 상수도를 만들고 물의 공급을 감독할 관리들을 임명했다.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새로 설계된 로마시의 경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렸다. 그늘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상당수 시민들은 옛 기념물들의 손실을 가슴 아파했다. 낭비벽이 심한 네로황제는 시내 곳곳에 승리 기념 아치를 세우고 베스타 신전과 원형 경기장 등 화재로 손실된 건축물들을 원래 규모보다 더 크게 개축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베드로성당 부근에 거대한 경기장을 새로 건립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새로 짓기 위해 가장 야심찬 건럽 사업을 추진했다. 황금과 상아, 각종 보석 등으로 풍부하게 장식해 '도무스 아우레아(황금의 집)' 로 명명된 이 황궁은 네로의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
황금의 집은 단순한 황궁이 아니라 수많은 포치로 연결된 별관이 이어져 있어 마치 로마시내 중심부에 들어선 작은 도시를 방불케 했다.
신전과 목욕탕, 정원, 숲, 동굴과 잔디밭, 분수 그리고 훗날 콜로세움이 들어선 거대한 인공호수 등이 무려 2O0 에이커의 광활한 구역 안에 자리 잡았다. 황금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엔 네로황제의 과대망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약 36m 높이의 금박을 입힌 네로 동상을 세워 로마시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화재 희생자들을 지원하고 도시를 재건하려는 네로의 주도면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번 화재에 어떤 식으로 든 책임이 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고 나돌았다 실제로 화재가 발생하던 날 밤에 이미 네로의 방화설이 나돌기 시작해 소문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졌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네로는 불을 지른 뒤 화재가 한창 절정에 오르자 매케나스탑에 올라 비극배우 의상을 걸치곤 트로이의 함락 이라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이 장면을 사설 무대 위에서 재연시켰으며 그 후 이에 관한 얘기는 수금을 들고 있는 네로에서 마침내는 바이올린을 켜는 네로로 비약된다.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황제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사실 여부는 아직도 입증되지 않고 있다.
로마시민들이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동안 네로황제는 처음엔 재앙을 신의 노여움 탓으로 돌리려 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달래야 한다며 일련의 종교의식과 신성한 연회를 베풀고 야간에 기도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래도 민심이 좀체로 수습되지 않자 네로는 로마의 소수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택했다. 네로황제가 기독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타키투스는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방화죄보다는 그들의 반사회적 성향 때문에 처벌을 받았으며 야생 짐승가죽을 뒤집어 쓰고 개들에 의해 사지를 찢기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했다. 고 쓰고 있다. 역사가들은 심지어 네로황제가 기독교도들을 밤에 정원을 밝히기 위한 횃불로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전설에 따르면 당시 박해의 희생자 중 한사람인 사도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 새로 지은 살기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했다.
만일 이같은 박해가 사실이었다면 네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처참하게 죽어간 기독교도들에게 동정을 느끼게 됐고 네로가 방화에 책임이 있다는 의심만 더욱 굳히게 됐기 때문이다.
대화재로 네로황제의 통치에 종말이 다가오다.
로마를 재건하는 데 소요된 엄청난 재원과 특히 황금의 집 을 짓는 데 든 막대한 비용은 로마시는 물론 전제국의 출혈을 초래 했으며 네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의 학정과 날로 늘어나는 살인 피해자수는 시민들의 인내를 한계로 몰고 갔다.
살해된 희생자 중에는 네로황제의 어머니를 비롯해 임신한 황후, 그의 옛 스승인 철학자 세네카 등도 있었다. 서기 68년 6월 원로원은 네로를 공적으로 선언하고 그를 마치 노예처럼 매질해 죽이도록 하는 굴욕적 선고를 내렸다. 궁정의 경비병들은 물론 신하들과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게 된 네로는 매를 맞고 죽는 대신 스스로 목을 베 숨을 끊고 말았다.
네로가 죽은 뒤 후임 황제들은 황금의 집 중 상당 부분을 일반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용도를 전환하고 그 나머지에 새로운 구조물들을 세웠다. 오늘날 남아 있는 네로황제의 궁정 유적은 훗날 지어진 건물들의 잔해 밑에 깔린 지하방들뿐이다.
네로의 거대한 동상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이들은 동상이 콜로세움 정면의 부지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이 거대한(colossal)동상에 근접해 있어서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동상의 실종은 로마 대화재를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다.
고대 로마의 화재 진화방법
로마공화정 시대엔 소방업무를 파밀리아 푸블리카(Familiar Publica)라는 노예들에게 맡겼다. 집정관의 감독을 받는 이 초창기 소방대는 물양동이 따위의 보잘것없는 장비를 갖추고 로마시의 출입문과 성벽에 배치됐다. 이 초기 소방대는 그후 재정적 이득이나 정치적 경력을 늘리려는 민간인들에 의해 대원들이 늘어났다.
서기 6년에 큰 화재가 있은 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효율성이 뒤떨어지는 이 체제를 자경단으로 대체했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전문 소방대인 셈이다. 자경단은 7개의 소부대로 편성돼 각기 로마의 14개 행정구역 중 2개씩을 담당했다. 각 소부대는 대략 1000명의 대원들로 구성됐으며 화재 발생시 진화 능력에 따라 임명됐다. 에스파르토 풀로 엮어서 타르 칠을 한 물양동이를 나르는 아쿠아리부대는 수원지와 화재현장 중간 지점에 배치됐다. 화재현장에선 시포나리부대가 피하 주사바늘 모양의 1.2m 길이 청동 손펌프인 시포스를 이용해 물을 끼얹어 불길을 죽였다. 그리고 운치나리는 갈고리 부대라는 뜻으로 대원들이 불타는 가옥의 지붕과 벽 등을 갈고리가 달린 창으로 헤쳐 불길을 죽였다. 당시 소방대원들이 사용했던 기타 장비로는 도끼와 사다리, 담요, 스펀지, 빗자루 세공 돗자리 또는 초기 형태의 화학 소화물질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포나리 부대는 오늘날 소방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2개의 실린더가 달린 동력 펌프를 사용했던 것 같다.
소방대원들은 이밖에 야간에 도시 정비 책임도 맡아 노예들의 탈주를 막고 공증 목욕탕에서의 도둑질을 예방했으며 소방 안전 규정을 집행하기도 했다. 자경단은 서기 64년의 로마 대화재를 효과적으로 진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략 500년간 존속됐다.
그림 설명
네로황제 시절의 이 로마지도는 당시 도시를 분할했던 14개의 행정구역을 나타내고 있다. 서기 64년의 화재는 이중 3개의 구역을 전소시켰고 7개 구역에 피해를 주었다. 화재는 제11구역에서 처음 발생해 제10구역과 제3구역을 합께 전소시켰다. 2단계 화재는 카피톨리네언덕 북쪽에서 발화됐다. 피해를 면한 곳은 제1, 5, 6, 14구역뿐이었다.
베수비오화산의 분노
장엄한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불타다
우리에게 대플리니로 더 잘 알려진 로마의 박물학자 겸 저술가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인생 말년을 편안하게 섭생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적어도 하루 한시간은 일광욕을 하고 재빨리 찬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풍족한 점심식사를 즐겼다. 그가 어느 날 오후 독서와 저술작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달려왔다. 여동생은 화창한 여름날 치곤 이상스럽게도 거대한 기형의 구름이 북동쪽 하늘을 덮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구름이 점점 커지면서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한번 눈여겨 보라는 것이었다.
이날은 서기 79년 8월 24일이었다. 플리니는 티투스황제로부터 나폴리만 어귀의 미세눔에 주둔한 로마함대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주일 전 이곳에 도착했다. 황제의 배려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취해졌다. 당시 플리니는 56세로 너무 뚱뚱한데다 최근 들어선 천식과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좀 쉬고 싶던 차였다.
서기 1세기에 로마는 플리니를 자연역사가이자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했다. 해군 장교였던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광대한 제국에 걸쳐 로마의 지배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미세눔은 전략적으론 중요했지만 비교적 평화스런 곳이었다. 검푸른 만을 32km쯤 가로지르면 시력이 좋은 사람은 로마인들의 여름 휴양지인 헤르쿨라네움을 볼 수 있었다. 그 남동쪽으로 14km쯤엔 번영을 누리던 농업과 상업 중심지인 폼페이가 위치했다.
플리니는 책을 덮고 뭔가 심상찮은 징조로 보이는 이상한 구름을 관찰하기 위해 인근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가 당시 목격했던 광경은 그의 조카 소플리니에 의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구름이 일고 있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느 산에서 구름이 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록 나중에 베수비오산 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구름은 마치 나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우산처럼 생긴 소나무를 연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구름은 거대한 나무기둥처럼 하늘로 뻗었으며 가지를 펴듯 사방으로 펼쳐졌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시민은 베수비오산이 휴화산이라는 사실 조차 터무니없는 소리로 생각한 듯하다. 태고적부터 오랜 세월 동안 베수비오산은 찬란하게 아름답고 보기 드물게 비옥한 주변의 풍경 위에 자비로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산 언덕에 즐비한 올리브밭과 과수원에선 사과와 무화과, 배와 체리 등이 풍부하게 생산됐다. 곡물생산도 풍족했다. 특히 베수비오 과수원에서 거둔 포도는 알이 굵기로 유명했으며 포도주는 향이 짙었다
이 지역은 또한 밝은 햇살과 서늘한 바다 바람이 섞여 하절기 휴가객들은 물론 일년 내내 거주하는 부유층들을 유혹하였다. 이들은 당시 로마시민의 화젯거리였던 호화스런 별장을 이곳에 짓고 살았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는 1만 6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을 비롯해 비아 델 포로의 거대한 대중 목욕탕, 화려한 사창가, 수십 개의 술집 등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위락시설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트라키안 노예가 주도했던 반란에 관한 얘기를 알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70명의 동료들과 탈출해 이곳 베수비오산 언덕에 피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로마군대가 스파르타쿠스 일당을 포위했다고 생각할 즈음 스파르타쿠스는 추종자들에게 가파른 산기슭의 포도덩굴 속에 몸을 숨기도록 하여 체포되는 것을 면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후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약 2년간 이탈리아 남부 해안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베수비오화산의 경고는 예시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였다.
베수비오화산에서 불과 32km쯤 떨어진 곳에 연기를 내뿜는 동굴과 플레그레안 평야의 간헐천이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저승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겨졌다. 또 그 부근의 바이애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로부터 뜨거운 광천이 분출됐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를 비롯한 고대 역사 기록가들은 베수비오산이 뚜렷한 화산 형태를 보이는 데 주목하고 그 기원에 대해 궁금증을 표시했다.
그러나 누구도 숲이 우거진 1830m의 푸른 산과 주변 평야의 정적이 깨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기 62년(다른 계산법으로는 63년) 2월5일 격렬한 화산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이 잿더미로 변했을 때도 두 도시를 재건하는 데만 관심이 집중됐다. 그렇지만 로마의 노동력 대부분이 64년의 대화재 복구사업에 동원됐기 때문에 두 도시의 재건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해 공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은 서서히 폐허에서 벗어나 새로운 위용을 되찾기 시작했다.
지진학이니 화산학이니 하는 학문은 그후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나 등장했다. 따라서 당시로선 이 지역 전체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이 만나는 지각의 거대한 단층대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화강암과 현무 암층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지표면 위로 엄청난 양의 용암을 분출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해 8월 24일 정오쯤 돼서야 용암은 천둥소리 같은 굉음을 내며 분출하기 시작하여 베수비오화산을 호두처럼 갈라놓더니 불기둥과 화산재, 돌 등을 20km 떨어진 지중해 상공으로까지 내뿜었다.
미세눔의 전망이 좋은 위치에서 화산폭발을 목격했던 플리니는 뭔가 심상치 않은 자연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그만 배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당시 17살이었던 조카를 찾았다. 과연 조카가 이 희귀한 자연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그와 동행하려 했을까?
이에 관해 조카인 소플리니는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아저씨가 직접 내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나는 공부나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플리니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친구의 아내인 렉티나가 보낸 전갈이 도착했다. 그녀는 바다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험한 산기슭 저택에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조카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저씨는 전갈을 받고 새로운 각도에서 탐험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과학자의 견지에서 생각했던 일을 이젠 영웅처럼 실행하려 했던 것이죠. 플리니는 배를 모아 선단으로 만든 뒤 솟아오르는 구름이 재와 불덩이를 뿌리는 광경을 보며 나폴리만을 가로질러 나갔다. 때마침 불어온 동남풍에 실린 화산의 분출물은 먼저 폼페이 시로 날아왔다 처음엔 화산재와 경석, 가늘게 쪼개진 검은 돌조각 등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수천 미터 상공 지상으로 떨어지는 이 파편들에 맞아 많은 폼페이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게다가 날이 저물면서 계속 쌓인 경석더미가 시내 도처의 건물 지붕을 무너뜨려 피해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미세눔에서 어머니와 함께 이를 지켜보던 소플리니는 온종일 공부와 식사, 수면으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최근 며칠 동안 지각 진동을 느껴왔기 때문에 캄파니아에선 늘상 있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진동이 더욱 격렬해져 지구가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뒤집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낸 모자는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느끼게 됐고 마침내 길가로 나가 다른 시민들과 함께 북쪽으로 가는 피난행렬에 끼었다. 땅은 더욱 격렬하게 흔들렸고 거대한 해일을 예고라도 하듯 바닷물이 밀려나가자 지각의 진동음이 점차 커졌다.
저멀리 반대 방향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으며 시커먼 구름이 무섭게 솟구쳐 올랐고 번개보다 큰 불길은 뱀의 혀처럼 갈라 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구름이 내려와 바다를 뒤덮어 버렸습니다. 구름은 이미 카프레를 완전히 뒤덮은 상태였고 미세눔만을 가려 버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불꺼진 방처럼 짙은 어둠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소플리니가 화산폭발을 묘사한 말이다.
들리는 것은 온통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어린이들의 울부짖음, 남자들의 고함소리뿐이었다."
한편 대플리니 일행이 이날 오후 폼페이 근방 해안가에 접근할 때쯤 새로운 장애가 등장했다. 조카 소플리니가 생존자들로부터 아저씨에 관해 들은 얘기는 이러했다. 화산재가 배 위로 떨어졌습니다. 일행이 다가갈수록 화산재는 더욱 많아지고 뜨거워졌으며 불기둥이 쏟아내는 시커먼 경석과 돌부스러기들이 배 위로 떨어졌습니다. 갑자기 바다의 수심이 얕아졌으며 산에서 흘러내린 자갈더미가 해안을 뒤덮어 상륙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선장은 돌아가자고 했지만 플리니는 망설였죠. 그때 플리니는 버질의 시를 인용해 용기 있는 자만이 행운을 얻는다! 고 외치며 선수를 스타비에 해변 마을이 있는 남쪽으로 돌렸다. 그곳에서 그는 옛친구인 폼포니아누스를 만났다. 그때는 이미 공포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플리니는 선원들과 친구들과 계속 도착하는 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가하게 목욕을 하고 나서 배짱좋게 식사도 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공포는 더 심해졌다. 산 정상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았고 지축을 흔드는 굉음은 그치지 않았으며 플리니가 침대에서 쉬는 동안에도 화산재는 계속 떨어졌다.
그가 알아채기 전에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고 폼 포니아누스는 제발 좀 일어나라며 그를 잡아 흔들었다. 집의 벽은 계속되는 격렬한 진동에 흔들렸고 마치 기초가 흔들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집안은 심하게 흔들리고 떨렸으며 밖으로 나가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화산재와 돌에 맞고 연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마침내 나의 아저씨는 좀더 합리적인 이유에서, 그의 일행은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드디어 저택을 빠져나가기로 결정 했다 고 소플리니는 비꼬듯이 술회했다.
그들은 화가들의 지옥 그림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목격했다. 날이 밝은 지 오래였지만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거친 파도는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을 장난감처럼 뒤흔들었다. 번개가 하늘을 가로 지르고 산꼭대기에선 불길이 솟았으며 유황 냄새가 대기중에 가득했다.
그 다음 상황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조카의 설명에 따르면 대플리니는 물을 달라고 외치다가 그대로 쓰러져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생각엔 짙은 가스 때문에 아저씨의 호흡이 곤란해졌고 본래 가늘고 약한 기도가 막혀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몸이 무겁고 나이가 많았던 플리니가 과로한 탓에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친구가 나중에 찾아 왔을 때 플리니는 상처 하나 없이 진흙에 덮인 채 숨져 있었다. 그 모습은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잠자는 사람과 같았다
폼페이 시민들이 순식간에 몰사한 것도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25일 아침 폼페이는 지질학자들이 말하는 지각 대변동에 빠져 들었다. 고열의 압축 증기와 혼합된 경석 화산 잿더미가 시속 100km의 속도로 분출됐다. 전날 오후 대피했다가 최악의 상황이 끝난 것으로 판단해 돌아온 많은 주민들은 순식간에 화산 분출물에 뒤덮였다. 또 집안에서 귀중품을 챙기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시장이나 공공 건물에 나와 있던 사람들, 혹은 필사적으로 대피하기 위해 길가로 다시 뛰쳐 나온 사람들도 모조리 화산 분출물에 뒤덮어 버렸다 도피처도 탈출구도 없었다. 화산 분출물은 닥치는 대로 모두 질식시키고 뒤덮어 버렸다
무참하게 인명을 앗아간 화산재와 경석 그리고 수증기가 혼합돼 뜻밖의 효과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결과적으론 역사에 이로운 효과도 있었다. 혼합물이 마른 뒤 그 속에 싸인 시체의 형상이 완전하게 보존됐던 것이다. 수십 세기의 세월이 흘러 부패한 뒤에도 그 형체의 윤곽은 그대로 남았다. 1860년대 최초의 폼페이 발굴학자였던 쥬세피 피오렐리는 시체를 감싼 흙덩어리에 석고를 부어 희생자들의 죽기 직전 모습을 재현했다. 그 모습은 얼굴 표정에서부터 옷의 주름에 이르기까지 생생했다.
1927년부터 61년까지 캄파니아 유적발굴을 지휘했던 아메데 오 마이우리는 화산재를 피해 달아나려다 몰사한 13명의 폼페이 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켰다. 석고 주물에서 나타난 그들의 옷과 소지품, 위치, 기타 증거들을 토대로 그는 이들이 두 농가와 한 상인 가족들로 모두 베수비오화산에서 가장 먼 누치안 게이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달아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식구들을 서로 찾고 아우성을 치던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두 농가 중 한 가족 식구들이 앞장서서 피난길을 인도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마이우리는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먼저 한 하인이 서둘러 챙긴 식량자루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우리는 채소밭(고랑의 형태로 봐선 양배추밭인 것 같다)담장 부근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자루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짙은 어둠과 화산 폭발로 생긴 세찬 바람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두번째로 농부 가정의 4살박이와 5살박이 두명이 손을 마주 잡은 채 발견됐다. 마지막으로 어린이들의 부모가 발견됐는데 농부인 남편이 공포에 떠는 아내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질식 당시의 고통을 숨기려는 듯 모두 얼굴을 땅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소년은 반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숨을 거뒀는데 그들의 표정은 마치 잠시 눈물을 흘리다 체념해 잠에 빠져 버린 듯 평화로워 보였다.
주조물이 하나 둘씩 완성되면서 의상은 물론 헤어 스타일과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까지 재현됐다. 그러나 마이우리로선 상인의 모습을 재생시키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는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팔을 땅에 짚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목까지 차오른 죽음의 화산재를 물리치고 가족들을 구출하기 위해 등을 뒤로 굽힌 채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등을 뒤로 굽히고 있는 그의 모습은 석고로 형상화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살과 피를 가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마이우리에 따르면 폼페이인들은 불에 타 숨진 것이 아니라 질식돼 몰사했다 도시의 생명을 앗아간 용암과 화산잿더미는 고도로 노련한 박물관장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도시를 보존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폐허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울 만큼 잘 보존된 박물관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베수비오화산은 나쁜 것들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화산 정상에서 겨우 8km밖에 안 떨어진 헤르쿨라네움은 첫날의 공포를 모면 할 수 있었다. 폭발과 진동, 소음으로 정신이 몽롱해진 상황에서 폼페이에 불어닥친 바람은 인구밀집 지역인 헤르쿨라네움이 최악의 화산재에 덮이는 비극을 막아주었다. 8월 24일 폼페이엔 경석과 연기를 내뿜는 파편이 3.6m나 쌓였지만 헤르쿨라네움엔 2()Cm 정도만 쌓였다.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이웃 폼페이 주민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정이 지나 소플리니가 어머니와 함께 미세눔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순간, 그리고 스타비에 마을에서 플리니아저씨가 위대한 일을 해냈을 무렵 베수비오화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화산은 불과 가스 그리고 각종 잔해들을 거의 12시간 동안 대기로 뿜어대면서 처음의 두꺼운 구름층을 다시 형성했다. 고열의 파편들이 쌓여 포화상태에 이른 화산이 마침내 저절로 무너져 내렸고 뜨거운 화산 분출물이 폭포처럼 헤르쿨라네움과 베수비오화산 주위로 쏟아져 내렸다. 소플리니는 이 가공할 자연재앙을 구름이 땅위로 내려앉고 바다를 덮어 버렸다 고 표현했다. 최초의 충격은 지각의 대변동을 일으켜 삽시간에 도시 곳곳에서 엄청나게 뜨거운 공기와 화산 잔해들의 폭발현상을 초래했다. 그 뒤로 죽음의 화산물질인 재와 증기, 돌덩어리 등이 섞인 고온의 토사가 흘러내렸다. 예고도 없었으며 집 밖으로 피신 해야할지 여부를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물론 간단한 귀중품이나 짐을 챙길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화산이 폭발하고 불과 5분 만에 일어난 이 재앙은 기둥을 순식간에 뽑아 성냥개비처럼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암벽을 박살내고 섭씨 400도에 이르는 엄청난 고열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녹여 버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피신처를 찾아 허둥거리며 뛰어다녔다.
학자들은 이 휴양지의 주민 4500여명 증 대부분이 하루 전날 재앙을 피해 대피한 것으로 오랫동안 추정해왔다. 그러나 최근 완벽하게 보존된 유골들이 발굴됨으로써 당시에 전혀 다른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음을 알게 해준다. 수십명 아니 수백명이 교외 공증 목욕탕의 대형 아치 밑에 있던 헤르쿨라네움 정박장으로 대피했다. 이 견고한 건물은 겨울철에 소형 선박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파도를 막아줄 피신처는 될 수 없었다. 대형 아치 밑에 웅크리고 앉아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이들의 공포는 형언하기 어려웠다.
두번째 폭발은 거대한 주먹처럼, 무력한 도시를 강타했다.
한시간쯤 뒤 또 한 차례의 뜨거운 구름이 빠른 속도로 산기슭을 쓸고 내려왔다. 이 화산 구름은 근처에 있는 집의 테라스 위에 서 있던 여인을 정박장 위 l8m 상공으로 날려 버렸으며, 군인 한 명은 차고 있던 칼집에 얼굴을 얻어맞았고, 배 한 척과 선원을 마치 인형처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1980년대초부터 시작된 발굴작업에선 마지막까지 공포에 질린 채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아냈다. 손가락에 아직도 광채가 나는 보석 반지를 끼고 있어 부유층이 틀림없어 보이는 한 여인은 거대한 아치 밑에 쓰러져 있었다. 부근 길모퉁이에는 7명의 성인과 4명의 어린이 아기 한 명이 서로 뒤엉킨 채 뜨겁고 두꺼웠던 진흙사태 속에 묻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이들이 서로 부등켜 안고 최후까지 재난을 피하려고 발버둥이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걸작 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폼페이를 경이롭게 보존된 박물관 이라 부른다면 헤르쿨라네움은 역사의 순간을 더욱 놀랍고 완전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곳에는 대재앙으로 중단된 주민들의 일상생활 현장이 남아 있다. 빵집 솥 안에 손도 안댄 채 들어 있는 빵 덩어리에서부터 과일, 달걀, 신선해 보이는 호두 바구니, 먹기 직전에 접시에 담아 놓은 야채 등이 보존돼 있다. 포장을 절반 밖에 풀지 않은 유리제품 상자 절반 가량 만들다 만 나무옷장과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목수의 연장 등이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몸이 아픈 소년이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엔 먹지 않은 닭고기 요리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일어난 대재앙의 순간에 동작을 멈춘 시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모두 여섯 차례의 진동과 용암분출이 도시를 강타했으며 용암이 굳어지면서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흔적을 남겼다. 최초의 화산활동이 시작되고 18시간이 지나서야 기나긴 시련이 멈췄다. 어둠을 뚫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참혹한 파괴의 현장이 드러났다. 헤르쿨라네움은 18m 두께의 두꺼운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 폼페이와 마찬가지로 헤르쿨라네움도 순식간에 화산재에 덮여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존재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베수비오화산은 공포의 그날 이후로도 무려 70여 차례나 폭발했으며 가장 가깝게는 지난 1944년에 또 한 차례 화산폭발이 있었다. 지금은 분화구의 바닥이 완전히 막혀 버려 가느다란 연기조차 새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이 평온한 모습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화산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의 경고대로, 서기 79년의 대재앙을 촉발했던 엄청난 압력이 지금도 더 깊은 지하 마그마층에서 형성되고 있을지 모르며 베수비오화산의 우렁찬 폭발음이 나폴리만을 진동시킬 날이 다시 올 수도 있는 것이다.
헤르쿨라네움의 비극
한 발굴 지역에서 도랑을 파던 시의 작업 반원들이 땅 속에 묻힌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을 발견했다. 1980년 2월의 일이다. 이 발견은 먼 옛날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하던 날 헤르쿨라네움에 발생한 비극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시의 발굴작업은 1709년 우물을 파던 인부들이 땅 속에 묻혀있던 헤르쿨라네움의 원형경기장을 처음 발견한 이래 단속적으로 추진됐다. 경석과 화산재로 덮여 있어서 삽으로 파헤칠 수 있는 폼페이와는 달리 헤르쿨라네움은 약 20m 지하에 단단한 화산물질에 덮여 있어 드릴로 어렵게 파거나 끌로 쪼아내야만 했다. 폼페이와 마찬가지로 헤르쿨라네움도 초기엔 주로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 터널을 뚫고 폐허 속으로 들어가 가구와 조상 보석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파내 갔다.
200여년간 발굴이 계속된 뒤에도 혜르쿨라네움에선 불과 10구의 유해만 발견되었다. 그래서 당시 3--4m 두께의 화산재와 경석이 폼페이를 덮어버릴 때 대부분의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은 대피할 층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추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추정은 1980년 작업반원들이 보석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는 고대 로마 여인의 유골을 발견하기 전까지 설득력을 유지했다. 그후 추가 발굴작업에서 새로운 유골들이 계속 발견됐다. 그럴 즈음 고고학자들이 작업에 나섰고 이들은 작업을 마칠 때까지 수백구의 유골들을 찾아냈다. 그들이 발굴해낸 유골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 해변 선착장이었던 건물내 5개의 큰 방 안팎에 몰려 있었다.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은 그동안의 지배적 추정대로 쉽게 탈출한 게 아니라 끔찍한 돌발 사태로 인해 대피길이 막혀 버렸다는 결론이 가능해졌다.
그떻다면 그들의 피난길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일까? 인류학자들이 유골을 정밀분석한 결과 1900년간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의 건강과 직업, 사회적 지위 등 귀중한 단서들 외에도 최후의 순간에 벌어진 상황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찾아냈다.
가령 첫번째 방에서 발견된 한 젊은 여인은 아기를 팔에 안고 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엔 모자 사이 같았지만 여인의 뼈마디와 다른 특징들을 검토한 결과 그녀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미혼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값비싼 옷을 입히고 잘 먹여 기른 아기의 보모로서 용암과 화산 가스가 덮치자 아기를 보호하려 했던 것 같다. 부유층과 마찬가지로 썩지 않은 그녀의 치아는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이 풍요롭게 살았으면서도 단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헤르쿨라네움의 발굴품은 규모와 접근성에 있어서 폼페이의 것에 비견될 수 없을지 모른다. 과거의 많은 건물들이 오늘날의 현대적 도시인 에르콜라노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 파고 들어갈 수 없어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은 온갖 상상만을 유발할 뿐이다. 18세기 중엽에 발견된 파피리의 웅장한 저택에는 방대한 고대 문헌들을 보관했던 서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 발굴 당시 약 1800권의 두루마리 책자가 발견됐지만 아직 발굴하지 못한 다른 방에는 귀중한 그리스 고전문학 작품들이 상당수 보관돼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헤르쿨라네움에서 발생한 희생자는 총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발굴을 기다리는 다른 매몰 유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80년대초의 발굴품들은 이처럼 많은 궁금증을 던져 주었으며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면밀히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진
거대한 파도가 지중해 연안의 육지로 밀려들다
서기 365년 7월 21일 이른 아침 강력한 지진이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뒤흔들었다. 해상에서 발생한 지진이 그렇듯이 인명과 재산에 미치는 피해는 지진 자체보다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쓰나미현상으로 증폭된다. 당대 교회의 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성제롬에 따르면 지진에 이어 일어난 홍수가 워낙 엄청나서 마치 하느님이 제2의 홍수를 내리려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천지 만물이 원래의 혼란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은 시칠리와 오늘날 구유고 연방의 일부분인 달마티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리스의 해안 도시 에피다우르스의 주민들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놀라 당시 그곳에 살던 신망 높은 수도승인 성힐라리온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고 한다. 이 노수도승은 마을 주민들의 안내로 해안가로 갔다. 거기서 그는 모래사장에 세 번 십자가를 긋고 바다를 향해 두팔을 벌렸다. 그랬더니 신비롭게도 밀려오던 파도가 멈추고 기세가 꺾이더니 이윽고 바다 쪽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지중해 건너에 있는 이집트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겐 그나마 그러한 행운도 없었다. 나일강 삼각주 서쪽 끝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는 재앙을 정면에서 받아들여야만 했다.
넓은 항구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유명한 등대를 갖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는 오랫동안 그리스--로마세계의 상업, 문화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대제가 세운 이 도시는 창건 직후부터 당대의 일류 학자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기원전 300년경 이곳에서 유클리드의 그 유명한 기하학 명제가 완성됐으며 에라토스테네스는 처음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밖에도 클레오파트라의 유혹과 음모가 펼쳐졌던 곳으로 결국 기원전 30년 그녀의 자살과 로마의 이집트 정복이 이어진 역사의 무대 이기도 하다.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어갔지만 그래도 기독교시대 초기의 100년간은 지적인 우위를 대부분 유지했다. 서기 4세기 중반 무렵,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이와 함께 이단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운명적인 7월 어느 날 아침,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우화에도 없고 그렇다고 믿을 만한 역사에도 없는 가공할 현상 에 직면하게 됐다고 당대의 역사가 아미아누스 마르셀리누스는 기술하고 있다. 날이 새고 잠시 후 우렁찬 천둥과 번개가 반복되더니 단단한 땅덩어리가 온통 흔들리고 떨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지중해의 바닷물이 해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한 전조였다. 물이 빠지자 각종 바다생물들이 진흙 속에 박힌 채로 노출됐고 조물주와 자연이 바닷속 깊이 감추었던 광대한 산과 계곡이 처음으로 햇빛을 쬐게 됐다.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은 이제 끝났으리라 생각하고 너도나도 얕은 바다로 뛰어들어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고기를 손으로 주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해수면의 급격한 하강에 이어 곧 무서운 파도가 밀어닥쳐 엄청난 힘으로 도시를 격렬하게 파괴했다. 아미아누스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밀려나갔던 파도가 거세게 다시 일어나 섬들과 육지의 넓은 해안을 강타하고 수많은 건물들을 무너뜨렸다. 밀려갔던 바닷물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되돌아와 수천명의 주민들이 익사했다. 고기를 잡으러 갔던 사람들도 물론 죽음을 면치 못했다. 파도의 힘은 커다란 선박들을 들어올렸다가 건물 위에 내려놓거나 멀리 3--4km 밖에다 내동댕이칠 정도로 엄청났다. 바닷물이 퇴조한 뒤 수많은 선박들이 파손된 채로 발견됐고 조난 당한 희생자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녔다. 이 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로 모두 5만여명의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이 목숨을 읽은 것으로 추산됐다.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흔히 신의 의지 탓으로 돌려지고 재난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 간주됐던 시대에 이 지진은 주민들을 경악시켰을 뿐 아니라 부패해가는 로마제국 전체에 공포심을 확산시켰다. 주민들은 근심에 사로잡혀 과거의 재앙들을 떠올렸으며 이번 지진은 최악의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도시생활 자체는 그 견고한 등대와 함께 지진을 견뎌냈으며,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356년에 발생한 이 지진과 수해를 그후 오랫동안 해마다 기렸다. 15세기의 법률가이며 역사가인 소조멘에 따르면 매년 거행되는 재앙 기일행사 때마다 알렉산드리아시민들은 도시 전체에 밝은 등을 달고 신에게 감사드렸으며 도시의 건재함을 경건하고 밝은 마음으로 축복했다고 한다.
안티오크에 일어난 죽음의 지진
자연의 분노가 찬란한 고대 도시를 파괴하다
서기 526년 5월 29일, 거대한 도시 안티오크는 평소보다 훨씬 생동하는 활력에 넘치고 있었다. 다음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이었기 때문에 제전을 참관하기 위해 수만명의 외지인들이 이 도시를 찾아왔다. 이때 안티오크를 방문하는 것은 정말 멋진 여행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시리아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에서 32km쯤 거슬러 올라가 오론테스강에 자리잡고 있는 안티오크는 유럽과 전체 동방지역을 연계하는 무역로를 통제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이때까지 거의 500여년간 안티오크는 도시 생활의 중심지로 번성해왔다. 처음에는 셀레우코스왕조의 수도였다가 나중에는 로마제국내에 있던 시리아의 수도로, 그러다가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뒤에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상업 중심지로 활짝 꽃을 피웠다. 6세기의 안티오크는 권세와 위엄을 자랑하는 각종 도시 장식들로 가득했다. 대리석 열주와 로마식으로 넓게 포장된 도로, 화려한 공중 목욕탕, 극장, 원형 경기장, 시장, 교회와 각종 기념물 그리고 기름을 태워 빛을 내는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안티오크는 기독교의 진정한 요람으로 가장 중요한 초기 교회공동체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교도들을 상대로 자신의 포교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봉자들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따라서 오리엔트의 왕관으로 불렸던 안티오크에 이처럼 예수 승천일을 맞아 이역만리에서부터 많은 신도들이 몰려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해가 질 무렵 사람들은 대부분 식사를 하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으며 이들의 마음은 다가올 승천일을 기다리느라 몹시 설레었다. 지진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시를 강타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저녁 6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일어난 지진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재앙이어서 사람들은 미처 대피할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었다. 모든 도시건물들이 거의 일시에 함몰했고 건물 벽과 천장이 사람들의 단말마같은 비명을 삼키며 무너져 내렸다. 최악의 시점에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예수 승천일을 맞아 수많은 내방객들이 도시에 운집한 것도 그러려니와 이들은 대부분 식사를 하기 위해 집안에 들어가 있던 상황에서 지진이 발생해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처음 몇분간 굉음과 함께 지축을 흔들던 지진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은 넋이 빠진 생존자들이 말을 잃은 채 불안에 떨고 있던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침묵과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진의 여파인 해일이 고통과 파괴를 더욱 증폭시켰던 것이다. 그 다음엔 마치 고통을 마무리하려는 듯 폐허화된 도시가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이 하도 맹렬하고 급속하게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번져 생존자들은 하늘에서 비 대신 불이 떨어지고 있다 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불길이 대피로를 막아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숨졌다. 그러나 여기가 솟아나는 잔해더미에 깔려 질식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고 번개처럼 타올랐다 고 당시 재난을 피해 대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인 존 말라라스는 훗날 회고했다. 마치 불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태워 죽이라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맹렬하게 번져 대지의 흙을 제외하곤 도시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더욱이 가까스로 지진과 지진의 여파인 해일을 견뎌낸 건물들도 대부분 화재로 인해 전소되거나 대파됐다. 존 말라라스는 단 하나의 건물이나 주택도 재앙을 모면하지 못했으며 피해를 입지 않은 교회나 수도원 그밖의 성소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고 상황을 기술했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안티오크의 번영을 상징하던 황금 돔의 대교회당이 맞은 운명이었다. 대교회당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200년전에 직접 세운 것으로 아름다운 자태로 정평이 난 건축물이었다. 말라라스는 대교회당의 운명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의 분노가 모든 것을 태워 버린 뒤에도 대교회당은 5일간을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길에 휩싸이더니 땅 위로 무너져 내렸다.
자연이 준 재앙은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더욱 가중됐다.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25만--30만명이 즉사하거나 굶어 죽었고 잡석더미에 깔려 피를 흘리다 불에 타 죽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생존자들이 재앙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강도들이 이들을 덮쳐 귀중품을 탈취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더 극악한 범죄자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귀중품을 닥치는 대로 훔쳤고 시체에서 반지와 보석 등 귀금속을 보이는 대로 빼냈다. 그중에서도 토머스라는 관리의 도적질이 가장 심했다. 그는 노예들을 시켜 나흘간 난민들의 금품을 탈취했다. 그러나 그도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그가 빼앗았던 금품들은 곧 주민들에게 분배됐다.
토머스 일당의 죽음은 신이 내린 응징의 본보기처럼 널리 인식됐다. 주민들은 슬픔 속에서도 초자연적인 신의 가호를 목격할 수 있었다.
말라라스에 의하면 잡석더미에 깔린 임신부가 21일 만에 무사히 구출됐으며 많은 여성들이 폐허 속에서 아기를 분만한 뒤 며칠 후 아기와 상처 하나 없이 구조됐다. 그밖에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기한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으며 오직 신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하고 고무적인 것은 지진 발생 사흘 뒤에 기력이 빠진 생존자들이 하늘에 나타난 성스런 십자가상을 보았다는 얘기였다. 목격자들은 신의 현시가 한시간 이상 계속되는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안티오크의 주민들이 용감하고 굳건하게 생활 터전을 다시 일구는 동안 외부세계는 경탄 속에 사태를 주시할 뿐이었다. 화려한 도시와 훌륭한 기후, 아름다운 교회들을 과거에 보고 훗날 다시 찾은 이방인들은 이 아름다운 교회등을 과거에 보고 훗날 다시 찾은 이방인들은 이 아름다운 휴양지와 평화로운 항구가 그토록 페허화한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라라스는 전하고 있다.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의도로 보았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안티오크의 파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지진은 자연활동의 현상이 아니라 불길한 징조였던 것이다. 신에 의해 창조된 땅에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지하에서 굉음이 나고 돌발사태가 일어나며 땅이 진동하는 등의 요란을 불길하게 여겼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518년 콘스탄티노플에 동로마제국을 건설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그같은 자연재해는 반복해 일어났다. 그러나 가장 극심했던 상황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유독 이 도시가 폐허가 된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상업 및 예술의 중심지였던 코린트가 완전히 폐허화되었다거나 똑같은 운명이 아시아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내려졌더라도 안티오크의 비극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사상의 중심지로 부유하고 강력했으며 선진문명을 자랑하던 안티오크는 당시 경제와 문화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에 필적할 만했고 기독교도들의 정신적 생활면에서도 로마, 예루살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유스티누스황제는 지진 피해를 보고받자 왕관과 자주빛 왕의를 벗고 오랫동안 애통해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고 말라라스는 기술했다.
그러나 안티오크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한 단기계획이 곧 시작됐다. 황실에서는 이 도시의 상업적, 종교적 활기가 빨리 회복되기를 기대했다.
이 일은 너무나 중요해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생존자를 찾고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됐다. 유스티누스가 지진 발생 1년 후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는 교회, 목욕탕 및 빈민 숙소를 새로 세우는 데 많은 돈을 지원했다. 황실의 입장은 단호하고도 강력했다. 안티오크는 다시 부흥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조사결과가 드러나면서 동로마제국 관리들이 정성을 다한 복구노력은 별소득이 없는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한마디로 안티오크의 파멸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여진이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됨에 따라 수백년 만에 처음으로 안티오크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한 지역의 쇠퇴는 또 다른 지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인명과 재산 손실로 교역은 줄어들고 이로 인한 경기 침체는 더 많은 주민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528년 11월 또 한차례의 대지진이 안티오크를 강타하여 5000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주민들의 대이주가 없었다면 피해자가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번 파괴는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수개월간 희망을 갖고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마치 다시 짓기 위해 철거한 건물처럼 완전히 파괴됐다. 2년 6개월 사이에 안티오크는 2번의 엄청난 지진을 경험했다. 주민들은 자연히 퇴색해가는 이 도시를 등지고 다른 정착지를 찾아 떠났다. 신앙심이 돈독한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집 문에 주는 우리와 함께 있다. 고 써 붙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믿음을 압도하고 있었다.
삼촌이 죽어 이제 유일한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거액의 재원을 들여 도시재건에 착수했다. 그는 안티오크 시민들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해 주었다. 뿐만아니라 관심은 영적인 차원에도 쏟아졌다. 일부 시민들이 그대 저주 받은 도시여, 안티오크로 불려선 안될지어다 라고쓰인 게시문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접한 뒤에는 도시면을 즉각 신의 도시 를 뜻하는 테오폴리스로 바꿨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기간 중 526년과 528년의 지진에 버금가는 대재앙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차례 지진의 피해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티오크는 더이상 위대한 도시가 아니라 근본이 뿌리째 흔들리는 불구의 도시였다. 말라라스의 표현대로 위대한 안티오크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붕괴 됐을 때 시민들의 큰 공동체 의식과 자부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동로마제국이 진로를 잃고 침략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수록 재난이 초래한 결과를 거듭 실감나게 했다.
신약성서시대의 대표적인 도시였던 안티오크는 대지진으로 생활기반이 무너진데 이어 결국 전쟁이라는 인간이 만든 재앙으로 인해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서기 540년 안티오크는 마침내 페르시아에게 점령돼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나마 이 도시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2년 후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치러야 했다. 치명타를 입은 이 도시는 역사의 장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526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그 찬란한 위업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말았다.
안티오크의 순교자
안티오크는 526년의 대지진 외에도 수만은 격변들을 겪었다. 서기 115년 12월에 로마황제 트라야누스가 안티오크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이 때 트라야누스황제를 초청한 사람은 이 지역 통치자로 후에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였다. 이 지진으로 수만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등 도시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 두 사람은 재난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번 지진 역시 신의 권위에 도전한 데 따른 응징으로 간주됐다. 당시에는 종교적 탄압이 심해 이 도시의 소수 구성원들인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박해 대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폭도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안티오크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재판을 받기 위해 쇠줄에 묶인 채 로마까지 호송됐다. 이 와중에 그는 여러 도시의 기독교인들에게 용기와 확고한 의지를 갖도록 설파하는 한편 격려 서한을 보내고 설교를 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결국 제국 재판소에 기소됐으며 자신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교계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어쨌든 그는 117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된 첫 기독교 순교자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동로마제국, 전염병으로 치명타를 입다.
동로마제국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15년째인 서기 542년,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동로마제국의 중심 도시 콘스탄티노플에 창궐했다.
흑사병은 넉달 동안이나 이 고대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희생자수는 계속 늘어났고 가장 심한 날에는 하루에만 1만명 이상이 죽어나가는 등 콘스탄티노플은 도시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당시 59세이던 유스티니아누스황제도 병에 걸려 눕게 됐으나 일반 시민들에겐 이 사실이 새나가지 않았다.
흑사병은 농부에서부터 군주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그토록 쉽게 확산될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흑사병의 전염경로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흑사병에 대한 공포가 더욱 가중됐다. 흑사병은 콘스탄티노플을 엄습하기 1년 전인 541년, 이집트 항구도시 펠루시움에서 처음으로 발병한 것이 확인됐다. 이어 흑사병은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나머지 도시들에 큰 피해를 주고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흑사병은 이곳으로부터 전세계로 번져나갔다 면서 그 피해가 하도 엄청나 인류가 멸종될 위기에까지 이르렀었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흑사병에 대한 발병 기록은 이것이 최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스티니아누스시대 흑사병의 전염 실태는 팔레스타인의 케사리아 출신인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들에 정보를 크게 의존하고 있다.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장군의 법률보좌관으로서 임무차 상사를 수행하면서 지중해 전역을 돌아보았으며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플에 번지기 시작했을 때는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목격자로서 이 병의 경로 및 시민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을 상세히 기술했다.
발병 초기의 환자들은 대개 비슷한 증상을 나타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환자들은 갑자기 고열 증세를 보였다. 일부는 잠에서 깨거나 집 주변을 산책할 때, 또는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항상 고열증세를 나타냈다. 이럴 때는 이상스럽게도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죽을 것으로 생각한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 하복부와 겨드랑이, 넓적다리 그리고 어떤 경우는 귀 옆에까지 멍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는 어느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증세가 악화됐다. 어떤 환자들은 병세를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죽지 않은 사람들이 운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거나 또는 일시적 정신착란 상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혼수 상태에 빠진 환자들은 친지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잠만 잘 뿐이었다.
정신착란을 보이는 환자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기괴한 망상에 시달렸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흥분하거나 사납게 고함을 지르고 싸우려 달려들었다. 마귀를 쫓는 무당이 치료에 나섰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멍울이 점차 악화되면서 정신력으로 버텨온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고통만 심해지고 결국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어떤 경우는 고름이 터지면서 회복기에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고 종기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체내에서 독이 번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부 생존자들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 했지만 평생동안 혀놀림이 불완전해 말을 하는 데 큰 지장을 겪어야 했다.
환자를 성의껏 돌보던 사람들도 온갖 시련에 의욕을 잃기 십상이었다. 환자들이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바닥에서 구르면 보호자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병상의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환자들이 방에서 나가려고 계속 떼를 쓰면 보호자들도 환자를 강제로 눕히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전염병이 한층 기승을 부리고 사망자들이 더 늘어나면서 시신들을 거둘 인력과 매장지가 부족해졌다. 프로코피우스는 가중되는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묘자리가 죽은 사람들로 가득 차자 사람들은 도시주변의 나머지 땅에 무덤을 파고 한 구씩 묻었다. 그러고도 계속 늘어나는 시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스탄불의 내항인 골든 혼의 황금의 뿔 수역 주변에 있는 시케의 성채에 올라가 지붕을 떼어낸 뒤 시체들을 그곳에 던져 넣었다. 시신들이 무질서하게 계속 쌓여 갔고 마침내 성채를 가득 채우면 그 위에 지붕을
다시 씌웠다. 이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태에 대응했다. 자원봉사단체들이 놀랍도록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 정신을 발휘해 썩어서 악취를 풍기며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 수천 구를 처리했다. 극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황제의 이름으로 식량과 돈이 지급됐다. 교회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예배를 계속했으며 생존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여했다.
시민들을 위한 위로행사도 끊이지 않았으며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 고관들에 대한 대접도 소홀함이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부인인 테오도라는 남편을 병석에 남겨두고 봉사활동에 적극 나설 정도였다.
8월이 끝나가면서 흑사병은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이 죽음의 여름 기간 동안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흑사병은 로마제국의 부흥이라는 황제의 꿈에 치명적 일격을 가했다. 겨울이 오고 주민들이 도시외곽으로 소개됨에 따라 흑사병은 세력을 거의 상실했다. 그렇다고 질병 자체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균은 일단 물러갔지만 인간에게 정복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흑사병이 다시 번진 14세기에도 엄청난 혼란이 재연됐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와 테오도라황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삼촌 유스티누스의 뒤를 이어 527년에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비잔티움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에 고대로마의 정치적, 군사적 영광을 재현시키기로 결심했다.
소농 집안 출신의 유스티니아누스는 뛰어난 재능과 강한 의지력을 가진데다 예기치 않은 행운까지 겹쳐 황제의 지위를 얻었다. 고대 로마제국의 부흥이라는 그의 야망에 가장 강력한 협력자는 아내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는 배우와 매춘부 노릇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프로코피우스도 그녀와 관련된 성적 추문에 대해서는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함구했으며 이에 따라 그러한 사실은 그의 사후 적어도 200년 동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테오도라의 행적은 매우 복잡하여 완전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노리는 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서커스단의 동물조련사를 부친으로 둔 테오도라를 시기하거나 비방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자 아주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서커스무대에 서게 됐다.
테오도라는 열정적이고 이지적이었으며 누구나 인정하는 아주 배어난 미인이었다. 악의에 찬 비방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인정했다.
테오도라는 미인형이었고 체격은 작았지만 아주 우아한 여인이었다. 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부드러운 색조를 띠고 있었으며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생기가 발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다. 황후인 숙모를 비롯한 왕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테오도라를 연인으로 만들었고 삼촌인 황제 유스티누스에게 간청, 토지법을 변경토록 해 마침내 평민 출신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샀던 이들의 결혼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결합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테오도라는 황후로 공식 추대되어 공식서류에도 이름이 등재됐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들을 창안 했으며 매춘부들의 재활을 돕기 위한 자선 단체도 설립했다.
54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야망과 역량을 모두 상실했다. 이후 그가 사망한 565년까지 통치력은 계속 약화됐고 제국 전역에 대한 영향력도 현저히 감소됐다.
이집트의 기근
나일강의 이변이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 굶주림을 가져오다
오래 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진흙을 운반하는 강이 없었다면 그 나라는 지중해 해안까지 이르는 모든 지역이 메마른 사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는 모든 생활을 나일강 수위의 오르내림에 의존하였으므로 강에 예기치 않은 이변이 일어나면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라오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사람들은 연중 나일강의 수위를 흥분과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일반적으로 나일강은 6월부터 수량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여름내내 수위가 올라간다. 강물의 수위는 9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 후에 차차 내려가 농부들이 경작하기에 좋은 두꺼운 비옥한 진흙층을 드러낸다.
중세 이집트에서는 충분히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불어야 하는 나일강의 최소 수위가 16큐빗, 즉 약 8.5m(큐빗은 팔꿈치에서부터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오 약 53cm)로 추정되었다. 일단 강이 그 정도에 이르면 농부들은 경작하는 땅에 대해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그 수위는 군주의 물이라고 불렀다. 수위가 18큐빗에 이르면 그 나라의 2년분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수위가 20큐빗을 초과하면 광활한 땅이 작물을 심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물에 잠겨버린다. 반면 수위가 16큐빗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은, 그해 작물이 극도로 부족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두 경우가 연속적으로 일어날 경우에는 재난이 초래되었다.
1204년에 바그다드 태생의 학자이며 과학자이자 역사가인 압드 알--라티프는, 나일강의 수위가 14큐빗 을 넘지 않은 경우는 이슬람 기원(서기 622년)이래로 대략 20번밖에 없었으며, 약 13큐빗 이었던 경우는 대략 6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1200년에 나일강의 수위는 13큐빗에도 이르지 못했다.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라티프가 1200--2년의 기근에 대해 자신의 연대기에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나일강 수위의 이변은 이집트 역사상 최악의 자연 재해 중 하나가 시작됨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라티프의 기술에 의하면 재난은 가장 참혹하고 끔찍했다.
그해 여름도 평년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6월말쯤에는 정상적인 수위에 도달할 징조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해보다 두달 먼저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라티프는 이렇게 전한다. 강물이 녹색을 띠기 시작했다. 녹색은 점점 더 짙어지면서 강물에서 악취까지 났다. 물을 끓여도 그 맛과 냄새가 가시지 않자, 사람들은 그 대신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몇년 전에 알--아자 모스크에서 가르침을 펴기 위해 카이로로 왔던 라티프는 일련의 수질 검사를 한 후 강물에 식물성 물질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원인이 강의 수원지에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보았다.
여름이 지나가자 나일강에서 이상한 색조는 사라졌지만 수위가 오를 전망도 사라졌다. 9월 9일쯤에 나일강은 그해 최고 수위--위험스런 12큐빗 21핑거(핑거는 손가락의 폭으로 약 1.9cm)--에 달했다. 그후 수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근의 위협이 점점 더 커지는 가운데, 다음 해가 괴물처럼 앙상하게 다가왔다. 라고 라티프는 전하고 있다. 식료품 값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바싹 말라버린 시골을 버리고 지방 도시들을 찾기 시작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집트를 떠나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이 미스르와 카이로로 갔다가 그곳에서 무서운 기근으로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 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1201년 3월경에는 공기가 오염되고 역병과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으며, 항상 기근에 시달려 왔던 사람들은 죽은 동물의 고기와 시체, 개... 동물의 배설물까지도 먹었다. 이러한 현상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드디어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압드 알--라티프의 설명은 모든 사회 계층에서 오랫동안 행해졌던 식인 행위로 절정을 이룬 혹독한 기아상태와 유례없는 야만적 행위에 기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린 아이를 굽거나 삶는 것으로 사람들을(놀라게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나도 어린 아이가 구워져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역 통치자에게 가져갔고, 그와 함께 그 아이의 부모라고 하는 남자와 여자도 데려갔다. 통치자는 그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러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식인 행위는 기근이 일어난 첫해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처음에는 이러한 기이한 식사에 대한 공포와 경악이, 모든 대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컸다.... 그러나 결국 그들 자신도 식인 행위에 익숙해지고 혐오스러운 음식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림 설명
파라오의 시대 이래로 나일강에서 사용된 수위계는 19세기 인쇄물에 있는 아스완의 이 수위계처럼 나일강의 연중 수위 상승을 측정했다.
수천년 동안 이집트는 매년 침니가 많아 생명의 원천인 나일강의 범람하는 물로(오른쪽) 경작지의 관개용수를 대신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유괴되어 식인풍조의 희생이 되었고, 무덤들도 파헤쳐졌다.
살을 발라낸 사람의 뼈로 가득한 창고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가득 담아 삶는 가마솥들을 보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딸을 둔 부모들은 적어도 자식의 목숨은 부지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어린 소녀들을 노예 상인들에 팔아넘기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이웃들이나 도시와 교외를 떠돌아다니는 약탈자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은 사람들 앞에는 기아로 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치고 굶주려 죽은 불쌍한 사람들의 수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내가 돌아본 거리에는 시체와 임종 직전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카이로에서만 100--500구의 시체들을 실어내갔다... 미스르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매장할 수가 없었으므로 도시 교외에 내다 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죽고 기근 직역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고 나자 카이로 일대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여행자가 큰 도시를 지날 때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열려 있는 집의 문 안을 들여다보면 썩어서 쪼그라들었거나 죽은 지 얼마 안되는 시체 더미들을 볼 수 있었다. 카이로를 출입하는 주 도로인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은 마치 시체의 살로 배를 불리는 새들과 야생 동물들의 연회장 같았다.
1201년 4월경이 되자 나일강은 다시 녹색으로 변하고 심하게 악취--절망적인 땅에 내린 무서운 저주--가 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 강은 맑아지고 물이 약간 불었다. 수위가 몇번 오르내린 후 나일강은 9월초에 연중 최고 수위--15큐빗 16핑거--에 달했다. 군주의 물치고는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수위의 상승쯤이면 강물이 곧바로 줄어들지만 않았어도 기근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지역에서는 물의 범람이 홍수의 유령처럼 느껴졌다. 충분한 물을 공급받은 밭조차도 소유주들이 밭을 경작할 돈이 없어 묵힌 채로 두었다.
두번째로 나일강에서 이변이 일어날 것이 확실해지자 이집트의 주산물--콩, 보리, 밀--의 가격이 또다시 치솟았고, 이집트에는 다시 기근이 찾아들어 인구가 감소하고 사람들은 더욱 지쳤으며 모든 생활자원도 고갈상태가 되었다. 라티프의 글에 따르면 모든 것이 첫 번째 기근 때와 똑같았고, 개선될 희망이 조금도 없었다. 사망자수는 줄어 들었지만 그것은 인구가 이미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식인 행위는, 그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희생자들이 부족하고 사람들이 기진맥진해 있었기 때문에 수그러들었다.
라티프는 당시 이집트에서 겪은 인구 감소의 예로 미스르에 있는 골풀 매트 시장을 들었다. 시장의 수는 2년 사이에 900개에서 15개로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그러한 현상은 다른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도시들은 주민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세는 85퍼센트나 떨어졌다. 심지어 밀의 가격조차도 내려갔다. 밀은 여전히 귀한 상품이었지만 잠재 수요가 크게 줄어들어 밀의 시장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에 기아와 질병 및 식인 행위로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1200년 7월부터 1202년 4월 사이에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의 수는 거의 11만 1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조차도 모든 도시와 시골 지역 및 도로에서 객사하거나 잡혀 먹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수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라티프는 기록했다.
이집트에서 흔히 그랬듯 기근이 끝나자 불충분하나마 작물들의 씨를 뿌리는 시기인 1202년초에 몇몇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그 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가 농부들이 농사를 짓다가 쓰러지곤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지도하는 이맘이 하루만에 700명에게 장례기도를 올렸다고 믿을만한 사람들이 라티프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한달 동안에 유산이 40명의 상속인에게 연달아 넘어간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재난은 일련의 격심한 지진이 이집트를 강타한 12022년 5월 20일 이른 아침에 발생했다. 지진은 시리아 전역과 멀리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에 있는 사람들도 진동을 느낄 정도였다. 그 지진으로 건물들이 부서졌고 문이 흔들거렸으며 지붕과 서까래가 떨어져 나갔다.
항구 도시들은 범람했고, 배들은 해안가로 밀려왔으며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진이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수를 상당히 증가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은 적어도 이집트에 닥친 이 특별한 시련기의 종말을 알려 주었다.
기근에 시달리고 나서 두번째 겨울을 지나며 나일강의 수위가 아주 낮아져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2월에는 다시 녹색으로 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일강의 수위는 지진이 일어날 때쯤에 최저 수준에 이른 후 다시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수위는 4핑거만 상승했는데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해의 수위 상승에 대해 불길한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절망감이 팽배했다. 그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나일강의 발원지 구역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월 중순 이후 강은 다시 한번 불어나기 시작했다. 강물은 순식간에 3큐빗의 수위에 이른 후 이틀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 다음 라티프가 기록한 것처럼 물은 다시 크게 늘었다. 물의 양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했으며 산더미 같은 물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1202년 9월 4일에, 나일강의 수위는 8.5m까지 올라갔으며, 이틀 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서서히 낮아졌다. 기아와 죽음의 세월이 2년간 휩쓸고 지나간 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근의 유령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금세기에 아스완 하이 댐이 건축되고 나면 비로소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의 수위에 의존하는 생활이 끝나기 때문이다.
압드 알--라티프: 이집트의 비극을 기록한 의사
중세 아랍 세계의 가장 다재 다능한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압드 알--라티프는 1162년에 바그다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육을 받는 동안 역사, 철학, 신학, 법학, 언어, 과학, 특히 의학 수업을 받았고 코란 전체를 암기하기도 했다.
라티프는 28세 때 터키와 그리스, 시리아 및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을 하는 도중에 몇몇 회교 교육 중심지에 머물며 공부도 하고 강의도 했다. 그는 이집트의 군주로서 십자군의 적인 살라딘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그가 카이로에서 만난 학자들 가운데는 유태인으로서 존경을 받는 사상가이자 의사인 마이모니데스가 있었다.
1197년초에 카이로를 두번째 방문중이던 라티프는 대기근이 밀어닥친 기간 내내 자기가 보고 들은 보고 들은 것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인간의 고통으로 인해 마음의 동요를 느끼면서도 항상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동정심 어린 학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기근 희생자들의 시체가 2만 구쯤 알 마크스라는 곳에 쌓여 있다는 말을 들은 라티프는 그곳으로 가서, 해부학에 대해서 이슬람교에서 설정한 금지사항을 무시하고 해골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래 턱뼈가 접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것은 라티프가 살던 시대 의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저서들을 썼던 갈렌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례적인 발견이었다.
기근이 일어난 다음 여러 해 동안, 라티프는 여행을 계속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모두 165권 가량의 책을 썼다. 인체에 대한 그의 논문은 수세기 동안 아랍권의 의학 교과서로 남아 있었다. 그의 (이집트 역사)는 소실됐지만, 라티프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대기근과 같은 사건들만을 담아놓은 발췌본은 남아 1965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압드 알--라티프는 메카를 순례하는 동안 잠시 들렀던 바그다드에서 69세로 숨을 거두었다.
미국 남서부에 몰아닥친 가뭄
고대 푸에블로 원주민 부락의 건립자들이 고향을 버린 이유
일부 재난들은 갑작스럽게 밀어닥치고 어떤 재난들은 서서히 나타나 사람들의 생활 터전들을 조금씩 파괴하기도 했다. 미국 남서부에 현재 살고 있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조상인 아나사지인들에게 일어난 재난은 후자의 경우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일어났다.
13세기말경,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되자 이미 극도로 건조해진 땅은 더욱 황폐해졌다. 샘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지하수면은 수위가 내려갔으며 여름의 뜨거운 불볕을 받은 곡식들은 시들어 갔다. 비의 부족, 토양 침식,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회적인 압력들로 인해 아나사지인들은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 그들이 돌로 지은 부락인 푸에블로를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다.
아나사지의 중심적인 거주지역은 결코 안락하거나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유타주 북부에서부터 콜로라도 남서부를 거쳐 애리조나 중부와 뉴멕시코에 이르는 콜로라도고원은 좁은 골짜기와 황폐한 사암 능선으로 갈라진 광대하고 굴곡진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파른 절벽을 이루는 산들은 그 지역의 일부인 알칼리성 황무지에 솟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척박한 토양에서 세이지브러시, 그리스우드, 사막의 풀들이 싹을 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곳에는 노간주나무와 소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지대도 있고, 협곡 아래에는 드문드문 시내가 흘러 사시나무와 버드나무에 물을 대주고 있다. 여름에는 날씨가 건조하고 먼지가 많으며 덥다. 간헐적인 소나기 덕분에 때때로 쾌적해지며, 자주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폭풍이 불어 사막의 강이 격류를 이루며 범람하기도 한다. 몇년 동안 그 고원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다.
아나사지의 땅이 장래성이 없어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선조들은 수천년 동안 그곳에 의지해 살았다.
1만 2000년 전에 그 지역은 식량을 구하러 고원 지대를 떠돌아 다녔던 석기시대의 수렵과 채집에 생계를 의존하는 원시인들의 거주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에는 그 지역에 옥수수 재배가 시작되었다. 기원후 처음 수세기 동안 남서부의 부족들이 정착 생활에 들어가면서 문화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가진 세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호캄족은 현재의 애리조나에 있는 낮은 사막지대에서 살았고 관개 농업을 능숙하게 했다. 욕심 많은 사냥꾼이자 능숙한 도공들이었던 모골론족은 콜로라도고원 남쪽의 산과 계곡에 거주했다. 아나사지족은 고원 위에서 살았다.
바구니를 짜는 기술 때문에 바구니 제조업자로 알려져 있는 초기의 아나사지인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이나 절벽 아래와 협곡 벽면에 있는 동굴에서 살았다. 그들은 사냥을 하고 야생 식물들을 채집하면서 몇몇 곡물들을 재배해 주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기 500년쯤부터 아나사지인들의 생활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기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점차 도기제조에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더욱 효과적인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돌촉이 달린 창과 목제 투창 장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밭에서 경작된 옥수수, 호박, 콩이 그들의 주식이 되었다.
아나사지인들이 농업 기술을 습득하고 정착함에 따라서 영구적인 주거지를 만들게 되었다. 서기 300년쯤 일부 아나사지인들이 땅 속에 접시같이 평평하게 흙을 파서 그곳에 진흙 바른 나무를 세워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 세대들은 그 방법을 개선하여 더 깊게 판 바닥에 부드러운 진흙을 깔고 나무 기둥으로 받치는 나무 지붕을 씌웠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매서운 돌풍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이러한 움집들은 1년 내내 계속 외기를 차단해 주었다. 땅 위의 저장창고--처음에는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만들다가 나중에는 돌로 만들었다.--에는 겨울 동안 먹을 식량을 저장해 두었다. 850년 이후부터 아나사지인들은 생활 거처를 땅 위로 옮겼다. 저장실은 집으로 개조되었다. 여러 친척들이 함께 살기 위해 본채 옆에 방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로써 다가족 푸에블로 원주민들의 생활이 양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나사지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은 관개법의 개발일 것이다. 부족 초창기에는 이러한 노력 대신 부족의 어른들이나 주술의들이 의식용 파이프 담배를 피우거나 의식상의 춤을 추어 좋은 날씨를 보장받으려 했다. 하지만 서기 1000년경에 콜로라도의 샌환강 계곡의 북쪽 부근에 살던 아나사지족은 더 실제적인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들은 강우량에 상관없이 빗물이 완만하게 흐르게 하기 위해 협곡 경사면에 배수로를 겸한 우회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협곡 바닥에 건설된 수로망들이 깔끔하게 구획진 농지에 물을 대주었다. 옥수수 생산량은 증가했고 인구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 인해 아나사지인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인구가 적었던 푸에블로족이 놀라운 규모로 번성하였다. 콜로라도주의 메이사버디, 애리조나주의 첼리협곡의 절벽 거주지들 그리고 특히 뉴멕시코에 있는 차코협곡의 다층식 푸케블로 혈거주택들은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당시 아나사지인들의 탁월한 기술을 증명해 준다. 차코협곡을 따라 15km 가량 가다 보면 적어도 8채의 거대한 집들 --두꺼운 돌벽으로 받친 수십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단위 주택 단지--이 있다. 과거의 움집같이 푸에블로에 있는 방들은 지붕에 나 있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남자들이 모여 친목 활동과 종교의식을 행하는 지하의 커다란 방인 키바는 옛 움집의 형태를 보존한 것이다.
차코협곡의 거대한 집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푸에블로 보니토-- 아름다운 마을 에 해당하는 스페인어--였다. 이 D자 모양의 웅장한 구조물은 테라스가 달린 다섯 개 이상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창문과 지붕 출입구는 거대한 중앙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푸에블로 보니토는 전성기에 800개 이상의 방이 있었으며 1000명 이상의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주택 단지에는 30여기의 키바가 있었는데, 그중 둘은 직경이 18m나 된다. 잘 정비된 도로가 차코협곡에서부터 교외에 소규모로 이룩된 공동 사회까지 뻗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7만 8000평방킬로미터의 지역--차코의 영향력이 그렇게 광대했다--에 퍼져 있는 이러한 외진 마을을 100개 이상 발견해 냈다.
고도로 조직화된 대규모 사회라야 거대한 공동체가 함께 살 집들을 짓고 그들에게 식량을 대주는 경작지와 관개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사지인들은 명확한 사회 계층을 구분한 것 같지는 않다. 그곳에는 왕도 귀족도 억압받는 농부도 없었다. 키바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부족 연장자들이 공동 사회의 문제들을 처리 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장로들은 이웃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살았던 것 같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은 노동과 의식, 춤과 추수의 질서를 좇는 리듬에 맞추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번영하는 아나사지의 공동체 규모가 커진 것이 바로 쇠퇴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한 요인은 900년경부터 시작돼 안정을 유지한, 강우량이 많은 기후 덕분이었던 것 같다. 강우량이 일정하기 때문에 곡물 생산량을 예측할 수 있었으며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여분의 곡물을 비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축된 곡식이 있더라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척박한 땅도 경작됨에 따라 아나사지는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장작과 건축 자재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나사지의 사람들은 주위 산에서 대대적인 벌목을 했다. 이러한 삼림의 훼손이 그 지역 하천 유역의 순환구조를 무너뜨린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무들이 없어지자 토양은 수분을 저장하는 능력을 잃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의 미묘한 관계가 균형을 잃고 있었다.
1150년 이후 어느 때부터인가 기후가 미묘하지만 광범위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강우량의 변동이 더 심하고 빈번해져서 몇년간 풍작과 예기치 않은 장기간의 가뭄이 교대로 들었다. 척박한 농토에서 흉년이 들면 식량 공급이 크게 부족해지곤 했다. 그러다가 1276년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게 되었다.
그후 20년 동안 매년 아나사지역의 강우량은 과거의 평균보다 훨씬 적었다. 높은 지역에는 눈이 더 적게 내렸지만, 봄에 눈 녹은 물이 벌거벗은 산비탈로 폭포처럼 흘러내려 표토층을 깎아냈다. 따라서 아주 적은 물만이 땅으로 스며들거나 협곡 어귀의 샘으로 흘러들었다.
연료와 건축용으로 쓸 나무는 이미 고갈 상태에 이르고 기근의 위협이 닥쳤으나 이에 대처할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아나사지 사회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햇볕이 아나사지의 땅에 내리쪼이자 어떤 의식의 나팔 소리나 춤도 시들어가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다.
아나사지인들의 몰락과정은 가뭄 그 자체만큼이나 느리고 냉혹했다. 우선, 그 땅을 경작했던 부족민들은 마른 땅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자라지 않게 되자 자기들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푸에블로 부락을 떠나기 시작했다. 땅의 소유권이나 점점 줄어드는 분배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푸에블로 부락은 줄어가는 곡물 비축분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사냥감을 찾아 거주지 일대의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짐승들도 그 지역에서 떠나 버렸기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아나사지인들은 가뭄과 기근을 견뎌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고향을 버렸을까? 정확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환경적인 요소들과 사회적인 요소들--불확실한 강우량, 나무의 공급 부족, 토양 침식, 궁핍, 파벌주의, 공동 사회의 유대감 파괴--이 복잡하게 뒤얽혀, 콜럼버스 이전의 미국 사람들에게 공통적이었던, 더 이상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정착지를 버리는 경향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차꼬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나 사지의 푸에블로 부락에는 80년 동안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이주의 이유들이 무엇이든간에 아나사지인들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전역에 여러 방면으로 흩어졌다. 결국 그들은 주로 리틀콜로라도강과 리오그란데 북쪽에 정착하게 되었다. 1300년경이 되자 메이사버디에서 차코협곡에 이르는 콜로라도고원에 널려 있는 푸에블로 부락들은 영원히 메뚜기와 방울뱀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이후에 그 지역에 거주했던 나바호족과 유트족은 아나사지인들을 따라다닌다는 유령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대에 지은 이 푸에블로 부락들을 기피했다.
비를 부르기 위한 축제 의식
비를 부르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춤 의식은 아나사지 농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아나사지인의 후손들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춤들을 참고해 보면 이 중 가장 신성한 분비는, 의식이 있기 몇달 전 푸에블로족 남자들이 자기네 씨족의 키바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정교한 의상과 무시무시한 나무 가면을 만드는 것이다.
춤추는 사람들은 고대에 그들에게 농업을 가르쳐 주었던 비의 신인 카치나로 분장하곤 했다. 비록 카치나가 그들을 떠난지는 오래되었지만 신들은 축제날에는 돌아와 춤추는 사람들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의상은 물을 상징하는 것들 즉 짧은 스커트와 구름과 번개 무늬가 있는 망토, 빗방울이 흩뿌려진 가면, 안개와 수중 생물들을 본따 돌과 터키석으로 만든 목걸이로 장식됐다. 어떤 사람들은 번개 모양의 막대기와 태양을 연상하게 하는 독수리 깃털이나, 산과 비 그리고 장수를 연상하게 하는 가문비나무 가지를 달고 있었다. 남자들만 카치나신의 의상을 입었지만, 모든 부족민들이 마을 광장에 모여 북과 피리, 딸랑이의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드는 춤꾼들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카치나신을 기리는 춤들은 푸에블로 인디언들 중에서도 호피족과 주니족의 정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는 고대 의식들 중에서 가장 큰 장관은 호피족의 뱀 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8월말에 9일간 행해진다. 의식이 절정에 달하면 춤추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뱀--천둥과 비의 상징--을 입에 물고 마을 광장을 돈다. 춤이 끝나면 비를 기원하는 호피족의 기도를 지하세계에 있는 신들에게 전하기 위해 뱀을 사막에 풀어준다.
아나사지의 과거 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 나무들
온대 지역의 나무들이 매년 새로운 나이테를 만든다는 사실을 기초하여 나이테를 이용한 옅대 추정은 미국 남서부의 유사 이전에 관해서 많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나이테로 나무의 나이와 성장 과정, 성장 유형들에 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뭄이 들어 나무의 성장이 방해를 받으면 나이테가 좁게 나타난다.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자라는 비슷한 종류의 나무들은 형태가 비슷한 나이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나이테 자료를 근거로 지역의 연대표를 만들 수 있었다. 나무표본의 안쪽 나이테를 그 표본이 묘목이었을 때의 바깥쪽 나이테와 비교해 먼 과거까지 추적하는 것이다. 그 기술은 미국 남서부에서 개발되어 가장 좋은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이곳에서 나이테를 근거로 한 연대표는 대략 기원전 300년까지 거슬러간다. 그것으로 우에블로 보니토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나무는 850년경의 것이고, 가장 새로운 것은 1130년에 잘린 나무라는 것이 밝혀졌다. 1276년에서 1299년 사이에 연달아 나타난 좁은 나이테는 아나사지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났던 그 시기에 심한 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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