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6일 토요일

wneswkcic59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걸어온 패턴 유형을 이명박 정부가 답습해가고잇는지 국민들이 감시하고 예방하고 대책을 세워놓아야 할것이다



이미 그러한 답습하려고 이명박 정권을 세운것이기에 이미 초기부터 국가 정책과 공기업의 민영화 의료민영화에 대한 페단이 나오고 있기에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서 막는길이외에는없다 안그러면 IMF보다도 더한 고통을 불행을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들이 당할가능성은 배제할수가없다



동시에 이러한 글을 올리는것은 다른 세력들에게 경고차원에서 올리므로 이제는 악순환을 반복하지마라 그것만이 그대들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자세이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들을 보여야 할것이다



굳이 어느 세력이라고 언급하지는않겠다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사과 성명을 해야하고 관련된 농림부 장관을 비롯한 예하 국민을 속인 관료분들을 옷을 벗기고 책임을 물어야 할것이다



김영삼 허수아비 정권과 이명박 허수아비 정권 특징은 이미 공개되었고

즉 후러처먹기를 좋아하는 대한민국을 도탄에 빠지게하고 국가와 국민을 괴롭히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밥먹듯이 국익을 저해하고 있는 그동안 30년간 구심적인 반역세력들의 각 행정부서마다 요직에 그들만의 이익과 노골적인 국익을 팔아넘기려고 한 세력과 지금도 그러한 세력들이 장난을 치고있다라는 사실

그러니 허수아비 대통령 당사자들은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롯하여 이명박 현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국민과 대통령간에 불신과 이분법적 사고 수많은 부정부패스캔들 사건 그로인한 민심이반 그덕으로 동시에 국민과 대한민국 대통령 그자체의 이간질시키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 혼란과 틈새에 그동안 30년동안 부패시켜오고 국가와 국민을 민족을 괴롭혀 온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이익을 더욱 확장화해온사실은



대한민국 관료들의 재산특징을 보면 잘말해주고 있다 즉 그만큼 대한민국은 도덕성과 정직성이 추락한 바탕속에서 허수아비 대통령과 부정부패의 그들만의 정책과 권력을 위한 부패하고 반역의 정신을 갖고 그리고 해 온 세력들이 존재해온가운데에 그러니 대한민국 국가가 지금과 같은 걸어올수없는 강을 건너왔다



이미 대한민국은 그들의 세력으로 대한민국을 구할수가없는 자정능력이 상실되었다 그 반증으로 지금 이명박정권의 민심이반은 김영삼정권의 도덕성 부재와 각종부정부패스캔들 그러한 주체세력들이 지금 아직도 집권당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동시에 이와별도로 정권초기부터 심각한 민심이반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이것을 알고도 대통령하려고 한 당사자나 그리고 난도질한 구심부패세력들의 관료세력들이나 기타 언론사 방송사 세력들 오늘날의 이 사태는 이미 예견된 각본이였고 그들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고



이제 이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주체자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남북한 국민들이고 동시에 주변국가들의 진정한 인류애 정신을 발휘하려는 자세에 달려있다

저들은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린지오랜된 그들만의 습관이오래되었기에 이러한 글이나 말 역시 통하지않는다 이미 자시자신도 모르게 수십년간 그러한 마인드와 생활이 습관화해왔기에 고칠수가 없다

고치는방법은 단 한가지는 세계3차 대전의 세계 국군 통수권으로 그들의 죄에 대한 반성과 참회 회개를 하지못하면 몽둥이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향후 더큰 국가와 국민의 동아시아의 인류의 불행과 재앙과 아픔을 고통을 줄일수가 있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방치해줄수가 없는 시간과 공간이고 자비와 관용의 시대는 얼마남지않았다

심각한 광우병 쇠고기 수입정책에 농림부들은 국민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처신을 해야함에도불구하고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을 기만하고 미국에가서 도축장을 조사한다고가는 자세는 눈가리고 아옹하는 노골적이고 국민의 피눈물의 혈세를 낭비하는 자세에 그리고 웃으가면서 출구하나 그만큼 그대들의머리속에서는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마인드가 안되어있으니 저들의 그러한 습관화되었음을 지금 대한민국 전국에 조류인플렌자 닭과 오리를 무수히 도축하는데 이제는 그대들 깨닫지못한 반역 관료인간들이 귀한 축생의 생명체도 제대로 관리못하는 인간 관료자들의 생명체도 닭과 오리처럼 도축이될것이다

모든 생명체를 귀중하게 다루지못하고 관리하지못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깨닫지못한 생명체에 동시에 국가와 국민 민족에게 고통을 주고 죄를 짓고 있는 이들역시 도축시킨다

다른 선택의 길은 이미 대한민국에게는 없다 그러하지못하면 세계3차 대전시에는 남북한 전체를 완전하게 심판할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것을 선택할것인가? 모두가 알아서 현명한 선택이 되기를 바란다

거듭말하지만 지은죄들은 조금도 반성하지않고 있다라는 사실이제는국민들이 나셔서 잡는일이외에는 그리고 그들이 도망가지못하도록 모든 인사들의 명단들을 확보하고 망명해도 책임을 묻는 대안까지 마련되어있어야 할것이다

지구 구석구석까지4287;아가서 심판을 묻겠다 이 역시 세게3차대전의 지휘권으로 그들을 어느 국가로가든 심판을 반드시 묻겠다

국가 흥망성쇠 부정부패부조리 인간 유형의 박물관을 짓겠다 그들의 시신들을 박제해서 길이길이 인류의 후세사람들에게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30년동안 자신들의 저질러온죄를 책임을 묻지않고 은페하고 회피하는방향으로 대한민국 이라는 국가 조직을 이어왔고 운영해왔기에 더 큰짐들이 생겨났음을 그리고 이번에도 한번 대한민국 국가를 운영하는 모든 조직체들이 관료분들이 또 다시 회피해보세요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이 정권까지의 관료분들의 자신과 가족들은 세계 어느라에 가든 대접받지못하게 만들어버릴것이다

여기서 고대왕조부터해서 현존의 국가 형태에 이르기까지 특히나 대한민국 국가의 현존의 모든 정치권력자들과 사용자들에게 강조 해 주고자 마지막으로 언급 해 드리는것입니다
국가가 존속하는 이유와 정치권력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리고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물고기 법칙을 제거하기위함에 국가가 존재하는이유이고 민족이 존재하는이유이고 또한 잘못된 정치권력자들을 심판하는 이유이고 그들에게 피를 받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물고기법칙이 무엇이냐하면 이 법칙은 힘이 선악을 결정하기에 또 큰물고기놈이 작은물고기놈을 잡아먹어치우기에 그래서 이것을 통제조절하기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국가가 존재하기에 정치권력이 필요한 이유이고 동시에 사용자가 생기는 이유인데
그동안 대한민국 국가는 이를 거역하고 지금도 거역하려고 마지막 그들의 명줄은 생각하지못하고 자신들의 존재자체의 가치마저도 상실하려고하니 그리고 정치권력자나 사용사 역시 그리고 국가존재마저 상실하려고 앞장서니 그러므로 국가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함에 이점을 간과하다가는 더는그대들을 용납해줄수가 없다 이미 그 한계에 도착했기에
그래도 한미 FTA를 강행하든가 잘못된 한미쇠고기 통상협상을 바로잡지못하는 대한민국이든 미국이든 물고기법칙을 제거하지않으면 얼마든지 그대들의 의중을 고려하겠다
그리고 국내 민영화하는 정책 역시 이점을 고려되어야 할것이고 고려되지못하면 그대들 스스로가 존재 부정을 말해주는것이기에 심판을 반드시 받아야 할것이다



그래서 이 남북한을 물고기법칙으로 먹으려고하는 문명의 정점에 서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정치권력의 본분과 사용사의 본분을 다하지못하고 반역하는 생명체는 도축시킨다
그동안 30년동안한것도 부족해서 아직도 그러한짓거리를 하는 생명체는 모두가 바로잡지못하거나 한쪽에서도 바로잡지못하면 둘다 잡는다 국가를 보존하지않으려는 그대들의 의지로 판단하고 그대들 모두를 도축한다 그것도 부족하면 남북한 모두를 도축해서라도 바로 세운다 이것도 부족하면 미국도 도축해서라도 바로 세운다 거듭말하지만 주변국가까지 포함해서라도 대한민국을 바로세울것이다 남북한을 바로 세울것이다


이 말은 전세계 국가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대한민국 남북한을 바로세우는것이고 다시 전세계 국가들을 바로 세워주는것과 같다 그동안 세계 각 국가들이 물고기 법칙들을 제대로 제거해오지 못하엿기에 말이다 그래서 전세계 국가들의 확답을 받을때까지 특히나 대한민국 남북한과 그리고 관련된 국가들은 괴로움을 당하게될것이다 그러니 중국이 조속히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어야 중국 국가를 살릴대안을 내어드리지요 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중국 지진은 예견된일이고 지금은 약과이다 앞으로 그보다도 더한 경천동지할만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못한다 세계 모든 국가들이 그러니 조속히 결론을 내려라! 대한민국이 먼저 바로세우겠다라는 의지를 보이지않고 세계 주변 국가들이 먼저 뜻을 밝히면 대한민국 이들 세력들을 모조리 도축시킨다 대한민국 세력들이 양세력이 자신의 죄와 반성과 참회의 용기있는 실천을 하면 여기에 힘이 실릴것이다 세계 3차대전의 관점에서 언급해주는것이다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세계의 변화의 빠른물결의 변화와 혁신을 따라가기는커녕 지들의 욕심챙기기에 국가의 존재를 위태롭게 앞정서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을 남북한을 잡아먹는일은 쉬운법 그나마 지금 싯즘에서 강조해드리지만 더는 그대들의 처신을 용납해줄수가 없다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방치하면 물고기법칙에 의해서 대한민국 남북한이 멸망하기에 말입니다 더욱이 세계3차대전시에도 살아남지못하기에 다수의 희생을 막고자 지금 소수의 세력들을 죄값을 묻는것이고 피를 받아내는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의 도움은 말그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국가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민족만을 도와줄뿐이다
그러므로 이미 대한민국 남북한 생사를 알고 있기에 죽고싶으면 무엇인들 못하나 그리고 얼마든지 하늘의 명으로 그대들의 육신의 명과 영을 자손들을 데리고갈것이다

4343년만에 뿌리를 뽑는것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마지막으로 도와주는 손길이고 두번다시 이러한 도움은 없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보이지못하는 과거처럼 지금처럼살아간다면 더는 보호받지못한다

지금 절대적인 신의 도움으로 그나마 남북한이 연명하고 있다

두번다시 대한민국 남북한의 이러한 운명은 돌아올수가 없거니와 돌아오지도않기에 인류문명에 낙오되는 국가가 민족이 인간이 되지마라

고대문명이나 현대문명이나 사람의 육신은 최고의 가치는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해탈을 하라느는것이 절대적인 신의 뜻이고 가르침이다

인도는 천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대영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도 인도의 정신은 지배받지않은 인도인들의 신앙심으로 이겨온것 같다

앞선 깨달음의 절대적인 신을 힌두교 브라만같은 그들만의 절대적인 신을 숭상하지만 고대 4대 문명의 교착지점인 인도에서 현대의 종교보다도 앞선 깨달음의 광명의 지혜의 힘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러한 신앙심이 나온것같다 그것이 인도의 힘이고 저력인것 같다

이제 대한민국 남북한은 그동안 깨닫지못한 인간에게 4개의 그룹으로 구분하면 대다수 3번째 계급의 인간으로 수천년간 지금도 깨닫지못하고 절대적인 신의 입장에서보면 보호 순위에서 밀려날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이것은 다 그대들의 자업자득으로 된것이다

지금도 예외일수가 없다 오냐하면 절대적인 신은 모든 국가들에게 공평하게 지켜보고 살피고 있고 스스로 돕지않는 국가는 민족은 절대로 도와주지않을것이다

인류도 그동안 스스로 인류가 인류를 돕지않는다면 도움이 없을것이다

고대시대의 인류 사회나 현대의 세계 각 국가의 인류 사회나 국가 통치자는 먼저 절대적인 신의 보호를 도움을 받고자 도덕성의 가치를 제일의 우선 순위에 두고 문명은 이루어져왔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무너지면 그러한 문명이나 국가나 민족은 멸망하는것이 이치이다

왜냐하면 통치해가기에 신뢰성이 없기에 분열로 내부적으로 먼저 망하게되어있으니 그다음 외세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게되는 과정이 그러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문명부터 지금가지 죽고 태어나고 하지만 도덕적 가치의 바탕속에서 개개인의 부귀 영화 재물,권력,쾌락까지 사람들의 깨닫지못한 공동체 삶의 생활을 보장해온것이 문명의 기본틀이다

고대문명이나 지금이나 그러하다 그러므로 깨닫지못한 사람의 생명체는 그렇고그러한존재다
그러나 그렇고그러한 존재의 사람들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각하여 절대적인 신의 존재와 믿음을 실천해가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개달음의 수행을 해가는 사람들의 육신도 끝없는 억겁의 윤회를 통해서 해탈을 할수가 있는것이다

그러하지못한 그렇고그러한 사람의 생명체의 육신이나 그들의 영도 역시나 수억겁의 윤회를 할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것을 게을리한자들은 억겁의 생명으로 나옴에 그보다도 더못한 축생으로 추락해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생명체는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서 수억겁 윤회를 통해서 해탈해야만하는 책무이다

소생은 지금 고대문명 사회의 인류모습들을 상상해보면서 자료들을 보면서 지금 현존의 인류의 문명사회를 보면서 그동안 기록해준 글은 틀림이 없다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과연 인류는 더나은 인류를 위해서 그동안 고대 4대문명에서나 지금 인류가 그동안 해보지못한 경험을 도전을 할 용기가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유일한 인류의 미래의 희망 비상구이고 출구이기에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지금 대한민국 국가나 남북한의 민족의 운명도 수차언급한대로 다른 선택은 없다 왜냐하면 다른 국가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어야 하기에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이미 그대들은 죽은 목숨이고 영이기에 세상에 이미 겁살 기운이 하늘의 신이 내려왔는데 그대들은 세계3차 대전시에 심판시에도 살아남을수가 없다 육신의 명과 영은 반드시 거두어간다 친인척들까지도 죄를 묻겠다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을 표본으로해서 확실하게 부정부패부조리 인간들의 유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세계 각 국가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줄것이다

인류의 평화와 번영의 공공의적이고 절대적인 신에게 제일 먼저 심판받아야 할 공공의 청산대상자의 우선하는자들이다

이들의 죄는 너무나 많다 오히려 깨달음을 수행하는자들이 비정상적으로 만들어가는 세상을 세계를 신명세계 역시 용납할수가 없다라는 사실이기에 전세계 전체를 다할수가없기에 대한민국을 표본으로 하게될것이다

이러한 과오에 대한 아픔을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나 남북한 국민들은 두고두고 기억해야하고 경계해야할것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아픔을 배우고도 깨닫지못하고 과거의역사처럼 살다가는 그러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것이다

대한민국 남북한의 국가와 민족의 운명은 그러하니 대한민국 국민들이 저들의 위정자들을 자정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언론사 방송사 일부 논조를 알고있는데 아직도 정신차리지못한 언론사와 방송사 자체를 없애버린다 강제적으로도 사장단을 모두 재산을 몰수하고 책임을 묻겠다

그동안 그 역활을 하지않았기에 그 존재 자체의 자정 기능이 없다라고 본다

그대들의 시대는 끝났다 광우병 쇠고기는 이미 여러번 자신들의 말에 신뢰성정직성에 도덕성에 문제가 있음을 두번이나 인정했으면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사과 성명을 해야하고 관련된 농림부 장관을 비롯한 예하 국민을 속인 관료분들을 옷을 벗기고 책임을 물어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서 잘못된 한미 쇠고기 협상을 무효화 하든지 잘못된 모든것을 바로잡는 자세가 지금은 필요하다

대한민국 지금 의료민영화와 공기업의 민영화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민영화가 되어야 할것이다 인도의 간디의 그분의말씀대로 인도 국민들을 먹어살리기위해서 산업화를 하지않고 인도국민들이 더 먹고 살아갈수있도록 사람의 손으로 한 그 정신은

지금 대한민국 공기업의 민영화와 의료 민영화는 바로 특정보험회사들이나 외국 보험회사들이 대기업들만이 배부르게하는 민영화는 절대로 반대한다 그러한 대한민국 국민들 서민들의 위한 민영화이기보다는 대기업 위주의 민영화로 가려고 하는 냄새가 너무나 강하기에 반대한다

그러한 대기업들에게 그러한 국가정책으로 이익을 집중시키는 정책을 한다면 그들도 대기업들도 외국 기업들도 모두 몰수해버린다

법이기전에 그대들의 생사권이 우선이기에 한마디로 죽고나서 빼앗길래 아니면 말들어서 죽지않고 상생 더불어사는 대한민국 국가 사회를 만들래!

그만큼 그대들/806;지않게 대한민국 남북한 인류 국가들의 마스트플랜이 설정되어잇기에 해 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그러한 대기업이든 외국 기업이든간에 모조리 접수할수도 잇음을 말하는것이다
김영삼의 정직성과 문민정부의도덕성,국민적배신감의 실체를 그리고 이명박현정권의 모습



김영삼의 정직성과 문민정부의

도덕성

【 심층분석 】국민적배신감의 실체를



《검찰수사가 자신의 아들도 죄가 있으면 사법처리하겠다는 YS의 대국민담화를 정직하게 이행해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정치인이 비리(혐의)가 있다면 수사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면한 최고의 비리의혹은 김현철씨에게 있으며 정치인의 자금수수는 그 의혹의 순위가 뒤로 밀려난다는 것이 항간의 여론이다.》



지난 93년 한해동안 90%이상으로 치솟던 金泳三대통령에 대한 국민지지율이 임기 1년을 남겨놓고 올해초 10%아래로 급전직하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조사방법과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같은 추세는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여론이나 인기는 군중심리와 같은 것이어서 화끈 끓어올랐다가 차게 식어버리곤 하는 변덕이 그 특성이긴 하다.

그러나 여론의 냄비가 끓거나 식을 때마다 그만한 요인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냄비기질이라는 말은 자극요인에 대한 반응이 지나치게 즉각적이며 완충과정이 없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아무런 변수가 없는데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이상증세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YS의 지지율이 기록적인 상승세에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배경은 무엇일까.

민심속에서 YS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이 차남 賢哲씨의 한보비리와 국정농단 의혹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민심의 이반(離反)은 김현철씨의 비리연루 의혹 자체보다도 YS의 정직성과 문민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배신감때문에 가속화됐다고 여겨진다. 여론과 민심이란 사회심리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 자체보다도 그것이 인간의 내면을 건드리는 심리효과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최근 YS에 대한 국민지지율이 급작스럽게 한 자리수로 떨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믿어왔던 그의 정직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실망감과 배신감 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더구나 정직성과 도덕성은 문민정권과 그 이전의 군사정권을 가르는 울타리 같은 기준개념이었다. 정권이나 지도자의 요건 중 경제를 이끌어갈 능력이나 국가안보와 치안질서를 확보할 조직력으로 따진다면 과거 군인출신 대통령들이 YS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 출범초기인 93년 1년간은 YS가 역대 대통령 중 단연 최고의 인기와 국민지지율을 누렸다. 그 배경은 YS가 어느 대통령보다도 바로 정직성과 도덕성에서 우위에 있다고 평가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4월1일 「동아일보」가 창간 77주년 기념특집으로 발표한 역대 대통령 인기조사 결과는 많은 식자층을 놀라게 했다. YS의 인기가 박정희 전대통령보다 훨씬 떨어질 뿐아니라 심지어 전두환씨 보다도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대통령 중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압도적 다수인 75. 9%가 박정희 전대통령을 꼽았다. YS는 불과 3. 7%의 지지를 받아 6. 6%인 전두환씨 보다도 크게 적었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본 식자층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과거의 군사정권이 문민정부와 동일한 기준위에서 비교될 대상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이날 그런 조사결과 에 어이없어 하는 일반독자들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예컨대 전두환 정권시대 물가지수가 현재의 YS정부시대보다 훨씬 낮고 안정적이었다고 해서 그것에 점수를 더 줄 수 있느냐는 문제다.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독재정치 아래의 경제안정과 민주화가 진전된 문민정부 아래의 경제불안이라는 두 가지 삶 중 어느 편이 바람직한가는 그리 쉬 운 선택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YS가 과거 군인출신 대통령들보다 뒤지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정직성과 도덕성에 큰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 같은 YS의 정직성은 한보비리와 현철씨 비리의혹 이후 연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형국이다.


김현철수사 실종 위한 각본?
국회의 한보비리 조사청문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검찰은 4월11일과 12일 신한국당의 대통령선거 예비후보 중 한 명인 金德龍의원과 국민회의의 2인자 金相賢 지도위원회 의장,역시 자민련의 실질적 2인자인 金龍煥사무총장을 소환 조사했다. 이어 검찰은 집권세력에 속하는 신한국당 민주계 신진들인 朴鍾雄 朴成範 羅午淵의원과 정계 원로세대로 민주당 상임고문인 李重載의원 등을 소환했다. 중량감있는 여야의원들과 집권여당의 유망주들이 줄줄이 한보비리 의혹을 받아 검찰로 불려 들어가자 정국은 일거에 정치권 비리수사라는 태풍에 휩싸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여론층 일각에서는 『김현철의 한보비리 연루와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수사는 어디로 사라졌느냐』며 『국민의 눈과 한보비리에 대한 분노를 유명 정치인에 대한 수사쪽으로 돌려놓으려는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유있는 의심이었다. 왜냐하면 김현철씨에 대해 한보비리 이외의 국정개입이나 탈법 권력행사 같은 죄목으로는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이 여권핵심부의 방침이라는 보도가 이미 한보청문회 이전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李會昌 신한국당 대표는 지난 3월 대표취임 직후 김현철씨 문제에 대해 『법대로 한다』고 언급,역시 대쪽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풀이가 나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전 망에 불과했다. 그가 말한 『법대로 한다』는 것은 『한보비리를 수사하는 것 이외의 별건으로 김현철씨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여권핵심부의 시국대처 방안을 의미했다는 쪽으로 정리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회창 대표의 대쪽 성격을 홍보하는 사람들은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즉 처음 이 대표가 『법대로』를 말했을 때는 YS와 합의한 대로였다. 그후 그 말의 뜻 이 청와대내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별건 구속은 안된다는 방침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법대로 한다는 내부합의를 두고 당을 대표하는 이대표와 김현철씨의 가족을 싸고 도는 청와대핵심부의 속셈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법대로』를 언급한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부자지간의 문제인데 구속은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방향전환의 말을 기자들 앞에서 내놓았다. 이것이 김현철씨에 대한 별건구속 불가방침이라는 여권핵심부의 기류에 대해 뒤늦게 감을 잡은 이대표의 정지작업이라는 풀이가 정설이 됐다.

이어 4월 1일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다. 그동안 웬만한 영수회담 요구에도 냉담하던 김대통령도 흔들릴 대로 흔들린 국정을 추스르기 위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기선을 잡 은 경제영수회담에 응했다. 여당에서 김대통령과 이회창 대표,야당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참석한 영수회담은 초당적 경제살리기를 발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여야영수 회담을 머리기사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영수회담을 제치고 대신 한보비리 문제를 톱기사로 올렸다. 여권 고위인사들은 한보비리가 터진 이후 언론을 공격하지 못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일제히 이런 보도방침을 비난했다.

4월2일 오전 청와대의 한 핵심당국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언론사 이름을 들어가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영수회담으로 모처럼 분위기가 잡혀가는데 왜들 그러 는지 모르겠다』면서 『대통령선거자금 조성의혹 기사가 영수회담 기사를 밀어낼 만큼 중요하단 말이냐』고 언론의 보도방침을 성토했다.

또 高建 국무총리도 그 다음날인 3일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보사태가 검찰의 재수사와 경제살리기 여야영수회담 등으로 정리돼가고 있는데 언론만 문제다』라고 말했다.

고 총리가 이날 『김현철씨가 구속까지 돼서야 곤란하지 않겠느냐』면서 『언론이 좀 협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자 그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즉 비교적 탈정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고 총리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여권핵심부가 김현철씨의 처리방향을 이미 정해놓고 다방면으로 정지작업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돌았다. 야당인사들은 한보비리 및 김현철씨 비리의혹 수사에서 이같은 여권핵심부의 말바꾸기 뿐 아니라 정치인소환이 YS를 최대의 정직성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인 소환조사가 김현철씨 수사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려는 것이며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하던 공작 냄새마저 풍긴다는 것이다.


가능성 없는 혐의 골라 수사
일반국민들은 그가 지난 2월25일 한보사태에 대한 대국민담화에서 내놓은 김현철씨 문제의 해결책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YS에게서 볼 수 없었던 워낙 인상적인 사죄 태도여서 무언가 특단의 후속조치가 나오리라고 믿어지기도 했다. 당시 YS는 『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당연히 응분의 사법적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전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 「취임 4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면서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저자신의 불찰』이라고 사죄했다.

그후 정부는 한보비리 수사를 맡은 대검 중수부장을 YS의 고교후배인 PK출신 崔炳國검사장에서 서울출신인 沈在淪검사장으로 교체하고 한보비리에 대한 사실상의 재수사 에 착수했다. 그러나 김현철씨의 「세도권력형」 비리의혹은 한번 터져나오자 한보사태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이 청와대의 핵심요직인 정무수석비서관실 등에 상당 수 포진돼 있었으며, 그중 한 명은 아무런 발령근거도 없이 무적(無籍)근무한 사실이 밝혀졌다. 공직자로서 신원조회나 자격검증도 안 거친 민간인이 대통령 아들의 측근 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 공직의 최고핵심부서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 그가 내각의 각료를 비롯,군부 검찰 금융권 등의 인사에 개입했다는 증언들이 꼬리를 물었다. 30대중반에 불과한 대통령 아들의 겁없는 국정농단에 수그러든 것처럼 보였던 국민의 공분(公憤)은 재발했다. 그때 검찰은 김현철씨의 한보비리 연루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신청한 朴泰重씨 자택의 압수수색 영장에 『김현철씨가 친구인 박태 중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보그룹으로부터 2천억원의 장비구입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혐의』를 기재했다. 모든 언론이 김현철씨의 2천억원 리베이트 수수설을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일반국민들은 경악했다. 각계의 원로들도 김대통령의 하야(下野)와 국정표류 위험을 우려했다. 그러나 검찰수사에서 2천억원 리베이트설은 밝혀지지않았다.

그제야 일각에서는 2천억원 리베이트 혐의라는 영장내용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현철씨의 리베이트설은 증권가의 루머였다. 증권가의 루머 중 태반이 허무맹랑한 헛소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검찰의 영장에 기재된 2천억원이라는 수치는 돌아다니는 루머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액수라는 것. 이에따라 상당한 정보 를 갖고 정밀한 수사를 펴는 검찰이 어떻게 가장 근거가 약한 루머를 영장에 기재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리베이트나 중간거래 수수료를 잘 아는 업계인사들은 『한보의 장비 도입총액이 수조원이라고 해도 거기서 2천억원의 리베이트를 얻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고 했다. 업계인사들은 이번 수사에 대해 『가장 근거없는 루머를 골라 수사함으로써 명확하게 무혐의 결론을 내려준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을 검찰의 문제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로 YS의 정직성 문제라고 연결짓는 것이다.


민주계 반발
그러나 2천억원 리베이트 의혹이 유야무야된 뒤에도 김현철씨의 인사개입 등 국정농단과 야당이 일관되게 제기해온 92년 대통령선거자금 수수설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상태다. 한보조사 청문회에서 야당의원들은 한보에 대출해주라고 은행에 압력을 넣었다는 洪仁吉의원의 배후에 도사린 「몸통」과 92년 대선자금 의혹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은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을 소환조사하기 시작했다. 12일 김덕룡의원등이 검찰에 출두하기 전 김의원을 비롯,민주계 중진 12명이 모인 대책회의에서 채택된 성명에는 아슬아슬한 표현이 담겼다.

『…우리는 최근 한보문제가 본질이 아닌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 소위 한보리스트의 비정상적인 유출에 의해 정치권 전체가 무기 력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며 집권여당이 이런 상황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함께 반성하고 앞으로 책임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회의에서 한보비리 등 최근사태의 주범인 몸통은 따로 있는데 깃털격인 민주계의원들을 마치 권력형부패의 중심인 양 부각시킨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많은 민주계 인사들이 검찰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핵심부가 무언가를 호도하기위해서 한보비리의 수사방향을 본질이 아닌 쪽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이들은 검찰수사의 방향이 애초에 김현철씨 쪽이었는데 한보청문회 도중 갑자기 정치인 소환조사로 바뀌었다며 그 시나리오에 사령탑이 있다고 주장했다.

수사의 흐름을 슬쩍 바꾼 각본의 사령탑을 찾는 민주계 인사들의 시선은 아직도 살아움직이고 있다는 김현철씨 주변과 YS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야당가 소식통의 분석 이다. 야당 인사들은 YS가 아들에 대한 사법처리 압력을 차단하려다가 끝내 정치권을 쑥밭으로 만들고 자신의 정치적 수족들인 민주계마저 궤멸시키는 자충수에 빠진 것 아닌가 보고 있다.

이번에 검찰에 소환된 민주계 의원 중 가장 크게 반발을 보인 김덕룡의원은 어두웠던 군사정권 시절 자신이 몸을 던져 모셔온 YS에 대해 서운함을 표시하는 것으로 정가에서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제기한 정치적 음모설은 집권여당 내부와 검찰 안기부 등에 포진한 PK(부산 경남)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YS의 핵심측근 중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자신의 대통령후보 경선가도에 브레이크를 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그러면서 그 PK들의 음모를 YS가 방조하는 것으로 본다는 얘기다.

김의원이 정권출범 초기부터 김현철씨의 해외유학을 직언하는 등 그를 YS의 곁에서 떼어놓기위해 애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런 직언을 하다가 YS부자뿐 아니라 PK세력으로부터 역공당한 김덕룡의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음모를 떠올릴 법한 일이다. 더구나 김의원은 검찰에 불려간 박종웅 박성범 나오연 의원 등이 모두 자신의 계보 에 속한다는 점을 정치적 음모설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김의원이 음모설을 강하게 토로하며 검찰소환에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던 4월11일 오후 YS의 그림자격인 청와대 金基洙수행실장이 프레스센터내에 위치한 김의원의 개인 사무실 덕린재(德隣齋)를 찾았다. 두 사람은 이날 20여분간 요담했다. 김 수행실장은 이른바 정통 상도동 가신 중 청와대에 남은 몇 안되는 핵심인물이다. 김의원의 경복고 후배로 YS가 야당정치인이던 시절부터 그 비서실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다. 따라서 이날 김실장은 김의원에게 YS의 의사를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밀사였다 . 그런 임무를 수행할 청와대 비서관을 찾는다면 정무수석이나 의전수석이지만 김의원의 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김실장이 여러모로 적임자였다.

이 자리에서 김의원은 YS의 속마음을 탐색했다. 그는 자신이 한보 돈을 받지 않았다면서 검찰에 소환되는 상황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의원은 또 이 와 관련해 YS와 면담을 갖고 직접 해명하겠다고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YS주변에서는 검찰조사 이전엔 곤란하다는 반응이었으며 이에 대해 김의원은 『어차피 정치 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는 마당에 내 갈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는 얘기들이 정가에 나돌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확보한 이른바 정태수리스트에는 신한국당 상임고문인 金潤煥의원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고문은 신한국당내에서 민주계와 함께 가장 응집력 있는 계파로 구여권을 대표하는 민정계의 리더이며 또한 TK(대구 경북)세력의 중심인물이다. 이렇게 되면 여야 각 정파의 실력자들이 모두 한보비리에 연루돼있다는 혐 의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셈이다. 즉 검찰수사를 지휘한 사령탑이 이것으로 국민에게 제시하고 싶은 것은 『영향력을 가진 거의 모든 인사들이 한보비리에 연루돼 있는 것이지 대통령 아들만의 의혹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검찰수사가 자신의 아들도 죄가 있다면 사법처리하겠다는 YS의 대국민담화를 정직하게 이행해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한보사태에 관한 검찰수사를 지휘하고 보고받는 사령탑은 YS일 것으로 믿고 있다. 정치인도 비리혐의가 있다면 수사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면한 최고의 비리의혹은 김현철씨에게 있으며 정치인의 자금수수는 그 의혹의 순위가 뒤로 밀려난다는 것이 항간의 여론이다. 상식선에서 보아도 정치인의 검은돈은 수시로 터진 바 있으나 대통령 아들의 비리의혹과 국정농단은 건국 이래 초유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등 야당인사들은 애초부터 YS의 정직성을 믿지 않는다. 야당 인사들은 YS가 정직성과 도덕성보다 「음모와 태도돌변의 정객」이라고 보고 있다.

YS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야권인사들은 90년의 3당합당을 예시한다. 당시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YS는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수차 비밀회동과 골프회동을 가진 끝에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합당했다. 총선거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여소야대(與小野大)국회가 만들어졌다며 3야당 공조로 군사정권을 압박해가던 야권은 YS의 태도돌변에 경악했다. 아무도 그가 군사정권의 여당인 민정당과 합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정치적 천재지변으로 일컬어지는 엄청난 사건이후 상황파악에 모든 관심을 빼앗긴 여론층은 당시 YS의 정직성과 도덕성을 본격 거론할 겨를이 없었다. 또 집권여당 세력의 강력한 대책 등으로 3당합당에서 보인 YS의 정략이 떳떳한지 여부를 따지기 어려운 여건이기도 했다.


「초원복집」 모의 가담자 중용
야당인사들은 또 YS의 정직성과 도덕성 붕괴를 92년 대선과정에서 찾는다. 그 첫째는 92년 12월11일 부산지역의 시장 검사장 경찰청장 안기부지부장 기무부대장 교육감 상공회의소의장등 기관장 등이 모여 여당후보였던 YS지지운 동 방안을 모의했던 초원복집 사건이다. 이들은 정부의 관계기관대책회의와 똑같은 방식으로 모여 YS의 당선을 위해서는 ▲지역감정을 자극해야 하고 ▲신문사 간부들을 매수,YS에게 유리한 편파보도를 하도록 하며 ▲상공회의소 등 민간단체가 유세장에 인력을 동원토록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모임을 비밀녹음했던 당시의 국민당 선거대책본부가 폭로한 참석자들의 육성녹음테이프에 따르면 특히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할 기관장 다수가 지역감정을 득표에 이 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YS는 집권한 후 이 초원복집 음모사건의 관련자를 요직에 중용했다. YS는 당시 대선과정에서 음모와 부도덕의 표본으로 지탄받은 이 사건의 관련자를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도덕성을 개의치 않는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 야권인사들의 얘기다. 대표적으로 초원복집 모의에 참가했던 朴一龍 당시 부산경찰청장은 YS가 집권한 후 서울경찰청장을 거쳐 경찰총수에 올랐으며, 경찰청장 임기가 끝난 뒤엔 안기부의 국내담당 책임자인 제1차장으로 중용됐다.

또 당시에 대선자금으로 YS진영은 모두 2백84억여원을 썼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이 야당인사들의 지적이다. 야당들도 물론 선거자금을 다 공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집권자들과 기업으로부터 수많은 비밀자금을 받은 여당후보 진영의 이런 선거자금 공언은 기본적으로 정직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시 YS와 민자당을 함께 했던 자민련의 한 중진의원은 『YS자신이 수수했다는 설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과 선거본부에 경제계로부터 엄청난 자금이 답지했다』면서 『YS진영의 92년 대선자금은 천문학적 규모』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최근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 나돈 「노태우가 YS에게 제공한 대선자금 내역서」라는 괴문서도 그런 설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 문서는 노 태우씨가 92년 대선에서 민자당후보인 YS에게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9천3백50억원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YS는 기자회견 등 수차에 걸쳐 노태우씨가 선거에서의 중립을 표방하면서 민자당을 탈당한 뒤론 그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일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괴문서는 노씨가 92년 9월18일 탈당하면서 3천억원을 민자당에 전달한 이후에도 ▲12월7일 YS대선자금을 여유있게 늘려주어야 한다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의 결정에 따라 1천억원을 주었으며 ▲92년 12월22일 YS의 대통령당선 축하금 6백억원 ▲93년 2월24일 정권인수 자금으로 2천억원 등을 건넸다고 폭로했다. 이 문서의 신빙성은 정가에서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 워낙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 수수의혹인데다 그 진상을 짐작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인 듯하다.


全·盧로부터의 통치자금 수수?
그러나 YS가 노태우씨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썼다는 것은 95년말 노씨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후 그의 아들 載憲씨측이 언론 접촉 등을 통해 증언함으로써 점점 확인된 사실로 자리잡아 왔다. YS가 96년초 기자회견에서 『노전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직접 받은 일이 없다』고 해명한데 대해 재헌씨는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며 심하게 반발했다.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도 야당측은 어쨌든 YS진영이 대선과정에서 구집권자들과 경제계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쓴 것만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도 한보사태의 몸통은 YS진영의 92년 대선자금이며 당시 한보가 6백억원을 YS의 선거자금으로 주었다는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자민련의 한 중진 인사는 『YS의 도덕성 문제는 그가 6월항쟁 이후 민주화를 허용해 정치적 평가가 괜찮았던 노태우씨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타기시됐던 전두환씨로부터도 상당한 통치자금을 받았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YS가 당선인사차 전두환씨를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갔을때 전씨가 대통령재임시의 경험담과 함께 상당한 통치자금을 건넸다는 소문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워낙 증인이 제한돼 있어서 규명되기 어렵지만 전씨의 성격으로 미루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야권인사들의 주장이다.

노태우씨나 전두환씨가 모두 개혁의 기치를 든 문민출신 대통령당선자 YS에게 돈을 주었다면 자신들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기위한 보험료의 성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민 시대 대통령임을 내세우면서 민심의 원한을 샀던 구체제의 집권자들로부터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받는 행위는 정직성과 도덕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95년 가을 YS가 전두환 노태우씨를 구속한 것은 분노한 국민여론에 밀린 조치였다. 사실상 YS는 민주계 핵심인 徐錫宰 전총무처장관이 비자금 4천억원설을 처음 언급했을 때 그를 해임하고 입을 막았다. 그 다음 야당의 朴啓東의원이 다시 이 문제를 국회에서 폭로하자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진상조사나 구집권세력에 대한 단죄를 거부했 었다. 그러다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불거지고 자신의 선거자금에 의혹의 불똥이 튀자 그는 말을 바꾸어 비리수사와 사법처리를 결단처럼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처음 그가 비자금폭로를 잠재우려 했을때 전두환 노태우씨로부터 받았다는 의혹을 산 정치자금이 보험료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人事가 萬事?
YS가 취임후 『앞으로는 외부로부터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데 대해서도 그 이면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정권 출범 이전부터 대규모의 정치자금을 확보 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냐는 것. 또 청와대가 대통령의 근검과 청렴성의 상징으로 내놓은 칼국수 식사라는 것도 사실은 YS가 평생 즐겨온 기호식에 불과하다. 그것을 돈 안받는 청렴성과 관계있는 양 홍보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의 대중조작과 무엇이 다르냐는 얘기다. YS가 야당시절부터 술을 즐기지 않으며 점심식 사 때면 이름있는 칼국수 비빔냉면 설렁탕집을 찾아다녔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도 철저한 건강관리상 육식을 피하고 칼국수와 시래기 된장국 같은 것으로 소식한다는 것. 그렇다면 70세를 넘어선 대통령이 건강관리상,또는 기호식으로 칼국수를 즐긴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설명일 것이다.

YS의 정직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야당인사들은 『인사가 만사』라고 공언해온 그의 인사내용을 지적한다. 자민련의 정책실 자료에 따르면 YS가 직접 결정했다고 볼 수 있는 차관급 이상 공무원의 출신지역별 비율(97년 2월 20일 기준)이 다음과 같이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 정부내 장차관과 외청장 등은 모두 103명이다.

▲부산 경남 33명(32. 0%)▲대구 경북 16명(15. 5%)▲충청16명(15. 5%)▲서울 14명(13. 5%)▲호남 12명(11. 6%)▲인천 경기 6명(5. 8%)▲강원 3명(2. 9%) ▲이북 3명 (2. 9%)

이 통계도 영남권은 부산 경남과 대구 경북으로 나누었으나 호남은 광주 전남과 전북식으로 나누지 않고 있어서 비교 기준이 영남에 유리하게 돼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 K(부산 경남)출신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거시적인 통계보다도 실질적인 핵심요직 현황에 있다. 즉 힘깨나 쓰는 자리는 모조리 YS의 경남고 후배나 동향출신자들로 채워진 것이다. 정부내 공직중 힘쓰는 자리인 안기부 ▲검찰 경찰 국세청 군부 등 5대부서의 요직은 PK가 아니고서는 넘겨다 보기 어렵다는 것이 관가의 상식에 속한다.

한보비리에 대한 검찰수사가 국민적 불신을 받고 그 실무책임자인 대검 중수부장이 교체된 것도 검찰요직을 모두 PK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체이전 검사장급 이상 검찰요직에 포진된 PK출신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검찰총장 金基洙(경남)▲대검 중앙수사부장 최병국(경남)▲대검 공안부장 주선희(경남)▲서울지검장 안강민(경남)▲서울고검장 한광수(부산)▲대전 고검차장 윤동민(경남)▲제주지검장 박주환(경남) 여기다가 안우만 법무장관도 PK로 YS의 경남고 후배다.

다음으로 경찰요직을 보면 총경급 이상 전체 경찰간부 4백77명 중 PK출신이 1백11명으로 23. 2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비례로 보더라도 다른 지역에 비해 2~5배 이상 편 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최고위직인 치안정감 이상의 경우 전체의 절반을 PK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총경급 이상 경찰간부의 출신지역 현황은 다음과 같다. (96 년 8월 현재) ▲부산 경남 23. 27% ▲대구 경북 20. 54% ▲서울 14. 89% ▲광주 전남 11. 5% ▲대전 충남 8. 3% ▲전북 6. 9%

안기부 역시 자민련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YS집권 후 PK출신이 조직과 정보관리를 장악했다. 즉 현재의 權寧海안기부장은 포항출신으로 PK주변지역이지만 ▲박일룡 제1차 장(경남고) ▲鄭亨根 전제1차장(경남고. 현 신한국당의원)▲黃昌平 전제1차장(경남고. 보훈처장 역임) 등 PK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또 재벌과 정치자금의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국세청장 자리도 YS정권 아래서 PK가 아니고서는 갈 수 없었다. 경남고 출신 秋敬錫청장이 정권 상반기에 맡고 있다가 건설교통부장관으로 영전했으며 그 후임을 부산고 출신인 林采柱 현청장이 이어받았다. 국세청 차장 자리마저 관례를 무시하고 경남 김해 출신인 이석희 국장을 전격 발탁해 내부비판이 컸다고 자민련의 정책자료는 밝혔다.

더구나 정치적 색채로부터는 독립적이어야 할 군부도 과거 전두환 노태우씨의 하나회가 휘두르던 인사전횡을 PK가 대신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부산고 출신인 윤용남 육군대장은 3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참의장에 오르면서 YS정권 아래서 군안팎의 인사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했다. 해군의 경우 지난 3월말 역시 PK출신인 柳勝男제독이 경력면에서 객관적으로 앞섰으나 TK인 林台燮전합참차장을 누르고 참모총장에 올랐다. 임 제독은 중장진급에서 유 제독보다 앞섰으며 해군작전사령관등 주요보직에서 선임자였다. 또 YS가 발탁한 金鴻來 전공군참모총장은 거제도 출신으로 YS와 같은 면에서 살았다. 현재의 李光學 공군총장은 김현철씨의 장인과 사돈지간이다.

군인사에서 PK독식 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96년7월 기준의 다음과 같은 중장급 지휘관 현황을 보면 문제가 심각함을 알게 된다.

총 13명의 중장급 지휘관 중 ▲특전사령관 정영모(경남) ▲기무사령관 임재문(경남)을 비롯, 무려 과반수인 7명이 PK 한지역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YS가 언필칭 『인사가 만사』라면서 능력위주 발탁으로 공정한 인사를 하겠다고 표면상 공언하면서 속으로 지연과 정실위주로 PK편중인사를 해온 것은 위선적이고 국민을 속이는 부정직한 모습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김현철씨의 개입의혹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다.


空約
인사 외에도 YS는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깨끗한 정치,강력한 정부」를 내걸고 『지역간 계층간 갈등을 해소하여 국민대화합을 이룩한다』 『지방자치 기반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내실화하여 지방화시대를 연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YS정부가 지금까지 펴온 정책들을 검증해보면 이같은 공약에 비추어 정직하지 못한 행위였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 불가항력 때문이 아니라 약속불이행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을 갖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에 연유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정부가 94년부터 97년까지 국토 지역개발공약 이행을 위해 편성한 신규투자사업비 내역을 보면 YS의 출신지가 역시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부산 경남 9조5천992억원(44%)중 2천5백87억원 집행 ▲대전 충남북 5조3천3백35억원(25%)중 1천4백90억원 집행 ▲대구 경북 4조85억원(18%)중 862억원 집행 ▲전남북 2조8천76억원(13%)중 집행액은 전무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지원하는 특별교부금 내역을 보면 지역균형 개발과 지방화 시대 준비라는 공약은 허구였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96년 9월 5대 광역시의 자치구 평균 특별교부금도 부산지역에 다른 곳보다 평균 3배이상이 지급됐다.

▲부산 15억 1천2백만원 ▲대구 9억 8천6백0만원 ▲인천 5억 6백만원 ▲대전 4억 5천6백만원 ▲광주 4억 1천6백만원

YS가 공언한 것 중 사정변경때문에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된 경우로 정상참작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는 선거유세 때 『쌀 수입은 대통령이 되면 그 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93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국제압력으로 쌀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경우 YS가 분명히 식언했고 야당의 정치공세 대상은 되겠지만 그것으로 정직성이나 도덕성을 따지기는 무리다. 또 그는 선거유세 과정에서 몇차례나 『대통령 퇴임 후 상도동 집에 그대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전에도 그는 언론과의 회견 등에서 『정치하면서 재산을 늘린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라며 『대통령이 된다면 상도동 집을 증개축하지 않고 퇴임 후 그대로 들어가 살겠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96년 청와대는 YS의 상도동 사저를 개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도 엄밀히 따진다면 공인으로서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어기는 행위다. 그러나 그것이 불순한 비도덕 성이나 부정직 행위라고 따질 정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나 측근세력의 이기적 소리(小利)를 탐하여 대의와 국민의 눈을 속였느냐의 여부다. 말을 바꾸더라도 당초의 여건과 다른 사정변경이 생겨서 공개적으 로 당당하게 한다면 그다지 부도덕한 행위라고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YS에 있어서 정직성과 도덕성의 문제는 자신의 92년 대선자금 문제 외에 아들 및 상도동 가신 (家臣),PK출신 등 측근세력의 인사전횡이나 비리의혹과 깊이 관련돼 있다.

洪仁吉의원이나 張學魯 전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YS의 안방살림을 꾸려온 집사들이다. 거기다 역시 한보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金佑錫 전내무장관이나 黃秉泰 국회재경위원 장은 YS의 정치적 수족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YS가 『나는 취임 이후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받았다』고 계속 역설한다면 이는 상당히 우스운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직 대통령과 관련된 의혹을 파헤칠 특별검사제 같은 제도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정직성을 검증할 방법은 달리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정직성과 도덕성도 어차피 퇴임 후에나 정밀하게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로 미루어 YS의 깜짝결단이나 태도돌변의 대상은 몇가지가 남아있다. 그 첫째가 4월18일경 서울에 들어올 黃長燁 북한 노동당비서의 진술이다.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나 다른 발언이 얼마나 큰 바람을 일으킬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는 안기부의 독점적 관리에 맡겨질 것이며 안기부는 YS의 의중대로 움직여 나갈 가능 성이 크다.

두번째로 YS의 정치적 복안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의 과제는 내각제와 개헌 여부다. YS가 지금까지 내각제 반대와 임기중 개헌불가를 누차 강조해왔지만 여권의 일부 고위인사들은 정치9단인 그의 현실적 판단에 따라서는 언제 태도가 돌변할지 모른다고 얘기하고 있다. 즉 지금 현실적으로 신한국당 의원들도 상당수 내심 내각제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현철씨 사건이후 많은 여당의원들이 권력집중적인 대통령제 아래서 정치적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고 있어서 내각제 선호자들이 부쩍 늘었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을 Y S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어렵지 않게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전망이 만만치 않다.

이런 정치적 변화상황은 정직성과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여당의원들이 지금까지 YS가 걸어온 행동양식으로 미루어 이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김재홍<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문민정부(1993∼1997) 임영태의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발췌한 것임





문민정부 개괄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고, 1993년 2월 25일 정식으로 김영삼 정권이 출범했다. 김영삼 정권의 출범으로 1961년 5·16쿠데타 이후 30년간 지속되어온 군부지배는 끝났다. 김영삼 정권에 붙인 이름은 제몇 공화국 대신 '문민정부' '30년만의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은 이런 이름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담았다.
문민시대의 개막은 한국정치가 군부정권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역대 군부정권과는 달리 더 이상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권도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것은 우선 야당 출신이었던 김영삼이 1990년 3당합당으로 여당의 당대표가 되었고, 거기에 기반해서 정권획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김영삼 정권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출발했다. 말하자면 문민정부는 군부정권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타협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도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그가 41.4%라는 비교적 높은 지지율과 호남·서울지역을 제외한 전국 각 지역에서 1위의 고른 지지를 받았으며 33.8%를 얻은 차점자인 김대중 후보와 1백93만6천48나 되는 『『문민정부』』표차를 보였지만 호남지역에서는 불과 4.0%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던 것이다.
문민정부는 '신한국 창조'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그를 실현하기 위해 '안정'과 '개혁'이라는, 어떻게 보면 다소 이율배반적인 목표를 동시에 들고 나왔다. 김영삼 정부가 '안정'과 '개혁' 가운데 먼저 선택한 것은 '개혁'이었다.

문민정부의 국정지표
* 신한국 창조
*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 건강한 사회
* 통일된 조국

'개혁'의 첫 신호탄은 정권 출범 이틀 후인 1993년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의 재산공개와 정치자금 안 받기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윗물맑기 운동'으로 불리는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와 정화운동은 1993년 5월 20일 여야 합의로 「공직자 윤리법」을 제정함으로써 일단 제도화에 성공하였다. 이 법에 따라 3만3천명의 고위공직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공개해야 했고, 그 가운데 일부 공직자들은 국민과 여론의 심판을 받고 공직에서 사퇴하거나 당으로부터 자체 징계를 받아야 했다.
사정정국으로 과거의 인적청산을 이룬 김영삼 대통령이 다음에 착수한 제도개혁은 금융실명제와 정치관계법의 개정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였고, 1994년 3월 4일 여야는 '돈 안 드는 선거'를 목표로 통합선거법, 지방자치법, 정치자금 등 일련의 정치관계법을 개정하였다. 이로써 개혁은 인적청산을 넘어 제도개혁 단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집권 2년째인 1994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의 독단적인 정치행태가 문제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행태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부라는 국가기구는 제쳐두고, 국민과 민주세력의 지원도 거부한 채 혼자서 개혁의 칼춤을 추고 있었다. 심지어 야당도 국정의 파트너로 상대해주지 않는 오만을 부렸다. 게다가 둘째 아들 김현철과 청와대 비서진 등 일부 측근의 음지에서 행해지는 막강한 권력행사와 부정비리도 문제였다.
한편 이때부터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서해에서 훼리호가 침몰하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기차가 전복되고, 건물이 붕괴하고, 다리가 줄줄이 무너졌다. 또한 국민의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챈 세무공무원 비리가 속속 드러났으나 상부는 그걸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대형 사건과 사고들이 연일 일어났지만 거대한 공룡조직 관료체제는 복지부동으로 일관했고, 김영삼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국가행정 전반의 난맥상과 마비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행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김영삼 대통령은 '중단없는 개혁'을 외쳤지만, 국민들은 등을 돌리고 말았다. 더욱이 이런 와중에서 김영삼 정권의 실정을 틈타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점차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재벌과 보수언론,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발목잡기는 집요하게 진행되었고, 김영삼 정부는 효과적인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종합하여 1995년에는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국민회의의 창당, 민자당에서 밀려난 김종필의 자민련 창당으로 신3김 시대를 낳게 하는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1995년 6·27지자제 선거에서 민자당의 참패 이후 김영삼 정권의 개혁은 사실상 끝났다. 지자제 참패와 국민의 지지도 하락을 문민정부의 독선과 실정에서 찾지 않고, 과거 회귀로 보수세력에 영합함으로써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김영삼 정권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다름없는 대대적인 탄압,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 등으로 보수회귀를 뚜렷이 드러냈다.
한편, 1995년 10월에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5, 6공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시작되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을 포함해 12·12와 5·17의 주역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이름으로 처벌받는 등 한국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집권여당은 1996년 4·11 국회의원 총선에서 1995년 지자제 선거의 패배를 만회하고, 재집권을 위한 정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1997년 1월 23일에 터진 한보사건은 정국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놓았다. 이 사건으로 문민정부의 도덕성은 치명타를 입었고, 김영삼 대통령의 정국 장악력이 결정적으로 떨어졌다. 그후 신한국당은 대통령 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을 계속하다가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떨어져나가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반면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의 DJP연합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후보단일화에 성공했다. 결국 1997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에 의한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꿔 출마한 이회창 후보를 40여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승리함으로써 50년 만의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결말은 비참하게 끝났다. 무엇보다도 1997년 말에 불어닥친 외채 위기와 그로 인한 IMF체제는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만큼 국민과 나라에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로써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겨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파탄의 책임자로서 영원히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물론 공직자 재산공개, 지방자치제의 실시, 군의 개혁, 교육·사법 개혁, 그리고 정치개혁 등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5년간의 개혁적 성과도 적지 않지만 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엄밀한 평가는 좀더 시일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1. 문민정부의 성립과 개혁 드라이브



1) 문민정부의 성립과 성격



1992년 대통령 선거와 문민정부의 출범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군인 출신이 배제된 가운데 민간인 정치지도자간의 대결로 치러졌다. 이것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30년만의 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제14대 대선은 그 나름대로 역사적 의의를 가진 선거였다.
대선은 민자당 후보 김영삼과 민주당 후보 김대중의 양자대결 구도를 기본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와 신정당의 박찬종 후보가 다크호스로 가세했다. 김영삼 후보는 과거 야당 시절의 명망성에다 여당의 프리미엄으로 가장 폭넓은 조직기반과 풍부한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1990년 3당합당 이후 대권후보를 둘러싼 민자당의 끝없는 내분과 쟁투를 극복하고 1992년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민자당 탄생 이후 내각제 각서파동, 월계수의 박철언과의 권력투쟁, 노태우 대통령과의 끊임없는 마찰, 민정·민주·공화의 계파 싸움 등으로 여러 번 위기를 맞았지만, 그 특유의 돌파력과 대세론으로 결국 대권후보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그도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불공정 경선이라는 비판 끝에 이종찬계가 탈당해 새한당을 거쳐 정주영의 국민당에 합세했고, 박태준 최고위원과 박철언도 탈당했다. 노태우 대통령과도 계속되는 불화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영삼 후보는 기존 여당조직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재벌과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보수 언론으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등 여당 후보가 누려야 할 프리미엄을 충분히 누렸다.
김대중 후보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많은 국민들과 민주세력, 그리고 3당합당을 거부한 정통야당의 대표로서 정권교체를 위해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3당합당 이후 평민당을 이끌며 거대여당과의 줄기찬 투쟁을 계속하면서 일차로 재야세력을 흡수한 뒤 1991년 4월 신민주연합당을 창당했다.
1991년 9월에는 신민주연합당과 꼬마 민주당의 통합을 성사시켰으며, 1992년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야당과 재야민주세력을 대표하던 전국연합의 지원을 받는 야당 단일후보였다.
그는 역대 군부정권의 심각한 지역분열 공작과 용공음해 때문에 지지기반의 확대에 심각한 장애를 받고 있었으며, 자금면에서도 여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중립내각이라고는 했지만 관권개입과 금권살포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다. 여기에 정주영 후보가 등장함으로써 대선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정주영의 지지도가 올라갈수록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김영삼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신한국 창조' '안정과 개혁'을 내걸었고, 김대중 후보는 '대화합의 정치' '지역간, 빈부간, 도농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위화감과 적대감 해소'를 중점 사항으로 내걸었다. 정주영 후보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민부의 시대' '경제대국과 통일한국'이었다.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했다. 최종집계 결과 김영삼 후보 997만여 표로 41.4%, 김대중 후보 804만여 표로 33.4%, 정주영 후보 388만여 표로 16.1%, 박찬종 후보 151만여 표로 6.3% 등이었다. 김영삼 후보가 194만여 표의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예상보다도 많은 표 차이였다.
이번 선거에서도 승패를 가른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역감정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부산에서 72.6%, 경남에서 71.5%, 대구에서 58.9%, 경북에서 63.6%를 얻은 반면, 김대중 후보는 광주에서 95.1%, 전남에서 91.1%, 전북에서 88.0%를 얻었다. 그렇지만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영호남 지역에서 벌인 격차는 130여만 표나 되었다. 민자당과 집권세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자극했고, 그것은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이를테면 '초원복국집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로써 지역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선거에서는 국민들의 보수적인 경향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이념적 보수화 경향, 그리고 경제불황과 이로 인한 기업의 도산과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생활상의 압박 등으로 중산층의 안정희구 심리가 강화되었고, 그것은 투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걸 반영하는 것이 전통적인 여촌야도 현상의 약화와 대도시 아파트 지역에서의 여당 지지표 확산이었다.
14대 대선의 특징 가운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느 때보다도 언론의 역할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역대 선거에서도 신문이나 방송의 역할은 매우 컸으며 대부분의 보수언론은 여당 편들기를 암묵적으로 진행했지만, 14대 대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졌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안기부의 공작과 지역감정 조장이었다면,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지역감정과 야권분열이었다. 반면 1992년 김영삼의 승리의 일등공신은 지역감정과 보수언론이었다.
언론의 김영삼 지원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김영삼의 부각과 '김대중 죽이기'였고, 또 한 가지는 '정주영 죽이기'였다. 전자는 교묘한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후자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보수언론, 특히 일부 신문들은 대선을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자구도로 몰아가면서 정주영을 까내리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왜냐하면 정주영의 표가 떨어지면 김영삼의 표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해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는 듯하면서도 색깔론 시비 등으로 중산층의 보수적 안정희구 심리를 자극하면서 김영삼을 지원했다.
14대 대선에서는 선거형식에서도 많은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직접적인 선거 유세는 가장 중요한 선거운동 방식이었지만, 각종 여론조사와 광고, TV유세 등이 가능해짐으로써 매스미디어 선거의 초기 양상이 나타났다. 후보자간의 텔레비전 토론은 김영삼 후보의 반대와 방송국의 방조로 무산되었지만, 선거 방식의 변화는 이후의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가 되었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후보의 당선은 그 자체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거가 공명하게 치러졌으며, 선거 결과 30년 만에 민간인 출신의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정식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연보


1927. 12. 30 - 경남 거제군 장목면 출생
1947. - 경남고등학교 졸업
1951. -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
1954. - 3대 민의원 당선(거제, 자유당)
1965. - 민중당 원내총무 겸 대변인
1967. - 신민당 원내총무
1970. 9. -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실패
1974. - 신민당 총재 취임
1979. - 신민당 총재 취임
1980. - 5·17과 함께 가택연금
1983. 5. 18. - 23일간의 단식 투쟁
1984. 5. -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 대표 취임
1987. - 민주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 지명
1987. 12. 16 - 13대 대선 낙선
1988. - 민주당 총재
1990. -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2. 5. -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92. 12. - 14대 대통령 당선




30년만의 문민정부, 그 의의와 한계


기대 반 우려 반. 김영삼 정권의 출범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을 정리하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다수는 기대쪽에 걸었지만 우려를 표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우려를 표명한 사람들은 대략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보수적 위치에 있는 기득권 세력이었고, 또 한 부류는 개혁적 위치에 있는 민주세력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는 너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위험이 있었고, 민주세력의 입장에서는 3당합당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민주화와 개혁을 성사시키지 못할 위험성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 5년이 지난 오늘 평가해 보면 양측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더구나 김영삼 정권은 일관된 정책적 태도를 견지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보수세력과 개혁민주세력의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김영삼 정권은 7공화국이라 불리지 않고 '문민정부'라고 불린다. 문민정부란 군부정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의 중추가 군부출신이 아니라, 민간인에 의해 장악됐다는 의미 외에도 권위주의적인 역대 군부정권과는 달리 민주적인 정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김영삼 정권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과반수의 지지를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 정권이었다. 또한 군부 숙정과 12·12와 5·17에 대한 역사적 단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그리고 정치관계법의 개정과 사법개혁·행정개혁 등 일련의 개혁 조치를 통해 많은 부분에서 군부시대의 권위주의적 유산을 청산하였다는 점에서는 김영삼 정권을 문민정부라 부르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한 문민정부가 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한계는 첫째 3당합당으로 국민의 뜻을 배신한 변절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점, 둘째 집권과정에서 지역감정과 색깔론 등 정당성이 결여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점, 셋째 김영삼 정권이 기득권세력에게 포위되어 있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세력이 개혁을 담당했다는 점 등이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군부정권과 그 대변기구였던 민정당의 정치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던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광범위한 민주개혁 세력의 결집이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권력의 중추였던 민주계는 민자당 내에서 소수로서 보수 기득권 세력에게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반발과 도전을 물리치고 민주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와 민주계 외의 광범위한 민주개혁 세력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철저히 거부했다. 국민과 민주세력을 개혁에 동참시키기보다는 철저히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 특히 야당에 대해서는 김대중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해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 결과 김영삼 정부는 보수세력과 야당을 비롯한 민주개혁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둘째, 튼튼한 개혁주체 세력과 일관된 개혁프로그램의 준비이다. 개혁은 혁명과는 다르나 점진적이지만 기존 질서의 개조와 변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기득권 보수세력의 저항은 필연적이다. 이런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뚫고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개혁을 일관되게 밀고나갈 중심과 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개혁주체는 좁게는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 등의 참모진, 내각과 당이 될 것이고, 넓게는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든 민주세력과 전체 국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민자당은 개혁의 주체가 되기보다 대상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집단이었다. 그리고 내각 역시 행정집행부로서 개혁의 방향타를 잡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개혁의 핵심주체는 대통령과 참모조직인 청와대비서실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참모조직은 개혁적 성향과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결과 참모진은 대통령이 개혁을 일관되게 밀고갈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보좌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공적 조직보다 김현철의 사조직에 의한 국정농단을 방치함으로써 관료조직의 복지부동과 눈치보기만을 부채질해 국정의 마비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후보로 지명된 이후 이른바 전병민이 이끄는 '동숭동 팀'을 가동해 집권후의 개혁 청사진을 준비하였다. 이 개혁 프로그램은 "연인원 5백명에서 6백명 가량의 교수, 정부연구기관 및 민간연구소 연구원과 공직자가 동원되었고, 반년 가까이 토의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이걸 소화할 능력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총 2백36개의 개혁 과제를 담은 방대한 동숭동 팀의 개혁안, 그리고 내용 면에서 매우 획기적이었던 개혁플랜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 가운데 일부 내용은 김영삼 대통령의 '반짝 아이디어'로 가끔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셋째, 지식인 그룹과 언론, 그리고 국민들에 대한 효과적인 홍보와 설득이다. '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개혁은 혁명과는 달리 기존의 질서를 하루아침에 뒤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씩 하나씩 점진적으로 바꿔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혁명이 물리력과 강권을 기본으로 하고 설득을 부차적인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개혁은 설득을 기본으로 하고 공권력을 부차적인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때문에 그 변화와 개혁의 과정은 국민에 대한 상당히 끈질긴 설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이것을 하지 못했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대통령 혼자서 뛰고, 김영삼 대통령은 인기에 연연해 '깜짝 쇼'를 연발하면서 즉흥적으로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정책은 일관성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하였다. 국민들은 국외자로 남았고, 민주개혁세력으로부터도 야당으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종합된 결과 '안정과 개혁'을 기치로 내세웠던 김영삼 정부는 결과적으로 안정에도 개혁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의 문민정부로 만족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가 이런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민주정부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정권의 탄생과정에서부터 배태된 한계가 바탕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른바 태생적 한계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의 자질과 식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통치철학의 부재가 더 큰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문민정부의 개혁 드라이브



공직자 재산공개와 '토사구팽'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문민정부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이날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신한국 창조를 새 정부의 국정지표로 내세웠다.
그는 신한국은 "보다 자유롭고 성숙한 민주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 "문화의 삶, 인간의 품위가 존중되는 나라" "갈라진 나라가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사는 통일 조국"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나라" "누구나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 후손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나라"라고 하면서 그를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였다.
문민정부 개혁은 공직자 재산공개로부터 시작되었다. 취임한 지 이틀 후인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문민정부는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므로 이런 때를 맞아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담당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재산공개 회오리가 신춘정국을 강타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 가족의 재산을 17억 7천822만원이라고 공개한 뒤, 3월 6일 황인성 국무총리(22억 9천8백만원), 이회창 감사원장(15억 5천만원), 민자당 김종필 대표(24억 4천만원), 최형우 사무총장(5억 1천만원), 김종호 정책위원장(16억 8천만원), 김영구 원내총무(27억 3천만원)가 재산을 공개했다.
이어 이경식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해 장관급 29명과 수석비서관급 11명의 재산이 공개되었고, 22일에는 민자당 당무위원 및 소속의원 161명의 재산이 공개되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4월 4일 재산을 공개했다.
재산공개는 곧바로 태풍을 몰고왔다. 박양실 보사부장관과 허재영 건설부장관, 김상철 서울시장이 부도덕한 축재시비에 휘말려 사퇴했다. 또한 민자당 의원들의 재산공개는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우선 평균재산이 24억 8천278만원으로 민주당 의원들의 14억여원보다 훨씬 많았다. 민자당 의원 가운데는 100억원이 넘는 거부만 해도 8명이나 되었다.
재산공개로 민자당 의원들의 막대한 축재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투기 등의 부도덕한 재산증식에 대한 언론의 폭로가 잇따랐다. 재산공개가 정치문제로 비화되자 민자당 최형우 사무총장은 '재산공개 진상파악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물의를 빚은 의원들에 대한 숙정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유학성·김문기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박준규 국회의장과 임춘원 의원은 민자당을 탈당했으며 정동호 의원은 제명조치 되었다. 또한 이원조·금진호·조진형·김영진·남평우 의원은 공개경고를 받았다. 끝까지 사퇴를 거부하던 박준규 국회의장도 결국 사퇴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사퇴하면서 '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를 잡고 나니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뜻의 중국 한나라 때 고사)이라는 세간의 유행어를 남겼다.
재산공개의 파문은 정부에도 영향을 미쳐 정성진 대검중앙수사부장, 최신석 대검강력부장, 조규일 농림부차관, 강신태 철도청장, 강두현 경찰위원회 상임위원 등 차관급 5명이 옷을 벗었고, 10명이 경고를 받았다. 민주당도 재산공개로 일부 의원들이 비난을 받았지만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1차 재산공개는 법적 근거가 없이 이루어져 '인치人治'라는 비난이 제기되었고, 이에 여야는 5월 20일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마련해 법적 기반을 정비했다. 개정된 공직자윤리법은 재산등록 의무자를 4급 이상 공직자, 재산공개의무자를 1급 이상 공직자로 규정하고, 허위등록 혐의가 있을 경우 사안에 따라 경고 및 시정조치하거나 2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일간신문 광고 등을 통한 허위등록 사실 공고, 해당 기관장에 징계 요구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된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9월 7일 제2차 재산공개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기관별로 일제히 이루어졌다. 공개 대상자는 입법부가 국회의원을 포함해 325명, 사법부가 103명, 행정부가 709명, 헌법재판소가 11명이었다.



그런데 재산공개 결과는 놀라웠다. 재산 공개자 1167명이 전국 각지에 소유한 대지 임야 전답 등 토지는 모두 4천9백여만㎡(1천480여만평)로 서울 여의도(80만평)의 18배에 달했다. 이들이 소유한 토지를 가격으로 따지면 대략 6천여억원으로 1명당 평균 5억 1천만원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토지 5천4백여건 가운데 35%가 넘는 1천9백여건이 서울, 경기, 제주 등 투기성이 높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국민들에게는 여간 충격이 아니었다. 부동산 공화국의 실상을 한눈에 본 셈이었다. 또한 재산 공개자들이 소유한 상가와 오피스텔, 빌딩 등 비주거용 건물은 모두 800여동이었고, 단독주택·아파트 등 주택은 모두 2천여채로 1명당 평균 1.9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2차 재산공개로 공직사회에 또다시 숙정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9월 10일 김덕주 대법원장이 '판사들의 부동산 과다보유에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를 선언하였다. 재산공개를 계기로 법관들의 도덕성이 집중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는 박노영 치안비서관과 정옥순 여성담당비서관이 투기의혹으로 사퇴하였으며, 민자당 의원과 정부 공직자에 대한 숙정작업도 진행되었다. 정부에서는 투기의혹이 짙은 1급 이상의 공직자 21명을 인사조치하고 33명에 대해 경고 조치하였다. 민자당에서는 이학원·박규식 의원을 제명하고, 김동권 의원은 당권 정지 6개월, 정호용·김영광·남평우·윤태균·이현수 의원 등 5명은 비공개 경고했다.



문민정부의 '화려한 출발'


김영삼 대통령은 2월 27일의 재산공개 선언 이후 3월 4일에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대통령의 정치자금 수수거부 선언은 그대로만 실천된다면 정치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동안 한국정치는 금권과 관권이 결탁한, 참으로 부패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의 정치자금 수수는 당연한 관행처럼 되어왔다. 권력은 곧 돈이요, 돈은 곧 권력이라는 등식은 비단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권력과 자본의 유착 정도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 규모를 일반인들이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천문학적인 숫자를 알 방법이 없었다. 일반인들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1992년 대선을 통해 선거과정에서 여당이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를 두 눈으로 실감했던 것이다.
김대통령의 정치자금 수수거부 선언은 재산공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김영삼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결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른바 '윗물맑기 운동'으로 불리는 위로부터의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는 부정부패가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들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국민의식 차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자금 거부 선언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히 드러났다. 이렇게 되니 자연 사회적으로 사정한파가 몰아칠 수밖에 없었다. 통치권자가 분명한 의지를 천명한 마당에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정화작업과 숙정, 그리고 사정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민들 보기에 민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공개로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정치인들이 숙정되는 것과 더불어 감사원과 검찰의 사정 바람에 숱한 사람들이 날아갔다. 비리척결을 위한 사정 바람은 정치권에만 불어닥친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과 공직자뿐만 아니라 금융계, 사회각계로 그 폭이 확대되었다.
이를 위해 청와대를 비롯해 감사원과 검찰, 경찰 등 사정기관이 총동원되었다. 입시부정과 관련된 학부모 명단이 공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집권당의 개혁 사령탑이었던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도 날아갔다. 금융비리로 은행장들도 무더기로 감옥으로 갔다.
슬롯머신 비리와 관련해 정·관계의 거물들이 차례차례로 구속되었고, 검찰내의 정화로도 연결되었다.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정계의 실력자 박철언 의원, 그리고 엄삼탁 병무청장과 이건개 서울지검장이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동화은행 비자금사건으로 전 청와대 수석 김종인 의원도 구속되었다.
'금융계의 황제'로 불리던 이원조 의원도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 민자당 대표위원이며 포철회장이었던 박태준은 기소중지 상태가 되어 일본에서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떠도는 정치낭인 신세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역으로 치부되던 군부에도 비리수사가 시작되어 전직 공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구속되었으며, 정치군부 하나회에도 철퇴가 가해졌다.
이런 사정의 칼바람은 당하는 본인들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쓰라렸겠지만,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로서는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제의 권세가들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쇠고랑을 차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라고 수군댔으며, 가슴 후련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일각에서 사정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정 당사자들에 의해 '정치보복'이라든가 '표적 사정'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야당에서 '김대통령의 사정이 본질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철언은 구속되고, 박태준은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숱한 사건에 관련된 '금융계의 황제' 이원조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이 점이 문제였다.
박철언은 6공의 실세로서 월계수회를 이끌면서 3당합당 이후 김영삼 최고위원과 내각제 문제와 당권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쳤으며, 박태준은 민자당의 대권후보 결정 과정에서 김영삼의 후보지명에 불만을 품고 민자당을 탈당해 김영삼 후보 진영을 당혹케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이원조는 1992년 대선과정에서 김영삼 후보의 대선자금을 조달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니 대우가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김대통령의 "비리 척결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는 구두선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셈이었다.
정치가도 사람인 이상,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은 봐주고 기분 나쁜 사람은 심하게 대할 수도 있지만 공권력을 집행하는데 그래서야 어디 공정한 처사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 과정에서 김대통령은 목의 가시처럼 걸려있는 원죄, 1992년 대선자금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초기 집권과정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김대통령의 사정과 개혁 드라이브는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김대통령은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인기의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흐뭇한 에피소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심지어 93년 4월 중에 MBC가 실시한 대중인기스타 여론조사에서, 김영삼은 탤런트 최진실과 농구스타 허재를 제치고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상'으로까지 선정되었다. 또 93년 5월 제일생명이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부모 다음에 2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93년 6월에는 'YS 티셔츠'가 등장해 백화점에서 시판되었고, 8월에는 백화점에 고객 기념촬영용 'YS 밀랍인형'까지 등장했다. 또 『YS는 못말려』류의 비디오 영화 『YS 안녕하십니까』도 등장했다. 8월의 'YS 열기'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사는 78세의 교포 할머니가 김대통령이 정치를 잘해 뿌듯하다며 "신문에서 대통령께서 국수 드시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성금 1백 달러를 보내온 '사건'으로 절정을 이뤘다.(강준만, 『김영삼 이데올로기』, 개마고원, 25∼26쪽)

위의 인용을 보더라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얼마나 절정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국민들은 김영삼의 개혁 조치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그에게 거의 표를 주지 않았던 호남 지역 사람들도 김영삼의 개혁조치에 90% 이상의 지지를 표시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이것만을 본다면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남긴 유산을 말끔히 청소하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열 비전을 던져줄 것처럼 보였다. 문민정부의 참으로 '화려한 출발'이었다.



하나회 제거와 군부 숙정


2월 27일 재산공개 선언, 3월 4일 정치자금 수수거부 선언. 이렇게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을 벌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3월 8일 또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3월 8일 오전 11시 35분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1층에 위치한 국방부 출입기자실. 국방부 대변인 박재욱(육사 26기) 대령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겸 지상구성군 사령관 김동진(육사 17기) 대장, 국군기무사령관에 기무사 참모장 김도윤(육사 20기) 소장을 각기 임명한다."
이날의 인사를 두고 김영삼 대통령은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깜짝 놀랬제?"라고 했다지만, 사람들은 정말 깜짝 놀랐다. 3월 8일의 인사조치로 경질된 김진영(육사 17기) 육참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은 세상이 다 아는 5, 6공 군부의 실세였고, 하나회의 핵심이었다. 하나회 제거로 대표되는 문민정부의 군부숙정의 신호탄이 오른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4월 2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에 육사 20기(중장급)부터 36기(중령급)까지 142명의 하나회원 명단이 복사된 16절지 크기의 괴문서가 살포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군은 물론이고 일반 사회에서도 하나회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하나회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이 진행되었다.
4월 3일 안병호 수경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이 경질되었다. 이어 4월 8일에는 2군사령관에 김진선 육군참모차장을, 3군사령관에 윤용남 합참전략기획본부장을, 합참1차장에 편장원 교육사령관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2군사령관 김연각 대장과 3군사령관 구창회 대장은 각각 예편되었다. 또한 4월 15일에는 육군참모차장에 김형선 전 특전사령관을 임명하는 등 소장 4명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군단장에 임명하고, 준장 8명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사단장으로 임명하는 등 대폭적인 장성급 인사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군부는 인사비리와 관련해 현역장성이 대거 구속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김종호 전 해군총장, 조기엽 전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해 해군 장성 5명과 대령 2명, 공군 장성 5명이 진급과 관련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과거 성역으로 치부되던 군부에 문민정부는 사정의 칼날을 매섭게 들이댄 것이다.
4월 27일부터는 그 동안 비리의혹이 많았던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되면서 군부에 대한 사정은 그 도를 더해갔다. 감사원은 7월 18일 118건의 부당 사항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국고낭비 2천39억원 중 회수가 가능한 249억원을 회수토록 했으며 현역장성 8명을 포함해 53명에 대한 징계와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군인사와 군부 숙정은 과히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군부는 한 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을 전후해서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 사이 김대통령은 여섯 차례에 걸쳐 군인사를 단행했다. 3월 8일(김진영 육군총장·서완수 기무사령관 경질), 4월 2일(안병호 수경사령관·김형선 특전사령관 경질), 4월 15일 봄 정기인사, 5월 24일 12·12 관련장성 해임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 조남풍 1군사령관은 율곡사건과 관련되어 감사원에서 극비조사를 받은 끝에 7월 중순 전역조치됐다. 문민대통령은 100일 만에 대장 7명을 포함해 19명의 장성한테서 42개의 별을 떨어뜨린 것이다.
5·16이나 12·12 같은 정변 외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육군의 김진영·이필섭(합참의장), 구창회(3군사령관), 조남풍, 김연각(2군사령관), 김진선(역시 2군사령관, 재임 기간 40일) 씨와 해군의 김철우 총장도 조기 퇴진했다. 이들은 단순히 옷을 벗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속되는 경우도 속출했다. 해·공군의 경우 인사비리와 관련돼 이재돈 해병대 1사단장, 해군 이연근 제독 등과 공군도 전투비행단장인 박종선 준장 등 9명의 현역 장성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김성걸·이상기, 『신한국군 리포트』, 한겨레신문사, 68쪽)



이렇게 해서 30여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군부에서 온갖 전횡을 행사하며 요직을 독식해온 정치군부 하나회는 끝장났다. 문민정부의 하나회에 대한 숙정작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장성 가운데 주요 보직에 있는 인사들은 대부분 강제예편되었고, 영관급의 경우에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아 군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1년만에 하나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해체"되었다. 또한 군의 인사비리와 율곡비리에 대한 사정으로 그 동안 성역으로 간주돼 비호를 받아온 군의 비리가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일부 인사들은 사법 심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군부는 과거 정치군부의 오명에서 벗어나 안보의 역군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난 것이다. 불공평한 사정과 원칙없는 인사가 자행되었고, 하나회로 대변되는 TK군맥 대신에 PK와 일부 학연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군맥이 생겨났으며, 뇌물수수와 같은 군의 비리가 여전히 뿌리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2·12 단죄와 역사바로세우기


문민정부의 군부에 대한 마지막 철퇴는 1995년에 내려졌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수사와 노태우 전직대통령의 구속수감, 12·12와 5·18의 재수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구속수감, 그리고 '5·18특별법'의 제정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행 군부에 대한 심판은 아니었지만 과거 군사정권이 저지른 역사적 죄과에 대한 단죄라는 점에서 군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2·12사건과 5·18에 대해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문제가 되었다.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12·12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하였고, 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등의 고소 고발에 따라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1994년 10월 29일 검찰은 12·12사건에 대한 1년 4개월간의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발표문에서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행위였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할 경우 불필요한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해 국민들과 민주세력, 고소 고발 당사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5·18 사건에 대해서도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광주민중항쟁상임의장, 김상근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 공동대표 등 6백16명이 고소고발장을 접수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되었다.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1년 2개월에 걸친 5·18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발표문을 통해 "피고소·고발인들이 80년 당시 벌인 각종 행위와 조치는 정치적 변혁과정에서 새 헌법질서 형성의 기초가 된 일들"이라면서 "이는 군을 배경으로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한 정치적 변혁과정들로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5·18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들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검찰의 궁색한 논리였고,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였다. 또한 이것은 검찰이 '기소독점권'을 이용한 행패가 아닐 수 없었다.
검찰의 이런 결정의 배후에는 당연히 김영삼 정부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2·12와 5·18에 대한 공정한 수사를 통한 해결보다는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는 이른바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국민들과 재야 민주세력, 그리고 야당까지 가세해 김영삼 정부와 검찰에 대한 항의와 비판을 계속했다. 그래도 끄떡없던 김영삼 대통령이 태도를 선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계좌를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그 동안 공공연하게 떠돌던 소문들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증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검찰도 수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도 비자금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 사건으로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이와 함께 12·12와 5·18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11월 23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정당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기에 이르렀고, 김대통령은 그 여세를 몰아 '역사 바로 세우기'를 들고나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1월 13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논란이 되어왔던 구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전격 단행했다.
또한 11월 30일, 검찰은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재수사에 착수했다. 많은 여론이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으나 검찰이 수사에 재빠르게 착수하여 선수를 잡았다. '공소권 없음'과 '기소유예'를 결정한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돌아갔다.
재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5·18 특별법' 제정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12월 2일 연희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월 3일 합천 친척집에서 전격 연행해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 결과 1996년 8월 26일 1심공판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22년 6월의 형이 선고되었다. 12월 16일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는 전두환 무기, 노태우 17년이 각 선고되었으며, 대법원의 최종판결은 1997년 4월 17일에 있었다. 항소심과 같은 무기와 17년형이 선고되었다.



이 역사적인 심판에서 전두환·노태우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거나 죄과를 참회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일관되게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1997년 15대 대선이 끝난 직후인 1997년 12월 12일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가 합의한 결과였다.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이들은 단 한 마디의 사과나 참회의 빛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무기와 17년형이라는 형기에 비해 기껏 1년 남짓한 수형생활 뒤에 이들에게 주어진 사면은 결코 법집행의 형평성으로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 대한 사면은 12·12와 5·18에 대한 신군부의 범죄에 면죄부만 내려준 것이라는 국민들의 항의를 결코 한 귀로 흘러버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2. 문민정부의 위기와 날개없는 추락


1) 문민정부의 위기와 개혁의 실종


대통령 혼자 뛰는 개혁


집권 첫해인 1993년에 펼친 일련의 개혁과 사정 작업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공직자 재산공개, 대대적인 군인사와 군부숙정, 비리공직자의 숙청과 금융실명제의 실시 등 강도 높은 개혁작업을 국민들은 피부로 느끼면서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조치는 1994년에도 계속되었다. 1993년의 개혁작업이 이른바 '윗물맑기'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면 1994년에는 제도개혁과 정치개혁, 생활비리척결 등으로 변화되었다.
1994년에 이룬 대표적인 개혁작업은 정부조직의 개편, 돈 안 드는 선거를 목표로 한 공직자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제정과 정치자금법 개정 등 각종 정치개혁입법의 마련이었다.
공무원의 비리를 막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공무원이 범죄로 얻은 재산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유래된 증식재산까지 몰수할 수 있도록 한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특례법'과 비리공직자의 금융거래추적을 쉽게 한 '공직자윤리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정부는 이와 함께 △공직자부조리 척결을 위한 부정추방 △조직폭력배 소탕을 통한 민생불안추방 △부실공사 근절을 위한 부실추방 등 '3불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첫해에 진행된 '윗물맑기' 차원의 운동으로 고위공직자와 사회지도층의 비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국민들과 직접 피부로 접촉하는 일선의 하위직 공무원들의 비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공직자의 부조리 척결뿐만 아니라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 등 기초질서위반사범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범칙금을 부과해 생활비리를 척결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런 조치로 기초질서위반자에 대해 범칙금이 최고 14배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때부터 숱한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정부의 위기관리와 국정능력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경부선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탈선사건,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성수대교 붕괴참사, 충주유람선 화재사건, 예비군 포병사격장 폭발사고, 군장병 탈영사건, 지존파·박한상·온보현 등의 엽기적이고 반인륜적인 살인사건,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대한항공 화재사건, 마포 가스폭발사고 등 대형사건이 빈발했으며, 부천과 인천 등지에서 공무원들의 세금도둑사건이 터져 김영삼 정부의 개혁조치를 무색케 했다. 또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정책혼선,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 쌀수입 개방파동, 농안법파동, 행정구역파동 등으로 정부 정책조정능력의 취약성도 드러났다.
1994년 4월 21일에는 이회창 국무총리가 전격 교체되어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1993년의 감사원장으로서 사정작업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던 이회창을 국무총리로 전격 발탁한 것은 1993년 12월 16일. 대쪽 총리로 불리던 이회창은 '법대로'를 외치며 국무총리의 권한을 주장하다가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의 신권위주의의 표본으로 지적되었으며, 김영삼 정부 개혁조치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와 함께 김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최기선 인천시장이 인천 세무비리와 관련해 물러나고, 성수대교참사로 이원종 서울시장이 물러나는 등 문책성 인사도 줄을 이었다.
여야관계도 결코 매끄럽지 못했다. 김대중이 은퇴한 뒤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는 사사건건 동교동 가신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대하기보다는 이기택 총재와의 과거의 사적인 관계를 염두에 둔 듯한 태도로 대함으로써 포용력이 문제로 등장했다. 아무튼 1994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김영삼 정부의 국가경영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국민들의 대 정부 신뢰도는 급격히 하락했다.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아태 3개국 순방길에서 이른바 '세계화' 구상을 발표하고 이에 따른 정부조직의 개편과 내각의 전면개편을 단행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화' 구상은 내용이 불분명하고 특유의 '깜짝 쇼' 차원의 성격이 짙었다. 말하자면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일어난 국정의 혼란과 위기에서 탈출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그 본질은 일종의 정치기술이었다.



1995년에 들어서도 김영삼 정부의 위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육사출신의 현역장교의 은행강도사건, 한진중공업 폭발사고, 집달관 비리사건, 대학교수의 아버지 살해사건, 대구가스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참사 등 대형사건이 줄을 지어 일어났고, 김숙희 교육부장관 사퇴파동, 현직 이형구 장관 구속사건으로 정부의 공신력도 흔들렸다. 김종필 민자당대표 축출과 자민련 창당, 지방선거 공천배제파동으로 여야관계도 더욱 악화되었고, 북한 쌀지원 파동과 그에 따른 강경회귀로 남북관계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5월 한국통신의 파업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국가전복기도' 운운하는 발언과 검찰의 5·18사건 공소권 없음 결정은 문민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하게 만들어 민주개혁세력으로부터도 심각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문민정부의 개혁은 그 방향타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개혁의 표류가 가시화되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의 책임을 김대통령에게 모두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숱한 대형사건들 대부분은 30년에 걸친 실적위주의 '압축성장'이 가져온 후유증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이런 사건들의 예방과 사후 수습에서 심각한 무능력을 노출하였다.
고위관료들과 공직사회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은 이를 더욱 심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개혁을 말로만 외쳤을 뿐이지, 공무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업무를 수행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의 구축에 실패하였다.
결과적으로 개혁의 지원자가 되어야 할 국민과 민주개혁세력을 구경꾼으로 전락시켰고, 개혁의 파트너가 되어야 할 야당을 적대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 혼자 뛰는 개혁이었지, '국민과 함께 하는 개혁'이 되지 못함으로써 이 모든 문제들이 발생했던 것이다.



망사가 되어버린 인사


김영삼 대통령은 늘상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문민정부의 인사는 '망사亡事'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런 인사정책의 실패는 문민정부의 실패와 곧바로 연결되었다.
인사정책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 스타일 때문에 생겨났다. 김대통령은 인사에서 보안을 생명처럼 여겼다. 장관 인사도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극비리에 선정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나 도덕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고, 일단 썼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꾸는 식으로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집권 5년 동안 끊임없이 인사를 단행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5년 동안에 개각만 무려 25회나 단행했고, 6명의 총리와 7명의 경제부총리, 6명의 통일부총리가 바뀌었다. 장관의 수도 118명이나 양산되었다.
그 결과 장관의 재임기간은 13.3개월, 차관은 14.9개월, 청장급은 16.8개월밖에 안 되었다. 장관의 재임기간 13.3개월은 노태우 정권의 12.6개월보다 약간 긴 편이지만, 김대통령과 함께 5년 동안 재임한 오인환 공보처장관을 제외하면 11.3개월에 불과하다. 결국 이런 잦은 인사는 일관성 있는 정책의 수립이나 집행을 어렵게 만들었고, 김영삼 정부의 최대 실정인 경제정책 실패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잦은 인사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문제는 특정 지역의 요직 독식과 과거에 신세진 사람들에 대한 '봐주기 인사'였다. 이런 잘못된 인사로 "TK와 군화(군 출신)가 물러가고 PK와 등산화(민주산악회 출신)가 요직을 점령했다"는 비아냥이 유행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초기 내각 때만 해도 지역 안배, 진보와 보수의 균형 등 여러 가지를 고려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산 경남 지역의 독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김용삼, 「문민정부 개각 대해부」, 『월간조선』 98년 1월호, 371∼372쪽)
이런 인사 편중은 그 예를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후기로 갈수록 노골화되었다. 게다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각종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고 새로운 인맥을 구축함으로써 김영삼 정부의 인사는 완전히 '망사'가 되어 버렸다.
김현철의 인사개입과 국정농단은 숱하게 많지만 단적으로 안기부의 예만 보아도 그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민정부 안기부의 3인방이라 할 권영해 부장, 오정소 1차장, 김기섭 운영차장(처음 기획조정실장)이 모두 김현철의 사람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군부도 하나회를 대신해 특정인맥을 새로이 구축했다.
권영해는 1993년 12월 포탄도입사기 사건으로 국방부장관에서 도중하차 한 뒤 1994년 12월 안기부장으로 컴백하는데, 이때 김현철의 도움이 컸다. 오정소 1차장은 이원종 정무수석과 함께 김현철의 경복고 동문으로서 김현철 인맥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정소는 안기부에 있으면서, 김광일 비서실장의 전화까지 도청하는 등으로 김현철의 수족이 되었다. 김기섭 운영차장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안기부 내의 인사와 예산을 무기로 김현철과 밀착할 수 있었다.(「비화 문민정부」 44∼46회, 『동아일보』 98. 4. 27, 4. 29, 5. 1 참고)
김현철의 인사개입과 인맥구축으로 김영삼 정권 후기에는 권력내부의 갈등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청와대 안에서 벌어진 김광일 비서실장과 이원종 정무수석, 이석채 경제수석과 박세일 사회복지수석의 첨예한 대립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권력 갈등도 국정표류의 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패는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좁은 소견과 포용력 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김대통령 주변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고 진정으로 보필하려고 애쓴 '현명한 신하(현신)'나 '올바른 신하(양신)'는 적었다." 대부분의 인사들은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좇는 '입신立身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개혁, 소리없는 실종


1995년 5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한창 문제가 되고 있던 한국통신노조사태와 관련해 단호한 태도를 천명했다. 그는 "한국통신노조가 불법행위를 계속하며 정보통신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법에 따라 엄중 처리하겠다"고 했다.
김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과 이사진 21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행해졌다. 김대통령은 "정부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노사분규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로 보고 있다"면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지키고 국민생활을 보호해야 하는 헌법상의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 어떤 경우든 법을 어기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마치 유신시대 박정희가 학생시위에 대해 엄포를 놓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발언이었다.
한국통신이 '국가의 중추신경'이고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국민생활에 주는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의 행정, 경제, 산업 등 국가기능이 마비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었다. 또한 한국통신노조가 임금이나 직급문제만이 아니라 개별사업장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민영화 반대나 통신시장개방 반대 등의 문제를 들고나온 것도 정부로서는 난처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누가 보아도 명백한 노사분규를 두고 '국가전복 음모' 운운한 것은 노사문제를 바라보는 김영삼 대통령의 시각이 과거 군부정권의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통신 사태가 시작된 것은 1994년 5월부터였다. 한국통신 노조는 정부의 공기업임금 가이드라인(3%+성과급 2%)의 철폐를 주장하며 기본급 8만원과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 거기다가 통신시장개방 반대, 대기업위주의 통신산업민영화 중지 등을 내걸어 단위사업장 차원을 넘어 정부와의 갈등으로 발전했다. 결국 1995년에 들어서면서 갈등이 깊어지자 회사는 4월 26일 노조위원장 등 간부 64명을 고소 고발했고, 5월 16일에는 노조간부 64명에 대한 중징계방침을 결정했다. 그러자 노조는 정부와 회사의 강경방침에 맞서 5월 18일 파업도 불사할 것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노조는 5월 19일 전남대에서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쟁의발생을 결의하는 대신 쟁의여부를 위원장에게 위임하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렇지만 정부와 회사는 일방적으로 노조를 몰아붙였다. 회사는 노조간부 64명에 대한 중징계를 감행하는 한편, 경찰은 핵심간부 20여명의 검거에 나서 일부를 구속시켰다. 그러자 노조간부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으며, 조합원들은 준법투쟁에 돌입했다.
6월 6일 정부는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사전 통보도 없이 전격적으로 경찰을 투입해 간부들을 모조리 연행 구속시켰다. 이에 명동성당과 조계사는 크게 반발하였고, 재야민주세력들도 규탄 집회를 열었다.
명동성당측은 "종교계가 중재노력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매우 유감스럽다. 현정부는 2천년 동안 지켜온 교회법을 침해했다"면서 "5, 6공 군사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인 권력의 남용은 현정부의 모습 역시 다를 바 없다.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정부측에 있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계사측도 "평화적인 중재를 통해 사태악화를 방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작금의 현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밝힌 뒤 "공권력 난입에 따른 책임규명과 관련자 문책"을 촉구하였다.
이 사건은 오락가락하던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후퇴하는 한 분기점이 되었다. 집권 초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문민정부의 인기는 온갖 대형사건과 국정의 난맥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1995년에 들어서면서 지지도가 20∼30%대로 떨어졌다. 거기다가 1994년부터는 보수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정부는 서서히 태생적 한계를 노출하였다. 국민과 함께, 야당과 민주개혁세력을 파트너로 삼아 개혁을 완성하기보다 보수세력과 손을 잡으려 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보수회귀 경향은 6·27지방선거 참패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6·27지방선거에서 참패하게 된 데는 김종필의 축출이 끼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민자당 내의 민주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김종필 대표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비정한 모습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충청권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배신으로 비춰졌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6·27지방선거 참패 이후 보수회귀로 차기 재집권의 발판을 마련하려 하였다.
김대통령은 지방선거가 끝난 3주일 뒤 7월 20일 민자당 당무위원과 상근 당직 초청 조찬에서 "96년에 있을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후보자 공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대통령이 당을 직접 장악해 차기 대권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그후 그런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해 12월 6일에는 민자당의 간판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어 달았다.
그리고 1996년 4월 11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국당은 승리했다. 과반수에는 미달했지만 서울 지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4·11총선거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당시 정무장관이었던 주돈식은 『문민정부 1천2백일』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총선거 직후의 정국은 67년 공화당이 재선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3번째 출마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개헌을 위해 엄청난 부정선거를 감행했던 당시의 후유증과 흡사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야당은 국회의 등원을 거부했고 부정선거 백서를 발간했으며, 국회 안에 제도개선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하는 등 꼭 30년 전의 신문을 읽는 듯했다.
통합선거법 제정 당시 "영국이 오늘 같은 맑은 선거 풍토를 이룩하는 데는 한때 60여명의 당선자가 당선 무효가 되는 진통이 있었다. 우리도 몇 십 명이 당선 무효로 재선거가 실시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정은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던 분위기에서 얼마나 큰 후퇴가 이루어졌나를 국민들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선거 문화만이 구태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원내에서 수를 확보한 여당은 이 수의 유혹에 차츰 빠져들었다. '우리가 다수당인데……' 하는 소리가 바로 이 유혹의 소리였다. 새벽의 날치기 기습 통과까지 어떻게 그리 과거를 닮아갈 수 있을까. 개혁 정국은 이렇게 허약체질이 되어갔다.

이처럼 개혁은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김영삼은 '안정 위에 개혁' '중단없는 개혁'을 외쳤지만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개혁은 1995년 한국통신 사태를 계기로 이미 물 건너가기 시작해 96년 4·11총선을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96년 4·11총선 이후 김영삼 정권의 행태는 과거 군사정권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바뀌었다.
이런 모습은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여 12월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96년 8월 12일부터 20일 사이 연세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한총련의 범민족대회 집회에 김영삼 정권이 퍼부은 강경진압은 과거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시절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한총련의 과격성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까지 김영삼 정부가 해도 너무 한다며 등을 돌렸다.
또한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은 기습적으로 임시국회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의 본회의에는 신한국당 소속의원 1백57명 가운데 외유중인 김윤환 고문과 야당의 감시를 받고 있던 김수한 국회의장을 제외한 1백55명 전원이 참석했다. 이 사건으로 야당은 국회농성에 들어갔고, 민주노총은 다음날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권 몰락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지방자치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김영삼의 오만과 자기도취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세 김씨는 30여년 동안 한국정치사에 커다란 족적과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각자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켜 왔다. 이들이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멀어지는가에 따라 한국정치의 풍향이 바뀌었을 만큼 이들은 한국정치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흔히들 이들이 활약한 이 시대를 '3김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김영삼이 9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고 김대중이 패배를 시인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3김 시대는 끝나는가 했다. 세 김씨 가운데서도 가장 민주화에 대한 기여도가 컸던 김대중이 물러남으로써 정치권에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열렸던 것이다.
이들 세 김씨가 지배한 한국정치는 많은 긍정적 요소와 더불어 부정적 요소들도 적지 않게 유포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엄혹한 탄압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이들 세 김씨의 정치 행태는 결코 정상적인 민주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를 상당 부분 갖고 있었다. 이른바 가신정치와 당내 민주주의의 부재, 특정지역을 근거로 한 지역분할구도 따위가 그렇다.
물론 이들의 정치 행태를 의회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 정치공작과 가혹한 탄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과거의 문제점들은 개선되어야 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와 더불어 정치에서도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도록 정치적인 조건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허사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가능하게 만들기보다 자신의 일방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려고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김대중의 행보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에 대한 핍박으로 나타났다.
김대통령은 과거 민주화의 동지였던 김대중에게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김대중을 민주사회를 완성해가는 길목에서 좋은 조력자요, 충고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여전히 목의 가시처럼 걸려 있는 경쟁자로 인식했다. 강준만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김영삼을 지배한 것은 오직 '승리 이데올로기'뿐이었다. 그는 정적 김대중을 이겼다는 자기도취에 빠졌고, 김대중의 재기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건 매우 부당한 처사였고, 속 좁은 생각이었다.
김영삼에게 김대중은 한때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지만, 그와는 숱한 민주화의 역정에서 때로는 협력한 동지이기도 했다. 특별히 김대중을 편파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에 대해 끊임없는 감시와 경계의 시선을 보냈고, 정치원로로서 대우도 하지 않았다. 1994년에 김대중이 영국에 다녀와서 시작한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이하 아태평화재단)에 대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끊임없는 감시의 눈길만 보냈다.
물론 김대중이 아태재단을 정치적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김대중 자신과 국민의 문제였다.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판단은 국민이 내리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통일문제나 외교문제에서 김대중 같은 연륜있는 지도자가 해낼 역할이 적지 않았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에서 보여준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역할은 그 좋은 실례였다.
결국 김대통령의 이런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불만, 좌표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개혁, 김영삼 정부의 무능과 독선, 야당의 지도력 상실, 동교동계의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김대중은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김영삼은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도와준 꼴이 되었다. 한편, 1995년 3월 30일 김종필은 독자적으로 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계의 노골적인 핍박을 견디다 못한 김종필 대표가 2월 9일 민자당을 뛰쳐나온 뒤 채 한 달이 안 되어서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계의 김종필 홀대와 축출 작전은 1994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민주계는 당의 대표인 김종필이 세계화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다면서 공개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지방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등 지독한 수모를 주었다. '이래도 당에서 안 나갈 테냐'는 식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부터 '참는 데는 도사'가 된 김종필도 1995년 1월 18일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한 3주일 뒤 탈당했다. 김종필이 떠나면서 "약속을 휴지처럼 버리는 사람들"이라고 김대통령과 민주계를 비난한 뒤, "내 갈 길을 가겠다"면서 창당에 나섰다.
3당합당 후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는 데는 김종필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김종필에게 2인자 대우를 굳게 약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약속을 휴지처럼 버리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권을 잡자 생각이 달라졌다. 2인자는 항상 절대권력자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고, 그 아래 사람들에게는 상승욕구를 가로막는 대상이었다. 1993년 재산공개파동에서 이미 김재순·박준규 등 김영삼의 대권승리에 기여했던 인사들이 '팽'당한 전례가 있었지만 김종필은 이들과는 무게나 성격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종필의 축출은 문민정부의 개혁의 일환이기보다는 김영삼의 차기 포석과 민주계의 대권주자를 향한 권력투쟁의 결과였던 셈이다.
공화계는 가장 적은 지분을 갖고 있었고, 현실적인 힘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김종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김종필은 독립했고, 민주계는 김종필을 이미 흘러간 물이라 치부했지만 그는 6·27지방선거에서 보기 좋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정국은 다시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천하를 삼분'한 형국이 되었다. 이를 이름하여 사람들은 '신3김 시대'라 불렀다. 이런 신3김 시대를 가져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3김 시대를 끝내고 싶어했던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었다. 김영삼의 독선과 오만이 다시 이런 지역분할구도와 신3김 시대라는 참으로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95년 6·27 지방선거와 김대중의 정계복귀


1995년 6월 27일에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날 선거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광역지방의회의원, 기초자치단체장, 기초자치단체의회의원 등 4대 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명실상부한 지방자치제 선거였다.
선거 투표율은 총유권자 3천1백4만여명 가운데 2천1백23만명이 참여해 65.9%를 기록했다. 이는 1991년 기초·광역의원선거 투표율(55%, 58.9%)보다는 높고 1992년 14대 대선·총선 투표율(81.7%, 71.9%)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었다. 그리고 1994년에 실시된 세 차례의 보궐선거(대구 수성갑, 영월·평창, 경주) 평균 투표율 51.6%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광역단체장 선거를 포함해 4대 선거가 동시에 치러짐으로써 유권자들이 '투표에 대한 의무감'을 가졌고, TV토론이 활성화되는 등 선거의 관심을 높일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었던 탓이다.
선거 결과는 한 마디로 민주당의 압승과 자민련의 약진, 민자당의 참패로 요약될 수 있었다. 광역단체장은 15개 가운데 민자당 5(부산, 인천, 경기, 경남, 경북), 민주당 4(서울, 광주, 전남, 전북), 자민련 4(대전, 충남, 충북, 강원), 무소속 2(대구, 제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특히 대구는 문희갑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어 김영삼을 싫어하는 TK정서의 실존을 입증했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민자당은 총 2백30석 가운데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1석을 얻는 데 그쳤다. 특히 서울은 25명 가운데 2석밖에 건지지 못했고 나머지 23석은 민주당이 차지했다. 이는 민자당에 대한 혐오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민자당은 부산의 16개 구청장 가운데 14곳에서 승리한 외에 텃밭이라 여겼던 경남에서도 무소속에게 11석을 내주고 10석을 건지는데 머물렀다. 대구에서도 민자당은 8개 구청장 가운데 2곳에서만 승리했고, 만년 여당지역으로 꼽히던 충북에서도 11곳 가운데 4곳만을 건졌을 뿐이었다. 더욱이 민자당은 광주, 대전, 충남, 전남, 전북에서는 끝내 1석도 얻지 못했다.
반면 민주당은 서울에서 23개, 광주·전남·전북 등 호남 지역 43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40곳에서 승리하는 등 전국 84개 지역에서 승리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자민련도 충남 15개 전지역을 싹쓸이하고 대전 5개 가운데 4개 등으로 전체 23개 기초단체장을 수중에 넣었다.
무소속 바람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대구·경북·강원·경남 등 여당 성향의 지역에서 불어 민자당의 기반을 잠식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대구에서 8개 구청장 가운데 5곳, 경북 23개 가운데 14곳, 강원 18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7곳 등 모두 52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6·27지방선거는 지역감정이 더욱 심화되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선거 결과도 지역분할로 나타났다. 특히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김대중 민주당 고문의 정계복귀 여부가 판가름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이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서울은 민자당의 정원식, 민주당의 조순, 무소속의 박찬종의 3파전이었는데 조순의 승리로 끝났다. 여론조사 과정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던 박찬종은 결국 민주당 바람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기세를 타고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을 선언했다. 신당의 명칭은 '새정치국민회의'로 결정되었고, 김대중 총재는 '내각제를 수용할 수도 있다'고 해서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의 연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심하게 반발하였으며 국민들의 여론도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가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야당의 분열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당리당략적 이해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정국은 3당 분할체제가 되었고, 다시 세 김씨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신3김 시대'가 출현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97년 대권을 향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라도 김대중 총재의 집권을 저지하고 자기가 세운 후계체제에 의해 재집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으려 했고, 김대중 총재는 다시 대선 4수에 도전하기 위해 기반을 확대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김종필 총재는 세는 약하지만 3당 분할체제에서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최대한 활용해 내각제 개헌을 확보하기 위해 뛰었다.



96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


1996년 4월 11월의 국회의원 총선거는 이들 세 김씨의 대선 전초전이라 해야할 것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차이가 있지만 국민적 지지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대선을 앞두고 있을지도 모를 정계개편에 대비하여 3김씨는 각기 필요한 국회의 지분을 확보해야 했다. 특히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는 민주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한 것에 대한 국민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97년 대선의 풍향계가 될 수 있었다.
선거는 총유권자 3,148만 8,294명 가운데 2,011만 8,528명이 투표해 전국 평균 63.9%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 투표율은 역대 총선거 가운데 가장 낮았으며, 95년 6·27지방선거 투표율보다도 낮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수치였다.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이 지역구 121석, 전국구 18석을 얻어 모두 139석을 차지했다. 반면 국민회의는 지역구 66석, 전국구 13석을 얻어 모두 79석을 차지했으며, 자민련은 지역구 41석, 전국구 9석으로 모두 50석을 확보했다. 이밖에 무소속은 16석을 차지했다.
이는 예상외의 결과였다. 애초 신한국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워낙 추락해 고전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선전했다. 특히 서울지역에서 47개의 선거구 가운데 신한국당이 27석을 차지해 파란을 연출했다. 국민회의는 18석을 얻었을 뿐이었다. 서울지역에서 사상 첫 '여대야소'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야권분열과 중산층의 보수화 경향 때문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 창당에 대해 지식인과 개혁 성향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그것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과거에는 야권이 찢어졌을 경우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전략적으로 투표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의 경우 많은 지역에서 개혁 성향의 민주당 인사가 출마했기 때문에 국민회의에 전략적으로 투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생긴 것이다. 결국 야권 성향의 표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찢어져 신한국당이 어부지리를 얻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생활수준이 높은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 밀집지역에서는 어김없이 여권이 당선되었다. 과거에는 지식 수준이 높을수록, 그리고 중산층인 경우 대개는 여당에 비판적이었고 야당 성향이었지만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이들 중산층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 심리가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 결과 국민회의에서 이종찬(종로), 정대철(중구), 조세형(성동을), 한광옥(관악갑), 김덕규(중랑을), 박실(동작을), 장석화(영등포갑) 등 중진이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신 반면, 신한국당에서는 이명박(종로), 박성범(중구), 강성재(성북을), 김충일(중랑을), 유용태(동작을), 이상현(관악갑), 이신범(강서을) 등의 신진들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95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과 광역의회, 기초자치단체장을 석권했던 국민회의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한국당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여당의 서울 승리의 최대 원군은 DJ"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지역의 야당 참패 뒤에는 야당 분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정치권의 신진대사와 변화를 바라는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혼전 선거구가 많았던 경기도 북부지역에서도 신한국당이 휩쓸었다. 이는 선거를 앞두고 북한군이 일으킨 비무장지대의 무력시위 등의 '북풍'의 위력 때문이었다.
4·11총선거에서는 '북풍'과 더불어 관권이 노골적으로 여당을 지원했으며, 돈이 마구 살포되어 정치개혁입법의 취지를 무색케 했다. 이것은 1995년의 6·27지방선거가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진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차이였다. 이런 관권과 금권, 북풍은 모두 선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김대통령의 노골적인 독려의 영향이 컸다.
신한국당은 국민회의의 아성인 호남지역에서 강현욱(전북 군산을)이, 자민련 아성인 충남에서 이완구(청양 홍성)가 당선되어 일단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광주와 대전, 전남에서는 전멸했다. 국민회의도 대구·대전·강원·경북·경남·제주 등 8개 지역에서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지지기반을 전혀 넓히지 못함으로써 김대중의 대권가도에 '빨간 불'이 켜졌다.



자민련은 대구에서 8석, 경북에서 2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신한국당은 대구에서 강재섭(서구을)과 김석원(달성) 등 2명밖에 당선되지 못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결국 대구 지역은 김종필 총재가 상당한 기반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맹주가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한편 경남지역에서는 무소속이 많이 당선되었으나, 이는 신한국당 공천에서 탈락한 친여 성향으로 당선 후 곧 신한국당에 흡수되었다.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의 승리, 자민련 보합, 국민회의의 약세로 요약할 수 있다. 4·11총선은 대선을 앞둔 전초전이라는 점에서 선거결과는 대권가도의 주자마다 새로운 전략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신한국당은 곧바로 무소속을 흡수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정국의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그 바람에 야권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원 구성도 하지 못한 채 국회가 한동안 파행으로 치달았다.
어쨌든 선거 결과, 김영삼 대통령이 대권주자 선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로서는 서울·인천·경기 지역에서 참패함으로써 대선가도에 심각한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특히 개헌저지선인 100석을 독자적으로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자민련 역시 신한국당의 자민련 흔들기에 자칫 당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게 될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야권공조체제를 유지하기로 했고, 이를 바탕으로 대선을 향한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3) 문민정부의 추락과 정권교체



문민정부의 날개 없는 추락


문민정부의 '날개 없는 추락'은 1997년 한보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1월 23일 재계 순위 14위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한보철강이 부도가 나자 검찰은 수사에 착수해 1월 30일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을 소환해 조사한 뒤, 1월 31일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정태수가 대출과 사업의 인허가 과정에서 정·관계와 금융계 인사들에게 청탁하고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가 금융계와 정치권으로 확대되었다.
2월 1일부터 2월 6일까지 한보철강에 집중적인 자금지원을 해준 신광식(제일은행장)·우찬목(조흥은행장)·이철수(전 제일은행장) 등 7명의 전·현직 은행장이 소환돼 조사받은 후 3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2월 10일부터 2월 12일까지 신한국당의 홍인길·정재철·황병태와 국민회의의 권노갑 의원, 그리고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등 5명이 소환되어 조사받은 후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었다.
이밖에도 여야의 중진의원들과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와 함께 국회에서 청문회가 개최되었고, 한보비리를 둘러싸고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연루 의혹이 집중적으로 추궁되었다.

* 청문회 제도


청문회 제도 청문회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여소야대' 시절인 13대 국회 때였다. 1988년 6월 국회법을 고쳐 이 제도를 명문화했다. 1988년 11월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특위 청문회 △5공비리특위 청문회 △문공위 언론청문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이 청문회는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어 열기가 뜨거웠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증언대에서 '살인마'라는 욕을 들었고,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도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했다.
청문회가 다시 열린 것은 1997년 4월. 한보사건 청문회가 9년 만에 열려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증언대에 섰다.
우리 국회에서 열린 4차례의 청문회는 '조사' 성격의 청문회였다. 그러나 주요공직자의 자격을 심사할 인사청문회는 아직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인사청문회를 열겠다고 했으나, 그것은 아직 실현되고 있지 않다. 아무튼 청문회 개최의 법적 요건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의 요구와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청문회제도는 미국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미국 의회에서는 청문회가 거의 일상적으로 열린다. 청문회의 종류도 다양하다. 법의 제정과 개정을 위한 입법청문회, 비리나 스캔들을 다루는 조사청문회, 장관 등을 불러서 행정을 감시하는 감시청문회, 공직자의 자격 심사를 하는 인준청문회 등이 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독일·일본 등에서는 미국 같은 청문회제도가 없으며 대신 공청회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김현철과 가까운 관계인 의사 김경식의 양심선언과 김현철의 비리를 입증하는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불똥은 김현철과 김대통령에게도 튀었다. 특히 김현철이 전화통화하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에서 CA-TV인 YTN사와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에 개입한 흔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김현철의 이권개입을 입증시켜 주었다.
김현철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김현철을 비롯 박태중 (주)심우 대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김희찬 디즈니여행사 대표 등이 구속되었다. 김현철의 비리를 입증케 하는 데서 대호건설의 이성호 사장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검찰은 이 수사과정에서 92년 대선자금으로 쓰고 남은 나머지 120억원이 김현철의 비자금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사건은 문민정부의 숨은 실세이며 황태자로 군림해왔던 '소산'(김현철)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치명적인 정치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김현철의 이권개입과 국정개입 등 온갖 비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깨끗한 정치'를 소리높이 외쳤던 김영삼 대통령의 얼굴에 진흙탕물이 튀었다.
김현철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1996년 12월에 날치기로 통과시킨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에 대한 반발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하고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재개정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해 국정장악력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한보사건과 김현철 사건으로 결정적인 치명타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곧바로 김영삼 대통령의 정권재창출을 위한 후계구도에 영향을 주었다.



노동법날치기 파동과 김현철 사건은 일차적으로 당시 당대표였던 이홍구를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주계의 좌장격이었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 전 총리가 당 대표로 지명되었고, 이회창 대표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무난히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 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1997년 말에 터진 외환위기는 후계구도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 우울해하던 김영삼 대통령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끌어내리게 만들었다. 일찍 찾아온 레임 덕 때문에 15대 대선에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숱한 문제들로 해서 비난이 가중되고 있기는 하였으나, 문민정부의 개혁과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던 것조차 외환위기가 싹 걷어가 버렸다.
외환위기는 이미 1996년 말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정부의 안이한 늑장대처와 기업의 계속된 차입,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로 1997년 11월에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내부적으로 위기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론 위기를 감추자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 같은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경제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의 경제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국정의 통솔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불러온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IMF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취임 초기 90%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아예 통계조차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날개없는 추락'이었다.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로 나왔다. 지금은 국민들의 감정상태가 너무도 악화되어 있어 역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30년만의 문민정부'의 비참한 몰락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시기는 WTO체제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세계사적인 전환기로서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이 전환기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내포한 시기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위기를 기회로 살리지 못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자신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백범,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김영삼
권력의 핵심에서 조선조 창건의 토대를 마련한 삼봉 정도전보다 역성혁명에 반대해 비운의 종말을 맞은 포은 정몽주를 더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였다.
네티즌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쓰러진 백범 김구선생을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았다.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천7백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 2위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뽑혔다.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그 뒤를 이었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5.1%로 5위에 들었다.
반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로는 김영삼 전대통령(24.6%)과 전두환 전대통령(20.1%)이 나란히 1, 2위에 올랐다.(『동아일보』, 98. 3. 17)



대권을 둘러싼 합종연횡과 3자구도 형성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장 먼저 후보로 결정된 것은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재였다. 1997년 5월 19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김대중 총재는 77.5%의 득표로 정대철 부총재를 누르고 무난히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자민련에서도 6월 24일 김종필 총재가 82.3%의 득표로 한영수 부총재를 압도적으로 따돌리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신한국당의 경선 구도는 이회창과 반 이회창의 구도가 일단 성립되었다. 이회창에 반대하는 주자들간의 연대 움직임이 강화되는 가운데 6월 25일 반 이회창의 6인 경선 주자와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 대표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반 이회창 움직임에 6월 27일 이 대표는 경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고 7월 1일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그후 신한국당의 경선 판도는 이회창 대세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인제 경기지사가 다크호스로 부상하였다. 결국 7월 21일 전당대회가 개최되었고, 이회창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60%의 지지를 획득해 이인제 후보를 따돌리고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경선 이후에도 신한국당은 당내 갈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와 민주계의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이런 갈등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의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게다가 이회창 후보는 아들의 병역면제 시비가 불거지면서 지지율이 급락했고, 당내에서는 대선 승리에 회의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이인제는 여론조사 지지도의 상승에 힘입어 공개적으로 후보교체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결정된 후보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마침내 이인제는 9월 8일 경기지사직을 사퇴하고 9월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세대교체와 범민주개혁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며 신한국당 탈당과 대선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인제측은 10월 14일 대구에서 창당준비위를 결성한 뒤 11월 5일 이만섭 고문을 총재로, 장을병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하는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후보로 이인제를 추대하였다.
한편,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 10월 26일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이른바 DJP연합은 그 논의가 시작된 지 1년 반 만에 결실을 본 셈이었다. 이로써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총리에 김종필'이라는 '공동정권 구상'이 성사되었다. 김대중·김종필 양인의 공조는 96년 4·11총선 이후부터 싹터 6번에 걸친 기초단체장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공동보조를 강화해왔고, 1997년에는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위한 협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렇지만 후보단일화 협상이 순조롭게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신한국당의 일부 인사들이 3월 중순 내각제 수용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신한국당과 자민련의 연대 가능성이 거론되었고, 6월에는 김종필 총재와 여권 중진들간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보수대연합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7월 21일 신한국당의 후보 선출로 신한국당과 자민련간의 내각제 연대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에 7월 22일에는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에 단일화협상 소위가 구성되어 DJP연합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때 김대중 총재 비자금사건이 터져나왔다. 후보 선출 이후 지지도가 급락한 이회창 후보 진영에서 도무지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당시 지지도 1위를 달리던 김대중 후보를 물고 늘어짐으로써 김대중 대 이회창의 양자 구도를 노린 승부수였다.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선봉에 서고, 이회창의 핵심이었던 7인 회의에서 기획한 이 작품은 검찰의 대선 후 수사선언으로 파문이 일단 진정되었지만, 대선 정국을 통째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다.
비자금 사건이 폭로되자 김대중 후보로서는 급박하게 단일화 협상을 마무리 지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자민련 일부에서도 단일화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10월 14일부터 한광옥, 김용환 두 협상대표의 합의 노력이 가시화되었다. 결국 김대중 후보의 결단으로 마지막 문제가 해결되었다. 합의 내용은 양당 총재에게 보고되었고, 10월 27일 밤 김대중 총재가 김종필 총재의 청구동 자택을 방문함으로써 최종합의에 도달했다.
양당의 합의 사항의 핵심은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되, 공동집권시 실질적인 각료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는 실세총리는 자민련측에서 맡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공동정부 출범 후 총리의 권한을 보장해주기 위해 별도 법률을 제정하고 양당 동수로 '공동정부 운영협의회'(가칭)도 운영키로 했으며, 내각제 개헌(독일식 순수내각제)을 대선공약으로 채택한 뒤 집권 후 양당 동수로 내각제 개헌 추진위를 구성, 99년 말까지 개헌을 완료키로 했다. 개헌 뒤에도 공조정신에 따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자민련이 대통령이나 수상(총리) 가운데 우선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98년 동아연감』, 29쪽)
11월 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 양당은 '야권후보단일화 합의문 서명식'을 갖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총재를 단일후보로 추대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여기다가 7월 24일 포항북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태준 전 포철회장도 야권단일화에 동참하였다. 11월 4일 박태준 전 포철회장은 자민련에 입당하였고, 21일 김종필 명예총재의 뒤를 이어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대중·김종필·박태준의 이른바 DJPT연합이 성사되었다.
한편, 대선국면에서 입지가 좁아져 당의 존립이 위태롭던 민주당 이기택 총재는 8월 8일 조순 서울시장에게 대통령 후보와 총재직을 제의했다. 조순 서울시장이 이에 화답해 민주당은 조순을 민주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세와는 달리 조순의 지지도가 제자리걸음에 머물자 조순은 10월 14일에 "건전한 세력과 연대를 위해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후보사퇴를 시사했다. 이에 10월 22일 이회창 총재도 "3김청산 원칙에 뜻을 같이하는 세력이라면 합당도 고려할 수 있다"고 화답해 이회창-조순 연대가 이루어졌다.
11월 7일 이회창과 조순이 만나 3김청산과 정치혁신, 정권재창출을 위한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에 합의했으며, 21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합당대회를 개최해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회창, 총재에 조순을 선출했다. 이로써 대선정국은 이회창-김대중-이인제의 3자구도가 정립되었다. 대선정국을 둘러싼 합종연횡의 과정에서 소폭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진 것이다.


80년 이후의 주요 정계 개편흐름 - 『동아일보』, 98. 4. 23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 탄생


3자 구도가 형성된 가운데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전의 기본 쟁점은 정권교체와 3김청산, 그리고 세대교체였다.
김대중 후보가 일찍부터 내세운 '수평적 정권교체론'과 자민련의 '내각제를 위한 정권교체론'이 접목되어 김대중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정권교체'가 되었으며, 이회창 후보는 "내각제는 3김시대의 연장을 위한 야합의 도구"라면서 '3김청산'을 주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대해 이인제 후보는 "한나라당도 3김 정치의 유산에 따른 수구정당이며 내각제에 동조할 세력"이라며 진정한 3김청산은 '세대교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가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문제, 92년 YS의 대선자금과 DJ비자금, 11월 말에 터진 외환위기문제가 대선정국을 뜨겁게 달군 주요한 공방거리로 등장하였다.
또한 8월 15일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밀입북사건이 터지면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색깔론 시비가 다시 등장했으며, 북한의 김병식·김장수 등의 편지사건이 터지면서 '북풍조작'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북풍사건'은 대선 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사가 진행되어 안기부의 조직적인 개입이 밝혀졌고, 권영해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직 고위간부들이 줄줄이 법의 심판을 받아 구속되었다. 안기부는 결국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기로 하였으며, 국내정치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가 천명되어 환골탈태의 변신을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5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면서 사실상 여당으로서의 프리미엄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9월 30일 이회창 후보는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총재직을 물려받았지만 그 바탕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김대중 비자금사건에 대해 10월 21일 검찰이 수사유보 방침을 천명하자 이회창 총재는 10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 한편, DJ비자금 수사를 촉구했다.
이는 비자금 수사유보가 김영삼- 김대중 밀약에 따른 것이란 판단으로부터 나온 노골적인 비난의 표시였다. 그런 갈등은 급기야 11월 6일 포항에서 열린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결의대회에서 일부 당원들이 김대통령을 상징하는 '03 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사건을 불러왔고, 11월 7일 김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김대통령과 이회창 후보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외환위기는 12월 3일 IMF협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외환위기와 경제파탄의 책임문제를 두고 대선 후보들간에 열띤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며, 김대중후보의 IMF재협상 주장이 등장하면서 공방전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국가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것은 김영삼 정부와 그에 깊숙이 관여하여 혜택받은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이라고 주장하고 집권 후 경제청문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회창 후보는 "김후보가 IMF재협상을 주장하는 바람에 외환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에 이인제 후보는 처음에는 재협상론에 무게를 실었다가 뒤에는 다단계 협상론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선거 때마다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이 지역감정과 언론의 편파보도였는데 15대 대선에서도 이 문제는 어김없이 일어났다. 지역감정은 한나라당의 김윤환 선거대책위원장이 경남지역 필승대회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하면서 범영남권의 단결을 주창하고 나와 문제가 되었다. 한나라당은 '이인제 지지는 곧 김대중 당선'이라는 등식을 주장하면서 부산·경남 지역의 반호남 정서를 자극하는 데 피치를 올렸다.
언론의 편파보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앙일보』였다. 11월 초 중앙일보가 'YS신당설'과 '100억원 지원설'을 보도하면서 이인제 후보 까내리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선거 막판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92년 대선 후보 당시 정주영 후보 죽이기로써 김영삼-김대중 양자구도를 부각시켰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인제 죽이기를 통해 이회창-김대중 양자구도를 부각시켰다. 이에 대한 이인제측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지만, 언론의 보도는 한 번 나간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터지긴 했어도 15대 대통령 선거는 과거에 비해 비교적 깨끗하게 치러졌다. 관권시비나 금품살포 시비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무엇보다도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이 본격화되어, 물량을 동원한 세몰이식 군중집회의 위력이 사라지고, 정책대결과 후보자들의 면면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을 가능토록 하였다.
TV토론은 3당후보(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가 확정된 7월 28일부터 각 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이회창-김대중-이인제의 3자구도가 형성된 뒤 12월 1일 처음 실시된 후보자합동토론회는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후보자합동토론회는 2차례 더 실시되었으며, 15대 대선에서의 TV토론은 선거풍토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는데 한 획을 그었다.
12월 18일 대통령 선거는 커다란 잡음없이 무난하게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40여만표라는 박빙의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유권자 3천229만 416명 가운데 2천604만 2천633명이 투표를 해 80.7%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그 가운데 김대중 후보가 40.3%인 1천32만 6천275표를 얻어 38.7%인 993만 5천718표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1.6%인 39만 557표로 앞섰다. 역대 대통령 선거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접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실로 한국정치사에 길이 남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고난의 역정을 걸어온 김대중 자신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전체 국민의 영광이었고 한국민주주의의 커다란 진전이었다. 이것은 1948년 정부수립부터 50년동안 파행을 거듭하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제 본궤도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새로이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이름을 붙였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김대중 당선자는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부터 쉴 틈도 없이 다시 뛰어야 했다.
IMF체제가 등장하면서 통치능력을 사실상 상실한 김영삼 정부를 대신해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일에 나선 것이다. 2개월간의 과도적 기간을 거친 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국민의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앞에는 숱한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연보

1925. 12. 3 -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출생
1944. 3. - 목포상업학교 졸업, 목포상선 회사 입사
1951. 3. - (주)흥국해운 사장, 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1960. 10. - 민주당 대변인
1961. 5. - 5대 민의원 보궐선거(인제) 당선
1965. 5. - 민중당 대변인
1970. 9. - 신민당 7대 대통령후보로 지명
1971. 4. - 7대 대선 낙선(46%)
1972. 10. - 일본 방문 중 유신선포로 망명생활 시작
1973. 8. -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강제귀국, 가택연금
1976. 3. -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주도로 징역 8년 선고받음
1980. 5. -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
1982. 12. - 형집행정지로 석방(2년 7개월간 옥고), 미국 망명
1985. 3. -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1987. 11. - 평화민주당 창당, 총재 겸 13대 대통령후보로 지명
1987. 12. - 제13대 대선 낙선
1992. 12. - 14대 대선 낙선, 정계은퇴 선언
1994. 1. - 아태평화재단 설립
1995. 7. - 정계복귀 선언
1995. 9. -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7. 10. - 자민련과 야권후보 단일화
1997. 12. - 제15대 대통령 당선





4) 문민정부의 남북관계



전향적인 출발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관계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못 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감동적인 말이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한들 부모형제보다 나을 리 없고, 우방국이 좋다지만 피를 나눈 동포와 민족보다 나을 것인가. 이는 자연의 섭리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다.
물론 취임사는 다분히 정치적인 수사가 섞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문민정부의 통일정책과 남북관계에 많은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통일부총리에 진보적인 인사인 한완상이 기용되어 기대를 한껏 부풀게 만들었다.
김영삼 정부의 초기 대북 정책의 전향적인 태도는 곧바로 나타났다. 3월 11일 정부는 장기수로 복역한 이인모 노인을 아무런 조건없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인모 노인 문제가 세상의 관심사로 등장한 것은 월간 『말』지와 『한겨레신문』이 그의 수기와 편지를 소개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생존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에 살고 있던 이씨의 부인 김순임과 딸 이현옥 등 가족은 "남편과 아버지를 돌려달라."는 호소를 『노동신문』에 실었고, 북한측도 1992년 1월 남북교류협력분과위에서 공식적으로 송환문제를 제기하였다. 북한측의 요구에 대해 한국 정부는 '조건부 송환' 의사를 밝혔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인모 노인은 한반도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1921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동경공고에 다니면서 비밀학생활동에 참가했고, 해방된 이듬해 1946년 8월에는 노동당에 입당해 당원이 되었다.
북한의 건국 사업에 참가하던 그는 50년 1월 인민군 소위로 임명되었고, 풍산군 조국보위 위원회 군사지도위원이 되었다. 그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노동당 경남도당 군사위지도위원으로 남한 땅을 밟는다.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을 따라가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이인모는 빨치산 유격활동에 참가하였다.
이인모는 1952년 1월 국군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1959년 1월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사건에 연루돼 1961년 6월 투옥되었고, 형기를 마쳤으나 사회안전법의 보안감호처분에 따라 1988년 10월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34년 3개월이란 엄청난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인모가 이렇게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것은 한국의 '사상전향제도'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좌익사상범에 대해서는 확신범으로 규정하여 사상전향서를 제출하지 않는 한, 비록 형기를 마쳤을지라도 풀어주지 않았다.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안감호처분으로 2년마다 계속해서 구속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상전향제도는 대표적인 일제 시대의 잔재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양심자유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제도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결국 폐지되고 '준법서약제도'로 대치되었다. 정부 스스로 이 제도의 전근대성과 비민주성, 위헌성을 시인한 것이다. 그에 대해 박상천 법무부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사상전향제를 폐지한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서 독자적으로 윤리적 가치판단과 정치적 사상 등을 형성하고 보유할 양심의 자유를 가지며 사상을 보유할 자유를 인정하므로 사상의 포기를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당하지 않을 자유, 이른바 '침묵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학자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 포기를 외부에 표명하도록 '십자가 밟기'를 강요한 것을 '침묵의 자유' 침해 사례로 들고 있다.
사상전향제는 사상범들에 대해 '내심의 사상'에 대해 전향서를 쓰는 형태로 포기하는 것을 외부에 표명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때 교도소 내에서의 처우를 달리한다는 점에서 '양심 보유의 자유' '침묵의 자유'를 침해함을 부인하기 어렵다.(박상천, 「사상전향제 폐지를 말한다」, 동아일보, 98. 7. 30)

아무튼 사상전향제도와 사회안전법의 보안감호처분으로 우리나라에는 30,4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비전향장기수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말았다. 전세계적으로 장기수의 상징으로 알려진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의 수형 기간이 27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현행제도의 문제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전향장기수 출신의 이인모 노인을 김영삼 정부는 3월 19일 판문점을 통해 북쪽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이인모 노인의 송환은 김영삼 정부가 취한 전향적인 대북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되었다. 더구나 한국 정부가 이인모 노인을 송환한 것은 북한이 NPT탈퇴를 결정한 다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렇게 해서 이인모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이라는 비극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72세의 병든 노인이 되어 북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의 외동딸 이현옥이 42세였으니 만 4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인모 노인은 북에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북한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호기로 삼았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송환은 하나의 아픔이었고, 또한 감동이었다.
해방된 지 50여년 동안 한민족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숱한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이산의 아픔만큼 큰 것도 없다. 이인모 노인의 송환에는 정치적 이해관계, 이념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남한 정부는 그 문제를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에서 처리함으로써 남북관계가 전향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핵 위기와 제네바 합의

김영삼 정부의 출범으로 남북관계가 전향적으로 발전할 것이란 기대는 북한 핵문제가 터져나오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정부가 이인모 노인을 조건없이 북으로 송환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한반도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 폭탄선언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지만 이 문제가 시작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1985년 NPT에 처음 가입한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핵안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9월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해외전술핵 폐기선언과 그해 12월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에는 핵무기가 없다"는 선언을 계기로 남북은 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1992년에는 팀스피리트 훈련이 중지되는 등 남북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북한은 1992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정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5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6차례에 걸쳐 IAEA의 임시사찰도 받았다.
그런데 IAEA는 북한이 제출한 16개 시설 외에 2개의 핵시설로 의심되는 지역에 대해서도 사찰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IAEA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첩보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넘겨받아 영변의 두 개 시설이 핵폐기물 저장장소로 의심된다면서 사찰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IAEA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단체라고 강력히 비난하면서 강경하게 나왔다. 북한은 핵문제가 불거진 것이 다분히 미국내의 국방성과 CIA 등 강경파들이 위성첩보 사진을 넘겨주는 등의 방법으로 IAEA를 부추기면서 북한에 대한 목조르기에 들어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도 강경했다. 미국은 IAEA의 핵사찰을 강제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려 했다. 그 수단의 하나로 1992년에 일시 중단했던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최후 수단으로 NPT탈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긴장이 급격히 고조돼 갔고,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약 1년 반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미국과 한국내에서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강온론이 교차했고, 어느 쪽이 득세하는가에 따라 상황이 수시로 변했다.
초기에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미국에서는 국방성과 중앙정보국이 이를 주도했고, 한국에서는 안기부와 국방부가 주도했다. 미국과 한국 내의 강경파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북한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분위기를 그런 방향으로 몰고갔다. 여기에 보수언론이 가세하면서 북한에 대한 전격적인 군사적 제재가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는 듯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5월 13일자에서 미국 국방부가 1994년 여름 북한 핵위기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을 때 전술핵무기의 사용과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전면전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고 보도했다.(이원섭, 『새로운 모색』, 한겨레신문사, 99쪽)." 한국에서 이종구 국방부장관이 '엔테베식 기습공격' 운운한 것도 이런 맥락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다.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면서 끝까지 버티는 벼랑끝 전술을 구사했다. 어차피 북한으로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파멸이 올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핵사찰을 수용해도 미국은 계속해서 화학무기 의혹, 미사일 문제, 인권시비, 테러리즘 포기 등의 문제를 연속적으로 들고 나오면서 '북한 고사 전략'을 계속할 것이라 보았다. 그럴 바에는 이번 기회에 미국과 직접 붙어서 생존을 보장받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이렇게 꼬여가던 북한 핵문제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카터재단을 운영하면서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을 다니며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카터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초청을 받아 1994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북한을 방문한다. 서울을 거쳐 평양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몇 가지 중요한 합의에 도달했다.
김일성은 만일 미국이 북·미고위급 회담을 열고 흑연감속로 대신에 경수로 건설에 지원하며,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공격 위협을 제거한다는 보장을 한다면 북한은 핵개발 계획을 동결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합의사항은 곧바로 미국에 전달되었고, 미국에서는 논란 끝에 엘고어 부통령의 제안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후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에서 강석주 외교 제1부부장과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를 각각 수석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재개되었으며, 10월 21일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도달했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내용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핵 동결과 NPT 복귀, 대북 경수로의 지원, 경수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중유의 공급, 그리고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 접촉과 관계 개선이 그 내용이었다. 이로써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의 전쟁위기 상황은 해소되었다.



'조문파동'과 꼬이는 남북관계

1994년 6월 18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회견 발표문에서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주석은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전에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상회담이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남한측에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김주석의 말을 김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카터의 중재로 북한 핵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고,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담은 무기한 연기됐다. 7월 11일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북측단장 김용순의 명의로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남북최고위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한다"고 전해왔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도 "정상회담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처사는 '정상회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을 무색케하는 것이었다. 우선 사망 소식이 전해진 7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7월 11일 개최된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은 조심스럽게 전제조건을 달아 "혹 정부가 조문의사를 표명할 용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은 거두절미하고 '국회의원이 조문을 주장했다'고 보도하면서 어떻게 '6·25를 일으킨 전쟁범죄자에게 조문 운운할 수 있느냐'면서 메카시즘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조문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조문파동에 기름을 부은 것은 서강대 총장 박홍이었다. 박홍은 7월 18일 청와대의 총장 초청 모임에서 "주사파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을 해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말의 요지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의 사로청이 있으며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북한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남한의 주사파에게 지령을 보낸다. 이미 북한은 학생들에게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미군기지 반납운동 등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문파동'과 함께 '주사파 파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7월 19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국가질서수호를 위해 무차별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사파 학생들에 대한 강력한 척결의지를 밝혔다. 한편 정부는 7월 20일 러시아의 6·25관련 비밀문서를 공개하고 6·25는 김일성이 스탈린, 모택동과 사전협의 아래 도발했으며, 따라서 김일성은 6·25 전범이라고 공표했다. 게다가 북한의 장래를 두고 온갖 억측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이로부터 반공 히스테리가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7월 21일 서강대 경영대 교수들은 박홍 총장 지지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23일에는 전국 20개 대학 총장들의 공동 지지성명도 발표되었다. 뿐만 아니라 8월 1일 박총장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됐다"고 했으며, 8월 12일에는 종교, 언론, 정당, 문화계에도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검찰은 박홍 총장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공안사건을 줄줄이 발표했다. 7월 21일 대검공안부는 한총련과 범청학련의 팩스교류 사례를 공개했고, 7월 25일 법무부는 주사파를 사면·복권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3일에는 검찰이 진주 경상대 교수 9명이 공동으로 저술한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대학교재가 이적성이 있다며 수사에 들어갔다. 8월 4일 경찰은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적발 검거했다고 했으며, 8월 10일 범민족대회추진본부의 이창복 의장 등 2명을 검거했다. 9월 8일에는 고교생들에게 반미학습을 시켜왔다는 혐의로 고교생 조직인 '샘'을 검거했다. 이렇게 진행된 대대적인 주사파 척결과정에서 1994년 한해 동안 주사파로 낙인찍혀 120명이 구속되고 105명이 수배되었다.



이런 비이성적인 메카시 광풍에 대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7월 21일 성명을 발표하고 "학생운동권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박홍 총장의 발언은 사실이 아닌 무지와 편견에 의한 것으로 양심과 상식을 넘어선 행위"라며 반발했다. 한총련과 사노맹 구속자 가족들도 강력히 항의했다. 또한 '야당에도 주사파가 있다'는 박총장의 발언에 대해 증거를 요구하며 야당도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검찰은 8월 19일 '박총장의 말이 대부분 제3자에게 들은 것이며 자료 역시 공안수사기관에서 대부분 확보하고 있던 것이어서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박총장은 8월 25일 여의도클럽 토론회에서 주사파가 최소한 1만 5천명 가량 된다고 또다시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남북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언제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나 싶게 서로 헐뜯기에 바빴다. 북한도 7월 15일부터 대남 비방방송을 다시 재개했다. 북한으로서는 한국 정부의 처사가 초상집에 조의를 표하지는 못할지언정 완전히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꼴로 여겨졌던 것이다.



쌀지원 파동과 남북관계의 파행

'조문파동'으로 남북관계는 정상회담을 합의하기 이전의 냉랭한 관계로 되돌아갔다. 서로간에 비방이 계속됐고, 남북 당사자간에는 어떤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남북경제협력도 지지부진했다.
북한은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조의를 표하고 조문파동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남북관계를 다시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것은 식량사정이 다급한 북한이 쌀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1995년 5월 26일 나웅배 통일부총리는 "식량난을 겪는 북한 동포들이 현실적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민족복리차원에서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정치적 부대조건 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해서 6월 17일부터 21일까지 비공개로 회담이 진행되었고, 여기서 남한은 북한에 1차로 쌀 15만톤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쌀의 원산지 표시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냉랭해진 남북관계가 다시 풀어질 수 있다면 이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데서 꼬였다. 이른바 '인공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인공기 사건은 당시 전후 사정이 생략된 채 "북한이 공연한 트집을 잡아, 쌀을 싣고간 남한배에 북한 인공기를 강제로 게양토록 한 것"으로 보수언론이 왜곡 과장 보도하는 바람에 파문이 확대되었다. 다행이 인공기 사건은 북한이 대외협력위 이름으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 파문이 수습되는 듯했다.
그러나 쌀지원 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남쪽에서 쌀을 싣고 간 남한 배의 선원이 합의사항을 어기고 사진기로 청진항을 몰래 찍다가 들켜 선원들이 억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은 이를 계획적인 정탐행위로 몰아 선박과 선원들을 억류시켰고,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쌀 지원을 차질없이 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사건은 남북간에 감정적인 앙금을 남겨 그후의 회담을 어렵게 만들었다. 9월 말 북경에서 계속된 3차회담은 쌀 추가 지원 규모에 대한 우선 협의를 주장하는 북측 입장과 우성호 선원송환과 회담장소 변경에 대한 북한측의 태도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남측 입장이 팽팽히 맞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쌀 지원 문제는 처음 북한이 일본에 쌀 지원을 요청하자 이를 알아차린 한국 정부가 남북 당국자간의 대화 재개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쌀 지원을 자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처음 "아무런 조건없이" 쌀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그 바탕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은 쌀 지원을 6·27 지방선거 전에 추진해 정치적인 성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그 바람에 충분한 준비도 없이 일을 진행하다 뜻하지 않은 문제들에 부딪쳤고, 보수 언론으로부터는 "쌀 주고 빰 맞는다"는 식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뒤 김영삼 정부는 쌀 지원이 정치적 이해득실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자 대북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몰아갔다. 심지어는 북한이 100년만의 대홍수를 만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데도 쌀 지원은커녕 민간 지원마저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북한 주민들이 100만명씩 굶어죽고 있다"는 국제지원단체의 말도 정략적 차원에서 북한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김영삼 대통령은 곧 북한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기 일쑤였고, 흡수통일을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국제사회와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남한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잠수함 사건·황장엽 망명 사건과 냉전의 벽

뒤틀리기 시작한 남북관계는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로 들어서면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사건만 터졌다. 1996년 9월에 일어난 북한 잠수함의 동해안 침투 사건과 1997년 2월의 북한의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인 황장엽의 망명사건이었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 반경 강릉 대포동 앞을 지나던 택시 운전사의 신고를 받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걸렸고 곧바로 추적작업에 나섰다. 이들 가운데 11명은 18일 오후 5시 강릉시 강동면 청학산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에 앞서 오후 4시 45분경 무장 간첩 가운데 한 명인 이광수는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농가에서 생포되었다.
이광수의 체포로 전모는 드러났고, 추적은 계속되어 10월 22일에는 칠성산에서 2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그리고 수색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11월 5일 남은 잔당 가운데 정찰조 2명을 사살했다. 총 26명의 상륙자 가운데 1명은 행방을 찾지 못했으나 50일 만에 대간첩작전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북한은 9월 23일 처음으로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훈련중 기관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 이전에 북한이 간첩사건 자체를 아예 부정하던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남한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은 다시 강경해지면서 남한을 강력히 비난하고 "백 배 천 배로 보복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남한은 격앙되었고,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강력하게 수색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언론에서는 요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목적을 띠고 남파된 무장공비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나면서 남한은 강경파의 주장이 득세했고, 보수언론은 이를 앞장서서 부추겼다. 이에 한국 정부는 대북경협을 동결하고 경수로 부지 인수와 서비스 의정서의 서명을 유보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경수로 지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때 막 시작되고 있던 4자회담과 관련해서도 북한이 4자회담 설명회에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북한도 경수로 지원은 제네바 합의 사항으로, 이를 파기하면 '핵 동결 약속'도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미국을 위협했다.
이렇게 남북이 강경대치로 나아가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남한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공식 사과는 아니더라도 '유감 표명'이라도 확실히 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미국의 노력과 압력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짓게 되었다.
북한은 12월 29일 '평양방송'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잠수함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유감'을 표명했다. 먼저 영어로 다음에는 우리말로 방송되었다. '유감' 표명이 한국보다는 미국을 향한 것이라는 간접적인 표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부 대변인은 위임에 의하여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1996년 9월 남조선 강릉 해안에서의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반도에서의 공고한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유관측들과 함께 힘쓸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고, 이튿날 무장간첩의 시신을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돌려주었다. 이로써 잠수함 사건은 1백일 만에 끝이 났지만 남북간에는 불신의 벽만 더욱 높아졌다.
1997년 2월에 일어난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사건도 황장엽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남북관계의 발전이나 화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황장엽은 2월 12일 망명 직후 중국의 한국 영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망명동기를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망명을 결심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황장엽은 2월 12일에 쓴 자술서 외에도 이미 1996년 11월과 1997년 1월 2일에 썼다는 또 다른 서신이 2월 13일과 다음날에 걸쳐 『조선일보』에 공개되었다. 그 두 개의 서신은 2월 12일 북경 영사관에서 썼다는 자술서와는 전혀 딴판의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남한의 노동자파업이나 학생시위를 비난하고 안기부와 군대의 강화, 강력한 여당 등을 주장했다. 마치 안기부나 정부여당을 편들기 위해 조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남한 사회에 대한 "엉뚱한 훈수"를 들고 있었다.



이로부터 황장엽의 망명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한 사회에서도 보수세력과 정치 위기에 빠져들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음이 드러났다.
황장엽 망명사건은 『신동아』 98년 5월호에 의하면 이미 1996년부터 준비돼왔고, 여기에는 안기부는 물론, 중국을 무대로 활약하고 있던 사설공작단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회장 이연길, '공작적 차원의 통일방안'을 내건 사설첩보공작단체)와 김현철 라인의 인사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또한 이런 활동은 이미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왔다고 한다. 원래 황장엽 비서는 1997년 4월 인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고, 그때 망명을 하기로 예정되었지만 정보가 새고 있다는 불안감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김대통령측의 요청으로 일정을 당겨 2월 12일 중국에서 망명을 감행한 것이라고 한다.(박성원, 「한보사태와 황장엽 망명 미스터리-YS, "K선생 황장엽 좀 데려다 주소"」, 『신동아』 98. 5)
사실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사건과 김현철 사건, 그리고 대선 국면에서 황장엽 카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포석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제대로 쓰지 못했다. 황장엽 망명사건에도 불구하고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한보사건과 김현철 사건에 대한 국민 비판이 너무도 거셌기 때문에 김대통령이 일찍이 무력화되었고, 정치적 주도력을 행사할 기회마저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후 황장엽 카드가 효력을 보기 어렵게 되자 199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북풍사건'이 터졌다. 북풍사건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수사가 이루어졌다. 북풍사건 수사로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박일룡 제1차장, 이대성 해외조사실장 등 숱한 전직 간부와 직원들이 구속되었다.
그와 함께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의 대대적인 숙정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국내정치에는 일절 관여치 않는 대신 해외정보수집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그 기본방향도 수정되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름도 '국가정보원(약칭 국정원)'으로 바꾸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처럼 대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자 하는 냉전시대의 사고를 버리지 못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가 없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한 철학과 태도를 갖지 못해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 하면서 남북관계를 6공화국 시기보다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남북관계는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도 냉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





3 국제화 시대의 한국 경제



1) 신경제 5년의 명암



新경제'의 등장



문민정부는 초기 자신의 경제정책을 「新경제」로 표기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동아일보』가 연재한 「비화 문민정부」(98. 3. 23)에서는 그 사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 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 신임 박재윤 경제수석비서관이 경제기획원 관계자들과 마주 앉았다.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은 앞으로 신경제로 부릅시다. 그리고 표기할 때는 이런 원칙을 지켜주세요. '신'과 '경제'는 붙여쓰고 '신'자는 한자로 쓰세요. 그리고 신경제 앞뒤에 강조하는 의미의 꺾쇠를 붙여서 「新경제」로 표기하세요.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후 상당기간 정부 문건에는 신경제가 「新경제」로 표기됐다. 경제수석비서관이 신경제의 표기법 같은 자잘한 문제를 직접 챙기고 나서자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문민정부 초기 경제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독선'과 '독주'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박재윤 경제수석은 「新경제」란 이름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박수석은 경제기획원 실무자들이 '93년 경제운용계획'을 보고하자 '운용'이란 말이 잘못됐으니 앞으로는 '경제운영계획'으로 쓰라고 했고, 그 바람에 인쇄가 끝난 서류나 문건들도 운용이란 오자 아닌 오자 때문에 모두 파기됐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 하나에도 애착을 갖고 '의욕적'으로 출발한 문민정부의 「新경제」는 5년이 지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민정부 5년의 경제정책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왜 그랬을까.
박재윤 경제수석은 신경제를 재정개혁, 세제개혁, 금융개혁, 경제행정규제개혁, 의식개혁 등의 '경제개혁'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신경제론은 김대통령의 통치철학을 경제정책론으로 표현한 것"이라면서 신경제를 "국민과 함께 하는 경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경제는 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종전 경제운용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온국민의 참여와 창의"를 새로운 성장잠재력으로 하고 있어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한층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수석의 신경제는 당시 확산되고 있던 '시장경제론'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가 강조한 '참여와 창의'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주도한다'는 의미로서, 민간주도를 의미하는 '자율'에 대신하기 위해 만든 구호로 알려졌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를 안고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가장 먼저 내놓은 경제정책은 신경제 100일 계획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초대 경제팀장이었던 이경식 경제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만큼 우선 93년 6월 말까지 신경제 100일 계획을 먼저 추진할 것"이며 "이는 경제제도의 개혁보다는 경기활성화에 중점을 둘 방침"이라고 했다. 또한 "본격적인 경제개혁은 100일 계획으로 경제가 활력을 회복한 뒤 5개년 계획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경제가 등장하면서 이전에 세웠던 제7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100일 계획의 중점 과제는 '△공금리의 인하, 통화공급 확대, 재정의 조기 집행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경기활성화 △중소기업의 구조조정 △기술개발 촉진 △기업활동의 자율성 제고' 등 7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중심은 경기활성화였다. 100일 계획은 신경제가 내걸었던 경제제도의 개혁을 뒤로 미룬 채 '선 경기부양'을 택한 것이다. 다만 경기활성화에 효과적인 행정규제완화만 100일 계획에서부터 바로 추진되었다.
이런 내용의 100일 계획이 발표되자 경제개혁을 주장해온 경실련 등의 시민단체는 "100일 계획은 신경제가 주창하는 '개혁을 통한 성장 잠재력의 확충'과는 거리가 멀며, 특히 시장경제의 존중이라고 하는 신경제 원칙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반발했다.
게다가 고통분담의 논리를 내세워 '△공무원 봉급동결 △노동자의 임금인상 억제 △공산품 가격의 동결 △예산삭감액을 재원으로 한 제조업 지원' 등은 사실상 '5공식'의 근로자 누르기 정책으로서, 노동계에서는 이를 '노동자 고통전담론'이라고 비판했다.
100일 계획은 이런 비판 속에서 출발했지만, 계획이 끝난 7월 초까지 경기가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100일 계획은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3년 7월 2일 정부는 신경제 5개년계획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신경제 정책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모든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능동적인 창의력'을 강조하였다. 5개년계획은 그 점을 원동력으로 해서 향후 2∼3년 안에 선진경제권에 진입하고 통일에 대비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등의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신경제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주도한다는 점에서 민간주도의 '자율' 경제와는 차이를 분명히 했다.
신경제 5개년계획은 총량규모에서도 의욕적인 목표를 세웠다. 계획 기간 동안 매년 평균 7%의 경제성장, 집권 2∼3년 내로 물가를 3% 수준으로 안정시키며, 1995년부터는 국제수지도 흑자를 내겠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신경제 5개년 계획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짜여졌다. 하나는 재정개혁, 금융개혁, 경제행정규제의 완화를 골자로 한 개혁과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기술개발과 경영혁신 등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일반과제였다. 특히 금융실명제의 실시와 지하경제의 척결, 부동산 투기의 근절과 공평과세, 불필요한 행정규제 철폐 등을 통해 각종 부조리를 제거하고 경제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재정부문의 개혁과제로는 정부의 인건비 등 고정지출을 최소화하고 각종 사업의 우선 순위를 재검토하며, 사회간접자본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적인 재정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재정개혁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였다. 이를 위해 정부조직개편은 필수적이었다.
금융부문의 개혁과제로는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포함해 금리자유화의 확대, 은행장 인사 및 금융기관 경영자율화, 금융기관의 신규진입 규제완화 등 자율화의 폭을 확대할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자율화의 확대에 맞게 금융감독기능도 강화되어야 했고, 국제화·개방화 시대에 걸맞은 외환 및 자본자유화도 더욱 확대되어야 할 것이었다. 결국 금융구조 전반에 대한 개편이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던 셈이다.
이와 함께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성장잠재력의 강화 △국제시장 기반의 확대 △국민생활 여건의 개선' 등 3대 정책과제를 설정했으며, 20개 시책을 세웠다. 그리고 133개 공기업 가운데 68개를 민영화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표로 보는 신경제 5년의 명암



김영삼 정부는 처음 출범하자마자 정치부문에서 강력한 개혁의지를 펼쳤고, 그것은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지만 「新경제」로 표현된 경제정책은 개혁 성격이 취약했다.
신경제 100일 계획을 통해 개혁적 경제정책보다는 과거 정권의 경기부양책을 답습했고, 그뒤에 추진한 신경제 5개년계획도 변화하는 국내외의 경제여건에 적절한 개혁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신경제정책이란 과거 정부주도·성장위주의 경제체제에서 민간주도의 자율경제·복지와 질을 중시하는 경제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성격의 정책이었다.
그런데 경제여건은 우리들의 바람과는 판이하게 너무도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1993년 12월 14일 제네바에서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었고, 1995년 1월 1일부터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체제를 대신한 WTO(세계무역기구)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로써 세계는 '총성없는 전쟁'의 시대, '무한경쟁' 시대로 들어섰다.
이러한 국제여건의 변화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다. 금융구조개혁, 재벌개혁, 재정개혁과 기구개편 등의 획기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변화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5년은 이런 상황변화에 적응할 만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고통분담론' '세계화' '삶의 질 세계화' '경쟁력 10% 높이기' '재벌개혁' '의식개혁' '산업구조조정' '금융구조조정' '정부기구개편' 등 구호와 목소리는 높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룡처럼 비대화된 재벌을 개혁하지 않고는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우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일관된 경제철학의 부재, 정부와 관료들의 무사안일주의, 기득권과 재벌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재벌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금융·통화정책을 둘러싼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원(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1994년 출범)의 힘 겨루기,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관여와 은행장의 정부 눈치보기 등으로 금융개혁을 위한 기구개편도, 금융구조조정도 제때에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일관성의 부재와 대국민 설득에 실패함으로써 '고통분담론'은 노동자에게 '고통전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정부·자본과 노동자는 극한적인 대결로 나아갔다. 게다가 대통령 아들의 부정비리와 삼성자동차 진출 허용·PCS사업자 선정의혹 등의 편파적인 특혜는 국민들로부터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동차·전자 등 한국경제의 주력 산업은 과잉투자와 수출부진으로 재고가 늘어났고, 재벌은 탐욕스런 문어발 확장으로 무한정한 덩치 키우기를 계속했지만 기업재무구조와 채산성은 악화되기만 했다. 더욱이 1996년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외채는 1997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를 견디다 못한 대기업들의 부도사태가 속출했다.
이와 함께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용도도 급속히 하락해 한국에 진출했던 외국자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주식시장이 혼란에 빠져들고, 외환위기도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급기야는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국가부도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보통의 실패가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평가받는 '날개없는 추락'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는 개혁의 실패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경제개혁의 핵심은 정부주도의 금융과 특혜로 성장해온 재벌에 대해 메스를 가하는 것이었지만, 정부는 그것을 방기했고 재벌은 거부했다. 그 결과는 한국경제의 추락과 국민 전체의 고통으로 귀결되었다.
신경제 5년 동안 김영삼 정부는 경제와 관련해 매년 한 가지씩 새로운 구호를 내걸었다. 1993년에는 '신한국과 신경제'를, 94년에는 '국제화와 세계화'를, 95년에는 '삶의 질 세계화'를, 96년에는 '경쟁력 10% 높이기'를, 97년에는 '21개 국가과제'를 내세웠다.
또한 1995년에는 경제선진국이 모두 회원으로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OECD 가입을 앞두고 5월 11일 통계청은 한국과 25개 OECD 회원국의 경제사회지표를 비교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총 25개국 가운데 경제성장률 1위, 국내총생산(GDP)규모 9위, 무역량 10위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부분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래서 한국은 스스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1인당 보건지출액 23위, TV보급률 22위, 연간 영화관람회수 18위, 인구 10만명당 의사수 17위 등 '삶의 질'과 관련된 분야는 하위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문민정부 5년 동안은 '삶의 질'뿐만 아니라 거시경제지표 면에서도 결코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외환위기와 IMF체제를 불러왔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신경제 5개년계획에서 세웠던 목표를 제대로 이룬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집권 2∼3년 안에 3% 수준으로 잡겠다던 물가는 5% 이상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또한 1995년부터 흑자를 내겠다던 경상수지는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폭만 더욱 커졌다. 1994년 45억 달러 적자, 95년 89억 달러 적자, 그리고 96년에는 사상 최대인 23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97년에는 89억 달러 적자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신경제 5년 동안 한 해도 흑자로 돌아서지 못하였다. 그 바람에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채규모는 1992년에 4백39억 달러에서 96년에 1천45억 달러, 97년 말에는 1천208억 달러(IBRD기준)로 불어났다. 그러나 여기에는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현지 채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97년 말 IMF체제가 시작되자 국제금융계는 한국의 채무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 세계은행(IBRD) 통계와는 다른 '대외지불부담' 통계를 요구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총대외지불부담은 1996년 말 1천607억 달러, 97년 12월 20일 현재 1천530억 달러에 달했다.(『한겨레신문』, 97. 12. 31) 이렇게 되어 한국은 미국 다음의 전세계 2위의 채무국이 되었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한국은 세계 1위의 채무국인 셈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도 1995년 1만 37달러, 96년 1만 548달러에서 97년에는 9천5백11달러로 1만 달러선 아래로 떨어져 1만 달러 시대를 2년 만에 마감했다. 국민총생산(GDP)은 1995년 4천5백65억 달러, 96년 4천8백44억 달러에서 97년에는 4천4백26억 달러(약 4백20조 9천억원)로 떨어졌다. 이것은 1인당 GNP로는 세계 34위 수준이고, 국민총생산(GDP) 기준의 경제규모는 세계11위 수준이다.
이와 함께 경제성장률은 1993년 5.8%, 94년 8.6%, 95년 8.9%, 96년 7.1%로 원래 목표치에 접근했다. 하지만 97년에는 5.5%로 내려앉았고 98년에는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이런 거시경제지표 외에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경제실상은 더욱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개방을 받아들임으로써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시장의 잠식은 심화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정부는 굴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국내 시장을 개방했고, 시기상조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과시욕 때문에 1996년 말 OECD의 가입을 강행했다. 그 결과 1997년 말까지 수입자유화율이 99.9%에 이를 정도로 국내시장의 빗장은 완전히 풀려버렸다.
이런 급속한 개방화에 걸맞은 준비와 개혁이 뒤따르지 않음으로써 국내 기업은 계속되는 도산의 위기에 내몰렸고,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93년부터 97년 6월 사이에 도산한 중소기업만 해도 5만 3천여 개나 되었다. 반면 재벌의 덩치는 더욱 커졌으며, 지배력은 더욱 높아졌다. 30대 재벌의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3년 79.9%에서 96년 92.1%로 높아졌으며, 계열사수도 93년 5백40개에서 97년 6월 8백15개로 늘어났다.(김상조, 『손바닥 경제』, 164쪽)
이렇게 재벌과 외국자본의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된 것과는 달리 중소기업과 노동자·농민 등 서민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노태우 정권 5년(1988∼1992년) 동안에 일어난 부도총액이 14조원인데 반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 97년 2월까지의 부도액이 45조원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보, 기아, 뉴코아, 진로, 해태 등 재벌기업이 쓰러지기 시작한 1997년 2월 이전의 부도는 거의 전적으로 중소기업 부도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경우도 생활난이 가중되기는 마찬가지였다. IMF체제로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구조조정이다 명예퇴직이다 해서 실업의 위험에 직면해야 했고, 실질임금상승률도 노동생산성 증가율보다 낮아 노동소득분배율이 1992년의 44.0%에서 95년에는 38.9%로 떨어졌다.
농민들의 사정은 농축산물은 물론이고 쌀수입 개방까지 하는 바람에 더욱 악화되었다. 1997년 5월 농림부 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농가 부채가 1천173만원으로 처음으로 1천만원을 넘어섰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1997년 11월에 독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가당 부채가 5천753만원이나 되었다.
물론 농림부 조사와 전농 조사가 이렇듯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전농의 조사가 영농활동이 활발한 30∼40대의 비중을 76%로 높게 잡았기 때문이었다.(『한겨레신문』, 98. 3. 18)
신경제 5년은 한 마디로 실패했다. 신경제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준비되지 않은 급속한 개방과 그에 상응하는 개혁의 부재가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2) WTO체제와 한국경제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김대통령은 금융시장의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새로운 법률의 제정없이 긴급재정경제명령(제16호)의 형식을 취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5, 6공 때부터 논란이 되어 왔지만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계속 시행이 유보되어 오다가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전격 실시된 것이다.
금융실명제의 핵심은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며, 금융소득에 대해 분리과세를 하지 않고 종합과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그 첫 단계로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을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인 이자와 배당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는 1996년 1월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되 1997년 5월에 첫 신고를 받으며, 세 번째 단계인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는 김영삼 정부에서는 실시하지 않고 차기 정권에 넘기겠다고 하였다.
금융실명제는 경제정의의 실현이란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의의가 있다.
첫째, 정경유착과 비자금, 접대비, 뇌물, 떡값, 무자료 거래 등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법적인 검은 돈거래를 근절하는 것이다. 전·노씨 비자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검은 돈의 거래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했는데, 금융실명제를 실시함으로써 이런 부정한 거래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을 완전히 근절하려면 금융거래의 실명화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돈세탁방지법, 부패방지법, 정치자금법 등의 개혁적인 입법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사실상 실효를 거두기가 어렵다.
둘째, 금융실명제는 과세상의 형평 실현에 또 한 가지 목적이 있다. 근로소득자의 소득은 유리지갑처럼 투명해 세금이 철저히 징수되지만 재산소득세는 세원조차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불공평한 과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금융실명제와 함께 예외없는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목적을 가지고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그후 많은 파란과 우여곡절 끝에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우선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의 실명화를 의무화하였지만 이를 위반하였을 때 금융기관에 과태료를 물리는 외에 다른 처벌을 할 수 있는 근거조항이 없었다.
더구나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에서 불법으로 실명전환해준 재벌 총수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에서 보듯이 합의차명의 경우 처벌할 근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96년부터는 경제가 침체되면서 금융실명제가 과소비를 부추기고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 결과 금융실명제는 대폭적인 보완이 이루어졌고, 금융소득 종합과세제도가 사실상 무력화됐다. 더욱이 1997년 12월에는 여야 합의로 금융실명제에 의한 종합과세를 유보하고 지하자금을 끌어낸다는 구실 아래 비실명장기채권의 발행을 허용하도록 개정함으로써 실명제는 유명무실화돼 버렸다.
이렇게 뼈다귀만 남은 실명제이지만 처음 실시될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개혁조치로 평가되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경제정책이 완전히 실패한 가운데서도 금융실명제의 폐지만은 끝까지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개혁조치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실명제 실시 후 2개월간 실명전환 의무기간 동안에 가명예금의 실명전환 액수는 2조 7천604억원으로 집계됐다. 또한 차명에서 실명으로 전환한 금액은 3조 4천775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 금융계는 차명예금의 실명전환 액수는 차명예금 총액 34조원의 10%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4년이 되는 1997년까지 실명확인조차 되지 않은 자금이 3조 6천억원이나 되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5, 6공 당시 실세였던 거물 정치인들이었다.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 데는 개혁적 요구 외에도 정치인에 대한 사정이라는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명제 실시로 정치자금 거래에 대한 추적이 용이하게 되었고, 그 표적이 일부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그 때문에 금융실명제는 '표적사정'이란 말과 함께 붙어다녔고,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UR타결과 WTO체제의 출범


식량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북한이 1995년 대홍수를 당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현실을 보면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 정책이 시행되면서 농업에 대한 투자는 우선 순위에서 가장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농업은 점차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고, 농업 인구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런 농업에 대한 투자 소홀은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식량을 다른 상품 일반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 결과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나날이 내려갔다. 1965년에 90%를 넘던 식량 자급률이 1985년에는 50% 이하로 떨어졌고, 1996년에 와서는 26.7%에 불과한 수준으로 급락했다. 그나마 쌀 자급률이 높기 때문이지, 쌀을 제외하면 식량자급률은 4.8%에 불과하다. 쌀을 제외한 나머지 곡물은 모두 수입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식량은 결코 보통의 공산품과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식량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개발과 환경악화, 극심한 기후변동 등으로 전세계적인 수준에서 식량자급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21세기에는 전세계적으로 급격한 식량위기가 닥쳐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식량을 다른 공산품처럼 취급해서 모자라는 식량은 공산품을 팔아 사다 먹으면 된다는 사고를 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식량의 절대량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국제 곡물시장의 가격 안정은 기대할 수 없으며, 만일 식량 위기가 절박하게 닥쳐온다면 자기 나라 국민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쌀의 자급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되면서 쌀 자급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쌀의 수입만은 막겠다던 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쌀 시장 개방에 동의하고 말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쌀 시장 개방을 받아들이면서 1993년 12월 9일의 대국민사과 담화에서 "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고 했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만은 않았다.
1986년 9월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완전히 타결되기까지 7년여의 시간이 걸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참가국간의 치열한 힘 겨루기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기나긴 '밀고 당김의 싸움'에서 최종 승자는 미국과 유럽 등의 선진국들이었다. 반대로 개발도상국들은 그만큼 많은 부담과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굴욕적인 과정이었다. 우리나라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협상의 결과는 철저히 선진국들의 '입맛'에 따른 것이었다. UR의 기본정신은 한 마디로 "각국간 교역을 냉정한 비교우위론, 즉 경쟁력의 논리에 맡기자는 것"이지만, 선진국들에게 유리한 금융·지적재산권·첨단기술제품시장을 대폭 개방하기로 한 것에 반해, 얼마 되지 않는 비교우위를 가진 개발도상국은 섬유 등에서만 단계적으로 수량 제한을 철폐하는데 그쳤다. 특히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자국에 불리한 영화산업을 버티기로 일관해 협정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 선진국의 이해관계만 철저히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UR협정을 19세기 말 대포와 총칼을 앞세운 아시아에 대한 '개항' 요구와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제2의 개항'을 맞이한 셈이었다.
1993년 12월 15일 UR이 타결되고 1년여의 후속작업을 거친 뒤 1995년 1월 정식으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도 1994년 12월 16일 'WTO협정 이행법'을 비준함으로써 회원국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
WTO체제의 출범으로 50년 가까이 세계의 무역질서를 담당해왔던 GATT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무역질서 시대가 도래했다. WTO는 "협정에 불과했던 GATT와는 달리 법인격과 강제력을 지닌 세계 무역의 유엔"과 같은 것이었다.
GATT가 주로 공산품의 관세인하에 역점을 두었던 데에 반해, WTO는 농산물과 서비스, 지적재산권까지 포괄하는 모든 분야의 관세인하와 자유경쟁을 목표로 하였다. WTO체제의 출범으로 세계는 국경없는 무한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냉전시대의 군함과 미사일 대신 산업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총체적 경쟁력을 무기로 한 '총성없는 전쟁'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WTO체제가 등장하면서 한국경제도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무엇보다도 시장개방이 가속화되었다. 쌀 수입이 시작되었고, 기초농산물 시장도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지적재산권과 서비스 분야도 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개방체제의 결과 1997년에는 수입자유화율이 99.9%로 높아졌으며, 97년 7월 현재 농축산물 수입자유화율도 99.6%나 되었다. 97년 2월에는 통신협상이 타결되었고, 다른 분야들의 시장개방도 줄줄이 예정되었다.
WTO가 등장하면서 한국 산업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은 농업분야였다. 쇠고기·돼지고기는 물론이고, 유제품과 고추·마늘·양파·참깨·보리 등이 줄줄이 수입되면서 한국산 농축산물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특허권·저작권·상표권 등 지적재산권 분야도 타격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컴퓨터와 의약, 출판계의 로열티 부담이 갈수록 늘어났다. 서비스 분야도 건설업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96년에 유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서 까르프를 비롯해 외국의 대형 유통회사들이 계속 진출해왔고, 진로, 뉴코아 등 국내 유수의 유통업체들이 무더기로 도산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일부 산업에서는 유리하게 된 면도 없지 않았다. 처음 WTO체제가 등장할 때 국내의 민간연구소나 정부산하 연구소들은 향후 10년간 225억 달러의 수출증대와 81억 달러의 수입확대로 144억 달러의 무역수지 개선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WTO체제가 출범한 지 만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펴볼 때 잘못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무역수지를 비롯해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 누적된 결과 한국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가장 주된 원인은 변화된 상황에 걸맞은 한국경제의 체질개선과 경제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성없는 전쟁의 시대',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경쟁력 있는 상품생산, 국내외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환경 마련이 핵심적인 과제였지만, 한국은 WTO체제 3년 동안 이런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했다.



'세계화' 구상과 정부조직 개편


'깜짝 쇼'를 좋아하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세계화' 선언으로 사람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1994년 11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길에 호주 시드니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세계화를 위하고 차세대를 위한 장기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곧 착수하겠다"고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다.
'세계화'가 무얼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는 '세계화'가 붙어다녔다. 세계화가 국제화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이헌 경제수석비서관은 "국제화가 세계의 개방화 추세에 뒤져서는 안 된다는 다소 수동적인 것이라면, 세계화는 우리가 앞서서 나아가자는 적극적인 것이다. 세계화가 훨씬 진취적인 개념이다"라고 답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은 기사거리 제공을 고심하던 끝에 나온 즉흥적인 발상이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UR타결과 WTO체제의 출범이라는 세계경제의 태풍이 몰아치는 전환의 시기에 한 나라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한국경제의 위상에 걸맞은 정치적 역할과 국제적 기여를 해보겠다는 넘치는 의욕도 배경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든 국제화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구호로 되는 게 아니다. 즉흥적인 기사거리 제공식의 발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더욱 명백하다.
이런 코미디 같은 세계화의 구상 발표와는 달리 세계화 선언이 가져온 파문은 상당히 컸다. 우선 정치적으로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당의 세계화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해서 축출되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은 최형우 내무부장관이었다. '3당합당 정신'을 강조하며 버티던 김종필 대표는 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결성했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삼성그룹의 승용차 사업 진입이 허용되었고,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가 해제되었다. 한이헌 경제수석은 삼성의 승용차 진출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면서 "각하, 세계화를 하게 되면 다른 나라의 기업이 한국에 와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할 때 적극 환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이 공장을 짓겠다는데 막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비화 문민정부」, 『동아일보』, 98. 3. 27)
세계화는 정부조직개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정부조직개편이 전부터 논의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현실화하는 데는 세계화 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해서 30년 동안 경제정책의 사령탑을 맡았던 경제기획원이 사라지고 재무부와 합쳐 재정경제원이 탄생했다.
세계화의 여파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외환제도 자유화 조처가 발표된 것이다. 물론 외환자유화 역시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것이지만, 김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이 발표되면서 그 시행이 앞당겨지고 자유화의 폭도 넓어졌다.
1996년 10월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세계화 드라이브에 밀려" 제대로 여론을 수렴하지도 않은 채 진행되었다. 이런 무분별한 세계화 드라이브는 한국경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시발이 되었다.
정부조직개편으로 재정경제원은 '공룡부처'가 되었고, 1997년의 외환위기 때는 경고장치마저 없어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데다가 외환자유화, OECD가입 등으로 자본시장개방을 무분별하게 추진하면서도 외채관리를 강화하고,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등의 제반 개혁조치들이 뒤따르지 않아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세계화 선언'과 그 뒤에 계속된 일련의 정책들은 '구호정치'의 표본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은 개혁은 없고 구호만 있었던 셈이다.


경제기획원 시대의 종언


"박정희의 관뚜껑이 이제야 덮였다." 정부조직 개편안이 발표된 1994년 12월 3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이날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에 따라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이 탄생했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통합해 건설교통부가 신설되었으며 상공자원부를 통상산업부로,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보건사회부를 보건복지부로 개편했다. 환경처는 환경부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정부조직 개편안의 핵심은 경제기획원의 해체였다. 경제기획원은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탄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그를 위해 강력하고 효율적인 통솔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1961년 7월 부흥부를 기초로 건설부의 종합계획국과 물동계획국, 내무부의 통계국, 재무부의 예산국을 흡수통합해 경제부처의 수석 부처로 기획원을 만들고 부총리를 책임자로 했다.
경제기획원은 1994년 12월 3일 해체가 결정되기까지 33년 5개월 동안 "개발시대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관차"였다. 이 기관차를 끌었던 장관은 모두 25명, 차관은 24명이었다.
이 가운데 8대 장기영, 10대 김학렬, 12대 남덕우 장관 시절이 가장 위세가 있었던 때였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고, 소신있는 장관들이 자리를 차고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공화국 시절부터 경제기획원의 역할이 줄어들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논란 끝에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재정경제원은 정부조직개편의 본래 취지인 '작지만 강력한 정부'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과정에서 일부 기구가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상당 부분이 그대로 존속해 재정경제원은 출범부터 '공룡부처'라는 우려를 낳았고, 재경원의 독주가 문제되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은행법 파동에서 잘 나타났다.



한국은행 파동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독립성 문제는 정치·경제적 격변기마다 주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돈을 찍고 싶어하는 정권의 요구를 적절히 조절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돈을 찍어내고 통화량을 조절하는 결정권을 가지려고 할 것은 당연했다.
한국은행 독립성에서 또 하나의 쟁점은 은행감독권을 어디서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위해 은행감독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었고, 정부는 은행감독권은 행정부의 고유권한이라는 주장이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은행 직원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는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했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장기과제로 미룬 상태였다. 그런데 1995년 2월 20일 재정경제원은 일방적으로 '한국은행법' 개정을 발표했다.
그 주된 내용은 "대통령이 임명한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한국은행 총재를 겸임하고, 한국은행 산하의 은행감독원은 금융감독원으로 확대 개편해 재경원 산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공룡부처' 재경원의 독주와 이기주의라는 비판이 터져나왔고, 한국은행과 경제학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재경원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국은행 개정법 파동은 1997년에 다시 일어났다. 1997년 6월 17일 강경식 재경원장관 겸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김인호 경제수석, 박성용 금융개혁위원장이 합의해 발표한 내용의 핵심은 한국은행 산하에 금융통화위원회를 설치하며, 금융감독권은 한국은행에서 분리해 증권·보험감독원과 통합한 뒤 국무총리 산하에 금융감독위원회를 둔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가 있자 한국은행 직원들은 심한 반발을 보였고, 갈등이 계속되면서 법개정이 늦어졌다.
개정 한국은행법은 12월 29일 국회 재경위에서 결국 통과되었다. 그렇지만 그토록 직원들이 바랐던 한국은행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 나라의 통화금융정책의 골격이 될 중앙은행의 독립 문제는 '온갖 술수와 방법이 동원된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환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재경원과 한국은행의 유기적인 협조관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재경원의 비대화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는데, 그것은 경제정책의 수립과정에서 기획원과 재무부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었던 '견제와 균형'이 사라짐으로써 생긴 문제점이었다.
실제로 1997년 8월부터 구 경제기획원 조직이었던 경제정책국이 계속 외환위기에 대한 경고음을 울렸지만, 구 재무부 조직인 금융정책실에 지나치게 의존한 강경식 부총리는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획원과 재무부가 분리된 체제였다면 외환정책의 난맥상이 훨씬 일찍 공론화해 강부총리의 독선을 견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작고 강력한 정부'를 통해 자율경제시대, 개방경제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부기구를 개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효과를 낳았던 셈이다. 이것들은 인기위주, 즉흥식 발상에 의존한 문민정부 경제정책의 참혹한 결과였다.



재벌 개혁은 없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재벌정책이다. 재벌은 30년 동안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로 덩치를 키워왔고,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경제 비중은 나날이 증가되었다.
이를테면 1995년 당시 한국의 30대 재벌이 제조업의 부가가치를 40%나 점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0년 전인 1985년과 비교하면 20%나 증가한 것이다. 이 40% 가운데 2/3를 4대 재벌이 점유하고 있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순이익 면에서 보면 이런 집중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1995년에 제조부문 순이익의 50% 이상이 30대 재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4대 재벌이 창출한 것이다.(부즈 & 앨런, 『한국보고서』, 매일경제신문사, 78쪽)
뿐만 아니라 재벌이 거의 모든 산업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더구나 4대 재벌은 농업을 제외하고 모든 부문을 주도하고 있으며, 제조부문에서 특히 전자·전기 부문을 모두 장악하고 있고, 서비스 부문에서도 막강한 주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재벌의 비대화는 계열사 수의 증가에서도 알 수 있다. 4대 재벌의 계열사 수의 변화를 살펴보자. 현대의 경우 1976년에 34개, 80년에 31개, 90년에 42개, 96년에 46개, 98년에 62개로 증가했다. 삼성은 각각 37개, 33개, 48개, 55개, 61개로, 대우는 각각 28개, 34개, 24개, 37개로, LG는 각각 62개, 43개, 62개, 49개, 52개로 증가했다. 그 결과 30대 기업집단의 계열사 총수는 1996년에 669개에서 98년에 804개로 늘어났다.
한국경제는 재벌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개혁은 재벌의 개혁과 동의어로 사용해도 크게 잘못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에서 재벌개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벌문제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과도한 사업 다각화와 문어발식 확장, 둘째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재벌총수 개인에 의한 독단적인 의사결정과 불투명한 기업 경영, 셋째는 기업의 과다한 차입경영과 그에 따른 도산 위기, 넷째 중소기업 고유업종에 대한 침해를 비롯해 새로운 사업에의 무차별적 진출과 한 사업분야에서의 독과점 상태 등이 그것이다.
한국의 재벌이 성장해온 과정은 고도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초기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계획과 국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재벌의 성장은 한국경제를 빠른 시일 안에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재벌의 성장은 국가주도 경제성장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개방화·국제화가 시대적인 대세로 굳어지고 자본의 거래가 국경을 제한없이 넘나드는 WTO체제 아래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가 운용될 수 없었다. 즉, 재벌과 같은 전근대적 경영체제, 지나친 문어발식 확장과 사업의 다각화, 과도한 차입경영 등으로는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주력기업을 중심으로 기술축적과 경영혁신을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야만 기업도 살아남고 국가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재벌정책은 그런 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기에 업종전문화의 문제가 잠깐 나왔으나 재벌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 제대로 추진도 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재벌의 무한확장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방치하거나 방조하였다. 과거와 다름없는 친재벌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삼성의 자동차 진출 허용.' 이것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현대 같은 일부 기업에는 규제가 가해졌지만 그것은 정주영이 1992년 대선에 출마해 김영삼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든 데에 대한 정치보복이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재벌의 경우는 '자율화'란 이름으로 덩치만 키워주고 있었다.



OECD 가입과 너무 빠른 축배


1996년 12월 12일 정오(한국 시간 저녁 8시) 프랑스 외무부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한국은 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은 같은 달 12일에 열린 경제정책위원회와 16일의 다자간투자협정(MAI) 회의에서부터 정회원국 자격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OECD는 '선진국클럽' '부자나라들의 사교클럽'이라고도 불리지만 회원국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했다. OECD 회원국에 요구하는 가입 조건은 무엇보다도 '개방'과 '자유무역'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 취급받아 선진국과의 국제무역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OECD에 가입하면서 이런 혜택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선진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경쟁을 해야 했다.
OECD 가입을 놓고 일부에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겨우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의 첫걸음을 시작한 우리나라가 과연 2∼3만 달러가 넘는 국민 1인당 GNP와 첨단하이테크산업으로 무장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겠는가, 커진 외형을 바탕으로 좀더 내실을 다진 후에 OECD에 가입해도 늦지 않을 텐데 정부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더구나 현재 경제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OECD에 가입해 개방의 부담을 질 필요가 있는가 등등이 대체로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드라이브에 편승해서 진지한 토론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입을 강행했다. 정부의 주장은 '우리나라도 이제 당당히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며, 경제능력으로 보아 11위에 상당하는 경제대국이다. 그러니 OECD 가입을 뒤로 미루는 것보다는 가능한 빨리 가입해서 경제능력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도 찾고, 선진국과의 경쟁을 통해 내실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 부분은 전시효과에 급급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몇 가지만 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OECD에 가입한 1996년도 한국의 국민 1인당 GNP 1만 548 달러는 기존 회원국 평균(1994년 기준으로 2만 1천1백6달 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역의존도 역시 기존 회원국은 20%에 불과한 데 비해 우리나라는 57.7%(1995년 기준)나 되어 경제자립도가 형편없이 낮았다. 게다가 제조업의 시간당 부가가치도 선진국의 1/3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OECD 가입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OECD에 가입하게 되면 몇 가지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 하나는 회원국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사항이다. OECD 운영비의 부담, 후발 개발도상국에 대한 국내총생산의 0.7% 이상의 공적 개발원조 제공(권고사항), GATT 11조(수출입에 대한 수량제한 철폐)와 IMF 8조(경상지불에 대한 외환규제 철폐) 준수 등이 그것이다.
한국 정부는 1995년부터 OECD에 가입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장기저리차관인 대외경제협력기금(OECD) 지원대상국을 21개국에서 35개국으로 늘리고, 1995년에는 3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OECD 대출금리도 최빈국의 경우 2.5%에서 2.0%로 낮추었다.
이런 조치들은 반드시 OECD 가입 때문만이 아니라 능력이 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었다. 국민들의 복지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가장 일차적인 것이겠지만, 국제사회에 대한 지원도 우리나라가 그 동안 받은 혜택과 지원을 생각해서라도 꾸준히 늘려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기본의무 사항 외에 OECD 회원국이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경상무역외 거래자유화와 자본이동 자유화에 대한 규제조치를 해제하는 것이다. 경상무역외 거래의 자유화와 관련된 것은 운송·보험·은행과 금융서비스·여행과 관광·영화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서비스 시장의 개방폭은 OECD 가입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확대된다.
1998년 3월부터 외국은행과 외국 증권사의 국내 현지법인 설립이 허용되었고, 외국 증권사의 국내 기존 회사의 지분참여가 자유화되었다. 결국 외국은행과 국내 은행은 동일한 조건에서 금융서비스 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더욱 충격이 큰 것은 자본이동의 자유화이다. 외국인의 주식투자 총액한도가 종목당 1997년에는 26%에서 55%로 늘어났고, 외국인 1인당 투자한도도 종전의 7%에서 50%로 확대되었다. 또한 채권투자의 경우에도 중소기업 전환사채의 매입이 허용되었고 단기 채권시장이 1998년부터 개방하도록 되었다.
이런 조치들도 1997년 말 IMF체제를 맞이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위기극복을 위한 '최선의 방안'으로 외국자본 유치가 거론되면서 자본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다. 1998년 4월부터는 적대적 인수합병(M&A)도 허용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개방화 바람은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 OECD 가입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채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자본이동 자유화 조치가 이뤄짐으로써 한국 경제는 국제자본의 핫머니(투기성 유동자금)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벌거벗은 상태로 노출되고 말았다.
1997년 후반기의 환율급등과 주식시장의 붕괴, 그로 인한 외환위기는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과 재벌들의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에 기본원인이 있지만 이런 국제적인 핫머니를 제어할 만한 규제장치가 없었던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OECD 가입은 너무 빠른 것이었다. OECD 가입으로 선진국 대접을 받았던 한국이 투자기피 대상국으로 전락하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적처럼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처럼 급속하게 진행되는 개방과 자유경쟁체제에 대응할 만한 국내의 제반장치나 제도개혁, 재벌과 은행·금융기관에 대한 '건전감독기능'의 정비 등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멕시코의 경험을 반복한 꼴이었다.



3) 한국경제 잔치는 끝났다



한순간에 무너진 한국경제의 신화


지난 30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나라는 어디일까. 정답은 연평균 9.2%를 기록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인구 1백50만명의 소국이지만 1966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전세계 다이아몬드 매장량의 10%를 차지하는 천혜의 조건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1996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천4백 달러.
16일 세계은행이 발표한 '세계경제 개발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7.3%로 2위를 차지했으며, 6.7%를 기록한 중국이 3위. 중국은 특히 1997년 성장률이 9.0%로 잠정집계 되어 90년대의 최고속 성장국으로 지목됐다.
반면 세계은행은 불가리아(-7.4%)와 모로코(-2.2%)를 경제가 가장 가파르게 뒷걸음친 국가로 꼽았다. 한편 동유럽과 구소련 지역을 제외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5%를 넘었고 '다음번 성장잠재국'으로 꼽히는 남부아시아는 6%대를 기록했다.(『동아일보』, 98. 4. 18)

세계에서 2위의 높은 성장률. 이것은 기적이고 신화였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한국형 모델'을 탄생시켰다. 한국은 홍콩, 싱가포르, 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떠올랐고, 한국형 모델은 타이,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 각국과 중국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과 신화도 1997년에 한꺼번에 무너졌다. 97년 한보 부도로 시작된 한국경제의 추락은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주식시장의 끝없는 추락으로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외환위기를 불러오고 국가부도 위기 직전까지 몰렸다. 결국 한국은 IMF의 긴급자금지원으로 가까스로 국가부도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물론 경제위기는 1997년 내내 계속되었지만, 연말의 국가부도 위기는 국민들이 볼 때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IMF의 긴급자금지원을 받기 전까지도 고위경제관료들은 계속해서 "한국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이 좋아 위기는 아니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 말을 믿었다.
또한 실제 피부로 느끼는 경제지수는 불안하더라도 30년 동안 고성장의 기적을 이룬 한국경제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기초는 사실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상황은 단순한 불황과 침체를 넘어서 위기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국경제 위기의 한 증거는 대기업들의 부도사태였다. 바둑의 격언에서 본딴 '대마불사大馬不死'는 한국경제의 재벌신화를 가장 적절히 설명해주는 말이다.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였던 재벌과 대기업들은 30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숱한 고비에서도 불사조처럼 생명력을 지탱해왔다. 그래서 절대로 대기업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 대마들이 1997년에 줄줄이 부도사태를 맞았다.
97년에 무너진 대기업은 한보에서 시작돼 한라그룹까지 12개나 되었다. 1월에 재계 14위의 한보가 무너졌고, 3월에는 재계 26위의 삼미가, 5월에는 한신공영이 각각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극심한 자금난으로 부도위기에 몰렸던 진로는 4월에 급조된 부도유예협약을 처음 적용받아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넘겼으나 9월 (주)진로 등 6개 계열사에 대해 화의를 신청하고 나머지는 매각을 추진하였다. 5월에는 재계 34위의 대농이 위기에 몰려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아야 했다.
7월 중순에 터진 기아사태는 한국경제의 취약성과 위기상황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재계 순위 8위의 기아그룹의 부도사태는 여타 기업의 도산과는 대내외에 미친 영향과 충격이 질적으로 달랐다.
한국경제의 기간산업인 자동차 전문업체였던 기아의 부도는 산업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한보나 대농, 삼미 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수만개의 하청업체가 곧바로 부도위기에 내몰렸고, 철강과 정유를 비롯한 연관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재계 8위의 위상 때문에 전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기아사태의 처리를 둘러싸고 재경원과 기아의 김선홍 회장이 힘 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노조는 파업을 했고, 처리는 지연되어 시간만 흘렀다. 이런 늦은 처리로 한국경제에 대한 대외 신인도가 급격히 하락했고, 외국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증권시장도 침체가 가속화되었다. 10월 말 정부는 기아의 김선홍 회장을 경질하고 법정관리인으로 진념 전 노동부장관을 선임해 사태해결의 가닥을 잡았으나 그 과정에서 한국경제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뒤에도 부도사태는 계속되었다. 10월에는 쌍방울, 바로크가구, 태일정밀 등이 쓰러졌고, 11월에는 부도위기에 몰린 해태가 화의를 신청하고 나왔으며 뉴코아그룹, 한라그룹, 청구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되면서부터 쌍용, 한화, 동아 등도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쌍용은 쌍용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넘김으로써 한숨 돌렸다.
나머지 재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긴 마찬가지였다. 재벌들은 앞다투어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려고 시장에 내놓았으나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현대는 대규모 조직감축과 투자규모 축소 등을 발표했으며, 여타 재벌들도 같은 조치들을 내놓았다.
대기업들의 부도사태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그 여파는 증권과 금융시장에도 곧바로 영향을 주었다. 한보사태가 일어나면서 금융권은 치명타를 입었다. 관치금융에 익숙해 있던 금융기관들이 한보철강에 빌려준 돈이 무려 5조원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모두 부실채권이 돼 버렸으니…….
이 바람에 한보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졸지에 부실은행으로 전락했다. 제일은행은 그 전까지만 해도 가장 건실한 우량은행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부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휘청거리던 금융기관들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9월말까지 국내 25개 일반은행과 6개 특수은행이 이자를 못 받거나 원금을 떼이게 된 무수익 여신은 무려 28조 2천346억원에 달했다. 특히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무수익 여신이 각각 4조 5천187억원, 3조 4천568억원으로 1, 2위를 차지해 부실은행의 표본이 되었다.(『98년 동아연감』, 56쪽)
이런 부실여신으로 인한 경영위기는 은행에만 닥친 것이 아니었다. 느슨한 감독 아래서 마구잡이 경영을 해온 종합금융사의 부실은 더 심각했다. 은행권은 담보라도 있었지만 종합금융사들은 그마저도 없었다. 더욱이 5월부터 시작된 태국의 금융위기는 종금사들을 깊은 나락으로 빠뜨렸다.
국내 채권은 물론이고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투자한 해외채권마저 부실화되면서 종금사들의 경영은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차입해 해외에 장기투자를 했기 때문에 해외 금융기관들이 돈을 회수해가자 헤어날 길이 없어졌다.
이런 금융기관의 경영위기로 신규차입이 중단되었다.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려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기업의 자금압박은 더욱 가중되었고, 그와 함께 기업의 부도사태가 급증했다. 결국 이런 금융위기를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정부는 기아사태에 개입했다. 정부의 방침은 산업은행 출자를 통한 기아의 공기업화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방침은 해외 시장에서 오히려 금융기관들의 신인도를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부실기업을 떠안은 한국 정부와 국책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을 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이 하향 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증권시장도 붕괴되고 말았다. 이미 대기업부도 사태가 속출하면서 흔들리던 증권시장은 2월 22일 700선이 붕괴되었고, 10월 16일에는 600선이 무너졌다. 이때부터 주가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외국인 주식투자가들이 한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금융시장은 주가폭락과 환율급등의 악순환이 가속되면서 급속히 붕괴했다.



외환위기와 IMF체제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에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11월 19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의 경질 뒤 경제부총리에 임명된 뒤 3일만의 일이었다. 임부총리는 공식적인 발표에 이어 곧바로 워싱턴에 있는 캉드쉬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구제금융요청을 받고 휴버트 나이스 국장이 이끄는 IMF 실무단이 내한했고 협상은 12월 3일에 마무리되었다. 협상이 끝난 뒤 2주일 후, 공식적으로 자금지원이 개시되었다. 협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휴버트 나이스 국장과는 별도로 내한한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은 계속 IMF협상의 배후에서 모든 문제에 개입했다.
11월 27일 미국은 백악관 회의에서 "안보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수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8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직접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국가부도사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IMF협상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충고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임창렬 부총리에게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 지으라고 지시했다.
협상이 타결된 뒤 내한한 캉드쉬 총재는 예정에 없던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후보들에게 협약을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굴욕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회창 후보가 합의문을 이행하겠다고 서명했으며,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도 이를 다짐했다.
협상조건의 주된 내용은 부실금융기관의 정리, 긴축재정과 고금리정책, 기업 구조조정의 촉진 등이었다. IMF와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그리고 미국 일본 등 선진 13개국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구제금융 총액은 580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다. 이 가운데 1차로 24일까지 IMF로부터 90억 달러, IBRD 30억 달러, ADB 20억 달러 등 모두 14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이렇게 긴급구제금융이 결정되었는데도 외환위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12월 6일 한라그룹에 이어 엘칸토, 셰프라인, 삼성제약, 산내들 등이 무너지고 동서증권이 부도를 냈으며, 신세기투신이 업무정지되었다. 이미 12월 1일 종합주가지수 400선이 무너지면서 주식시장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금리는 25%대로 폭등했다. 환율도 계속 올라갔다. 환율변동폭 제한을 없애자 1,700원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11월 28일 '무디스'사는 한국의 신용도를 A1에서 A3로 2등급 떨어뜨린 데 이어 12월 11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4등급을 떨어뜨려 요주의 대상이 Ba1로 낮추었다.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도 10월 24일 A+로 한 단계 떨어뜨린 데 이어 11월 25일 A-로 2단계, 12월 11일 BBB-로 3단계, 다시 12월 23일 4단계 떨어뜨린 B+로 낮췄다. 이로써 한국은 투자부적격 단계로 떨어져버린 셈이다.
이렇게 외환위기가 계속 되면서 외환보유고는 완전히 고갈되었다. 한국은행은 11월 이후 국내 금융기관에 모두 233억 6천만 달러를 긴급지원했고, 그 바람에 11월 230억 달러 수준이던 외환보유고가 12월에는 30억 달러까지 바닥났다. 대외채무 지급불능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이 발생하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까지 가세한 가운데 한국 정부는 지급불능 상태를 피하기 위해 전력으로 경주했다.
12월 21일부터 2차협상이 시작되었고, 12월 25일 임창렬 부총리가 그 결과를 발표했다. 외국인의 종목당 주식투자한도를 연말까지 확대하고 채권시장을 완전 개방하며 수입선 다변화를 1999년 6월 말까지 조기 폐지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대신 IMF는 20억 달러를 예정보다 앞당겨 12월 30일 제공하고, 1998년 1월 중에 IMF 40억 달러, IBRD 20억 달러, ADB 10억 달러를 제공받기로 한 것이다.
2차 협상으로도 외환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12월 말의 부도위기는 모면했지만 1998년 1월에 다시 위기가 닥쳐왔고, 결국 JP모건이나 일본계 은행 등과의 협상을 통해 국내 금융기관의 단기채무를 중장기로 전환하는 협상을 마무리지은 후에야 겨우 외환위기가 진정되었다.
이런 상황을 일선에서 처리하는 당국자들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피가 마르는 나날들이었다. 또한 참으로 굴욕적인 상황들이 아닐 수 없었다.

1997년 12월 30일 한국 정부는 대외채무 규모를 총 1천569억 달러라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대외채무를 둘러싸고 국제금융계에서 계속적인 불신을 보이자 IMF와 공동으로 집계해 발표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대외채무는 세계은행(IBRD)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따르는데, 이 방식에 따르면 한국의 대외채무는 1천161억 달러였다. 이런 불신은 한국이 자초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그 동안 외채통계를 소상히 공개하지 않아 국제금융계로부터 2,400∼2,500억 달러 정도될 것이라는 추측까지 낳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대외지불부담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은 국내은행이 관치금융의 보호막 속에서 갇혀 있어서 은행의 해외 현지 채무까지도 정부와 국민의 책임으로 공인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한겨레신문』 1997년 12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외지불부담 규모는 96년말 1천607억 달러, 97년 9월 말 1천706억 달러였다. 전체적인 대외채무 규모는 1996년에 이미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96년 말의 외채는 세계은행(IBRD) 방식을 따르더라도 1천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외환위기는 96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라도 위기가 닥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외환위기를 가져온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방만한 차입경영과 한보 이후 계속된 대기업의 부도사태, 그로 인한 금융권의 부실화였다. 거기다가 종합금융사의 방만한 해외투자와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가 덧붙여져 외환위기가 가속화되었다.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외환상황에 혼란이 초래되었으나 4월 이후 다시 진정세로 돌아섰다. 1996년 말 원화환율은 844원에서 97년 3월 말 897원까지 솟았으나 7월 5일에는 887원으로 내려갔다. 그렇지만 기아사태가 터지면서 외환위기는 본격화되었다. 국제적인 신용평가 회사인 무디스사와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는 한국의 국가 신인도는 물론이고, 시중은행의 장단기부채 등급을 급격히 낮추어 금융기관의 해외차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해외에서 돈을 빌리지 못한 종금사 등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국내 외환시장에 몰려들면서 환율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10월 중순 기아사태가 수습되면서 외환위기도 불이 꺼지는가 했으나 이때 홍콩의 외환위기가 터졌고, 홍콩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외국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빠져나가면서 한국은 급격히 위기로 빠져들었다.
무디스와 S&P가 다시 신용등급을 낮추었고, 주식시장도 무너지고 환율은 급등했으며 금리도 급상승했다. 그뒤 외환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빚 먹고 사는 기업과 부실 금융기관


외환위기의 주범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차입경영과 그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였다. 대기업이 얼마나 빚에 의존해서 경영을 해왔던가는 30대 재벌기업의 평균부채 비율이 자기 자본의 5배를 넘는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998년 4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총 자산을 기준으로 삼아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을 새로 지정해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규 30대 기업집단의 97년 말 현재 총 자산은 435조 3천억원으로 1년 동안 24.9%가 늘었다. 이는 환차손에 따른 부채 증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자기 자본은 오히려 1조 8천억원이 줄었다.
이에 따라 30대 재벌계열 기업 가운데 금융·보험사를 제외한 804개의 부채 총액은 96년 말 269조 9천억원에서 97년 말에는 357조 4천억원으로 급증했다. 평균 부채비율이 386.5%에서 518.9%로 치솟았던 것이다. 반면 총 자산에서 자기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6%에서 16.2%로 뚝 떨어졌다.
이 가운데 한라(-5천7백억원)와 진로(-5천3백60억원)는 자기 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이며 뉴코아(1,793%), 해태(1,501%), 아남(1,498%), 한화(1,215%) 등은 부채비율이 1천%를 넘었다. 이에 비해서 롯데는 부채비율이 216.45%로 가장 낮았으며, 동국제강·동부·동아·삼성·쌍용·한솔·강원산업 등이 300%대를 나타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00%의 부채비율은 결코 건실한 것이 아니다. 부즈·앨런 & 해밀턴의 「한국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개혁을 이룬 국가에서 우량기업은 대부분 부채비율이 100%이하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뒤에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재벌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 최소한 200% 이하로는 낮추어야 무한경쟁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재벌들은 국민이 저축한 돈을 모두 끌어다 덩치만 키운 부실 덩어리, 허풍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재벌들이 허풍선에 불과하다는 것은 기업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당장 나온다. 단적으로 1998년 3월 20일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2월 결산법인 5백10개사는 평균적으로 97년도에 1천원어치를 팔아 10원을 손해보는 헛장사를 했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1996년에 비해 19.5% 늘어난 4백41조 2천743억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96년 3조8천여억원 흑자에서 4조 5천5백43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이 가운데 26개 은행의 적자규모가 3조 8천여억원에 달해 전체 적자의 84%나 차지했다. 기업의 차입경영과 연속되는 부도에 따른 은행경영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실제로 97년 말 현재 8개 시중은행(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 외환, 신한, 국민은행)의 무수익 여신(돈을 빌려줬다가 이자를 못 받게 된 대출금)은 35조 7천7백억원으로, 은행 총여신 2백52조 5천8백억원의 14.2%나 되었다. 그만큼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은행경영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국내은행들의 부실한 경영상태는 외국계 은행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97년 한해 동안 국내 우량은행으로 손꼽히는 주택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의 당기 순이익은 각각 1천83억원, 1천44억원, 5백33억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흑자를 미국계 은행인 씨티 한국지점이 냈다.
은행감독원과 금융계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국내 26개 은행 중 18개 은행이 무더기 적자를 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외국계 은행들은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기록했다. 씨티은행은 당기 순이익이 2천6백억원에 육박해 1996년에 비해 186%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당기 순이익이 9백80여억원으로 전년 대비 307%, 체이스맨해튼은 7백50여억원으로 46% 가까이 증가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기업부도가 도미노현상처럼 이어지고 경기와 주가가 바닥을 기었는데도 외국계 은행들의 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화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영기법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국내은행과 이들 은행의 순이익 추이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시중은행의 순이익이 199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강한 반면, 이들 외국계 은행은 계속적인 상승세를 유지했던 것이다.
국내은행의 이런 경영부실화는 기본적으로 관치금융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박정권 시절부터 은행 등 금융권은 그 자체가 금융산업이기보다는 경제개발을 위해 일반기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관치금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WTO체제와 같은 무한경쟁의 국제화 시대를 맞아 국내은행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금융산업으로서의 경쟁력과 경영노하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바로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인도와 연결되었고,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경제의 비참한 추락은 약간 멀리서 보면 어느 일본 경제 전문가의 말처럼 "87년 6·29선언 이후의 자유화·자율화 10년간 '근육질'의 경제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기업들이 자유화 후 국제경쟁력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92년 이후 재벌을 필두로 경제 전체가 단기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중기적 요인"이었다. "철강분야의 포항제철이 한국의 거의 유일한 세계 초일류기업"일 뿐 그외에는 세계적인 기업이 없다. 반도체나 자동차 분야가 기간산업이라곤 하지만 세계적인 메이커와는 거리가 멀다.
이는 "대부분의 기간산업을 재벌들에 의존한 가운데, 재벌들이 모든 업종에 손을 대는 '풀세트주의'로 사업을 구상하는 바람에 우량 전문화 기업을 만드는데 실패"한 때문이었다. 여기다가 "기술자립을 위한 독자적 연구개발(R&D) 대신에 손쉬운 기술도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것도 대기업 실패의 원인"이었다. 더불어 재벌들의 방대한 상호지급보증과 재벌총수에 의한 봉건적 경영이 파탄을 심화시켰다.
한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자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산업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결합재무제표 도입, 책임경영체제의 확립 등 경영의 투명화가 중요하며, 장기적으로는 과학기술력의 발전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바탕 위에서만 제도개혁도, 금융개혁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4. 전환기의 사회문화



대학교육과 '과외망국론'


1994년부터 새로운 대학입시제도에 따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대학수능시험)이 처음 실시되었다. 수능시험은 대학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수능의 출제경향은 과거의 암기위주식 문제에서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춰 통합교과적 소재를 가지고 사고력과 창의력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학입시제도는 수능 성적과 고등학교 내신성적, 그리고 대학별 본고사를 골간으로 하게 되었다. 고교 내신성적은 40%이상 반영하도록 했으나 수능시험과 대학별 본고사의 반영 여부와 비율은 대학자율에 맡겼다. 1996년부터는 대학 내신성적을 위해 종합생활기록부(종생부) 제도가 도입되었고, 대학 본고사를 폐지하는 대신 일부 대학에서 대학별 논술고사만 치르고 있다.
대학수능시험제도는 그 동안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과 점수따기 경쟁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고,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개방화·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암기위주에서 사고력과 창의력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필요성이 그 하나였고, '과외망국론'이 공공연히 제기될 만큼 심각한 과외열풍을 해결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수능시험제도가 시행된 지 4년이 지났지만 과외열풍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또한 창의력과 사고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방안으로 장려되었던 논술도 또 다른 점수따기 기능시험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1997년 7월 4일에는 '99학년도부터 수능시험과목을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능시험 개선방안이 발표되었다.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고교교육정상화를 위해, 수험과목수를 줄이고 선택과목을 늘리기로 했으며 비교내신제도 철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비교내신제 철폐에 반발해 과학고와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들이 집단 자퇴하거나 전학하는 등 파문이 일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골간으로 하는 대학입시제도 개선과 더불어 대학의 자율성과 대학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제기되었다. 대학의 정원을 일정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했으며, 대학학사운영의 자율화, 대학종합평가인정제 등을 도입해 대학의 질적 향상과 구조조정을 강화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학의 구조조정과 대학 개혁은 크게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여전히 대학들은 외형과 순위 경쟁에만 치중하였고, 대학의 특성화 등을 통한 새로운 질적 발전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대학을 둘러싼 비리와 파문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대학의 부정입학 사례, 대학교수 임용을 둘러싼 재단과 보직교수들의 금품수수사건, 재단비리를 둘러싼 재단과 교수·학생들간의 갈등 등 온갖 사건들이 일어났다. 또한 93년도에는 한의사와 약사의 분쟁으로 야기된 불똥이 대학에 번져 한의대생들이 대거 유급되는 사태가 빚어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신은 굶으면서도 자식만은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진 고생을 견디며 살아왔고, 그것을 보람이자 의무로 생각했다.
이런 교육열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40여년 만에 한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킨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변변한 부존자원 하나 제대로 없는 이 나라에 이런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풍부한 노동력과 질 높은 인적자원이 가장 큰 힘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듯 지나친 교육열은 한편으로 많은 폐해도 낳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학벌주의와 출세지상주의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일류병이라는 한국병이 존재하고 있다. 50년대, 60년대에 한국사회에 뿌리 내린 학벌주의, 일류병은 경제발전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되었다.
황금만능주의는 학벌주의와 일류병을 더욱 부추겼다. 돈을 벌자면 좋은 학벌, 일류 대학이 필요했다. 좋은 학벌과 일류대학을 위해서는 돈을 투자해야 했다. 또한 돈을 투자하니까 그만큼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학벌주의, 일류병, 출세주의는 황금만능주의와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돈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돈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모두들 과외열풍에 시달렸다. 돈 있는 사람은 비밀 고액과외, 돈 없는 사람은 동네 과외, 아니면 학원이라도…….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 '과외망국론'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연간 사교육비는 94년 현재 17조 4천6백40억원으로 16조 7천5백78억원의 공교육비를 능가한다. 정부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액수다. 이중 과외비로 지출되는 것만도 5조 8천4백47억원에 달했다. 감사원의 과외 실태조사(94년 9월)에는 전국의 중고생 중 69.2%가 과외를 받고 있으며, 고교생의 경우 과외비로 월평균 35만5천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백만원 이상의 고액 과외를 받는 경우도 6%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자녀가 있는 집안에서는 가계비의 50∼60%가 사교육비로 지출되고 있다는 것이다.(강준만, 『서울대의 나라』., 개마고원, 53쪽)
김모씨(46·여·서울 중랑구 묵1동)는 "딸애가 삼수 끝에 올해 대학 작곡과에 들어갔는데 5년간의 과외비로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을 날렸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딸이 피아노 화성악 등 3개 음악분야와 국어 영어 수학을 과외지도 받았다면서 "매달 6백만원씩을 과외비로 들였다"고 말했다. 지난 12월에는 한 달에 2천만원을 지출했다는 게 그의 실토.
실업고 3년 아들을 둔 한 학부모는 "아들이 대학진학을 원해 국어 영어 수학은 과외를, 다른 과목은 학원교습을 시키고 있다"면서 "과외비와 학원비로 남편 월급이 거의 모두 들어간다"고 말했다. 경기 고양시의 손모씨(40·여)는 "비평준화 지역인 고양시는 고교간 학력격차가 심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국·영·수 과외에 시달리고 있다"고 소개했다.(『동아일보』, 98. 4. 7)

과외열풍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것은 교육계 비리이다. 이미 대학교육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대학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금품수수 비리가 숱하게 터져나왔다. 이런 비리 사건은 급기야 사립학교만이 아니라 국립 서울대학으로까지 번졌으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대학에서 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의 금품이 오고갈 때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는 촌지가 일반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촌지를 둘러싼 파문도 대학교수 임용비리만큼이나 숱하게 터져나왔다. 촌지를 받는 수법도 다양했다. 학부모에게 노골적으로 물건과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에서부터 학생을 압박하는 우회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촌지문제는 선생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학부모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회 전반의 부패 사슬이 교육계에 투영되었을 뿐이었다. 사회 전체가 부패해 있는데 교육만이 유독 썩지 않는 소금이 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유난히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교육계의 비리는 세금도둑 사건에서 보이듯이 '30년 압축성장'의 뒷그림자에 숨어 있던 부조리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면서 밖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담배들
글로리(9백원, 1993. 7) 컴팩트(4백원, 1994. 8) 디스(9백원, 1994. 9) 오마 샤리프(1천원, 1995. 2) 심플(1천1백원, 1996. 1) 에세(1천3백원, 1996. 11) 겟투(1천3백원, 1997. 5)




더욱 강력해진 언론의 힘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당했으면서도 그 실체를 정확하게 모른다.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언론이 거기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언론의 위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체로 언론이 권력에 빌붙어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에서는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권력이 언론의 눈치를 보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만큼 언론의 힘이 막강해졌다.
김영삼 정부에서 언론이 이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는 김영삼의 대통령 탄생에 일등공신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언론 매체들은 14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원해 스스로 '킹 메이커'를 자처하고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에 커다란 빚을 졌던 것이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선일보』가 정주영 후보를 집중 공격해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을 높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중앙일보』가 이인제 후보를 공격함으로써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언론은 단순히 권력에 기생하는 기관이 아니라 독자적인 권력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갔다.
선거 과정에서 확보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보수 언론은 문민정부의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문민개혁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해 '개혁의 최대 걸림돌은 언론'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만큼 보수언론의 행보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국내 정치만이 아니라 외교와 남북관계, 노동문제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기득권 세력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문민정부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상당 부분의 책임은 이들 보수언론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보수언론의 반개혁적 태도에 대항하는 노력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한겨레신문』은 제도언론으로서 창간 정신을 살려 직필정론을 고수하려 노력했고, 대중적 정론지로서 사회적 위치를 확보했다. 주간지인 『한겨레 21』과 『씨네 21』을 창간해 대항력을 높이려는 노력도 계속하였다. 하지만 보수언론에 비하면 아직도 그 영향력은 취약하다.
이와 함께 대항매체의 출간과 언론의 공정보도 감시활동도 진행되었다. 언론노련에서는 『미디어 오늘』을 발간해 언론에 대한 비판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사저널』과 월간 『말』 『길』 같은 진보적 매체들도 자기 몫을 다했다. 또한 『인물과 사상』 같은 간행물은 대항언론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시민단체들의 신문·방송·모니터 등 언론감시 활동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국민대중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 그리고 꾸준한 대항매체의 발간만이 보수언론의 횡포와 영향력의 확대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활동이 아닐 수 없었다.
90년대에 들어서 신문 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신문사의 생명은 광고에 있다. 광고수입은 신문사의 수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50년대에는 구독수입과 광고수입이 각각 76.1%와 21.5%였던 것이 60년대에는 47.9%와 32.8%, 70년대는 55.1%와 44.8%로 역전되었고, 80년에는 34.2%와 60.2%로 광고수입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문사는 광고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이는 증면과 부수확장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신문경쟁이 치열해진 데는 재벌의 언론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기존의 삼성 외에 현대, 대우, 한화, 롯데 등 재벌들이 줄줄이 언론사 경영에 뛰어들었고, 덩치를 키운 기존의 언론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김영삼 정부에서는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의 치열한 확장 경쟁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한확장 경쟁으로 신문사들은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고, IMF체제가 도래하면서 그 어떤 산업보다도 가장 먼저 구조 조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떠올랐다.



언론사들은 신문만이 아니라 방송산업에도 진출하고자 하는 의욕을 꾸준히 펼쳤다. 그렇지만 현행법상 신문과 방송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유사방송매체로 이에 접근해 갔다. 이를테면 신문사들이 벌이고 있는 인터넷과 전광판 등이 그에 속할 것이다. 신문사들은 뉴미디어 사업이란 이름으로 이런 일들에 접근해 갔는데 그 선두주자는 역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였다.
이처럼 대표적인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이 유사방송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앞으로 미디어 산업에서는 신문은 사양산업이지만 방송과 정보통신이 결합한 위성방송 등은 무한대로 확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산업은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지역방송이 늘어나고 95년부터는 CA -TV의 허용, 위성방송의 도입으로 다매체, 다채널의 경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기존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이 전광판 등으로 유사방송매체사업을 벌였으며, 재벌들은 앞다투어 영상산업에 뛰어들었다.
영상산업은 1990년 약 1조 2천억원 수준의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1995년 3조 1천억원 수준으로 확대되었으며, 2000년에는 4조 9천억원 대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때문에 영상산업은 그 자체로도 황금시장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방송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벌들의 영상산업 진출은 영화, CA-TV, 외화수입, 멀티미디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특히 이 가운데 CA-TV에 진출하는 것은 종합유선방송을 운영하지 않더라도 프로그램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프로그램 공급자로 성장하게 되면 위성방송 채널을 현재의 공중파방송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될 때 프로그램공급능력을 가진 영상산업자들이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벼움과 일상성을 좇는 출판문화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함께 이념서적의 퇴조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탈이념화 경향과 함께 출판 경향도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성과 일상성을 추구하는 내용들이 주조를 이루게 된다. 이런 출판 경향에 따라 출판도서의 중심은 크게 4가지 정도가 차지하고 있다.
먼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소설을 비롯한 문예물이다. 문예물은 여전히 도서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비해 점차 그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또한 등단작가들에 의한 순수문예물보다는 대중적인 문예물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를테면 초베스트셀러였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퇴마록』 같은 게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도 정통 문예물과는 거리가 먼 대중소설이다.
기존의 정통 작가들 가운데서는 이청준이 영화에 힘입어 『서편제』와 『축제』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에서는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많은 호응을 받았다.
반면, 문단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은 수년 동안 시 부분에서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중사회의 급진전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에세이, 전기류, 신변잡기 따위의 비소설 분야이다. 에세이류는 꾸준히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는 좀 다른 성격의 비소설들이 크게 득세한다. 이를테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기적 성격과 신변잡기식을 섞어 책으로 펴내는 일들이 80년대 후반부터 성행했는데 이런 흐름은 이 시기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1995년에는 『일본은 없다』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책 제목에 '있다'와 '없다' 붐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경기불황이 깊어지는 1996년에는 가벼움을 넘어선 여유와 잔잔함을 추구하는 내용의 책이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좀머씨 이야기』가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여기서 좀더 가벼운 유머집도 한 코너를 굳힐 만큼 독자층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IMF체제가 등장하는 97년에는 '몇 가지'라는 제목의 책들이 성행하고, 모방 현상도 크게 나타났다.
아무튼 비소설류는 꾸준히 영역을 넓혀나갈 추세이다. 영상사이버 문화의 도래, 감각을 추구하는 세대의 등장, 불황이 주는 스트레스 등으로 사람들은 전통적인 소설도 무겁게 느낀다. 따라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가벼움은 비소설류의 커다란 장점이다.
어학과 컴퓨터는 국제화·개방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수이다. 조선시대 관료에게 한문과 붓글씨가 필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이런 시대 상황 때문에 현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실용서가 꾸준히 증가했고, 90년대 중반의 한때는 출판판매를 거의 휩쓸어 버리기도 하였다. 특히 1994년의 세계화 선언과 함께 불어닥친 해외여행 붐으로 어학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여행관광, 레저스포츠 등에 관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마지막으로 인문·사회 교양서들이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탈이념·포스트 모던 시대가 왔다고 하여 교양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거대 담론이나 이론서 등의 사회과학 서적은 퇴조했지만, 인문교양서는 꾸준히 자리를 유지했다. 특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성공으로 문화유산답사 붐이 일었고, 인문교양서의 새로운 증대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인문 교양서 가운데서 가장 생명력이 있고 널리 읽히는 것은 역사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돌아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풍요로운 현실에서 궁핍했던 과거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싶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2만 6천304종에 총 1억 3천4백37만 6천224권이었던 출판량은 1997년에는 2만 7천313종에 총 1억 8천8백70만 7천879권으로 약간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증가라기보다는 정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출판량이 이처럼 정체 현상을 보이는 1995년부터 출판계가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황을 반영해 1995년에는 전체 출판량도 94년에 비해 줄어들었다. 출판이 이렇듯 불황에 빠진 이유는 영상매체의 발달과 함께 활자매체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진 탓도 있지만, 독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만한 신선한 기획이 뒤따르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거기다가 세계화 바람으로 내실을 다지는 독서보다 여행과 관광 등 외형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사람들의 생활태도에도 큰 영향이 있었다.
그래도 1996년까지의 출판 불황은 97년에 닥친 사태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997년 3월 고려원 부도로 시작된 출판계의 부도사태는 서적도매상들의 부도로 이어지면서 출판의 기반 자체가 거의 무너질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출판계는 김대중 정부에 대표적인 정보·지식산업이며 벤처산업인 출판을 살리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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