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 행성의 모든 존재들의 종교 역사를 망라해서 지구촌의 신명계와 법계를 망라해서 인간계는 말할것도 없고 지금 이 동해바다 문무 대왕릉에 이렇게 지구촌의 시작시의 그들의 영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지구의 모든것을 통치해온 외계 영의 실체를 잡아들이고 동시에 이미 우주로부터 배신한 영과 그러하지않고 절대적인 신의 믿음으로 영성과 물질의 시공을 초월하는 과학 기술 문명을 가진 영들과 그속에 이미 영벌을 받아온 각혼이 없는 외계 영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의 영이 군웅의 영으로 되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의 모든 산자와 죽은자들의 마음과 영은 군웅의 영벌을 받고 이것을 출발해서 지구촌은 숱한 종교 논리와 율법의 논리가 난무하고 동시에 군웅의 습성에 12간지 축생의 영을 비롯하여 다른 축생의 영까지 인간의 몸주속에 기생하고 있는것이다.
절대적인 신게서 여호와 하느님 다음 차례는지구의 관점의 천명이아니라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천명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지구를 지배해온 그들의 통치자들은 지구에서 쫓겨나갈것입니다 가지않으면 잡아서 이미 만방의 열국의 절대적인 신과 함게 하는 신령들에게 그들을 잡아들여라고 명을 내린지 오래되었고 이들의 외계 영을 잡는일에는 지구촌의 자신들의 조상 신령이든 아니면 타인의 조상의 신령이든 이들의 뒤에서 조정하는것이기에 이들의 조상의 신령들이 절대적인 신의 뜻에 거역하는 신령이면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나면 그뒤에 이들 외계 영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지구촌의 정법의 올바른 영성 활동 수행을 하는 인간 후손들과 그 몸주의 조상 신령분이 천상계에 계셨든분이라도 천신 해탈계의 격상된 신령분들이면 동시에 절대적인 신의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공부해서 올라가신분들이라면 이들을 잡을수가 있고 성령이 함께하고 절대적인 신게서 함께하고 계시니 그들을 성령의 철망에 잡아들이면됩니다.
너무나 고약하고 고약한 그래서 그들이 어둠의 죄악을 지어도 늬우치지못하는것은 각혼이 없기에 그러한 의식없는 패턴으로 지구의 인간들의 마음의 이성과 감성을 역이용하여 절대적인 신의 뜻에 세상을 산자와 죽은자들의 세계를 등불의 세계로 인도하는일에 그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그들 자신들은 아무런 의식도 없기에 당연한것처럼 여기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을 잡아들이고 동시에 이것을 악용하는 지구촌의 인간 후손들과 그들의 간사한 습성의 조상 신령들이 있기에 이들 역시 삼혼들을 이제는 걷두어들이는 과제가 지금 지구촌의 대문명의 대전환의 전환기가 돌아선 싯즘에 당면한 하늘의 사역인것이다.
그래서 지구촌의 기독교 후손분들이나 조상신령분들이 같이 예배해서 불처님의 공부를 필히 산자와 죽은자가 같이 내면의 내공의 원력을 쌓아야 그들의 적들을 잡아들이고 마귀와 요괴들을 사탄들을 잡아들이고 심지어는 구천에 돌아다니는 넋조차도 그들의 혼들을 이제는 걷두어들어야하는것이다.
더욱이 이 한반도는 해탈되어서 생사고해바다를 건너간 영들은 군웅의 영조차도 영벌의 업장도 벗겨낸 영들이 없기에 생사고해바다 돌고도는 숱한 영들이 남아돌고 인간의 개체수보다도 많다 그러니 악순환의 고리는 단절되지못하는 민족의 애환을 가지고 살아가는것이고 반복되는 습성과 전쟁과 고통 그리고 가난,비극이 일어나고 있는것이고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못하니 더욱이 이 동해바다에 이러한 영의 실체들이 존재함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 외계영들은 알았기에 물질의 명분으로 이 한반도를 그들의 번제물의 도구에 불과한 민족에 지나지못한것이였다라는 사실이고 그것이 숱한 수천년넘는 시간과 공간 세계를 초월하여 호미곳의 등대가 그러한것이다 자주 독립을 하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등대를 세우고 불을 밝히는것이 인류의 새로운 문명의 등불의 불을 밝히는것과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잠자고온 이루말할수없는 지구촌의 혼을 잠에서 깨어나서 오늘날에 이르러서 만방의 모든 산자와 죽은자들에게 고하고 이미 통신들을 하고 있으니 마음의 빛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에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 문자없이도 통신이 이루어지고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것을 과거로 회귀한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역시나 문자없이도 세상은 지상낙원의 성령의 세계를 살아갈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믿음이 부족하여 그리고 감사함과 영성의 부단한 음식의 욕구에 그로인한 생존번식 욕구 그리고 경제 활동,새로운 율법이 나오고 숱한 주장과 논리와 사상이 나오고 이제는 이렇게 오늘날 지구촌이 깨어나는데는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하고 받은 결과가 오늘날 절대적인 신게서 마지막으로 이 지구 행성에 드리는 말씀이고 빛이니 그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댓가를 지불하였으니 현재 자신들의 인간 후손이나 그 조상 신령분들이 이러한 고귀한 선물을 축복을 받아가는것도 자신들의 깨우침의 의지에 달려있는것이다.
지구촌의 이러한 영의 환경에 그들의 주파수 다르마의 장난에 우주 양자 컴퓨터와 지구촌의 핸드폰의 주파수의 통신으로 그들과 교신들을 통한 다르마의 발생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이 모든 프로그램도 이미 다른 행성에서 사용해온 패턴이기에 행성계획이기에 성안과 성밖의 영들을 구분하게되어지는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떠나서 성령의 행성으로 갈분들과 나머지 남아서 마무리 일들을 하고 나중에 성령의 행성으로 돌아올분들이 마지막 가을 추수 시대를 그것도 안정기에 시기까지만 남아계시다가 떠날것이다 그 나머지들의 생명과 영들은 역시나 그러한 자신들끼리 숱한 전쟁과 대립들을 욕망들을 채우려고 싸우다가 멸망하게될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마 교황청의 모든 추기경 신령들이나 모든 영들에게 대한 감찰들을 하고 계시니 그것이 산자든 죽은자든 이미 초대 신령분에게 명을 내렸고 마지막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 실천의 행을 한 믿음의 영들을 살펴서 건질분들은 건지고 거짓의 존재들은 삼혼들을 걷두어들이게될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로마 교황청에서 누구보다도 절대적인 신의 말씀에 더욱이 다시한번의 마지막의 자신의 조상과 자신의 영과 주변의 존재들에게 영성의 높은 단계의 반열에 올라가도록 하기위해서는 불법의 공부와 성경의 참된 깊은 진리를 찿아서 그리고 자신의 죄악업장을 사함을 받으려면 자신의 육신이 육체가 편안한 후손들은 그만큼 업장소멸이 제대로 되어있지못함을 반증하는것이다. 십일조 헌금 받아서 지내는것 그것 다 공짜가 아니다 다 갚아야한다 자신이 노동으로 벌어들인 댓가가 아니고 달란트도 아니기에 다시 갚아야하는 영의 법계의 율법은 인간계보다도 더 엄한것이니 그러니 그들의 군웅도 죽어서도 이러한 인간으로 살았있었을때에 진빚은 죽어서도 가아야하는것이다. 그러니 생사 고해바다에 예수님을 믿든 아니믿든 헤메고 다니는것이다
그래서 불법의 참된 등불의 진리를 무시해온 어긋난 기독교인들은 이제 정신들 차리고 그러하지못하면 삼혼들을 걷두어들이는것마고는 기다리는것이 없다.
동시에 불법을 믿지만 실천을 못하고 아상에 수좌상에 명예상에 스님상에 허우적거리고 육신은 편안하게 자신의 조상도 다 구제못하면서 사부대중들을 설파하는 자체가 부처님을 기만하는것이고 절대적인 신을 예수님을 기만하는것이다.
육바라밀도 어디에 믿음의 기준을 두고 그것이 십자가의 행이요 실천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의 존재 사실은 이 지구촌의 문명이 지금 흘러가다보면 확인이되고 논쟁할 필요도 없기에 자발심으로 깨우쳐서 믿는냐 아니믿는냐 그러한 자신의 군웅의 습성도 이겨내지못하면 정직한 마음이 없다라는것이고 하근기의 사부대중들과 같다.
그래서 이들도 죽으면 살아생전에 수좌상에 잡혀서 피눈물의 중생들의 시주한돈의 업장들을 다 갚아야하는 영의 사후의 운명인것이다 이것을 통과하지못하고 윤회하여 스님으로 목사로 돌아가는 영들도 부지기수이고 그래서 수좌상 자리가 그만큼 무서운 자리이다.
그것도 모르고 육신은 편안함에 취하여 배고프고 거지의 육신이 되어지는것이 진정으로 모두를 위해서 나은 실천의 행인것이다.
동해바다의 모든 지구촌의 산자와 죽은자들이 경비가 많이 들어도 이곳에 오셔서 반성과 참회 기도를 하는것만으로 업장을 비롯한 겁장을 빨리 벗겨내는 장소이고 지구촌의 성지인것이다
그러니 막대한 투자들을 하고 있는것이고 이는 한 국가의 소유도 아니요 한 민족의 소유도 아니기에 특정집단의 종교의 소유도 아니기에 소생이 이렇게 공표하는것이다.
먼나라에서 이곳을 찿아오시는 만방의 열국의 관공객분들에게는 내국인보다도 더 영성의 관점에서 그들의 조상 혼령을 비롯한 신령분들을 처리해드릴것입니다.
이곳을 찿아오심에 얼마나 많은 경비와 마음을 담아서 오시는데 어찌 빈손으로 돌려보낼수가 있나요 그래서 마음의 성지를 짓고자한것이고 이것이 유지함에는 역시나 지구촌의 절대적인 신과 함께하는 신명계분들의 뜻에 달려있고 성령의 촛대는 이렇게해서 이곳에 잠시나마 세워진것이고 이 성령의 촛대가 이 한반도의 평화가 깨달음의 한반도가 되어지도록 모든 영들을 처리해갑니다.
그리고 한반도 진정한 평화는 인류 전체의 새로운 문명의 전조등의 역활이기에 이것을 거역하고 있는 인간과 그들의 조상 신령들을 가차없이 성령의 사자분들이 걷두어버릴것입니다 어느 국가의 정치인이든 대통령이든간에 그들의 조상과 후손들까지 심판을 할것입니다.
다음생에 좋은 인류문명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부여받을것인지 아니면 거역해서 그들의 조상 모두가 멸절의 심판을 받을것인지 지금 어느 국가 대통령이든 그들의 신령들이든 인간 후손들은 명심하세요
가을 추수 군대의 사전 성격인 지구 공동 방위 창설군은 이러한 영성의 무장과 천신 해탈계로 올려드려서 죄악업을 짓는 천신줄의 신령들과 인간들을 심판해갈것입니다.
성령의 사자와 신장앞에서 신령의 사자들이 신장들이 이곳 용궁바다에서 멸절을 당하려고 아직도 정신들을 차리지못하고 있으니 어찌 그 인간 몸주와 후손들의 존재들을 허락하겠는가?
성령의 그 자체가 가피력이고 사자중에 사자이고 신장중에 신장이고 영중에 영인것이다 영의 실체의 세계를 제대로 모르면서 그들의 조정에서 놀아나고 있고 전세계에 산이고 용궁이고 성령의 군영들이 설치되어서 움직이고 있거늘 자신의 죄업장소멸을 함에 입맛에 맞는 상황이 없기에 업장소멸함에 육신의 고단함은 감수하여야 하는것이다.잠시나마 돈을 지불하고 타인의 후손을 통해서 업장 소멸을 대신의뢰한들 그것도 임시이다 본질적인 죄업장 소멸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것이다.
누구도 대신하는것이 아니기에 죽은자들에게는 이러한 일을 하도록 일을 조치해드리지만 살아가는 후손들에게는 방도만 알려드리는것이다 실천은 자신의 몫이기에 그러하다
어차피 행성 계획에 의거하여 지금의 지구촌의 상황을 놓고 처리해감에 경험이 있기에 절대적인 신게서는 이 지구 행성을 저들의 외계 영보다도 더 엄하게 처리한다라는 사실은 성경에 기인하여 인용하면 후회하는 심정이 들어나있기에 지금은 더한 심정이 노여움이 계시기에 그래서 더욱더 엄한 잣대로 이 지구 행성을 처리해갈것입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어느 나라든 대통령이든 아담과 하와 신령도 그리고 중동의 신령들도 한반도의 환인의 신령도 거역하면 삼혼을 걷두어버리는것이다
아울려 그 아래대의 신령인 단군의 신령들 이놈들을 이번에 까불면 반드시 걷두어버린다 자신의 위의 신령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마치 자신이 주인양 홍익인간 이화세계 지 자신의 신령부터 생사고해바다 건너가지못한 주제에 어찌 인간을 홍익인간 이화 세계를 할수가 있다고하는지 그러니 가증스러운 군웅의 습성인것이다.
이곳 청룡과 황룡은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존재 사실을 다 확인한 신령들이다.
이곳 용궁바다가 그러한 지구촌의 역사와 같이하는 같이해온 의미와 가치가 담겨있는 바다이고 산인것이다 이제 이들보고도 믿음으로 신령의 힘을 빛의 힘을 키우라고 당부하고 있는데 그동안은 자신보다도 하위의 신령들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조정노릇을 해온것이기에 이것이 지구촌의 군웅의 신령들의 습성과 힘을 키워온 잘못된 패턴임을 그로인한 빚도 갚아야하기에 군웅의 영벌의 업장을 아직도 벗겨내지못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모든것을 절대적인 신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믿음의 힘으로 영성을 빛을 밝히고 등불을 켜라는것이다 그래야 군웅의 영벌을 벗겨나가는것이고 그러한 실천이 바로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신령이 되어라는것이다 이것바탕 기초하에 깨달음의 진리와 성령의 빛의 실체와 공의 빛의 실체를 향해 달려가라는것이다.
절대적인 믿음만이 자신도 모르는 간사한 군웅의 습성을 벗겨낼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업장소멸을 넘어셔서 생사 고해바다 분명히 건너갈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러고도 십자가의 행을 해야만 성령의 빛의 인도로 도움을 받습니다
맹목적인 신앙의 주장으로 지구촌을 어둠으로 몰고온 그들이나 앞으로도 반드시 삼혼들을 걷두어버릴것입니다
예수님도 재림하였고 동방과 서방의 조상 신령들 그리고 인간 후손들 그리고 진정으로 이 지구 행성을 사랑하고 지구 행성의 모든
존재 요소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진 마음을 가진 영들이 이제 절대적인 신이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대명령의 대천명앞에서
여호와 하느님의 실체와 아담과 하와의 신령의 실체을 비롯한 모든 만방의 열국의 국사 신령이든 조상 선대,후대 신령이든 당대
신령이든 그리고 인간의 후손들이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진행해가는 대단원의 막을 정리하기위해서 그들의 삼혼들을
대정리해갈것이다.
이것은 소리도 없이 경고도 이미 다 나팔의 소리는 끝났다 군웅의 영의 습은 즉 절대적인 신의 뜻을 거역해온 우주의 그들의
영들과 지구의 이들의 조정을 받아온 영들은 계속해서 반복하는 습성의 패턴들을 과거에도 지금도 나타내고 있기에 게임이
되지않는다.
자신의 믿음의 신앙에는 이러한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을 습성들을 개선하기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의 고통이
수반되지않고서는 그러한 습을 고처나가지못하기에 죄악업으로부터 생사 고해바다로부터 벗어나지못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절대적인 믿음의 각오없이는 수억겁의 업장의 인을 벗겨내기란 쉬운 일이아니므로 지금 절대적인 신을 부르지는 찿는
행하는 자신의 육신의 몸을 버리는 각오의 의지의 믿음의 행이 없이는 이러한 반열에 그것이 죽은 조상이든 현재의 자신의 마음이든
영이든 그러하다.
성령의 빛은 바로 나비루 행성에서 지구의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마음의 빛과 영의 빛들을 생명들을 관장하고 있는것이다.
이곳 대한민국 동해바다 문무 대왕릉이 바로 지구 행성을 시작할시의 성경의 창세기 귀절에 나오는 영분들이 계셨든곳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서방의 신명계들도 알고 있었고 이 주도권을 잡기위해서 일본과 중국의 신령들이 중동의 신령들이 유럽의
신령들이 정작 주인인 이 한반도의 신령들은 알지못하고 수천년을 지내왔으니 오늘에 이르러서 절대적인 신의 도움으로 모든 영안을
열어서 사실을 확인하였고 소생이 제 위치를 찿게되었든것이다
성경말씀과 불법의 말슴을 필히 같이 공부하고 믿음의 행을 반드시 해야만 융합이 되어서 자신의 새로운 영의 실체를 깨닫게될것이고
자신만의 법과 힘이 생기고 그것이 등불의 빛이 밝아질것이다
지구 행성은 나비루 행성보다도 많이 뒤떨어진 물질 상황과 영성의 상황임은 분명하기에 절대적인 신께서 우주의 그릇된 영들에게
벌을 내리고 지구의 행성의 모든 존재들에게 영벌로 군웅의 영으로 되어있기에 더 엄하게 지구 행성을 감찰하고 계시기에 그속의
생명체는 대정리가 성경의 귀절보다도 더 범위가 넓은 조치들이 내려질것이다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진화론자든 창조론자든 말로 먹고 살아가는 종교 신학자들이 지구상에 8%대의 그들의 산자와 죽은자들의
말장난에 유혹되지말고 대한민국의 명문대 교수들이 논문 표절하여 박사학위를 장사하는세태나 위정자들이 국가와 민족 그리고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는것이나 다 공통점은 정직하지못하는 군웅의 죄악업장들이 소멸하지않아서 그러한 가증스러운 습성의 산자와 죽은자들이
나타내는 습성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직하지못한 습성은 결국은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 그리고 어둠 그다음은 멸절내지 심판과
전쟁으로 이어지는것이다.
지구촌이 정직한 마음으로 이 지구 전체를 이끌어간다면 그러하지못하였을시보다도 비용은 더 적게 들고 더나은 새로운 인류문명의
가을 추수 시대를 맞이하는것이다
나사의 지구 행성의 밤하늘의 모습을 보니 지구 행성이 어느 역사 어느 문명때보다도 우주에서는 그만큼 물질의 문명이 절정의
최고조에 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모든것이 다 차면 기우는법이고 대폭발을 하는것이다 이것이 물질의 법칙이고 자연의 이치이고 이러한것에 흔들이지않는 마음의 빛을
영의 빛을 힘을 키우는것이 산자와 죽은자들의 신앙의 믿음의 힘인것이다 존재의 이유이고 이것을 우주 태초에 절대적인 신게서
인간에게 주신 마음의 빛이 성령의 빛으로 물질의 시간과 공간 세계를 초월하는 마음의 성령의 빛으로 무장된 존재였으나 그것을
배신하고 믿지않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우주의 그들의 군웅의 신령들과 외계 생명체와 지구 행성 전체의 모습들이다
그래서 지금 우주를 포함 지구 전체의 모든 대도수 공사를 마치고 이제는 우주부터 시작하여 지구에 이르기가지 일들이 일어날것이다
믿음의 힘만큼 강한 방어벽은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믿음만큼 강한 영성의 물질의 자산은 없으니 살았을때나 죽었을때나
그만큼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생사 고해바다를 건너가는것이나 천신 해탈의 신령이 되는것이나 그러합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의 그분의 넋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기도 염원으로 윗분의 도움으로 잘 인도하였으니 아마도 엘리자 베스 영왕께서 마가렛 대처 수상의 영으로부터 인사를 받았을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영국을 사랑하신분인것을 엘리자 베스 여왕께서 부탁을 하셨기에 소생이 그렇게 절대적인 신의 도움을 비롯한 재림하신 예수님,비로자나 부처님 여러 신령님들 도움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도움 요청하신것이기에 동시에 절대적인 신의 뜻에 합의동참,합의 동심하신 영이기에 그렇게 해 드린것입니다.
이 사실을 만방의 열국의 신령분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이 한반도에 하나님이 계심을 처음으로 알려주신 만방의 열국의 신령분들과 이 땅에 조상 신령분들 그리고 이분들의 영들을 살펴보고자 그리고 영의 세계에 대한 신앙의 실체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하게 영적인 실체를 통해서 재림하신 예수님께서나 비로자나 부처님께서도 살펴보시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분들을 밝은 길로 인도해드리고자하는것이오니 그리고 소생의 견해는 그동안 밝혀드린대로이고 아래글에 대한 논조는 추후에 설명들을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번역이 제대로 되지못하여 외국분들은 불편하드라도 한글을 아는 친구분들을 통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사실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여호와 하느님은 구분이 되어있다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알려드리는것입니다 이것을 혼돈하지마시고 지금 성경책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표현된 명호 를 사용하는 성경책은 수정보완이 필요함을 알려드립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였음을 역시나 앞으로 성경에 기록해야하는 과제가 있기에 참고를 하시고요
http://www.cbck.or.kr/page/(대한민국 천주교 주교 홈페이지 참조)
1-2. 교회 창설 과정(1770~1784년)
조선 왕조에 한문 천주교 서적이 전래된 이후,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홍유한(洪儒漢)이었다. 1770년경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동한 홍유한은, 천주교 교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날짜를 7일씩 계산하여 일곱째 날을 주일로 삼아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금욕 생활과 기도 생활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날마다 소재(小齋)를 지켰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왔다.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이 책을 통해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혼자서 실천해 나갔다.
그 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연구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는 기호(畿湖) 남인(南人) 계통에 속하고, 학문 전통으로는 성호 학파(星湖學派)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년)의 학문을 이어받아 연구하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 등 일단의 지식인들은 1777년에 이르러 서울 부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유교 경전을 강학(講學)하고 있었다.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이벽(李檗, 1754~1786년)도 여기에 합류한다.
그들은 주어사에서 유교 경전을 강학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을 참조했고, 서학서에 언급된 내용들도 검토하였다. 이들이 검토하는 서적 가운데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강학의 참여자 가운데 몇몇은 천주교 서적에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고 천주교를 신앙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결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은 이벽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결심이 곧 교회 창설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창설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이벽은 교리를 연구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좀 더 많이 얻고자 하였다. 마침 그때 이벽의 동료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부연사(赴燕使) 일원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이벽은 곧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 가거든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책들을 구입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간 후 선교사를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 천주교 책들과 성물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가져온 서적의 일부를 이벽에게 넘겨 주었다. 이벽은 몇 개월 동안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훈과 함께 친척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형제들을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은 권일신(權日身, 1742~1792년) 등을 입교시키는 한편, 김범우(金範禹, ?~1786년)를 비롯한 중인(中人)들에게도 전교하였다.
1784년 9월(음력) 이승훈은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
2.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년)
2-1. 초기의 신앙 공동체(1784-1801년)
교회 창설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선 인물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 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李存昌, 1752~1801년)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柳恒儉, 1756~1801년)이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신자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바쳤다.
이렇게 출발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1785년 봄, 형조(刑曹)의 관리들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하고 있던 신자들을 검거하였으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이 양반인지라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조는 양반의 범죄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체포된 신자 가운데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하고 유배를 보냈다. 귀양을 살던 김범우는 고문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조직을 다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성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 수행하던 비합법적 제도를 말한다. 이를 가성무집행 제도(假聖務執行制度)라 하기도 한다. 고해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미사 집전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미처 알지 못한 당시 신자들은 미사와 고해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이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이승훈은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고, 모두 10여 명의 신자가 신부로 추대되었다. 가성직 제도는 교회법으로는 올바른 일이 아니나, 교회 조직을 갖추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선교를 강화해 보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성직 제도는 178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관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다. 1790년에 도착한 답변에서 북경 주교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선교사를 맞이하는 기쁨과 조상 제사 문제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장자(長子)에 대한 제사 상속권 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 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 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다. 조상 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사대 봉사는 양반 신분의 상징이다. 사족들은 사대 봉사를 통해서 팔촌친(八寸親) 공동체를 형성하여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이렇듯 조상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때문에 조상 제사 금지는 양반 사족 출신 신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 제사 포기는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사대봉사를 하던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한 유교 문화로 재편입해 가면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들도 탈락하였다. 따라서 1790년대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급 신자들도 바뀌었다. 양반층 신자들이 탈락한 반면, 양반으로서 특권을 포기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과 중인 이하의 인물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년)과 권상연(權尙然, 1750~1791년)은 1791년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우리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들로 기록되었다. 그들의 순교로 양반층 신자들이 빠른 속도로 탈락해 나가면서 1791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양반 지식층이 주도하던 종교에서 민중들의 종교 운동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어 갔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로서 조선에 파견된 그는 조선의 신생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하면서 신자 수가 1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년), 최인길(崔仁吉, 1764~1795년), 지황(池璜, 1766~1795년)과 같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강완숙(姜完淑, 1760~1801년)을 비롯한 신자들의 보호로 주문모 신부는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이후 일부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소규모의 탄압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탄압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는 신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고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자선 활동을 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년)이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순수한 한글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천주교 교리를 요약하여 제시해 준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최창현(崔昌顯, 1754~1801년)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조직과 발전에 초석을 놓았으며, 강완숙과 윤점혜(尹占惠, 1776~1801년)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여성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회장'(女會長)으로 불렸다.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정산필(鄭山弼, ?~1801년)이나 ‘김승정'의 경우처럼 지방에서도 ‘회장'을 임명하였다. 이 회장들은 주문모 신부가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임명하였다.
2-2. 초기 교회에 대한 박해(1801∼1831년)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이후 얼마 아니 가서 신자의 숫자가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뒤에는 대략 4,000명의 신자가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교세는 더욱 발전하여 1800년에는 대략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힘없는 민중들이었으며, 여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천주교를 반왕조적(反王朝的) 종교로 규정한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한다. 1801년에 단행된 박해는 나이 어린 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니, 이 박해로 말미암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피하면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이 박해의 와중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신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당시 교회의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 회장 정약종,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이존창과 유항검이 이때 순교하였으며, 강완숙, 이순이(李順伊, 1781~1801년) 등과 같은 여성 신자들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한 이 박해에서는 앞서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金建淳), 이희영(李喜英)과 같은 인물들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정약용을 비롯하여 배교를 선언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형을 면하고 귀양을 떠나거나 방면되었다.
이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 백서 사건이 발생한다.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황사영은 박해가 발생하자 이를 피하여 제천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의 박해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편지 내용에는 조선 왕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강경한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백서를 작성했지만, ‘무력적 외세'라는 부당한 방법을 제안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인색하게 되었다. 결국 황사영도 자신의 행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1801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 박해는 천주교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은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경상도나 강원도로 이주한 내포 지방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실천하면서 그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박해가 끝난 이후 신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 재건에 힘쓴 신자들 가운데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년) 등이 있었다. 1801년의 박해 때 배교를 하고 귀양을 살던 정약용도 1811년 이후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선교사 파견을 간청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에까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주교 파견을 간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회 재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박해는 일부 지방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한 결과 조선 교회는 중국인 여항덕(呂恒德: 異名 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선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뒷날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이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2-3. 조선교구의 설정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우리나라 교회는 북경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것은 조선인 신자들의 꾸준한 청원과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응답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자 했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소속된 브뤼기에르(Brugière, 1792~1835년)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이 되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새로운 사목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이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조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 갔으며, 그들의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9년 다시 박해를 일으키어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년) 주교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처형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로는 유진길(劉進吉, 1791~1839년) 등을 들 수 있다. 정하상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한 것도 바로 이 박해에서였으며, 그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는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국제 문제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등을 선발하여 중국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로 수품되어 국내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몇몇 신자와 함께 선교사를 맞이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1846년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양업도 사제가 되어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산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한 교리 내용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한 천주교 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천주교 가사는 신자들의 묵상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죽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발전되어 갔다. 교회 초기부터 186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신자 수는 다음 <표 1>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표 1> 박해 시대의 교회 현황
연도 신자 수 외국인 선교사 조선인 신부
1789 1,000 0 0
1790 4,000 0 0
1796 10,000 1 0
1859 16,700 8 1
1865 23,000 16 0
1860년대 초의 교회는 거듭된 박해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지방 유림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기에 앞서, 이단으로 지목되던 천주교부터 척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순결성을 먼저 과시하면서, 사족(士族)들을 위압하려 한 듯하다.
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4년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기간은 1866년 이후 3년 동안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인 가운데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 다블뤼(Daveluy, 安, 1818~1866년) 주교를 비롯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였다. 이에 1866년 프랑스 해군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도발하여 강화도를 침략하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또한 1868년에는 흥선 대원군의 생부(生父)인 남연군(南延君) 묘를 파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박해를 피해서 중국에 피신해 있던 페롱(Féron, 1827~1903년) 신부가 개입되었다. 이 도굴 미수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혹독하게 전개되어, 충청도 해미에서는 많은 신자를 생매장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이 박해 과정에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년), 홍봉주(洪鳳周, ?~1866년) 등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언하고자 순교하였다. 또 제너럴 셔먼 호(號) 사건을 빌미로 삼아 1871년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외세와 결탁된 것으로 간주되던 천주교는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사에 기록된 큰 박해로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들 수 있다. 이렇게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 가운데 오늘날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1,80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 외에도 무명의 순교자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이 숫자 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1839년의 박해와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이하 79명은 1925년 로마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이들 가운데 24명도 1968년 로마에서 시복되었다. 이들 103명의 복자들은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세계 교회는 103명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한국 순교자를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 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1. 박해의 원인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라고 할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물론 박해와 박해 사이에는 일종의 휴지기도 있었지만, 박해를 강행하는 정부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정부에서 단행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구실까지 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사상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은 집권층의 주요 임무였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던 당시에는 성리학이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 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다는 말도 되는데, 당시 집권층은 이런 현상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면서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각종 사회 원리를 부인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펴 나가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였으며, 당시 사회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마저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며 조상 제사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는 조상 제사로 상징되던 일체의 구제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여, 당시의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성행하면 양반들이 존중하는 유교가 무너지고, 양반의 권위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양반의 정치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임으로써 가장 높은 존재로 여기던 왕의 지위를 하느님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양반층의 공통된 의견이며 왕의 명령인 실정법에서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 법을 어기며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심법이 양반 사대부의 법보다 더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양심을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 온 동양 문화의 전통에 젖은 집권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집권층은 천주교인들이 왕과 양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한편 부패한 관리들은 교회 탄압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니, 이들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한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정식 명령을 받지 않고서도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였다. 또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한테서도 박해를 당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며 사회 풍속을 혼란시킨 풍속 사범,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사상범으로 처벌되었다. 연좌제 적용을 받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심하게 탄압함으로써 자신과 가문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는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박해가 진행되자 신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부패한 관리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은 틈을 타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도적이 되어 관리들과 토호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박해를 피하려고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도 이들처럼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쳤으며,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민중 봉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 때문에 집권층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도둑 떼와 같이 여겨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한편 박해가 일어난 데에는 당시 교회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동양에 천주교가 선교되던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너무도 인색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여겼다. 교회 당국의 이와 같은 생각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천주교 박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조상 제사의 금지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고 당시 교회 지도층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조상 제사에 관한 문제를 다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상 제사가 지닌 부모에 대한 효성만을 올바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를 떳떳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4-2. 순교의 개념과 의미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 조선의 교회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물론 박해가 항상 강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자들이 체포되어 신문을 당하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천주교 신앙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정부는 신자들을 ‘회오'시켜 ‘사학'인 천주교를 버리고 ‘정도'인 성리학적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회유하고 고문하였다. 당시의 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그 ‘범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100여 년에 걸쳐서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박해에서 얼마나 많은 신자가 체포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66년에 발생하여 수 년 동안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서울의 좌우 포도청에 체포되었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을 분석하여 이에 관한 이해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당시에 작성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는 전국에서 체포·압송해 온 408명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취조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신앙을 관철했던 신자들은 35%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신문 과정에서 배교를 선언한 신자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51%에 이르렀다. 신교와 배교 여부가 미상인 기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였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곧 광의의 개념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 모두를 순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순교(martyreo)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증언하다', ‘증거 하다', ‘증인이 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에 착안한 개념 규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교라 할 때에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를 협의로 규정할 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순교자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고, 셋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한다. 박해 시대의 교회사에서는 무수한 광의의 순교자들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가운데 대략 1,800여 명에 이르는 협의의 순교자들을 주목하여, 이들의 죽음, 순교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순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궁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사의 박해 시대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박해 시대에 처형된 신자들 가운데에는 신앙보다는 현실 정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순교는 초자연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성 차원의 합리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들은 평시에도 복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생활을 해 왔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생활 안에서 실천해 왔다. 그들은 성사 생활에 철저하고자 했고,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켜 왔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줄기차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한편 그들의 순교에는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 실천과 순교는 자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시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신분제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발견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다. 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한데, 그들의 순교는 신앙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역사 행위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게 되었다. 이 역사 행위를 한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망과 희망을 번갈아 가지며 고뇌하기도 하였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평범한 이 사람들이 실천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고 역사화(歷史化)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오랜 박해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박해에 시달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내세에만 안주해 보려는 도피적 신앙 태도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박해의 여파로 일부 신자들이 복음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이를 성직자에게만 맡기려는 피동적 모습이 간혹 드러났다. 계속되는 박해로 신앙 교육이 어려워지자 일부 신자들은 개인주의적이며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신앙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계속 병폐로 남아 있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다.
4.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4.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4-1. 천주교와 전통 종교
개항기 한국 사회의 전통 종교 사상 가운데 유교의 존재가 우선 주목된다. 개항기 재야의 유교 지식인들은 외래의 시대 사조에 대항하여 척사 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재천명하였고, 이로써 유학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이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척사 위정의 논리는 초기 의병 전쟁 과정에서도 저항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1877년 평양에 척사 기적비(斥邪紀蹟碑: 1866년에 있었던 제네랄 셔먼 호 사건의 극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가 세워졌고, 1881년에는 척사윤음이 다시 반포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전국에 포고되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움직임은 개항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지방관이나 지방민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척사윤음'이 반포되기는 했지만 중앙 정부 차원의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른바 박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조상 제사 문제'이다. 개항기 천주교회에서도 교황청의 이 결정에 따라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받았다. 이에 조상 제사 문제가 다시 검토되었고, 1939년 로마 교황청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허용 시기는 너무나 늦었다.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은 신사 참배 문제를 최종 결정하는 데서 파생한 결과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는 불교를 범신론적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었다. 교회는 불교가 지닌 정신문화적 가치와 조선 사회에서 불교가 발휘하고 있는 종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당시 천주교는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마저 갖지 못하였다.
개항기 이래 일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천도교를 비롯한 각종 신흥 종교가 성행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자신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신흥 종교들을 불교나 유교보다 더 저급한 ‘미신' 행위로 보고 그들과 대화하거나 협동하는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전통 종교와 신흥 종교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는 조선에 수용된 지 일천한 천주교 신자들이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관습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4-2. 천주교와 개신교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선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1884년 미국계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함께 개신교의 선교도 착수되어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더욱 폭넓게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에 개신교가 전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신교가 전래되기 40여 년 전인 1840년대부터 신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였다. 개항기 당시 조선 천주교는 개신교의 선교에 경쟁 의식과 위기 의식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개신교 선교가 본격화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1890년대로, 1900년까지 10년 동안 개신교는 급격히 발전한다. 1897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인들은 6,800여 명이나, 1900년에는 13,569명에 이르고, 1905년에는 37,407명이다. 그리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신자 수가 72,968명에 이르러, 당시 63,340명으로 집계된 천주교 신자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의 급격한 증가 현상은 다음 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표 5> 그리스도교 신자 증가표(단위: 명)
연도 천주교 개신교 연도 천주교 개신교
1897 32,217 6,800 1907 63,340 72,968
1900 42,441 13,569 1910 73,517 140,470
1905 64,070 37,407 1919 88,553 144,062
개항기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89년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들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호금을 걷어 기민 구제에 사용해 달라고 천주교 선교사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니, 조선의 천주교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선교에서 불로 소득을 노리는 무리 정도로 이해하였다. 물론 100여 년의 박해를 거쳐서 이제 막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순교의 결실을 거두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해의 시련을 거친 바도 없는 개신교가 선교를 하겠다고 할 때, 이를 환영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천주교 선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개항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개신교 선교가 천주교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개신교를 이단이요 열교로 규정하며 「예수진교사패」와 같은 책을 간행하여 개신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하는 개신교 선교사들도 대부분 천주교를 배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 초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1895년 평양에서는 성당의 대지 문제 때문에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1901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해서 교안(海西敎案)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부의 중재로 마무리되긴 하였으나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는 결코 원만한 사이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와는 달리, 식민지 시대 간도 지방(間島: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의 지역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던 곳)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서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나 금융 회사를 공동으로 설치·운영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도 서로 발을 맞추어 갔다. 교회 일치라는 차원에서 볼 때 당시 간도 지방의 신자들이 보여 준 모범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4-3. 교회와 공산주의
식민지 시대 조선 사회에서는 3·1 운동 이후에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독립을 위한 노력으로는 상해 임시 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주목할 수 있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어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종교를 미신으로,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반종교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물론 공산주의의 종교에 대한 교조주의적 비판은 반제국주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통일 전선론이 제기됨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통일 전선론은 종교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종교 기관이나 종교인들도 반제국주의 운동에 공산당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공산주의가 규정한 종교의 가치는 매우 제한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교황청은 사상적 측면에서 가톨릭과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일본은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려고 자신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제의 반공주의는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방책의 일부였다.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데 노력하였다. 교회는 책자를 통해 반공의 입장을 제시하는 한편, 교황의 반공주의적 교서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공산주의의 각종 오류를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단죄하였다. 일제 통치 아래 조선 교회는 통일 전선 이론에 무관심했으며, 타 종교나 정치 집단과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출판물들이 펼친 반공주의적 논설들은 식민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구체성에 입각한 공산주의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론적 입장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적 비판이었다. 당시 교회 지도층 일부에서는 일제가 대륙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하여 제시한 반공주의 정책과 교회에서 주창하는 반공주의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일제의 반공주의 정책에 찬동하거나 묵인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 정책에 대한 교회의 비판 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국 교회가 형성해 놓은 반공주의적 태도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사 전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교회의 반공주의적 태도와 관련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북한 교회는 오랜 동안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할 때 한국 교회가 이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제의 지배를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반공주의적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4-4. 천주교와 신사 참배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강력한 ‘일본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사 참배 강요였다. 신사 참배는 일본의 전통적 종교 의식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 국민 정신의 기초로 강조되었으니, 신사 참배에는 국민 의례적 성격이 추가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과 그 세력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군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호전 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여기서 조선 천주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 당국은 신사 참배가 단순한 ‘애국적' 의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신사에서 거행되는 의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 의식과 국민의례의 성격이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에 포함되어 있는 신도 의식적 요소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는 1925년 「교리교수 지침서」에서 신사 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와 일본 총독부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예리하게 대립하였다.
1932년 일본 천주교회는 일본 정부에 신사 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의례인지에 관하여 정식으로 회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신사 참배가 국민의례의 일종임을 강조하는 답변을 보내 왔다. 이 답변을 근거로 1936년 로마 교황청은 일본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선의 주교들은 반대하던 종전의 태도를 철회하고 일본 주재 교황대사의 훈령에 따라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천주교인들에게 신사 참배는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황도 정신'의 발양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의 민족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만 관심이 있던 반면, 조선 교회는 그 종교성 여부와 함께 민족 감정을 감안해야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 평양지목구장이던 모리스(Morris, M.M.) 신부는 이에 반대한 결과 자신의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또한 상당수의 조선인 신자들은 교회의 이 같은 결정에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신사 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근무하던 학교나 병원을 사임하는 수녀들이 잇따라 나타났으며, 학교와 성당이 폐쇄되는 고초를 무릅쓰고 신사 참배를 완강히 거부한 성직자도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몇 명의 성직자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전시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신사 참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만 제한해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개신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약하였다. 물론 개신교계의 ‘주류'도 우여곡절 끝에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지만, 장로교의 일부 신자들을 비롯해서 보수 신앙을 견지하던 개신교 일각에서는 신사 참배에 강하게 항거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는 뒷날 신사 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천주교 절두산순교기념관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천주교 성지는 원래는 잠두봉이라 불리웠다. 봉우리에 천주교의 순교기념관이 있으며 봉우리 모양이 누에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2월 프랑스 군함이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을 문책하고자 서강까지 침입하자 격분한 대원군은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잠두봉으로 끌고가 목을 베어 참수케 하였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그 후 절두산 성지로 불리우게 된것이다 또한 잠두봉(절두산)은 원래가 절경이어서 옛날에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제목: 한국기독교뿌리찾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탐방 소감(양화진 문화원 홈페이지 참조)
글쓴이: 강국희
등록일: 2013-01-10 04:15
조회수: 338
수표교교회 여호수아 선교회
한국기독교뿌리찾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방문 소감
2012.11.3
姜 國 熙 / kauthead@gmail.com
이번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방문하게 된 사연은 10월 여호수아 선교회(회장 김광호 장로) 예배시간에 이충일 장로님이 조선의 개화기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설교말씀을 하셨는데 그 분들의 지극한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독교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우리가 함께 탐방하자고 하여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라고 하면 으레 외국의 선교지 방문을 생각하겠지만 국내 유일의 성지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가 한곳에 있는 이곳을 탐방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신앙학습이라 생각하고 날짜를 11월3일로 정했었지요.
여호수아 선교회의 양화진탐방계획이 결정되고 전체 회원들에게 문자로 안내를 하고 또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광고를 하였지요. 오전 11시 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겨우 6명 [이충일-김여옥, 김광호, 김옥규, 김상오, 강국희]뿐이었습니다. 날씨는 맑고 햇살은 따사롭고 포근하여 산책하고 걷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은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나와 계셨습니다. 오랜만에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면서 시내에서 함께 걸어 보니까 정겨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전철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성지의 접수처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우리보다 일찍 온 방문객들이 많았고 여러개 팀으로 나뉘어 해설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묘원을 순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1주일 전에 이곳 사무국에 수표교교회에서 방문하겠다는 것을 미리 신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안내자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강당에서 성지의 역사에 대한 동영상을 30분간 시청하고 그 다음 안내자를 따라서 각 선교사들의 개인 묘소를 방문하면서 설명을 듣기로 하였습니다. 강당에는 우리 외에도 지방에서 단체로 100명, 60명, 50명 등등 여러 교회에서 오신 분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동영상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양화진 시가지, 한강변의 모습, 그 시대의 사회현상, 여성차별, 양반과 상놈의 차별, 조선의 쇄국정치로 인한 서양문물 배척, 기독교 탄압 하에서 의료봉사를 명분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활약 내용들이었습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남아공, 일본에서 이역만리 조선이라는 열악한 봉건사회에 복음선교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젊은 나이에 청춘을 불사르고 오로지 사랑, 믿음, 헌신, 봉사의 복음적 사명을 띠고 찾아 온 선교사들이었습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 헌신하다가 각종 질병 [이질, 결핵, 장티브스 등]에 걸려 일찍 병사한 분들도 여러명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자녀들 함께 선교활동하다가 3대, 4대째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성지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미국 기독교의 부흥기여서 젊은 청년들의 선교열망이 불타오를 때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복음의 씨앗을 안고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하고 의료봉사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젊은이들이 일부러 의과대학에 진학, 의사자격을 취득한 후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이 땅에 정착하는 기독교 선교조상들의 피눈물 나는 헌신, 봉사, 교육, 사랑의 실천과정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정신적 신앙유산의 역사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차별이 심하였고 백정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신분차별 사회였지만 선교사들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교회, 학교, 병원을 세우고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참여, 평등과 자유, 이러한 모든 것이 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헌신, 봉사, 사랑의 선교사업에 의하여 기초가 세워졌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되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선진화 참여 민주주의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엄숙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미국인 SHAW선교사는 한국전쟁에서 군목으로 활동하였고 그 아들은 조선에서 봉사활동하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하버드대학 박사과정 공부 중에 6.25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지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쟁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서울 녹번동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 인사들은 자식들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갖은 꼼수를 다 쓰는데 미국의 청년들이 이처럼 멀고 먼 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우리들의 먹고 사는 땅이 아니라 세계복음의 중심지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어린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북한공산군의 6.25남침으로 인한 3년간 동족전쟁에 외국 18개국의 군대가 참여한 것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크게 쓰시려는 섭리라고 보아 집니다. 이번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흘린 피와 땀의 현장을 학습하게되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하나님의 대한민국 섭리에 대하여 마음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묘원이며 여기에 417구의 묘가 있고 그중 선교사 145인의 묘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묘원의 주변환경은 매우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고 강당시설, 시청각 음향시설, 100주년 기념교회의 예배시설 등이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안내원들도 10여명에 이르고 자원봉사로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묘원의 중앙에는 정원이 있고 정원을 끼고 건너편에는 천주교의 [절두산순교성지]가 있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형제 기독교 공동성지를 탐방하기에 매우 편리한 곳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 성지가 우리 처럼 사이좋게 한자리에 있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 해설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100년 전에 1784년 천진암에서 공부하던 이승훈과 그외 지식인들이 서양문물을 공부하다가 성경을 알게 되어 자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초기선교 과정에서 대원군에 의하여 엄청난 순교자를 내었으며 1886년 병인양요 사건으로 1,000여명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 목이 잘렸고 그 피로 한강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순교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984년 순교자 103인의 성인 시성식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하기 위하여 오셨던 교황이 가장 먼저 이곳을 방문하였던 것도 순교자의 피 흘린 대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표시였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초기 100여년 간에 적어도 2만~3만명의 순교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약 2시간에 걸쳐 외국인 선교사묘원 및 천주교절두산순교성지를 둘러보면서 우리 일행은 참으로 많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 예수님의 복음, 사랑, 믿음, 헌신의 생생한 역사현장이고 학습의 수련장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모여 앉아서 기도하는 것 보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강열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천주교, 개신교의 수많은 순례객들[남녀학생, 청년, 노인]과 함께 보낸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특히 이충일 장로님은 연세대 총무처장으로 근무하실 때 언더우드 가족의 마지막 유해를 미국으로부터 이송해 와서 이곳에 안장하는 일을 담당하셨다고 하면서 오늘 그 현장을 다시 찾아보는 감회는 남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은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혹시 직접 가이드를 하게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선교사 개인별로 활동내역을 조사하여 여러장의 노트에 정리해 오셨지만 구종천 해설전문가 (예비역 장교)의 도우미가 있어서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이 직접 해설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건강에 무리하시면 안 되기에 사양하였던 것이지요.
조선정부는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헤론이 처음이며 이어서 앨런, 언더우드가 들어와서 제중원(병원)에서 의사로서 봉사하였습니다. 헤론은 이질에 걸려 조선에 온지 5년만에 사망하였고 양화진묘원에 첫 번째로 안장된 선교사입니다. 헤론의 묘지로서 양화진이 선정된 것은 이미 천주교의 절두산성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이곳으로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개신교의 공동성지로서 매우 역사적인 기념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는 국가의 [사적 제399호]로 등재되어 있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교회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나니까 배도 출출해지고 마음은 한결 정갈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꽤 유명한 [백년토종 삼계탕]집으로 이동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교인들 특히 신입교인들과 청년학생들에게는 이곳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있는 수 많은 기독교 성지를 차례차례 탐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피 땀 어린 신앙학습장 현장탐방의 벅찬 소감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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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선교사
영국의 아이슬랜드로 출신으로 먼저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입장이 자기 나라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억울한 우리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 이것이 오늘의 서울신문으로 발전되었다. 민족지사들을 전부 신문사의 간부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 국민의 애국심을 고양하였다. 1909.5.1 37세, 별세, 양화진에 안장
【인천=한갑수 기자】인천시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발상지인 옛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중구 내동·현 내리교회) 일대를 선교 테마거리로 조성한다.
인천시는 옛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과 인근 지역의 오래된 종교시설과 근대건축물, 차이나타운 등을 한데 묶어 선교 테마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29일 밝혔다.
인천 중구 일대에는 한국 감리교의 시발점인 제물포 웨슬리 교회 예배당(1901년)을 비롯해 답동성당(1897년), 성공회 내동교회(1890년) 등의 종교시설과 짜장면박물관,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이민사박물관 등이 산재해 있다.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은 1885년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미국 감리교회 소속 아펜젤러 선교사가 예배를 드린 장소에 건립됐다. 웨슬리교회는 1955년 예배당이 개축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복원작업은 당시 사진과 기록물을 토대로 고증을 통해 진행됐다.
인천시는 2008년부터 시작한 웨슬리교회 예배당 복원작업을 마치고 오는 6월 준공할 예정이다. 시는 예배당이 복원 되는 대로 테마거리 조성을 실시할 방침이다.
또 복원된 예배당 옆에는 기독교 역사박물관(아펜젤러 비전센터)도 함께 건립했다. 이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개신교 안수를 받은 김기범 목사의 유품과 개항기 선교 사진 230여점 등이 전시된다.
특히 내리교회는 한국 이민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하와이 이민을 주관했던 교회로 이때 사용했던 미국 비자와 사진 등도 함께 전시된다.
웨슬리교회 인근에 위치한 답동 성당은 강화 성공회 성당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고딕양식) 중 하나이다.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으로 매년 3000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이 성당을 구경하려고 방문한다.
성공회 내동교회는 서양 중세풍의 석조에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인 처마양식이 결합된 보기 드문 건물이다.
인천시는 중구 일대의 종교시설과 차이나타운, 짜장면박물관,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등 다양한 테마박물관을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다양한 놀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출처: http://www.fnnews.com/view?
http://www.cbck.or.kr/page/(대한민국 천주교 주교 홈페이지 참조)
1-2. 교회 창설 과정(1770~1784년)
조선 왕조에 한문 천주교 서적이 전래된 이후,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홍유한(洪儒漢)이었다. 1770년경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동한 홍유한은, 천주교 교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날짜를 7일씩 계산하여 일곱째 날을 주일로 삼아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금욕 생활과 기도 생활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날마다 소재(小齋)를 지켰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왔다.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이 책을 통해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혼자서 실천해 나갔다.
그 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연구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는 기호(畿湖) 남인(南人) 계통에 속하고, 학문 전통으로는 성호 학파(星湖學派)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년)의 학문을 이어받아 연구하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 등 일단의 지식인들은 1777년에 이르러 서울 부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유교 경전을 강학(講學)하고 있었다.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이벽(李檗, 1754~1786년)도 여기에 합류한다.
그들은 주어사에서 유교 경전을 강학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을 참조했고, 서학서에 언급된 내용들도 검토하였다. 이들이 검토하는 서적 가운데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강학의 참여자 가운데 몇몇은 천주교 서적에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고 천주교를 신앙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결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은 이벽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결심이 곧 교회 창설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창설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이벽은 교리를 연구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좀 더 많이 얻고자 하였다. 마침 그때 이벽의 동료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부연사(赴燕使) 일원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이벽은 곧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 가거든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책들을 구입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간 후 선교사를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 천주교 책들과 성물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가져온 서적의 일부를 이벽에게 넘겨 주었다. 이벽은 몇 개월 동안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훈과 함께 친척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형제들을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은 권일신(權日身, 1742~1792년) 등을 입교시키는 한편, 김범우(金範禹, ?~1786년)를 비롯한 중인(中人)들에게도 전교하였다.
1784년 9월(음력) 이승훈은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
2.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년)
2-1. 초기의 신앙 공동체(1784-1801년)
교회 창설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선 인물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 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李存昌, 1752~1801년)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柳恒儉, 1756~1801년)이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신자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바쳤다.
이렇게 출발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1785년 봄, 형조(刑曹)의 관리들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하고 있던 신자들을 검거하였으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이 양반인지라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조는 양반의 범죄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체포된 신자 가운데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하고 유배를 보냈다. 귀양을 살던 김범우는 고문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조직을 다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성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 수행하던 비합법적 제도를 말한다. 이를 가성무집행 제도(假聖務執行制度)라 하기도 한다. 고해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미사 집전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미처 알지 못한 당시 신자들은 미사와 고해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이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이승훈은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고, 모두 10여 명의 신자가 신부로 추대되었다. 가성직 제도는 교회법으로는 올바른 일이 아니나, 교회 조직을 갖추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선교를 강화해 보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성직 제도는 178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관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다. 1790년에 도착한 답변에서 북경 주교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선교사를 맞이하는 기쁨과 조상 제사 문제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장자(長子)에 대한 제사 상속권 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 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 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다. 조상 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사대 봉사는 양반 신분의 상징이다. 사족들은 사대 봉사를 통해서 팔촌친(八寸親) 공동체를 형성하여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이렇듯 조상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때문에 조상 제사 금지는 양반 사족 출신 신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 제사 포기는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사대봉사를 하던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한 유교 문화로 재편입해 가면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들도 탈락하였다. 따라서 1790년대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급 신자들도 바뀌었다. 양반층 신자들이 탈락한 반면, 양반으로서 특권을 포기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과 중인 이하의 인물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년)과 권상연(權尙然, 1750~1791년)은 1791년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우리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들로 기록되었다. 그들의 순교로 양반층 신자들이 빠른 속도로 탈락해 나가면서 1791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양반 지식층이 주도하던 종교에서 민중들의 종교 운동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어 갔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로서 조선에 파견된 그는 조선의 신생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하면서 신자 수가 1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년), 최인길(崔仁吉, 1764~1795년), 지황(池璜, 1766~1795년)과 같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강완숙(姜完淑, 1760~1801년)을 비롯한 신자들의 보호로 주문모 신부는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이후 일부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소규모의 탄압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탄압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는 신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고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자선 활동을 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년)이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순수한 한글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천주교 교리를 요약하여 제시해 준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최창현(崔昌顯, 1754~1801년)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조직과 발전에 초석을 놓았으며, 강완숙과 윤점혜(尹占惠, 1776~1801년)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여성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회장'(女會長)으로 불렸다.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정산필(鄭山弼, ?~1801년)이나 ‘김승정'의 경우처럼 지방에서도 ‘회장'을 임명하였다. 이 회장들은 주문모 신부가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임명하였다.
2-2. 초기 교회에 대한 박해(1801∼1831년)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이후 얼마 아니 가서 신자의 숫자가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뒤에는 대략 4,000명의 신자가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교세는 더욱 발전하여 1800년에는 대략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힘없는 민중들이었으며, 여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천주교를 반왕조적(反王朝的) 종교로 규정한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한다. 1801년에 단행된 박해는 나이 어린 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니, 이 박해로 말미암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피하면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이 박해의 와중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신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당시 교회의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 회장 정약종,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이존창과 유항검이 이때 순교하였으며, 강완숙, 이순이(李順伊, 1781~1801년) 등과 같은 여성 신자들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한 이 박해에서는 앞서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金建淳), 이희영(李喜英)과 같은 인물들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정약용을 비롯하여 배교를 선언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형을 면하고 귀양을 떠나거나 방면되었다.
이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 백서 사건이 발생한다.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황사영은 박해가 발생하자 이를 피하여 제천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의 박해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편지 내용에는 조선 왕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강경한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백서를 작성했지만, ‘무력적 외세'라는 부당한 방법을 제안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인색하게 되었다. 결국 황사영도 자신의 행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1801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 박해는 천주교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은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경상도나 강원도로 이주한 내포 지방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실천하면서 그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박해가 끝난 이후 신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 재건에 힘쓴 신자들 가운데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년) 등이 있었다. 1801년의 박해 때 배교를 하고 귀양을 살던 정약용도 1811년 이후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선교사 파견을 간청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에까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주교 파견을 간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회 재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박해는 일부 지방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한 결과 조선 교회는 중국인 여항덕(呂恒德: 異名 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선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뒷날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이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2-3. 조선교구의 설정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우리나라 교회는 북경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것은 조선인 신자들의 꾸준한 청원과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응답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자 했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소속된 브뤼기에르(Brugière, 1792~1835년)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이 되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새로운 사목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이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조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 갔으며, 그들의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9년 다시 박해를 일으키어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년) 주교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처형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로는 유진길(劉進吉, 1791~1839년) 등을 들 수 있다. 정하상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한 것도 바로 이 박해에서였으며, 그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는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국제 문제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등을 선발하여 중국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로 수품되어 국내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몇몇 신자와 함께 선교사를 맞이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1846년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양업도 사제가 되어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산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한 교리 내용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한 천주교 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천주교 가사는 신자들의 묵상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죽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발전되어 갔다. 교회 초기부터 186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신자 수는 다음 <표 1>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표 1> 박해 시대의 교회 현황
연도 신자 수 외국인 선교사 조선인 신부
1789 1,000 0 0
1790 4,000 0 0
1796 10,000 1 0
1859 16,700 8 1
1865 23,000 16 0
1860년대 초의 교회는 거듭된 박해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지방 유림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기에 앞서, 이단으로 지목되던 천주교부터 척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순결성을 먼저 과시하면서, 사족(士族)들을 위압하려 한 듯하다.
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4년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기간은 1866년 이후 3년 동안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인 가운데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 다블뤼(Daveluy, 安, 1818~1866년) 주교를 비롯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였다. 이에 1866년 프랑스 해군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도발하여 강화도를 침략하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또한 1868년에는 흥선 대원군의 생부(生父)인 남연군(南延君) 묘를 파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박해를 피해서 중국에 피신해 있던 페롱(Féron, 1827~1903년) 신부가 개입되었다. 이 도굴 미수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혹독하게 전개되어, 충청도 해미에서는 많은 신자를 생매장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이 박해 과정에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년), 홍봉주(洪鳳周, ?~1866년) 등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언하고자 순교하였다. 또 제너럴 셔먼 호(號) 사건을 빌미로 삼아 1871년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외세와 결탁된 것으로 간주되던 천주교는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사에 기록된 큰 박해로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들 수 있다. 이렇게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 가운데 오늘날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1,80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 외에도 무명의 순교자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이 숫자 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1839년의 박해와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이하 79명은 1925년 로마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이들 가운데 24명도 1968년 로마에서 시복되었다. 이들 103명의 복자들은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세계 교회는 103명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한국 순교자를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 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1. 박해의 원인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라고 할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물론 박해와 박해 사이에는 일종의 휴지기도 있었지만, 박해를 강행하는 정부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정부에서 단행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구실까지 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사상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은 집권층의 주요 임무였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던 당시에는 성리학이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 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다는 말도 되는데, 당시 집권층은 이런 현상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면서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각종 사회 원리를 부인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펴 나가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였으며, 당시 사회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마저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며 조상 제사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는 조상 제사로 상징되던 일체의 구제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여, 당시의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성행하면 양반들이 존중하는 유교가 무너지고, 양반의 권위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양반의 정치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임으로써 가장 높은 존재로 여기던 왕의 지위를 하느님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양반층의 공통된 의견이며 왕의 명령인 실정법에서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 법을 어기며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심법이 양반 사대부의 법보다 더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양심을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 온 동양 문화의 전통에 젖은 집권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집권층은 천주교인들이 왕과 양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한편 부패한 관리들은 교회 탄압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니, 이들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한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정식 명령을 받지 않고서도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였다. 또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한테서도 박해를 당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며 사회 풍속을 혼란시킨 풍속 사범,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사상범으로 처벌되었다. 연좌제 적용을 받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심하게 탄압함으로써 자신과 가문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는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박해가 진행되자 신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부패한 관리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은 틈을 타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도적이 되어 관리들과 토호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박해를 피하려고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도 이들처럼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쳤으며,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민중 봉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 때문에 집권층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도둑 떼와 같이 여겨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한편 박해가 일어난 데에는 당시 교회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동양에 천주교가 선교되던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너무도 인색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여겼다. 교회 당국의 이와 같은 생각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천주교 박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조상 제사의 금지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고 당시 교회 지도층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조상 제사에 관한 문제를 다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상 제사가 지닌 부모에 대한 효성만을 올바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를 떳떳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4-2. 순교의 개념과 의미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 조선의 교회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물론 박해가 항상 강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자들이 체포되어 신문을 당하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천주교 신앙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정부는 신자들을 ‘회오'시켜 ‘사학'인 천주교를 버리고 ‘정도'인 성리학적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회유하고 고문하였다. 당시의 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그 ‘범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100여 년에 걸쳐서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박해에서 얼마나 많은 신자가 체포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66년에 발생하여 수 년 동안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서울의 좌우 포도청에 체포되었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을 분석하여 이에 관한 이해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당시에 작성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는 전국에서 체포·압송해 온 408명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취조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신앙을 관철했던 신자들은 35%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신문 과정에서 배교를 선언한 신자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51%에 이르렀다. 신교와 배교 여부가 미상인 기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였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곧 광의의 개념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 모두를 순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순교(martyreo)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증언하다', ‘증거 하다', ‘증인이 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에 착안한 개념 규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교라 할 때에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를 협의로 규정할 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순교자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고, 셋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한다. 박해 시대의 교회사에서는 무수한 광의의 순교자들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가운데 대략 1,800여 명에 이르는 협의의 순교자들을 주목하여, 이들의 죽음, 순교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순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궁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사의 박해 시대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박해 시대에 처형된 신자들 가운데에는 신앙보다는 현실 정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순교는 초자연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성 차원의 합리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들은 평시에도 복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생활을 해 왔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생활 안에서 실천해 왔다. 그들은 성사 생활에 철저하고자 했고,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켜 왔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줄기차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한편 그들의 순교에는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 실천과 순교는 자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시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신분제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발견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다. 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한데, 그들의 순교는 신앙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역사 행위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게 되었다. 이 역사 행위를 한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망과 희망을 번갈아 가지며 고뇌하기도 하였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평범한 이 사람들이 실천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고 역사화(歷史化)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오랜 박해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박해에 시달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내세에만 안주해 보려는 도피적 신앙 태도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박해의 여파로 일부 신자들이 복음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이를 성직자에게만 맡기려는 피동적 모습이 간혹 드러났다. 계속되는 박해로 신앙 교육이 어려워지자 일부 신자들은 개인주의적이며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신앙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계속 병폐로 남아 있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다.
4.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4.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4-1. 천주교와 전통 종교
개항기 한국 사회의 전통 종교 사상 가운데 유교의 존재가 우선 주목된다. 개항기 재야의 유교 지식인들은 외래의 시대 사조에 대항하여 척사 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재천명하였고, 이로써 유학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이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척사 위정의 논리는 초기 의병 전쟁 과정에서도 저항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1877년 평양에 척사 기적비(斥邪紀蹟碑: 1866년에 있었던 제네랄 셔먼 호 사건의 극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가 세워졌고, 1881년에는 척사윤음이 다시 반포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전국에 포고되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움직임은 개항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지방관이나 지방민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척사윤음'이 반포되기는 했지만 중앙 정부 차원의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른바 박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조상 제사 문제'이다. 개항기 천주교회에서도 교황청의 이 결정에 따라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받았다. 이에 조상 제사 문제가 다시 검토되었고, 1939년 로마 교황청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허용 시기는 너무나 늦었다.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은 신사 참배 문제를 최종 결정하는 데서 파생한 결과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는 불교를 범신론적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었다. 교회는 불교가 지닌 정신문화적 가치와 조선 사회에서 불교가 발휘하고 있는 종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당시 천주교는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마저 갖지 못하였다.
개항기 이래 일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천도교를 비롯한 각종 신흥 종교가 성행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자신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신흥 종교들을 불교나 유교보다 더 저급한 ‘미신' 행위로 보고 그들과 대화하거나 협동하는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전통 종교와 신흥 종교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는 조선에 수용된 지 일천한 천주교 신자들이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관습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4-2. 천주교와 개신교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선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1884년 미국계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함께 개신교의 선교도 착수되어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더욱 폭넓게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에 개신교가 전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신교가 전래되기 40여 년 전인 1840년대부터 신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였다. 개항기 당시 조선 천주교는 개신교의 선교에 경쟁 의식과 위기 의식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개신교 선교가 본격화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1890년대로, 1900년까지 10년 동안 개신교는 급격히 발전한다. 1897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인들은 6,800여 명이나, 1900년에는 13,569명에 이르고, 1905년에는 37,407명이다. 그리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신자 수가 72,968명에 이르러, 당시 63,340명으로 집계된 천주교 신자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의 급격한 증가 현상은 다음 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표 5> 그리스도교 신자 증가표(단위: 명)
연도 천주교 개신교 연도 천주교 개신교
1897 32,217 6,800 1907 63,340 72,968
1900 42,441 13,569 1910 73,517 140,470
1905 64,070 37,407 1919 88,553 144,062
개항기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89년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들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호금을 걷어 기민 구제에 사용해 달라고 천주교 선교사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니, 조선의 천주교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선교에서 불로 소득을 노리는 무리 정도로 이해하였다. 물론 100여 년의 박해를 거쳐서 이제 막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순교의 결실을 거두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해의 시련을 거친 바도 없는 개신교가 선교를 하겠다고 할 때, 이를 환영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천주교 선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개항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개신교 선교가 천주교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개신교를 이단이요 열교로 규정하며 「예수진교사패」와 같은 책을 간행하여 개신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하는 개신교 선교사들도 대부분 천주교를 배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 초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1895년 평양에서는 성당의 대지 문제 때문에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1901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해서 교안(海西敎案)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부의 중재로 마무리되긴 하였으나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는 결코 원만한 사이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와는 달리, 식민지 시대 간도 지방(間島: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의 지역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던 곳)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서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나 금융 회사를 공동으로 설치·운영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도 서로 발을 맞추어 갔다. 교회 일치라는 차원에서 볼 때 당시 간도 지방의 신자들이 보여 준 모범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4-3. 교회와 공산주의
식민지 시대 조선 사회에서는 3·1 운동 이후에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독립을 위한 노력으로는 상해 임시 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주목할 수 있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어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종교를 미신으로,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반종교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물론 공산주의의 종교에 대한 교조주의적 비판은 반제국주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통일 전선론이 제기됨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통일 전선론은 종교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종교 기관이나 종교인들도 반제국주의 운동에 공산당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공산주의가 규정한 종교의 가치는 매우 제한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교황청은 사상적 측면에서 가톨릭과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일본은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려고 자신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제의 반공주의는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방책의 일부였다.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데 노력하였다. 교회는 책자를 통해 반공의 입장을 제시하는 한편, 교황의 반공주의적 교서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공산주의의 각종 오류를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단죄하였다. 일제 통치 아래 조선 교회는 통일 전선 이론에 무관심했으며, 타 종교나 정치 집단과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출판물들이 펼친 반공주의적 논설들은 식민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구체성에 입각한 공산주의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론적 입장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적 비판이었다. 당시 교회 지도층 일부에서는 일제가 대륙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하여 제시한 반공주의 정책과 교회에서 주창하는 반공주의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일제의 반공주의 정책에 찬동하거나 묵인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 정책에 대한 교회의 비판 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국 교회가 형성해 놓은 반공주의적 태도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사 전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교회의 반공주의적 태도와 관련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북한 교회는 오랜 동안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할 때 한국 교회가 이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제의 지배를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반공주의적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4-4. 천주교와 신사 참배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강력한 ‘일본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사 참배 강요였다. 신사 참배는 일본의 전통적 종교 의식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 국민 정신의 기초로 강조되었으니, 신사 참배에는 국민 의례적 성격이 추가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과 그 세력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군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호전 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여기서 조선 천주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 당국은 신사 참배가 단순한 ‘애국적' 의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신사에서 거행되는 의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 의식과 국민의례의 성격이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에 포함되어 있는 신도 의식적 요소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는 1925년 「교리교수 지침서」에서 신사 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와 일본 총독부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예리하게 대립하였다.
1932년 일본 천주교회는 일본 정부에 신사 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의례인지에 관하여 정식으로 회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신사 참배가 국민의례의 일종임을 강조하는 답변을 보내 왔다. 이 답변을 근거로 1936년 로마 교황청은 일본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선의 주교들은 반대하던 종전의 태도를 철회하고 일본 주재 교황대사의 훈령에 따라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천주교인들에게 신사 참배는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황도 정신'의 발양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의 민족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만 관심이 있던 반면, 조선 교회는 그 종교성 여부와 함께 민족 감정을 감안해야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 평양지목구장이던 모리스(Morris, M.M.) 신부는 이에 반대한 결과 자신의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또한 상당수의 조선인 신자들은 교회의 이 같은 결정에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신사 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근무하던 학교나 병원을 사임하는 수녀들이 잇따라 나타났으며, 학교와 성당이 폐쇄되는 고초를 무릅쓰고 신사 참배를 완강히 거부한 성직자도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몇 명의 성직자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전시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신사 참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만 제한해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개신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약하였다. 물론 개신교계의 ‘주류'도 우여곡절 끝에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지만, 장로교의 일부 신자들을 비롯해서 보수 신앙을 견지하던 개신교 일각에서는 신사 참배에 강하게 항거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는 뒷날 신사 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천주교 절두산순교기념관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천주교 성지는 원래는 잠두봉이라 불리웠다. 봉우리에 천주교의 순교기념관이 있으며 봉우리 모양이 누에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2월 프랑스 군함이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을 문책하고자 서강까지 침입하자 격분한 대원군은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잠두봉으로 끌고가 목을 베어 참수케 하였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그 후 절두산 성지로 불리우게 된것이다 또한 잠두봉(절두산)은 원래가 절경이어서 옛날에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제목: 한국기독교뿌리찾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탐방 소감(양화진 문화원 홈페이지 참조)
글쓴이: 강국희
등록일: 2013-01-10 04:15
조회수: 338
수표교교회 여호수아 선교회
한국기독교뿌리찾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방문 소감
2012.11.3
姜 國 熙 / kauthead@gmail.com
이번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방문하게 된 사연은 10월 여호수아 선교회(회장 김광호 장로) 예배시간에 이충일 장로님이 조선의 개화기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설교말씀을 하셨는데 그 분들의 지극한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독교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우리가 함께 탐방하자고 하여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라고 하면 으레 외국의 선교지 방문을 생각하겠지만 국내 유일의 성지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가 한곳에 있는 이곳을 탐방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신앙학습이라 생각하고 날짜를 11월3일로 정했었지요.
여호수아 선교회의 양화진탐방계획이 결정되고 전체 회원들에게 문자로 안내를 하고 또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광고를 하였지요. 오전 11시 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겨우 6명 [이충일-김여옥, 김광호, 김옥규, 김상오, 강국희]뿐이었습니다. 날씨는 맑고 햇살은 따사롭고 포근하여 산책하고 걷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은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나와 계셨습니다. 오랜만에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면서 시내에서 함께 걸어 보니까 정겨운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전철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성지의 접수처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우리보다 일찍 온 방문객들이 많았고 여러개 팀으로 나뉘어 해설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묘원을 순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1주일 전에 이곳 사무국에 수표교교회에서 방문하겠다는 것을 미리 신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안내자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강당에서 성지의 역사에 대한 동영상을 30분간 시청하고 그 다음 안내자를 따라서 각 선교사들의 개인 묘소를 방문하면서 설명을 듣기로 하였습니다. 강당에는 우리 외에도 지방에서 단체로 100명, 60명, 50명 등등 여러 교회에서 오신 분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동영상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양화진 시가지, 한강변의 모습, 그 시대의 사회현상, 여성차별, 양반과 상놈의 차별, 조선의 쇄국정치로 인한 서양문물 배척, 기독교 탄압 하에서 의료봉사를 명분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활약 내용들이었습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남아공, 일본에서 이역만리 조선이라는 열악한 봉건사회에 복음선교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젊은 나이에 청춘을 불사르고 오로지 사랑, 믿음, 헌신, 봉사의 복음적 사명을 띠고 찾아 온 선교사들이었습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 헌신하다가 각종 질병 [이질, 결핵, 장티브스 등]에 걸려 일찍 병사한 분들도 여러명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자녀들 함께 선교활동하다가 3대, 4대째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성지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미국 기독교의 부흥기여서 젊은 청년들의 선교열망이 불타오를 때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복음의 씨앗을 안고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하고 의료봉사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젊은이들이 일부러 의과대학에 진학, 의사자격을 취득한 후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이 땅에 정착하는 기독교 선교조상들의 피눈물 나는 헌신, 봉사, 교육, 사랑의 실천과정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정신적 신앙유산의 역사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차별이 심하였고 백정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신분차별 사회였지만 선교사들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교회, 학교, 병원을 세우고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참여, 평등과 자유, 이러한 모든 것이 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헌신, 봉사, 사랑의 선교사업에 의하여 기초가 세워졌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되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선진화 참여 민주주의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엄숙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미국인 SHAW선교사는 한국전쟁에서 군목으로 활동하였고 그 아들은 조선에서 봉사활동하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하버드대학 박사과정 공부 중에 6.25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지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쟁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서울 녹번동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 인사들은 자식들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갖은 꼼수를 다 쓰는데 미국의 청년들이 이처럼 멀고 먼 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우리들의 먹고 사는 땅이 아니라 세계복음의 중심지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어린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북한공산군의 6.25남침으로 인한 3년간 동족전쟁에 외국 18개국의 군대가 참여한 것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크게 쓰시려는 섭리라고 보아 집니다. 이번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흘린 피와 땀의 현장을 학습하게되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하나님의 대한민국 섭리에 대하여 마음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묘원이며 여기에 417구의 묘가 있고 그중 선교사 145인의 묘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묘원의 주변환경은 매우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고 강당시설, 시청각 음향시설, 100주년 기념교회의 예배시설 등이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안내원들도 10여명에 이르고 자원봉사로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묘원의 중앙에는 정원이 있고 정원을 끼고 건너편에는 천주교의 [절두산순교성지]가 있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형제 기독교 공동성지를 탐방하기에 매우 편리한 곳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 성지가 우리 처럼 사이좋게 한자리에 있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 해설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100년 전에 1784년 천진암에서 공부하던 이승훈과 그외 지식인들이 서양문물을 공부하다가 성경을 알게 되어 자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초기선교 과정에서 대원군에 의하여 엄청난 순교자를 내었으며 1886년 병인양요 사건으로 1,000여명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 목이 잘렸고 그 피로 한강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순교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984년 순교자 103인의 성인 시성식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하기 위하여 오셨던 교황이 가장 먼저 이곳을 방문하였던 것도 순교자의 피 흘린 대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표시였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초기 100여년 간에 적어도 2만~3만명의 순교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약 2시간에 걸쳐 외국인 선교사묘원 및 천주교절두산순교성지를 둘러보면서 우리 일행은 참으로 많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 예수님의 복음, 사랑, 믿음, 헌신의 생생한 역사현장이고 학습의 수련장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모여 앉아서 기도하는 것 보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강열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천주교, 개신교의 수많은 순례객들[남녀학생, 청년, 노인]과 함께 보낸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특히 이충일 장로님은 연세대 총무처장으로 근무하실 때 언더우드 가족의 마지막 유해를 미국으로부터 이송해 와서 이곳에 안장하는 일을 담당하셨다고 하면서 오늘 그 현장을 다시 찾아보는 감회는 남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은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혹시 직접 가이드를 하게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선교사 개인별로 활동내역을 조사하여 여러장의 노트에 정리해 오셨지만 구종천 해설전문가 (예비역 장교)의 도우미가 있어서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충일 장로님이 직접 해설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건강에 무리하시면 안 되기에 사양하였던 것이지요.
조선정부는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헤론이 처음이며 이어서 앨런, 언더우드가 들어와서 제중원(병원)에서 의사로서 봉사하였습니다. 헤론은 이질에 걸려 조선에 온지 5년만에 사망하였고 양화진묘원에 첫 번째로 안장된 선교사입니다. 헤론의 묘지로서 양화진이 선정된 것은 이미 천주교의 절두산성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이곳으로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개신교의 공동성지로서 매우 역사적인 기념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는 국가의 [사적 제399호]로 등재되어 있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교회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나니까 배도 출출해지고 마음은 한결 정갈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꽤 유명한 [백년토종 삼계탕]집으로 이동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교인들 특히 신입교인들과 청년학생들에게는 이곳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있는 수 많은 기독교 성지를 차례차례 탐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피 땀 어린 신앙학습장 현장탐방의 벅찬 소감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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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선교사
영국의 아이슬랜드로 출신으로 먼저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입장이 자기 나라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억울한 우리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 이것이 오늘의 서울신문으로 발전되었다. 민족지사들을 전부 신문사의 간부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 국민의 애국심을 고양하였다. 1909.5.1 37세, 별세, 양화진에 안장
【인천=한갑수 기자】인천시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발상지인 옛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중구 내동·현 내리교회) 일대를 선교 테마거리로 조성한다.
인천시는 옛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과 인근 지역의 오래된 종교시설과 근대건축물, 차이나타운 등을 한데 묶어 선교 테마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29일 밝혔다.
인천 중구 일대에는 한국 감리교의 시발점인 제물포 웨슬리 교회 예배당(1901년)을 비롯해 답동성당(1897년), 성공회 내동교회(1890년) 등의 종교시설과 짜장면박물관,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이민사박물관 등이 산재해 있다.
제물포 웨슬리교회 예배당은 1885년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미국 감리교회 소속 아펜젤러 선교사가 예배를 드린 장소에 건립됐다. 웨슬리교회는 1955년 예배당이 개축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복원작업은 당시 사진과 기록물을 토대로 고증을 통해 진행됐다.
인천시는 2008년부터 시작한 웨슬리교회 예배당 복원작업을 마치고 오는 6월 준공할 예정이다. 시는 예배당이 복원 되는 대로 테마거리 조성을 실시할 방침이다.
또 복원된 예배당 옆에는 기독교 역사박물관(아펜젤러 비전센터)도 함께 건립했다. 이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개신교 안수를 받은 김기범 목사의 유품과 개항기 선교 사진 230여점 등이 전시된다.
특히 내리교회는 한국 이민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하와이 이민을 주관했던 교회로 이때 사용했던 미국 비자와 사진 등도 함께 전시된다.
웨슬리교회 인근에 위치한 답동 성당은 강화 성공회 성당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고딕양식) 중 하나이다.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으로 매년 3000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이 성당을 구경하려고 방문한다.
성공회 내동교회는 서양 중세풍의 석조에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인 처마양식이 결합된 보기 드문 건물이다.
인천시는 중구 일대의 종교시설과 차이나타운, 짜장면박물관,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등 다양한 테마박물관을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다양한 놀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출처: http://www.fnnews.com/view?
참으로 지금 지구촌안에 지구인들 육신의 조상의 다르마 뒤에 숨은 외계의 영 즉 우주 태초에 절대적인 신에게 배신해오고 지혼만 가지고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가 여전히 지구인들의 물질의 허상에 꺼달려 살아가고 온 그들의 습성들에게 주파수로 다르마들을 발생시키고 다른 다르마들을 선무당이 자신들이 영가 천도가 되는 능력이 없고 대신 천도시키고 그 이익을 몫을 차지하려는 핸드폰의 주파수 다르마들의 장난들을 보면서 그래서 이에 대한 조치도 있기에 핸드폰의 주파수들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기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이 오대양 육대주는 지구촌의 어느 국가나 어느 민족마다 어느곳이든 이미 절대적인 신의 대성령의 빛으로 무장된 빛들이 이미 임하여 가동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땅에 기어다니거나 걸어다니거나 날아다니거나 굴려가는것이나 가릴것없이 이미 가동되어지고 있으니 지금 지구촌의 세계 정세는 여전히 그대들의 습성의 군웅의 패턴의 습이기에 그들의 신명계 구도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든 미,러간의 신탁 통치를 논의 하든 전후 시대의 신명계 상황과 유사하기에 특히나 이 한반도는 대한민국이나 북한은 그러한 형국에 그들의 신명계들이 놀아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물론 일본 신명계들이 주도하여 해가고 중국 신명계들이 묵인하에 돌아가는것이니 그러한 형국의 습성에 대한민국의 운명은 북한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것으로 보는가?
더욱이 죄악을 짓고도 늬우치지못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해 주고도 임진왜란 전후의 습성처럼 일제 식민지를 당하고도 지금 독도 문제 일본의 우경화 문제 논의 하기전에 한반도 민족의 대한민국 지난날 역사의 자신의 얼굴부터 처다보아라!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숨기고자 은페하고자 독도와 같은 무지한 하근기의 백성들을 정치의 단골메뉴로 사용하는것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러한 형국이고 지난번 말했지만 100년전의 남북한의 중대한 운명을 결정짓게되는 사건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 다시 100년만에 이것은 지구가 망하는 그날넘어셔서 우주가 종말하는 그날까지 결정되어지는 영성의 법계 상황이고 동시에 지구의 시간으로 3000년 보장받는 시간속에 한반도에서 북한이 1000년 남한이 수백년의 보장받는것도 지금 현재의 이들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게되고 매듭을 짓게되어지는것이다.
일본으로써도 우경화로 갈수밖에 없는 형국은 그들도 마지막 배수진을 치는 일본 국가의 운명이기에 북한도 그러하고 그럼 미국과 대한민국은 미국은 누가 지켜주나 미국도 내코가 석자이기에 자신의 안보를 남의 나라에 맡기는 믿는 안보 의식은 월남전의 교훈에서 말해주듯이 지금 대한민국의 안보의식은 스스로 자주 국방하려는 안보의식보다는 미국을 의지하려는 안보의식 아니면 중국을 일본을 의지하려는 그만큼 스스로 올바른 안보의식을 지키려는 자립하려는 정신적 의식부터 병들어온것이니 그러니 주변국의 매파 정치인들이 설치고 구한말과 같은 신명계의 구도 상황으로 답습해가고 있는것이다.
그러니 동해바다 호미곳 등대와 같은 그 당시의 깨어난 국가들의 상징물이 생겨나게되어지는것이다.
남북한이 어떠한 지금 선택을 하든 답습을 해가든 결과는 100년전의 지구의 상황과 세계 정세의 처지가 미래의 지구의 계획하고는 차원이 다르기에 결과도 두번다시 되돌아올수없는 길을 가게될것이다.
이것은 국가든 민족이든 개개인의 운명이든 죽은 조상이든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훗날 이 한반도가 중국에게 복속되어지는 지리적 환경이 되어지드라도 그것을 보고 지금 산자와 죽은자들을 살피고 있는것이고 그러니 미래생을 내다보고 조금이나마 일장춘몽의 가을 추수시대를 맞이하고 누리고 복을 받고 싶으면 지금 산자와 죽은자들의 처신들을 정직하게 처신하라는것이다.
지구촌의 영적으로 대성령의 빛으로 무장된 모든 보이지않는 세계를 가동되고 있기에 신령계의 사자들이 설치는것 웃기지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자들이 더 올바르게 알고 깨우처야하는 일을 그리고 등불의 길로 인도해야함을 사자들의 신령들이 제대로 아는바가 없는 사자들이 뭔 인간의 목숨과 신령의 생사를 가질수가 있다고 보여지는지 그래서 성령의 사자분들이 지금 지구촌에 자리잡고 계시는것이다.
그만큼 신령계의 막바지에 왔기에 그래서 이제는 공동연대 책임의 영벌의 준엄한 심판을 이미 지구촌은 영벌을 받고도 늬우침이 없으면 그것을 심판이 이루어질것으로 본다 그것이 산자든 죽은자든 그들의 존재들을 심판하는것이다
이미 세계3차 대전의 생사부 즉 죽은자들의 생사부 산자들의 생사부는 다 올라간것이고 그만큼 지구촌의 미세한 마음하나조차도 감지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구촌의 어긋난 만방의 열국들의 나라 신장 동자 선녀들의 신령들이 성령의 무서움을 모르고 지난 70년전의 세계 2차 대전을 생각하는것 같은데 그 이상이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심판의 전쟁이 이루어질것이다.
동시에 영적으로 삼혼들을 분명하게 심판을 하는것이 더 무서운것이고 지금 외계영들이 지구 행성밖으로 다시 도망가드라도 우주에 가도 그들은 더이상 설자리가 없다 물론 나중에 지구 행성의 가을 추수 시대가 끝나고 다시 돌아와서 지구를 병들게해서 지구의 종말과 더불어서 할 여지는 있지만 정신들 차리세요.
그리고 이 지구를 구하기위해서는 지금 그러한 습성대로 지구촌을 운영해가려는 그들의 의도를 보면서 그래서 그들중에 여러 국가의 대통령들의 신령과 육신의 명줄을 걷두어갈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즉 거역하면 미래생도 보장받지못하니 자신과 관련된 일체의 조상이든 자손이든 영의 존재에 대한 심판을 받을것이니 그다음에 육신의 존재와 모든 소유에 대한 존재들을 심판받을것이니 그 정도 감당하고 거역하면 그렇게 처리해갈것입니다 그러나 반성과 참회의 회개의 뜻으로 불가피하게 십자가를 메야하고 깊은 숨은 심정의 뜻을 알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목소리는 바로 지구를 구하기위해서 자신을 던지고자 아베 총리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우경화 군국 소리를 내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깊은 뜻도 모르고 그러니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한수 아래인것이 신명계들의 정신 상태다.
어디 일본 총리뿐인가? 그러니 다음생에 영의 기회를 부여받고 복락을 누릴것이기에 이 정도로 영의 세계의 힘을 알고 실체를 알고 신명계라고 해야지 잡신들을 외계 영에 허우적거리는 영들이 신명계라고 설치니 망국으로 가는것이다.
그동안 지은 죄악과 더불어서 영벌을 받아오면서도 정신들을 차리지못하는 에덴동산부터해서 지금까지 분명하게 처리를 하게될것이다.
그만큼 지구촌의 산자와 죽은자들이 분수도 모르고 6000년동안 날뛰고 여기까지 왔으니 영벌을 받고 있는데 늬우치지못하면 그 다음은 무슨 벌인가?
모든 존재의 심판은 언제든지 가능하도록 되어지고 있기에 중국의 생사부도 다 받았고 이제는 이번의 한번의 선택이 국가와 민족은 간판을 내리고 지구촌이 하나일수밖에 없는 그들이 만들어온 문명의 시스템이기에 세계는 하나가 되어지는것이고 그럼 남은것은 영적인 레벨의 서열 순위인것이다.영적 레벨의 서열의 순위에는 국가와 민족의 간판은 필요가 없기에 자신의 조상 신령과 자신의 육신의 마음의 영이 어떻게 믿음과 반성과 참회의 실천의 행을 해가고 있는지 이 여부에 사후와 미래생을 결정짓도록 하는것이기에 엄중한 지금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정신들을 차리지못하고 있으니 한반도도 이미 영벌을 받아온 민족이니 그 다음 차례는 알아서들하세요 구한말 교훈도 깨우치지못하고 있고 냄비 근성의 마음이나 신령들은 더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분수를 제대로 아세요 분수도 모르고 설치면 끝나는것입니다.
영의 세계를 먼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신앙이라는 미명아래에 믿음이라는 미명아래에 선무당이라는 미명아래에 자원이 없는 국가나 민족일수록 원조를 받아먹고 살아가는 국가나 민족일수록 개인일수록 주변 국가를 민족을 인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드리는것이 그것이 물질적인 수입이든 수출이든 그 은혜를 갚아가는것이고 업장을 벗겨내는 일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언제 대한민국이 그렇게 불과 반세기 조금 지났지만 이미 자원의 존귀함과 그 의미와 가치를 모르니 칠성줄에 이 민족을 이 국가의 신령들과 인간들을 용서해주나? 그러니 강대국에 지터지고 맞고 살아가는 산자와 죽은자들인것이다.
동북아 균형자는 이러한 상황을 넘어선 신령이고 후손이여야 그래야 그들과 당당하게 어깨들을 당당하게 해가는것이다 말로만 실제적으로 행을 못하는 국가는 항상 삼류로 변방으로 남아지는것이다 그러고는 강대국을 남의 국가를 침략하든말든 비판할것이 못된다 먼저 침략하지못하도록 대비와 방어를 하지못한 책임은 있기에 그러니 삼류중에 삼류의 국가와 민족이 되어지는것이다
무엇이든 일관되게 중심이 없고 신명계도 그 위에 영분들이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령찿고 조상찿고 다 잡신들을 놀아나서 그때분이고 대의와 공의의 진정한 가치도 알려고 노력하지못하면 경쟁력에서 이제는 살아남지못한다 알겠는가?
더이상 어떠한것도 원망하지말아라 원망해도 들어주지않는다